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싸늘한 분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에디스는 황태자의 명에 따라 근엄하기 그지없는 회의장에 질질 끌려갔다.
제국 최고의 결정 기관인 국정 회의.
강당만큼 넓은 공간에 국무대신을 비롯한 장관급 인사와 인지도 있는 황족이 겹겹이 늘어섰다. 이미 몇 번 참관한 경험이 있는 에디스는 시종 줄의 끝에 섰다.
의자에 앉은 사람은 클라이드뿐, 전원이 선 채로 보고하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라서 굉장히 분위기가 엄숙했다.
오늘 격론을 펼치는 주제는 상비군 문제였다.
군 축소를 주장하는 귀족 층에서 비용 문제를 들먹이며 열변을 토했다.
“전하, 당장 전쟁이 터질 위기도 아닌데 군인 수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수도를 둘러싼 군대가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전부 비용이고 낭비입니다.”
관료 진영에서 반박이 쏟아졌다.
“군대는 폐하의 힘과 같습니다. 이 제국의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께서 일개 귀족의 사병과 같은 수준으로 군을 거느린다면 오히려 말이 안 되지요. 상비군은 단순히 총을 든 병사가 아닌 통치 수단으로서…….”
연설에 가까운 말이 길게 이어질 듯하자 클라이드가 가볍게 손끝을 들었다. 열띤 논쟁을 벌이던 양 진영이 동시에 잠잠해졌다.
그는 집무실에서의 울적한 대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상태로 국정 회의에 들어온 터라 기분이 매우 가라앉은 상태였다. 장내의 첨예한 분위기를 참아 넘길 만한 너그러움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섬광 같은 금안으로 황좌 좌우에 겹겹이 늘어선 귀족과 관료를 한 바퀴 빙 둘러봤다.
황태자의 눈꼬리가 치솟는 순간, 싸늘한 눈빛을 느낀 자가 움찔 놀랐다.
그의 못돼먹은 표정은 중신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삐뚜름하게 고개까지 기울여 쳐다보면 십중팔구 누군가가 된통 당하는 사건이 생기곤 했다.
엄한 손끝이 시종장을 향해 까딱였다.
“내가 따로 지시한 보고서는 가져왔겠지?”
“예, 전하.”
“나를 대신해서 읽게. 현황은 건너뛰고 평가 부분을 낭독하면 되네.”
집사장관으로도 불리는 시종장은 황태자가 추진하는 정책을 최일선에서 지원하는 사람이었다. 가방 가득 문서 꾸러미를 담아서 대기하고 있다가 클라이드가 요구한 보고서를 찾았다.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장황하게 보고서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앨런 공작의 사병이 5백 명, 스미스 백작의 사병이 4백 명, 그 외의 가문에도 백 명 이상으로, 규모가 적지 않다. 반면에 황제의 상비군은 2천 명으로서 귀족 사병을 총합한 수보다 현저히 적다.”
보고서 내용을 듣고 에디스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낭독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정리해서 올린 의견서였다.
형식에 맞추지 않고 거의 일기를 방불케 할 만큼 대충 끼적인 건데, 언제 정리해서 황태자의 인장까지 박아 뒀대. 저거 쓰는 동안 책상에 머리 박으며 꾸벅꾸벅 졸았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때 앨런 공작이 갑자기 성큼 나섰다.
“거짓입니다! 저희 집안은 경비병 몇십 명밖에 없습니다.”
반박을 무시하며 시종장이 계속 읽어 내렸다.
“귀족의 영지가 수도에 가까울수록 황실은 위협을 크게 받아들여야 한다. 영지의 치안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외국인 용병을 사들여 사설 군대를 만들기 때문이다.”
.0발언권을 얻지 않고도 입을 벌리는 자들이 속속들이 늘어났다. 다들 자신의 무해함을 주장했다.
“따라서 현재의 상비군은 최소 1.5배 늘어나야 한다. 반역으로부터 안전하려면 2배까지 필요하다.”
반역이라고 쓴 것까지도 거르지 않고 그대로 옮겼네. 심하게 센 단어인데.
에디스의 당황한 눈동자가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는 대회의실을 굴렀다.
자신이 쓴 의견이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전혀 몰랐다.
별실에 채워진 방대한 양의 자료를 읽으면서도 클라이드가 개인적으로 참고하려니 추측했다. 그녀는 별달리 체계적으로 작성하도록 요구받지도 않았고, 결과물로 건넨 보고서도 조악한 낱장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클라이드는 내용만 충실하면 된다고 강조하곤 했다. 자료를 제대로 활용하고 공정하게 판단하기만을 요구했지, 글씨가 알아보기 힘들 만큼 삐뚤빼뚤하든 중간에 침이 번졌든 신경 쓰지 않았다.
보고서 제목과 본문, 마지막에 에디스의 의견 첨부.
외적인 형식은 번듯한 공문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중에서 의견서 한 장만 떼어 들고 떡하니 국정 회의에서 읽다니. 부끄럽기도 한 한편으로 클라이드의 의도가 뜻밖이었다.
황실 정무부에서 작성되는 문서도 분명히 황태자의 뜻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을 텐데 구태여 에디스의 분석이 잔뜩 들어간 의견서를 위주로 논의한 이유가 뭘까.
‘내가 보는 시각이 객관적이라고 여기는 걸까?’
클라이드의 뇌 속에 뭐가 들었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노점상 거리의 패싸움처럼 관료와 귀족의 진영이 한판 붙기 직전 상황이 되자, 그는 손을 들어 좌중을 침묵시켰다.
“다음 안건은…….”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상큼하게 화제를 바꾼다.
“제국을 지탱하는 대지의 기둥이 이다지도 노고가 크니, 이쯤 해서 황실 주관으로 행사를 열어 보면 어떨까 하네.”
“행사……라니요?”
시종장도 처음 듣는 얘기인 듯이 반문했다. 클라이드의 굳은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한 줄 세워져 있었다.
그는 황좌 팔걸이에 턱을 고인 채 시종 줄의 뒤에 선 에디스를 냉랭하게 쏘아봤다.
아직도 속이 꼬인 게 분명하다.
밴댕이 속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집무실에서 우리 둘이 나눈 얘기가 좀 민감하긴 했지. 조금 많이.
“대신과 귀족이 모두 즐길 수 있는 행사라면 좋겠네.”
“그러면…….”
시종장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드디어 연회를 여는 겁니까?”
치고받고 싸우던 양측도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고인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진 가운데 누군가는 감격 어린 표정까지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라이드가 대리청정을 펼친 이후로 단 한 번도 연회가 열린 적이 없었다. 연회는 물론이고 황실이 주관하는 행사가 전무했다. 폐하께서 병중이신데 어떻게 감히 웃고 떠들 수 있겠냐는 명목이었다.
영 썰렁한 기색이 가시지 않은 클라이드는 손을 받친 턱으로 성의 없게 대꾸했다.
“홀에서 춤추는 행사를 연다고는 안 했네.”
“그러시면……?”
“실력 있는 총병을 양성하기 위해 총사 대회를 개최할까 하네.”
귀족 측에서는 붉으락푸르락 안색을 달리하면서도 섣불리 반대 의견을 내지 못했다. 여태 다투던 것이 사병과 상비군 문제였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반역을 들먹이던 얘기에 휩쓸릴 수 있었다.
무도 연회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전히 황실 주관의 행사에 기대를 거는 이가 많았다.
살짝 들뜬 기운이 회의실에 떠돌았다.
눈치 빠른 백작 한 명이 신중하게 클라이드의 비위를 맞췄다.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행사에 제국민 모두가 기뻐할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또 무슨 폭탄 발언을 할까 싶어 다들 클라이드의 눈치를 봤다.
“대회는 내가 직접 관여할 걸세.”
장내가 술렁였다.
애초부터 다들 황태자가 아랫사람들의 보고만 받으리라고 짐작하지는 않았다. 단지 회의에서 공언할 정도면 얼마만큼 손수 행사를 돌볼지가 관건이었다.
“전하, 어떤 방식으로 대회를 열자는 말씀이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일단은 전례대로 진행하도록 하게. 나는 다만, 그대들의 예상을 벗어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미리 전해 두려 함이네.”
관료와 귀족으로 나뉘어 넓은 회의실에 좌우로 선 사람들은 서로 눈치 보기에 바빴다.
특히 황태자의 수족인 시종장도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짓자 좌중에 긴장이 더해졌다. 마냥 흥겨운 축제를 열 목적이 아님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대들이 강력히 원하는 연회는…… 생각 좀 해 보겠네. 총사 대회를 위주로 하되, 진행 상황을 봐서 연회도 열지 결정하도록 하지.”
클라이드는 사람들의 염원에 못 이겨 봐준다는 듯한 말투로 연회를 절반쯤 허락했다.
“명 받잡겠습니다, 전하.”
회의장에 선 사람들은 순순히 복종하면서도 황태자의 숨은 의도가 뭘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 * *
궁인의 안내를 받아 에디스는 처음 보는 구역으로 넘어갔다.
웬만해선 넓디넓은 황태자 궁을 쏘다닐 일이 없어서 그녀가 활동하는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뜬금없이 별실과 멀리 떨어진 어떤 곳으로 가게 되었다.
복도에 화분을 놓아두고 열린 창을 통해 파릇파릇하게 자라는 담쟁이덩굴이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얇은 커튼이 하늘하늘하게 날리는 작은 갤러리도 신세계 같았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쉼 없는 일상이 계속되는 집무실과는 딴판이었다.
크고 작은 풍경화가 걸린 공간은 가운데가 텅 비어서 메아리가 울렸다.
“어서 와, 에디스.”
반기는 이는 단 한 명이었다.
“전하. 무슨 일로 여기까지.”
대낮이라 샹들리에와 벽에 붙은 촛대가 꺼져 있는 탓에, 빛이 들지 않는 안쪽은 도리어 어둑했다.
딸깍. 그녀를 데려온 궁인이 밖에서 문을 닫았다.
음지의 그림자를 온몸에 두르고 떡 벌어진 어깨를 한 클라이드가 으슥하게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왜…… 왜?”
어버버 더듬으며 뒷걸음쳤다.
크큭, 못된 웃음이 그에게서 터졌다.
“이젠 말을 아예 놓는군. 뭐, 좋아. 그럼 이름도 막 부르든가.”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요.”
“클라이드.”
“에?”
“해 봐. 클라이드.”
마음속으로는 골백번도 더 이놈 저놈 욕설을 퍼부은 경험이 있었지만 면전에 대고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다. 여기는 누가 뭐래도 현실이 아닌 소설 속 세계이고 클라이드는 황태자였다.
“잠깐 놀랐을 뿐이에요. 전하를 함부로 모실 생각은 없었는걸요.”
“함부로……도 상관없어.”
아쉬움을 섞어 중얼거리며 성큼 다가왔다. 에디스의 스커트 끝자락에 그의 발이 잠겼다.
별실에서 격무에 시달리다가 부름을 받은 터라 에디스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혼자 일하던 중이라 드레스가 깔끔하고 간소했다. 몸을 조이거나 스커트를 부풀리는 속옷은 입지 않은 상태였다. 보고서 쓰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보니, 고뇌에 찬 머리채를 쥐어뜯어 버려서 장신구도 죄다 날아가 버렸다.
두 사람의 구두 앞코가 순식간에 부닥쳤다.
허리 뒤로 커다란 남자 손이 둘리는 흐름이 자연스러웠다. 이런 기분이 들면 잘못된 거지만 그의 접촉을 제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에디스는 번뜩이는 금안에 홀려 들어가고 있었다.
매료하듯이 내밀어진 그의 나머지 손 위로 어느샌가 제 손을 올렸다. 어째서 제가 아무런 저항감 없이 클라이드에게 이끌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어여쁜 얼굴을 하면, 나도 견디기 힘든데…….”
훅, 끌어당기는 힘이 강렬했다.
“읏.”
그녀의 짧은 신음에 클라이드는 움찔거리며 반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