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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24)화 (24/129)

24화

자주 만나서 친분을 쌓자는 건지, 그 이상의 농밀한 관계를 해 보자는 건지.

페이튼의 말뜻이 쉽게 분간되지 않았다.

정상적이라면 이건 데이트도 하자는 얘기다. 하지만 여기는 19금 삐—의 세계라서 좀 더 깊은 관계를 맺어 보자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서로를 알아 가는 것은 자칫하면 육체적인 행위에 가까워질지 모른다.

에디스는 남몰래 떠올리는 살색 가득한 상상을 굳게 숨겨야 했다. 음전하고 귀족적인 태도를 고수하기가 참 힘들었다.

“친분을 쌓자는 건가요? 대화를 나누면서?”

길게 뻗어 나온 남자의 다리가 까딱 움직였다. 꼬았던 다리를 이내 풀면서 페이튼은 상체를 에디스에게 굽혔다.

말투도 갑자기 돌변했다. 그가 목소리를 낮게 낮추자, 둘이 벌써 특별한 관계가 된 양 끈적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대화는 물론이고, 다른 것도 하고 싶습니다.”

“다른……?”

“제가 당신한테 얼마나 괜찮은 남편감인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어딜 가자든가, 정중히 인사하든가 하기 위해 내어놓은 모습 같았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페이튼에게 제 손을 얹었다.

페이튼은 뭔가 만족스러운 듯 소리 없이 웃었다. 큰 키만큼 길쭉한 손이 밀고 들어와 에디스와 겹쳐졌다.

손목을 잡았다가, 더 깊이 들어와 팔뚝을 감쌌다.

둘의 손목이 스쳤다. 유달리 체온이 높은 부위가 슬쩍 맞닿았다.

축구공도 한 손에 들 수 있을 만큼 기다란 손길은 그녀의 팔꿈치까지 들어와 은근한 자극을 건넸다.

“나한테 요구하세요, 에디스.”

손끝은 느슨하게 굽어져 위쪽 팔뚝을 돌았다. 자연스럽게 휘어진 접촉 부위가 옆구리까지 파고들었다.

갑옷처럼 겹겹이 입은 드레스와 빳빳한 감의 남성용 코트가 무색하리만치, 그녀의 겨드랑이와 옆구리에 섬세한 스킨십이 우연인 것처럼 지나갔다.

조금 간지러워서 에디스는 흠칫 어깨를 좁혔다. 정확히는 간지럽다기보다 야릇한 감각이 꼬물거리는 쪽이었다.

“무얼 요구하라는……?”

한참 위에 떠 있던 페이튼의 고개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느닷없이 입술을 부딪쳐 올까 봐 봐 겁이 날 정도였다. 그녀는 놀라서 입을 꼭 다물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정말로 키스할 만한 거리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 입술에 힘만 풀리면 곧바로 들어올 것 같았다.

입술 대신에 뺨이 맞닿았다.

“몸에 관한 건 뭐든지.”

작게 속살거리는 음성에 잔뜩 타락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는 어떤 요구를 받고 싶은지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만질만질하고 평평한 남자 뺨의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솜털이 둘의 피부 사이를 간질였고, 농밀한 의미를 전하려는 입술은 에디스의 귓가에 머물렀다.

고개를 까딱도 할 수 없었다. 여차하면 곧장 키스 모드로 돌입할 것 같았다.

“어서 내게 요구해요. 입 맞춰 보라든가.”

어쩔 줄 모르고 상대에게 내맡긴 팔꿈치 안쪽으로 페이튼의 손길이 파고들었다.

에디스의 입술이 벌어지며 참고 참았던 신음이 샜다.

“끌어안아 달라든가.”

그가 다른 팔로 그녀의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곧이어 무릎 한쪽이 쿠션을 짚었다.

장신의 남자가 팔다리를 모두 에디스에게 둘러싸 버리자, 마치 감옥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벗어날 수 없는 철창 같았다.

“그다지 원하는 건…… 아직 없어요.”

팔에 끼워져 있던 손길이 어느새 그녀의 목선을 타고 올라왔다. 뺨과 턱을 한꺼번에 쥐어 잡고, 에디스의 얼굴 윤곽선을 탐하듯이 느슨하게 어루만졌다.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그녀의 얼굴은 따끈하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상대적으로 페이튼의 피부가 선선하게 느껴졌다.

“그러면 내가 먼저 청할까요?”

아슬아슬하게 피부 접촉을 반복하던 페이튼의 뺨이 기어코 각도를 달리했다. 약간 선이 가는 입술이 그녀의 볼에 실수인 것처럼 콕 찍혔다.

몰랑한 입술 감촉이 느껴지자, 마냥 느끼기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이 이상 선을 넘고 싶지는 않았다.

19금 소설이 흔히 그렇듯, 페이튼이 하자는 대로 따르다 보면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침실까지 직행할지도 몰랐다.

이건 그의 성품 문제가 아니라 원작의 장르가 원래 그렇다. 클라이드나 아드리안도 그녀와 스킨십하는 데에 유난히 열을 올리곤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적극적인 행동에 몸속까지 녹진해진 에디스는 겨우겨우 사양의 말을 뱉었다.

“자, 잠깐…….”

그는 고개를 빼지 않고 가만히 입술을 누른 채 멈추어 있었다.

아쉬운 듯, 짧은 한숨이 흘렀다.

“날 봐요, 에디스.”

에디스의 귓불을 살그머니 만지며 그가 느리게 고개를 뗐다.

여차하면 다시 들이댈 기세로 지그시 그녀를 응시했다. 에디스 역시 달아오른 얼굴을 들어 그를 마주 바라봤다.

눈동자가 칠흑과 같이 새까맣다는 걸 그때 발견했다.

선명한 검은색 테두리는 그의 환하고 풍요로운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꼭 강아지 같았다. 못된 계략이나 품고 있는 악당의 눈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 주십시오.”

의자 쿠션에 올린 무릎이 그녀의 허벅지 옆을 꾸욱 눌렀다. 페이튼의 존재감이 새삼 강렬하게 와닿았다.

“아마도 당신 마음에 드실 겁니다. 내가 이래 봬도 영 별로인 남자는 아니거든요.”

자신감이 넘치는 것일 수도 있고, 가진 용기를 모두 끌어모아 가열하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에디스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어쩌면 자신은 그에게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악역으로 점찍어 놓은 다음, 먼 훗날 더러운 짓을 서슴지 않을 거라고 성급하게 믿었다.

그런 페이튼이 해맑은 대형견 같은 눈망울이라니.

실패보다 성공을 염두에 두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졌다니.

“저도 잘 부탁해요.”

문득 머리가 복잡해졌다. 자신이 이 남자와 혼인한다면 원작의 흐름이 어떤 식으로 바뀌려나. 잠재적인 흑막이자 악당을 과연 제 손으로 갱생시킬 수 있을까.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할 만큼 대단한 조건인지는 조금 더 따져 봐야겠다. 에디스는 세상을 뒤집을 욕심 따위는 없고, 자신의 위주로 편하게 잘 살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서.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사귀어 보자는 뜻으로 오해할까 봐, 그녀는 이쯤에서 선을 그었다.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지원금 문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다시 돈 얘기로 돌아가자 그의 기분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서운한 기색이 가득한 채로 에디스의 의자에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 * *

페이튼은 집 밖까지 에디스를 따라 나와 아쉬움이 가득한 태도로 작별 인사했다. 후일의 만남을 꼭 기대한다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마지막으로 손등에 입술을 찍을 때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를 이대로 보내기 싫어하는 행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진실되어 보였다. 에디스 역시 쑥스러워하면서도 무난하게 그의 호의를 받아 줬다.

케츠모리스 가의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페이튼은 대문 너머의 길을 내다봤다.

집사가 깍듯한 태도로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진행하시겠습니까. 따로 시키실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페이튼은 뒤돌아서며 손가락을 다각 튕겼다.

태양처럼 환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기분 좋게 고개도 끄덕였다.

현관 계단을 올라가는 걸음에는 주체 못 할 기쁨이 담겨 있었다. 가볍게 뒤꿈치를 떼어 껑충 뛰어올랐다.

“에디스로 결정했어. 이 혼사는 꼭 성공시킬 테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케츠모리스 가에 협상안으로 더 제시할 것이 있나 찾아봐.”

집사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네, 연구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거.”

홀 입구에 돌연히 멈춰 선 그가 강조하듯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흔들었다.

“에디스는 베타가 아닌 것 같아. 기질이 어떻게 결정된 건지 알아봐.”

그녀가 탄 마차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지만 페이튼은 제 몸에 에디스의 잔향이 밴 기분이었다. 베타라면 결코 뿜을 수 없는 향이었다.

격식을 차린 거리에서는 알아채지 못하다가 그녀에게 키스하려 한순간 확실하게 맡을 수 있었다. 그건 단순한 살냄새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느 오메가처럼 충분한 페로몬이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어떤 사연이 있길래 베타도 오메가도 아닌 상태일까.

“베타가 아니라니요?”

집사가 되묻자, 페이튼은 그녀의 당황하던 표정과 미묘한 향을 무방비하게 흘리던 태도를 떠올렸다.

“감추는 건 아닌 듯하고……. 자신도 모르는 것 같던데.”

“뒷조사를 해 볼까요? 케츠모리스 가의 주치의를 수소문한다든지.”

“그러다가 들키면 에디스에게 밉보일 수 있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방법이 좋겠네. 에디스가 일하는 동안 티가 나는 점이 있을지도 모르니 궁에 출입하는 자에게 물어봐도 되겠군.”

이유는 둘째치고 에디스의 기질부터 알고 싶어졌다.

그녀가 베타라고 아는 상태로 청혼서를 보냈지만, 실제로는 오메가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대환영이다.

페이튼은 알파의 기질을 가졌다. 애초 생각으로는 그녀와 부부가 된다면 자신의 페로몬을 약으로 조절하려고 했다. 아주 강한 성질의 알파까지는 아니다 보니 시중에서 제조할 수 있는 억제제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오메가라니.

그것도 냄새가 아주 끝내주는 오메가!

짐작하는 부분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에디스 쪽의 조건이 훨씬 나아진 것이다. 페이튼이 내걸 조건도 달라져야 옳다.

이미 파격적인 제안을 한 상태지만, 그녀의 군침 도는 향취를 떠올리는 동안 뭘 더 챙겨 주면 좋으려나 궁리하게 되었다.

“에디스가 오늘 만남을 괜찮게 생각했을까?”

집사는 눈치 빠르게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하고 좋았습니다.”

“내가 너무 질척거린 것 같기도 한데…….”

“공작님께서 싫어하시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단호하게 거절하실 성품인 듯했습니다.”

응접실을 들락거리면서 둘의 분위기를 눈여겨봤던 집사는 장담하듯이 설명을 덧붙였다.

잠시 마음의 갈피를 못 잡던 페이튼이 집사의 얘기를 듣고 차츰 안도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줄곧 에디스의 표정이 밝았다. 이대로 진행하기만 한다면 이번 혼담은 무사히 성사될 듯싶었다.

아직 한낮의 해가 기울지 않아 밝은 빛을 등진 페이튼은 그 자체로 태양의 신과 비슷한 느낌이 났다. 티 없이 해사하게 치아를 드러내어 웃을 때는 더욱 그러했다.

“역시 그렇지? 에디스가 조금 나한테 반한 느낌도 받았어.”

집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냥 들떠 있는 페이튼을 상대하는 역할로는 과하다 싶을 만큼 몸을 사렸다.

“물론입니다. 분명히 호감 이상이었습니다.”

아래로 내리깐 집사의 눈빛이 페이튼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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