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23)화 (23/129)

23화

부러 페이튼에게 흠잡을 데를 찾아봐도 당최 찾을 수가 없다.

클라이드처럼 제국을 짊어질 부담도 없고, 아드리안처럼 지나치게 주목받는 사람도 아니고.

“조금 이르지만 격의 없는 호칭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그레이브즈 공자보다 페이튼으로 불리고 싶습니다.”

1부터 10까지 내 취향이다. 로맨스는 취향이라더니, 내 이상형이 바로 여기에 있었네. 원작 작가의 취향은 메인 공 클라이드이고 내 취향은 서브 공 페이튼이 확실하다.

“물론이죠. 저도 에디스로 불러 주세요. 말씀 낮추시고요.”

치아를 드러내어 웃는 그의 얼굴이 너무 근사해서 평생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이 남자, 내 남편으로 도장 찍을까?

못 할 게 뭐가 있어. 친해지는 건 차근차근히 해 나가면 되지.

모르는 남자와의 혼인은 절대 싫다던 결심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특히 부부간에는 몸정이 중요하다던데. 페이튼의 얼굴과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그녀는 더러운 뇌를 풀가동해 밤에 몸을 써야 하는 적절하고 합리적인 상상을 했다.

“에디스…….”

“페이튼.”

마주 서 있는 동안 대략 키를 짐작할 수 있었다. 원작의 메인 공인 클라이드도 키가 무척 크지만 페이튼은 그보다 더 컸다.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그녀의 키와 차이가 나서, 남자의 어깨가 에디스의 머리 위로 한참이나 올라갔다. 190에서 200 사이? 남들은 흔히 180대 신장을 선호한다지만 그녀는 더 큰 키가 좋았다. 키 취향까지도 제대로 저격당했다.

오늘을 위해 무리해서 장만한 부채로 입꼬리가 찢어지는 몰골을 감췄다.

페이튼은 그녀에게 안부를 물으며 향이 좋은 차를 대접했다. 서두르지 않고 각자의 근황 얘기도 했다. 에디스는 험난한 황태자 궁 생활을 조잘거렸고 페이튼은 신대륙의 사업에 대해 고충을 털어놨다.

어찌나 흐무러지게 기분이 풀어지던지, 환영의 의미로 준비된 바이올린 연주를 감상할 즈음이 되자 그녀는 절반쯤 얼이 빠진 상태가 되었다.

단단히 밉보이겠다던 작심은 진작부터 종적을 감췄다. 평소보다 유난히 조신하게 차를 홀짝이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에디스, 괜찮으시다면 자주 뵙고 싶습니다. 말이 잘 통하는 분과 함께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군요.”

빈말인지 진심인지 궁금한 이유는 페이튼에게 홀라당 넘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려나.

“저도 그러고 싶지만 일이 바빠서요.”

그녀는 거절의 의미로 들리지 않도록 미안한 표정을 열심히 지었다. 황태자의 직속 시종이라 몸을 뺄 수 없다는 설명도 연거푸 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엔 시기가 이른 듯하지만, 전부터 에디스의 호평을 익히 들어 왔습니다. 아카데미의 졸업식에서 먼발치로나마 경을 뵌 적도 있지요. 하지만 케츠모리스 가에 껄끄러운 문제가 있어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웠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좀…… 그렇지요.”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그런 장벽이 사라졌으니 거리낄 게 없지요. 작위를 승계한 소식을 접하고 나서, 주저하지 않고 에디스에게 청혼서를 보낼 결심을 했습니다.”

“절 너무 높게 인정해 주시는 것 같네요.”

“제 지인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를 똑같이 읊는 겁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 모양이다. 에디스는 귀를 쫑긋 세운 상태를 들키지 않으며 담담하게 그를 응시했다.

“에디스는 혼인과 상관없이 케츠모리스 가를 이끄는 분입니다. 당신 자체로 의미가 있지요.”

“…….”

“그러니 제 청혼을 받아들여 주신다면 흔히들 하는 지참금은 생략했으면 합니다.”

신부의 지참금이 없이 혼사를 진행하자니. 이건 꽤 파격적인 제안이다.

원작의 세계관에서 귀족 영애는 누구나 지참금을 가져가곤 하지만 페이튼은 시원하게 건너뛰자고 말한 것이다. 에디스의 집안 사정상 어차피 액수는 크지 않을 것이라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듯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도 대단한데 더 놀랄 만한 얘기가 이어졌다.

“또한, 허락해 주신다면 이웃 나라의 혼례 관습을 빌어 왔으면 합니다. 혼인과 동시에 케츠모리스 가에 저희 가문의 자금을 지원했으면 합니다.”

“지원금……이라니요?”

“긴 초록 뿔 영지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거기는 잠재력이 큰 지역입니다. 부채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제 상회에 맡겨 주신다면, 에디스가 흡족할 만큼 발전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지참금과 반대로 신부대가 있다고 들었다. 페이튼의 얘기는 아마 그 뜻인 듯했다.

“영지를 맡긴다는 건 어떤 형식을 말씀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여쭤도 될까요? 조금 막연해서요.”

“소유권을 건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 땅은 당연히 에디스 것이지요.”

“그러면……?”

“신대륙에 있는 제 농장에서 사탕수수와 목화를 대규모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걸 가공하고 판매할 거점이 필요합니다.”

“가공업을 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공업단지를 조성할 계획입니다. 제 영지는 수도에서 너무 먼데 긴 초록 뿔 땅은 고작 하루 거리거든요. 심지어 항구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입지 조건이면 설탕과 옷감 외에도 벌일 만한 사업이 많습니다.”

“하지만 거긴 대부분의 땅이 밀밭인데요. 생산량도 나쁘지 않아요.”

“아깝지만 밭은 밀어 버려야지요. 발전을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혼인의 조건을 단단히 준비해 온 기색이 역력했다.

에디스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땅은 그녀의 것, 건물은 페이튼의 것이면 지대를 받아야 하나? 아니면 수익을 비율로 나눠야 하나? 더 물어보고 싶고, 이 자리에서 숫자를 들먹이며 꼼꼼히 따져 보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페이튼과 처음 만난 날이다. 둘은 예쁘게 차려입고 차만 마시는 중이었다. 재산 명세와 회계 장부가 등장하려면 통상적으로 몇 번은 더 만난 후여야 적절했다.

그녀는 세세한 조건은 미뤄 두고 페이튼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에만 치중했다.

“그렇게까지 계획하셨다면, 결혼은 빼고 사업 제안만 했어도 됐을 텐데요.”

“제 중요한 공장을 무작정 남의 땅에 짓기에는 위험이 큽니다. 어쩔 수 없다면 사업 얘기만 해도 됩니다만…….”

거침없이 설명하던 페이튼이 돌연 말꼬리를 흐렸다. 속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앗, 아뇨. 그게 아니라.”

“물론 안정적으로 사업하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에디스는 아름다운 데다가 지위도 있고, 궁에서 능력도 인정받았고…….”

그는 줄줄이 에디스의 장점을 늘어놓으며, 마치 훨씬 조건이 좋은 상대에게 청혼하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이런 말과 행동은 혼담을 계속하기 위한 겸손이 분명했다. 실제로 양쪽 집안을 저울질하면 그녀가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에디스는 금테가 둘린 찻잔에서 최고급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호화로운 정원을 내다봤다. 찢어지게 가난한 제집과의 격차가 여실히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페이튼이 이렇게 꼼꼼히 준비했으면 아마도 그녀의 부채 상황도 조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알고 있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실제 액수를 들으면 당장 혼담을 철회할지도 몰랐다.

“부족한 저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혹시 제 부채가 얼마인지는 아시나요?”

“상당히 크겠지요.”

“그래도 괜찮으신지…….”

그는 이런 대화가 나올 것을 예상했는지 테이블 테두리에 두 손을 올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듣기로 긴 초록 뿔의 땅은 매매된 적이 없습니다. 맞지요?”

에디스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영지에서 들어오는 세수는 전부 채권자에게 넘어가고 있어요.”

“세수만입니까? 다른 건 온전하고요?”

“예, 이자 명목이라서 마냥 제자리걸음이지요.”

다행스러워하며 환히 웃는 페이튼은 마치 방향을 훤히 아는 길잡이 같았다. 앞날의 계획이 죄다 명쾌했다.

“그럼 우선 제가 드릴 지원금으로 이자를 내면 되겠습니다. 우리 사업이 자리를 잡은 후 차근차근 원금을 갚도록 하지요.”

“그건 그럴 수 있지만, 페이튼은 부담스럽지 않으신가 해서요.”

“저는 에디스 소유의 땅을 넘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채도 건드리기 힘들겠군요. 다만 당신이 하루빨리 어려움을 벗어나도록 최대한 돕겠습니다.”

열정 가득한 응원과 함께, 그가 맞잡았던 자신의 손을 펼쳐 내보였다.

그는 웃음이 아주 화려했다. 에디스도 절로 따라 미소 짓게 될 만큼 주변을 밝게 만들었다.

또한, 하는 말마다 아귀가 딱 맞았다. 트집을 잡을 게 없었다.

한 방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거나, 그녀의 빚을 대신 갚아 주겠다거나 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는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합격. 만점짜리 합격이다.

이것저것 따져 봐도 서로 이득이 되는 혼사다. 그는 공작 아내를 얻는 데다가 마음껏 활용할 영지가 생기는 것이고, 에디스는 빈곤 탈출에 더해 미남 남편을 맞이하는 것이다.

불안 요소라고 해 봤자 페이튼과 초면이라는 것 정도랄까.

사람됨을 충분히 알지 못해서 조금 걱정되기는 했다. 원작에서는 그가 악역이었으니 지금 보이는 모습은 진짜가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앞의 페이튼은 긍정의 에너지가 마구 피어나는 남자였다. 이런 인상을 가식으로 지어내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다. 치아를 드러내어 웃는 미소는 오렌지 블론드의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눈부셨다.

“에디스, 혹시 시종의 직에 계신 것이 정계에 진출할 목적입니까?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싶습니다.”

“정치……요?”

에디스가 당황해서 대꾸하자 그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시종을 관두고 싶으시다고 해도 상관없고요.”

선택의 여지를 그녀에게 넘긴다는 뜻이었다.

이 남자, 완전 취향이다.

그는 내외간에 상공업계와 정계를 섭렵하자는 욕심을 암암리에 드러내고 있었다. 더불어, 그녀가 원치 않으면 현재의 혼인 조건에 충실하자는 의미도 전해 왔다.

“정계 진출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실은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시종으로 들어갔거든요.”

“그러셨군요.”

“혼인도…… 죄송하지만 아직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페이튼이 연락을 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초대해 응한 거지요.”

그가 초조한 기색으로 에디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러 가지 말씀 고마워요. 하지만 아직은 너무 급해서요. 죄송하지만 제게 충분히 심사숙고할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혼담은…… 계속할 수 있는 겁니까?”

“물론이에요. 진심으로 고민해 보려고요.”

혼사를 깨기 위해 행패 부릴 요량으로 왔건만, 행여나 페이튼의 결심이 바뀔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의 모습이라니.

흘끔거리며 눈치를 보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페이튼도 그녀를 조심스럽게 살피던 중이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에디스는 뻘쭘하게 눈알을 굴렸다.

담담하게 대응하는 페이튼의 매너는 자로 잰 듯 완벽했다.

“알겠습니다. 물론 갑작스러우시겠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에디스를 응시했다.

바른 자세로 앉았던 다리를 한쪽으로 꼬며 여태까지보다는 격식을 덜 차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 남편과 아내로서 우리가 얼마나 잘 맞을지 시험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무슨 뜻인지…….”

“서로를 알아 가는 단계를 밟자는 겁니다. 당신과의 혼담이 이대로 끝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