28화
에디스는 침대만큼 편안한 카우치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채 진료를 받았다.
사실 저도 종종 일어나는 빈혈기를 어떻게든 해결할 마음이었다. 아마도 이런 상태의 주범이지 않을까 싶은 클라이드를 흘끔거리며 의사의 문진에 응했다.
잠시 후 클라이드가 끼어들어 의문점을 던졌다.
“에디스는 보다시피 베타라네. 그런데 나한테는 베타가 아닌 구석이 자꾸 눈에 띈단 말이지.”
의사는 지난번 클라이드에게 러트 사이클이 닥쳤을 때 만난 사람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올곧은 인상이 에디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황실 주치의에게 진료받는 기회가 생긴 것도 기꺼웠다.
“어떤 부분이 베타가 아닌 듯합니까?”
“내가 러트를 겪을 때 에디스가 페로몬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았네. 분명히 느낌이 달랐어.”
의사는 나직하게 침음성을 흘리며 황태자의 의견을 귀담아들었다. 에디스 역시 내심 의심했던 부분이었다.
더불어 그간 클라이드가 벌였던 행동에 대해 캐물었다.
“전하, 그럼 진작부터 제 기질을 의심하셨다는 말씀입니까?”
“몸도 못 가눌 정도로 휘청거렸으니 평범치 않게 볼 수밖에.”
“그럼 처음에 알려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주 초반에는 나도 반신반의했지. 나중에 기질 탓이 아닌가 물었던 적도 있지만, 그때는 에디스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하지만 기질은 한번 결정되면 바뀌지 않잖아요. 빈혈이나 감기를 의심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었는 걸요.”
“결정된 적이 없다면서. 베타 검사를 받지 않았으니.”
“하지만 전 분명히 베타인데요.”
“어떤 근거로 그렇게 확신했지?”
에디스는 입술을 말아 물며 더는 받아치지 못했다.
소설이며 등장인물을 들먹이기에는 적절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녀가 생각한 근거는 원작이었지만, 클라이드 앞에서는 차마 밝히지 못했다.
게다가 스스로 관리하지 못한 몸 상태를 그의 탓으로 돌리는 것 옳지 않았다. 어지럼증이 자주 생길 때, 돈 아낄 생각하지 말고 의사를 찾았어야 했다.
하지만 변명하자면, 클라이드가 홀릴 만한 외모인 탓이 컸다.
처음에 에디스는 아찔해지는 기분을 저 대단한 면상 때문이라고 여겼다.
좀 심하게 잘나야 말이지. 클라이드를 마주하는 동안 멍하니 쳐다보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었다. 그건 에디스뿐 아니라 다른 시종도 마찬가지였다. 페로몬의 영향을 받지 않고도 클라이드 앞에서 다리가 풀리는 사람이 지천에 널렸다.
황태자라는 지위 탓에 누구도 그의 얼굴 점수를 함부로 매기지 못할 뿐, 냉정히 아드리안과 비교해 보자면 막상막하 수준이다.
그런 그가 저를 뒤에서 안아 총을 쥐여 주는데 다리가 안 풀리고 배겨? 은밀한 미로 정원에서 러트가 시작된다며 난리 피우는데 제정신으로 버틸 리가 있냐고!
이 외에도 길디긴 자신만의 변명을 속으로 외쳤지만, 에디스의 입은 뻐끔도 못 했다.
대신에 클라이드가 보호자처럼 의사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에디스는 베타로 확진 받은 적이 없다네. 페로몬이 나오지 않으니 그저 베타이려니 하고 어른이 되었다더군. 이런 경우도 있나?”
의사는 고심 끝에 조심히 답변했다.
“흠, 이 나이로는 매우 희귀하군요. 사실 제가 본 사례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보자면, 갖가지 이유로 체내에 기질이 억눌리게 되었다가 나중에 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에디스도 내심 의문을 품어 왔던 걸 물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 발현되는 게 정말 가능해요?”
“학계에 발표된 바에 의하면 10대 후반까지가 한계이긴 합니다. 그래서 확실히 말씀을 못 드리는 겁니다.”
“내 생각이 그거거든요. 나이가 지났으니 이럴 리가 없다는 거죠.”
“일단은 폭넓게 빈혈 증상을 진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페로몬 성향 검사부터 하면서, 동시에 다른 질환이 있는지도 알아보죠.”
“의사 선생님께선 절 지난번에도 본 적이 있잖아요. 그때 어떤 기미를 알아채진 못하셨나요?”
“제가 신도 아니고, 가까이에서 얼굴만 보고 이상한 걸 알아채기는 힘듭니다. 제 기질이 베타라서 딱히 향기로 구분하지도 못하고요.”
무리한 질문을 한 것 같아 에디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반면에 의사는 그녀의 건너편에서 압박을 가하는 황태자의 시선 때문에 남몰래 진땀을 흘렸다. 뒤따르던 조수를 시켜 어떤 진료 가방을 가져오게 했다.
“이건 페로몬 진단 키트입니다. 타액과 소변, 머리카락을 채취해서 실험실에서 검사해야 합니다. 며칠 후에 결과가 나올 테니, 케츠모리스 경은 그때 다시 저와 만나도록 하지요.”
“아, 네…….”
“특이 체질이라는 결과가 나오면 그에 맞춰서 대처해야겠습니다.”
“어떤 식으로요?”
“늦게 발현하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억눌려 있는 기질을 풀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을 주로 쓰곤 하지요.”
에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진단 키트를 채우느라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다.
친절하게 그녀를 대하던 의사는 왠지 모르게 관자놀이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오기 전까지만 해도 적당히 긴장한 정도였지만 이젠 확연히 힘들어 보였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나요?”
진료도 다 끝난 듯한데 의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설명을 하다 만 게 있습니다. 나중에 치료할 때를 알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요.”
“말씀하세요.”
“기질을 개선하려면 짝이 되는 기질로 자극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경이 오메가라면 알파의 페로몬을 되도록 자주 접하면 되지요.”
“복잡한 건 아니군요.”
“제가 처방해 줄 건 알파 페로몬과 비슷한 약입니다. 그런데 약보다는 실제로 알파와 접촉하는 게 최고입니다.”
“접촉이요?”
에디스는 대화에 집중하느라 클라이드가 시야 밖에서 의사를 노려보는 걸 보지 못했다.
매서운 눈초리에 못 이긴 의사가 큼큼 헛기침했다. 그러고는 이어지는 얘기가 순수하게 의료상의 목적이라는 듯 태연하게 덧붙였다.
“이를테면…… 우성 알파한테서 페로몬 샤워를 받는다든지.”
에디스가 동그란 눈을 순진하게 깜빡였다.
“페로몬 샤워? 그게 뭐예요?”
당연히 알아들을 줄로 예상했던 모양인지, 의사는 잠시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가 클라이드에게 난감한 눈빛을 던지는 걸 보면서도 에디스는 영문을 알지 못했다.
둘이 왜 저런 분위기인 거지?
의심이 생기면서 페로몬 샤워의 의미에 대해 궁금증이 커졌다.
원작에서는 페로몬 샤워가 등장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살아온 지난 4년간에도 누구 한 명 에디스에게 이 용어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느낌상 좋지 않은 뜻 같다. ‘페로몬’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으니 아마도 알파나 오메가와 관련한 것이겠지.
좋은 말이면 널리 쓰여야 할 텐데, 내내 에디스의 귀에 들리지 않았던 걸 보면 분명히 나쁜 말이다. 게다가 썰렁해진 분위기도 영 심상치 않았다. 의사와 클라이드 둘 다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의사를 대신해 클라이드가 작게 목청을 가다듬었다.
“흠……. 페로몬 샤워가 뭔지는 진료가 끝나고 설명해 줄게. 단둘이 있을 때.”
“뭔가 대단한 거예요? 왜 이 자리에서는 말을 못 하죠?”
그녀는 초로의 의사가 남몰래 목덜미를 벌겋게 물들이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의사는 그나마 점잖은 말로 마무리하려고 노력했다.
“하여튼 약보다는 실제 알파의 페로몬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자주 페로몬에 노출되도록 하세요.”
심지어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닌데 거의 확정적으로 오메가인 양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에디스는 기분이 오묘해졌다. 의사와 클라이드의 농간에 놀아나는 중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얘기의 앞뒤가 꼭 들어맞아서 섣불리 반박하기는 힘들었다. 클라이드와 함께 있을 때 아찔한 기분이 들었던 게 페로몬 탓이라고 한다면, 저는 잠재된 오메가일 확률이 높았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원작의 에디스는 오메가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문제는 지금 자신의 주변에 너무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래도 괜찮은 건지 불안했다. 변화의 대부분은 그녀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고, 또 제어할 수도 없었다.
각각의 등장인물이 알아서 날뛰는 듯했다. 죄다 엉망진창이었다.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고 앞날의 가닥을 잡아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 * *
의사가 물러가고 업무를 빙자한 단둘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물론 업무가 보통이 넘기는 했다. 코피 쏟을 만큼 일의 분량과 강도가 높았다. 국정 회의에 쓰이기도 했던 탓에 클라이드가 억지로 만든 핑곗거리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둘이 비껴 앉은 별실은 고요했다. 한 사람은 노닥노닥 여유시간을 갖고, 나머지 한 사람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는 장면이 대조적이었다.
평화로우면서도 치열한 실내는 미열이 오르는 듯 따끈한 분위기였다.
에디스의 눈은 문서철과 빈 종이를 오락가락했다. 펜을 든 손이 쉴 새 없이 종이 위를 날았다. 한편으로는 타인의 문서를 읽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머릿속으로 정리해 자신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만큼 집중해서 일해야 저녁에 귀가할 수 있을까 말까였다.
클라이드가 정한 퇴근 시간은 꽤 일러서, 저녁 6시까지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철야로 넘어가야 했다. 근무 첫날 이후로 만든 규칙이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철야지, 실제로는 클라이드의 침대를 그녀가 점령하고 잠들곤 하는 구도였다.
덩치도 커다란 저 남자가 맨날 피곤하다며 떼쓰는 바람에 요즘엔 특히 야식을 먹자마자 불을 껐다.
먹을 것 생각이 나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몸서리쳤다.
‘에휴, 야식…….’
그건 정말 최악이었다. 지옥에서 갓 올라온 현혹 마귀가 분명하다. 뱃살을 불리는 데 특효인 데다가, 도저히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동안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멀리서 6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망했어.
“전하, 오늘은 춤 연습 상대를 하느라고, 그리고 진료도 받느라고 너무 시간이 없었어요. 조금만 여유를 주시면…….”
“자아, 에디스. 식사는 제때 해야지? 시종을 굶기면서 부려 먹는 악덕 상관으로 널리 알려지고 싶지는 않거든.”
“입맛이 별로 없어서요. 저녁 식사는 건너뛰고 이걸 마저 써서 올릴게요.”
“입맛이 없다고? 저런, 내 불찰이군. 저녁은 이미 차려졌겠지만 대신에 야식을 특별히 준비하도록 하지.”
약 올리려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집에 안 보내려는 수작이 뻔히 읽혔다. 얄팍한 눈속임도 모른다면 저는 바보천치다.
쉽지 않은 클라이드의 토로를 들은 이후로 그녀도 마음 정리를 했다. 요약하자면 마음에 둔 이와 쌍방통행이 되지 않는 한에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황태자의 혼담을 거론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인간적이고 배려심 넘치는 남성상이다. 하지만 클라이드의 심정을 반추해 보면 조금 안됐다는 기분도 들었다.
황태자는 연애하기 참 힘든 자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는 상대를 특정하지도 못했다. 어느 정도 진전될 때까지는 밝히기 힘들어서겠지.
클라이드의 뛰는 심장에 자리 잡은 이가 자신인지 다른 누구인지 모호했다. 어쩌면 훗날 다가올 인연을 위해 마음의 자리를 비워 뒀다고 털어놓은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핑크빛 무드를 타는 중이 아니다.
그는 내게 애매한 여지만 줬을 뿐 확실히 고백한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만약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온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클라이드가 반려를 기다리며 누구와도 황태자비 자리를 거론하지 않듯이.
진정한 마음의 부분에서만은 함부로 까불 수가 없다.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그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황태자와 시종으로서 마주하는 편이 한결 수월하다. 그리고 싱숭생숭하게 마음이 들뜰 만한 시간을 되도록 줄이고 싶었다.
냉정히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에디스의 대안은 페이튼이고, 무난하게 클라이드의 곁을 떠날 비책이기도 했다.
이것이 그녀가 부득부득 귀가하겠노라고 열일하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