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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25)화 (25/129)

25화

집사는 웃는 얼굴로 혹독한 징벌을 내리는 이 집안의 주인을 늘 주의해 왔다.

페이튼은 충실히 제 역할을 하는 자에게는 너그럽지만 방만한 자에게는 가차 없었다. 이 집에서 종사하는 사용인이라면 저 얼굴이 불시에 서슬 퍼렇게 바뀌는 것에도 익숙했다. 그의 앞에서는 누구나 행동거지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첨으로 보이지 않도록 무해한 얼굴을 꾸민 집사가 그에게 맞장구쳤다.

“공작님께서는 분명 주인님의 제의를 받아들이실 겁니다.”

“당연하지 않나. 내가 언제 실패하는 거 본 적 있어?”

“물론 없습니다.”

사업적으로든 개인사에 있어서든 페이튼은 잘못되어 좌절한 경험이 없었다.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잘 풀렸다. 그럴 만한 능력이 차고 넘치게 있었고 주변 환경도 충분히 받쳐 줬다.

페이튼은 오늘의 자리가 맞선 형식이 된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의 부모님이 외국에 계신 탓에 혼인의 조건을 따지는 자리에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에디스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혼자 왔으니 잘된 셈이었다.

‘혼사도 사업이나 다를 바 없지. 설마 에디스를 맞이하는 일이 틀어지기야 하려고.’

거래 조건을 꼼꼼히 따져 보기 위해 서재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또한 인간적으로도 그녀를 꼬드길 자신이 있었다.

사교계에서는 누구나 그의 빛나는 용모에 찬탄을 금치 못했고, 그만큼 자신도 육신을 갈고닦는 데에 소홀하지 않았다. 시중에 떠도는 ‘최고의 반려’라는 칭송도 접수한 상태였다.

그런 타이틀을 거머쥘 가치가 있는 남자는 역시 자신뿐이다.

지나치는 걸음에 거울을 발견하고, 제 이목구비 중 빠지는 구석이 있나 요목조목 뜯어봤다. 에디스를 공략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매끈한 턱을 쓱 만지는 페이튼은 자신의 점수를 합격점으로 매겼다.

* * *

“그래서…….”

도끼 눈을 한 클라이드가 그녀를 숭덩 썰어 버릴 듯 노려봤다.

“푹 쉬라는 뜻에서 집에 보내 줬더니, 그사이 혼담을 진행했다?”

살벌한 기세에 눌려 에디스는 움찔거렸다. 완만한 어깨가 쿠션만큼이나 더 동그래졌다.

집무 책상을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이 신경 거슬리게 다각다각 소리를 냈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리듬에 맞춰 클라이드의 혈압이 1씩 상승하는 듯 보였다.

까딱이던 손톱이 어느 순간 책상 위를 끼긱 긁었다.

“묻고 있잖아. 혼담이 오갔냐고.”

“네? 네에…….”

에디스는 제가 뭘 잘못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봉변당한 얼굴을 하고 황태자의 책상 건너편에 오도카니 선 채였다.

출근하자마자 곧장 집무실에 불려 온 상태. 그는 에디스의 혼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소문이 빠른 사람들을 통해 얘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얼굴을 한 클라이드가 그녀를 쥐 잡듯이 잡아 댔다.

그녀는 지난 휴가 동안 벌어졌던 일을 꼬치꼬치 추궁당하는 통에 잔뜩 기가 죽고 말았다. 문책당하는 신하처럼 손을 배꼽에 모은 자세가 되어, 사적인 결혼 얘기를 공적인 보고처럼 모조리 털어놔야 했다.

핑계는 그럴싸했다. 중책을 맡은 시종으로서 클라이드와 업무 외적인 부분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유치고는 너무 질투하는 남친 같지 않나.

“그레이브즈 가문의 페이튼이라 했지? 둘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나눴어?”

대사까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드라마나 영화나 소설. 스토리가 있는 매체에서 질투하는 남자의 전형적인 멘트다.

모르는 척 넘어갈까? 한데 그러기에는 요즘 클라이드의 태도가 영 심상치 않았다. 집착 광공의 스위치가 자신한테 켜진 느낌이었다.

이런 기분은 꾸준히 받아 왔다. 클라이드가 저를 대하는 태도가 애매하고 이중적으로 보였다.

다만 지난번에 나 좋아하냐고 물었다가, 황태자비로 청하지는 않겠다는 답을 들은 적이 있었다. 특별히 끼고도는 시종이라든가 장난치기에 재미있는 상대쯤으로 여기는 걸까? 애정 이외의 이유를 골고루 갖다 붙여 봤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봐도 선을 넘었다. 솔직히 클라이드는 자주 선을 넘곤 한다.

안 되겠어. 다시 확인해 봐야지.

에디스는 굳은 결심을 하고 마른 목구멍에 침을 넘겼다.

“전하 혹시…… 제 혼인에 관심이 있으세요?”

감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보다는 다른 식으로 표현을 바꿔 봤다.

“물론 관심이 있지.”

그가 두루뭉수리 넘어가려 했다.

시크하면서도 빠른 대답은 직속상관으로서 부하의 혼인을 알 필요가 있다는 식이었다.

간 보는 것도 아니고, 장난치자는 것도 아니고. 대체 클라이드는 어중간하게 왜 이러는 걸까. 아무래도 그의 정체 모를 집착을 확실하게 밝혀 둬야 할 것 같았다.

다른 방식으로 말을 고르려고 잠깐이나마 열심히 골몰했다. 하지만 어떻게 묻는다고 해도 그가 작정하고 딴청부리면 해결책이 없었다.

불편한 관계는 서로 곤란해질 뿐이겠지.

내친김에 우리의 사이를 정리하려고 단단히 마음먹으며, 이번에는 핵심을 찔러 물었다.

“그냥 관심이 아니라, 전하가 제 맞은편에서 성혼 선서를 하게 될 일은 없을까 하고요.”

이런 물음이 혹여 발랑 까진 태도로 보일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 클라이드가 요리조리 빠져나가려고 하니.

그래도 ‘감히 뉘 앞이라고’라든가 ‘무엄하게’ 같은 반응은 나오지 않을 거로 예상했다. 한 침대 써 본 사이끼리 인제 와서 점잔 떨지는 않을 테다.

둘이 대치 상태를 이룬 동안 드레스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손에 땀이 서서히 뱄다.

저질러 놓은 다음에야 뒤늦게 긴장했다.

클라이드의 예술작품처럼 잘생긴 얼굴은 돌덩이처럼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자잘하게 까딱이던 손가락이라든가 손목도 움직임을 그쳤다. 그렇지 않아도 심기 불편하던 그는 완전히 정색해 버렸다.

지그시 응시하는 시선은 한겨울처럼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아랫사람의 하극상을 불쾌해하는지, 질투의 화산이 기어코 터져 버리려는지, 겉으로 드러난 표정만으로는 알기 힘들었다.

그가 호칭에 말투까지 싹 바꿔서 엄하게 굴었다.

“케츠모리스 경.”

낮게 을러대는 음성은 거북한 속내를 방증하고 있었다.

성씨로 불린 게 그를 처음 만난 날 이후로 없었던 것 같다. 좀 무섭다. 새삼스럽게 클라이드와의 거리감이 느껴지면서, 에디스는 꼿꼿이 서느라고 등줄기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네? 아……. 전하 말씀하십시오.”

어슬렁거리는 맹수처럼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뜻밖에도, 그는 위엄을 갖춰 조목조목 설명하기 시작했다. 짓궂은 장난을 즐기던 클라이드에게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황가의 혼인을 그리 쉽게 입에 담을 수는 없네. 내가 누군가를 비로 들인다면, 황실에 필요한 인물이자 나에게도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사람이 될 걸세.”

맞는 말이고 그녀도 알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클라이드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자 그 의미가 무겁게 다가왔다.

“죄, 죄송합니다.”

“황태자 클라이드가 보내는 청혼서는 죽음으로밖에 피할 수 없는 것이네. 기분이 좋든, 싫든. 혹은 날 치 떨리게 미워하더라도 황태자비가 되어야 하는 것이야.”

에디스는 연애 놀음이라도 하는듯하던 기분이 싹 사라지면서 정신이 번쩍 났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만 주억거려야 했다.

황태자가 일단 혼인을 거론한다면 돌이킬 수 없이 국혼을 치러야 한다. 거절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엄한 황제의 뜻으로 황태자비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혼인을 거부하고 싶으면 기껏해야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야반도주뿐이다. 어느 외진 벽지에 숨어들어 일생 동안 신분을 숨기고 사는 방법만이 남는다.

궁색하게 숨어 살다가 발각되는 날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 도망자로서 그야말로 끝까지 내몰리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서늘하게 풀어내는 클라이드의 토로는 언뜻 서글픔마저 서려 있었다.

“군림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좋아하는 이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건…… 내 어리석은 욕심일지도 몰라. 하지만 한 침대에서 살을 섞고 아기를 낳을 사람과 적어도 증오하며 살고 싶지는 않네.”

이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황후와 사이좋았던 황제는 오히려 손에 꼽을 정도다. 공식 석상에서만 나란히 앉던 커플이 많고, 그것마저도 못 참던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전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은근히 미안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에디스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다만 내 상황이 보기보다 쉽지 않다는 것만 기억해 주면 고맙겠군.”

그녀를 케츠모리스 대신 다시 에디스로 부르는 것으로, 함부로 꺼내기 힘들었던 얘기가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며 마음을 가다듬는 그의 뒷모습에는 속으로 삭여야 하는 고뇌가 엿보였다.

클라이드가 긴 감상에 젖어 있을 동안 그녀도 들은 말을 되새겼다.

현재 황태자비 후보로 물망에 오른 사람은 없는 상태다. 흔히들 떠도는 소문으로는 황태자가 워낙 이성에 무관심해서라고 하던데, 정말 관심 없는 탓이라면 조건 위주로 상대를 물색해도 될 일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강권해도 구태여 혼인을 서두르지 않는 이유를 이젠 알 듯했다. 클라이드는 마음을 나눌 황태자비를 찾는 중이었다.

‘그럼 혹시…… 나하고 엮였던 일들도 같은 이유일까?’

자신이 먼저 마음을 열 때까지는 클라이드가 함부로 굴 수 없는 사정으로 여겨야 하나.

씁쓸하게 내려앉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디스는 자신도 믿기지 않는 상상을 했다.

그녀의 혼담에 울화가 치밀지만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질투하지도 못하는 상황. 그깟 혼사는 깨 버리고 제게로 오라고 다그칠 수 없는 지위. 대리청정하는 황태자의 무거운 책임.

‘내가 싫어할까 싶어서 클라이드는 아무 말 못 하는 걸까? 거절도 못 하고 억지로 황태자비 자리에 앉혀질까 봐?’

클라이드는 그녀가 청혼받기를 싫어하리라고 짐작했을까? 그렇다면 에디스의 속마음을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황태자의 청혼서가 당장 손에 쥐여 진다면, 자신은 이걸 피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을지부터 고민할 테지.

클라이드가 싫지는 않지만, 미지의 위험과 난관을 뛰어넘을 만큼 마음을 주지도 않았다. 게다가 원작 소설을 떠올리면 미래가 밝지도 못하다.

그가 피의 숙청을 하던 대목이 떠오르자, 에디스는 두려움부터 일었다. 그 순간을 바꿀 능력이 제게 있을지도 확신 못 하겠다.

아드리안은 또 어떻고. 클라이드를 살릴 가장 확실한 반려는 뭐니 뭐니 해도 메인 수인 아드리안이다.

심지어 그녀는 정계에서 출세하고 싶은 욕망도, 신분 상승의 야망도 없다.

이런 속내를 혹여 간파당했으려나?

물론 죄다 근거 없는 망상이긴 하다.

클라이드는 단지 그녀를 집적거리길 즐기는 것일 수 있다. 늦은 밤까지 한 공간에서 머물기를 재미있어한다든지.

좋아하지 않고 단지 마음에만 들더라도 능히 그럴 수 있다.

그녀는 한발 물러서는 심정으로 속삭였다.

“클라이드가 소원하는 반려…….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찾았는지, 놓쳤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

절반쯤 뒤돌아본 그가 에디스를 먹먹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내가 그 사람한테 부족한가 봐. 쉽사리 잡혀 주지 않는 걸 보면.”

누구를 가리키는지 클라이드는 끝내 털어놓지 않았다.

잠시 엿봤던 그의 속내는 여전히 모호했다. 잡고 싶다는 사람의 정체를 밝히지도 않았다. 요즘 에디스에게 친근하게 구는 행동만으로 속마음을 함부로 넘겨짚기는 곤란했다.

그는 겉보기보다 훨씬 고심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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