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저 어깨가 약간 들썩거렸을 뿐이건만 이상하게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잘난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어질어질한가 보다.
그가 에디스의 허리춤을 반짝 들었다. 저절로 발끝을 돋운 그녀가 가까이 밀착하자, 선이 강한 그의 입매가 도톰하게 부풀었다. 갈고리처럼 올라간 입꼬리는 짓궂은 기운이 모락모락 풍겼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클라이드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들이댔다.
“이번에는 그냥…… 춤이나 같이 추자고 부른 거라서.”
“춤?”
더운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약간의 열기가 에디스의 몸속에 흡수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몸이 노곤해졌다.
그에게 붙들린 손도 고슴도치처럼 오므라들었다.
“춤은 나중으로 미룰까? 에디스, 조금 힘이 없어 보이는군.”
그녀는 묘하게 술렁거리는 배 속의 느낌을 참으려고 입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견디려는 노력이 무색하리만치 에디스의 육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갤러리에 들어올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이젠 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클라이드와 질척하게 엮일 때마다 매번 이 꼴이었다.
잘난 얼굴 때문에 눈에 뵈는 게 없다기에는 신체적으로 변화가 너무 컸다.
“아뇨, 괜찮아요. 나 멀쩡한걸요.”
흐릿하게 풀어지는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단 꿀로 절여지는 듯한 머리를 애써 굴렸다. 찐득찐득하게 클라이드가 뇌까지 눌어붙는 느낌이었다.
홀린 걸까?
이 남자에게 마음이 넘어가는 중일까?
“일단 어디에든 앉아 보자. 에디스, 비틀거리고 있어.”
발끝에 힘을 줘 버텼다.
“전혀요.”
중심도 못 잡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다니.
고작 연애한다고 몸뚱이가 이렇게 달라질 리가 있나? 정작 클라이드와 사귀는 중도 아니건만.
에디스는 줄곧 의심을 품고 있던 부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에 클라이드가 물어본 적이 있다. 베타 성향으로 확진 받은 때가 언제냐고. 당시만 해도 당연한 사실을 묻는 그가 도리어 이상했지만, 인제 와서는 신경이 쓰였다.
제게 빈혈기가 일어날 때마다 클라이드가 곁에 있었다.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다 보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게 됐다.
강력한 우성 알파인 클라이드와 원작에서는 베타였던 에디스는 성향 면에서 얽힐 일이 없었다. 하지만 스토리가 자꾸 바뀌고 있으니, 저라고 변화의 여지를 무시하기는 힘들다.
골몰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아무런 냄새도 느끼지 못했다. 흔히들 오메가가 알파를 접할 때는 독특한 향기가 진동한다고 들었다. 심지어 피부 감촉까지 달라진다던데.
체감하지 않는 상태로 몸이 반응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대체 왜 저만 다른지 모르겠다.
혼란 속에서 자신의 성향을 확신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클라이드는 몽롱하게 풀어진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입꼬리를 늘여 웃었다. 악마적인 퇴폐미가 물씬 풍기는 미소였다.
“몸이 안 좋으면 나한테 기대도 돼.”
어깨를 감싸 가볍게 당기려 하자 에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무리할 필요는 없는데.”
“정말이요.”
클라이드의 손길이 속셈을 숨긴 채 그녀의 팔뚝을 따라 미끄러졌다.
그동안 그는 여러 번에 걸쳐 온갖 계략을 써 가며 스킨십을 시도해 왔다. 페로몬을 잔뜩 뿜어내어 에디스의 몸에 덕지덕지 발랐다. 암컷을 유혹하는 수컷의 냄새였다.
페로몬으로 자극할수록 그녀에게 차츰 오메가의 느낌이 짙어진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클라이드야말로 에디스가 궁금했다. 왜 이도 저도 아닌 성향으로 머물러 있는지. 진찰조차 받지 않은 채 무심히 내버려 두는지.
그래서 자극했다.
알파의 페로몬으로 그녀를 꾀었다.
이렇게 오메가로서의 자각을 일깨워 주면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물론 그의 페로몬에 푹 잠겨 드는 에디스를 보는 것도 기분이 좋았지만.
덕분에 에디스도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느슨하게 풀어지는 손을 그의 어깨에 올린 채 혼란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춤 계속할게.”
클라이드는 긴 손가락을 다각 튕겼다.
갤러리 반대편에서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피아노 독주였다.
연주자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걸 에디스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지나치게 밝은 창의 볕에 맞춰 홍채가 순응한 탓에 어두운 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가 여전히 몸을 가누기 힘든 에디스를 부축했다. 발을 제 발등에 올려 둔 상태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총사 대회와 함께 연회를 열기로 했으니, 춤 연습도 해야겠지?”
처음은 느리게 움직이다가 차츰 음악에 맞춰 속도가 빨라졌다.
그녀를 품에 안은 채 텅 빈 갤러리를 자로 잰 듯한 발놀림으로 돌았다. 순서에 맞춘 궁정 무도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하지만 둘의 춤은 황실 연회에 알맞은 춤이 아니었다.
원래 에디스의 기억을 담고 있는 그녀의 육신은 당연히 춤도 출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서로의 몸을 붙이고 도는 춤이 정상적인 댄스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궁정의 춤은 원래 손끝만 깃털처럼 닿아야 했다.
“전하, 너무 거리가 가까운 것 같아요. 연회에서 이렇게 췄다가는…….”
선이 굵은 손이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몇 뼘만 한 높이로 훌쩍 들어 안으며, 춤추기보다는 끌어안기에 집중했다.
발등에 얹혔던 그녀의 구두 끝이 허공을 짚었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 줘. 아직 내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서.”
목덜미 옆으로 한탄과 같은 호흡이 스쳐 지났다.
그는 조금씩 팔에 힘을 빼 에디스를 빙판처럼 미끄러뜨렸다.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노려보는 황금안은 마치 한계까지 당겨진 고무줄 같았다. 위험 경보가 온몸에서 발산됐다.
클라이드는 오늘 내내 기분이 엉망이었다. 에디스에게 동료 시종이 혼담에 관한 얘기를 물어보며 축하할 때마다 점점 더 불쾌해졌다. 업무 중에 본의 아니게 딴 사람한테 울화통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녀의 체향을 맡는 순간은 좋았다. 부글부글 끓던 속이 가라앉으며 잠시나마 평온이 찾아왔다.
길게 숨을 들이쉬어 폐 속에 에디스의 향기를 가득 채운 다음 그가 고개를 들었다.
“에디스 말이 맞아. 이렇게 춤을 춰서는 안 되겠지. 그럼 다시 해 볼까?”
진하게 붙어 있던 몸을 뗀 다음 그가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피아노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한 뼘만큼의 거리를 두고 섬세한 손끝을 겹치며, 클라이드와 에디스는 날아오르는 새처럼 가벼운 스텝을 밟았다.
몇 곡을 연달아 춤췄다.
그는 집요하게 에디스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았고 그녀는 난감한 심정에 클라이드의 턱 아래만 주시했다.
“전하의 춤을 담당하는 선생이 있을 텐데요.”
“예전에는 있었지. 하지만 연회를 오랫동안 열지 않는 바람에 교습도 그만뒀어.”
“하지만 춤 상대가 분명히 따로 있을 테고…….”
“그게 너야, 에디스.”
고집스럽게 아래만 보던 시선이 엉겁결에 위로 올라갔다. 서슬 퍼렇게 쏘아보는 클라이드를 기어코 마주해야 했다.
“수발 담당 시종……. 다시 생각해도 직책 이름을 참 잘 지은 것 같아. 이렇게 춤 상대도 청할 수 있잖아.”
때마침 곡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넓은 보폭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춤이었다. 갤러리 공간 전부를 충분히 활용하며 활기차게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춤 연습은 나 말고 전문가를 초빙하는 편이 나을 텐데요.”
“에디스 정도면 훌륭해. 더할 나위 없이.”
그녀는 스커트가 나풀거리도록 빠른 스텝을 밟았다.
갤러리 한쪽 면의 천장에서 바닥까지 뚫린 창은 따가운 햇빛이 사선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그런데 음지에서 양지로 넘어가는 순간, 눈앞이 쨍하니 밝아졌다.
[☆긴급 공지☆]
엇, 원작의 대목이 아니라 공지가 나타난다고?
[안녕하세요, 독자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며 다음 이야기를 보여 드려야 할 텐데, 이렇듯 공지부터 올리게 되어 유감스럽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장면이 보일 수 있지? 실시간으로 현실의 일이 눈 앞에 펼쳐지는 중일까?
이 글은 새로 올라온 공지가 틀림없었다. 4년 전 그녀가 원작의 세계로 빠져들 때는 아무런 공지가 없었다. 이건 최근의 글이 틀림없었다.
현실에서 변화하는 부분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니. 진짜 충격이다. 원작 내용을 에디스의 힘으로 비틀 수 있다는 걸 알았던 순간만큼이나 놀라웠다.
[저는 독자님의 기대에 부응할 만큼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 앞서지 뜻대로 풀리지 않네요.]
[특히 설정 오류를 여러 군데 찾았습니다. 제 의도와 다르게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어서 상당 부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설정 오류라니! 대체 뭐가 문제길래 그러지.
[따라서 당분간 이 작품을 비공개로 전환하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얼마만큼 원작을 뒤집어엎으려고 글을 내린다는 걸까.
원작이 바뀌면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걱정이었다. 과연 안전하고 무사한 빙의 인생을 계속할 수 있을지.
또한 현실로 돌아갈 방법도 문제였다.
지난 세월 동안 그녀는 현실과 연결고리가 될 만한 어떤 힌트도 찾지 못했다. 오로지 에디스로서의 삶을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막하기만 한 상황에서 원작이 사라지면 아예 돌아갈 길이 끊길지도 몰랐다.
보다 자세한 내용이 하단에 이어지려는 듯했다. 그녀는 온 신경을 창밖의 하얀 빛에 집중했다.
화면이 스크롤되어 몇 글자를 알아보기 직전, 클라이드의 음성이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에디스?”
갑자기 얼이 빠진 에디스를 그가 빤히 쳐다봤다. 가까이에서 손을 흔들다가, 턱 아래를 받쳐 들고 동공의 반사작용을 확인했다.
“에디스, 왜 그래.”
“핫.”
공지 글이 햇살에 섞여 서서히 사라졌다.
먼 창밖을 응시하던 시선이 돌연 클라이드에게 바뀌자 사위가 까맣게 번져 보였다. 그녀는 안 보이는 눈을 끔벅거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창백하게 마른 이마에 그의 손등이 다정하게 와 닿았다.
“왜 이리 갑자기 체온이 식었지? 아무래도 의사를 불러야겠군.”
“그냥 햇볕이 쨍했을 뿐이에요. 진짜 별거 아닌걸요.”
“이만 돌아가자. 어차피 춤 연습은 꾸준히 해야 하니까 당장 무리할 필요 없어.”
사양하는 말이 아무 의미가 없을 만큼, 클라이드는 부득부득 그녀를 설득해 침실로 함께 올라갔다.
난감하게도 황실 주치의 중 한 명을 부르기까지 했다.
* * *
원래 황실 주치의 팀은 24시간 대기 상태지만, 클라이드가 호출하자마자 심하게 빨리 의사가 달려왔다.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에디스가 앞장서서 황태자의 침실 옆 별실로 향했다.
등 뒤로 의사와 클라이드가 서로 눈짓했다. 이 기회에 제대로 진료하라는 의미를 담아 황태자가 매섭게 시선을 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