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편지 심부름이 서툰 하인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집사를 고용하지 못해 하인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글쎄요. 이름이 긴 어느 가문에서 왔다면서, 이걸 주인님께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전언은 없었니?”
글을 모르고 교육받은 것도 적은 하인과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예? 예. 뭘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뭔데?”
하인이 또 긁적긁적했다. 아무래도 궁에서 첫 급여를 받으면 집사부터 고용해야지 싶었다.
에디스는 하인을 물리고 봉투의 겉면을 확인해 봤다.
「검은 덩굴 흙의 페이튼 그레이브즈.」
뭐? 페이튼?
에디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페이튼이라면 원작의 서브 공이자 악역이다. 클라이드와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로서, 사람 자체는 굉장히 머리가 비상하고 행동력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소설이 그렇듯 서브의 비애를 타고난 게 흠이다. 좋은 건 메인 공인 클라이드에게 몰아주고 살짝 부족한 건 서브에게 돌아가곤 했다.
소개 글에 의하면 나중에는 온갖 책략과 모략을 일삼게 된다고 하던데, 에디스가 읽은 부분까지는 그 대목이 나오지 않았다.
이 남자가 왜 제게 편지를 보냈을까? 그것도 부담스럽도록 화려한 봉투에 담아서.
「친애하는 케츠모리스 경께 경애하는 마음으로 삼가 서신을 띄웁니다.」
인사말이 지나치게 정중한 거 아냐? 이건 극도의 존대가 필요한 상황에서나 나올 법한 문구다. 단순한 파티 초대장이면 이렇게 쓸 리가 없다.
아랫줄에 구구절절하게 예절을 차리는 글이 이어졌다. 요점이 아닌 부분을 대각선으로 훑어 읽고 본론이 나오자 에디스의 표정에 놀라움이 번지기 시작했다.
「케츠모리스 가문과 저희 그레이브즈 가문은 오랜 친분을 유지해 왔지요. 이 관계를 발전시켜 백 년의 인연으로 맺었으면 합니다.」
백 년의 인연이라면 혹시.
「케츠모리스 경께서는 저를 어찌 여기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래전부터 경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부디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만남을 갖기를 청합니다.」
“에?”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맹하게 말꼬리를 올렸다.
그러니까 청혼서인 거네. 화려한 겉봉투부터 편지 서두에 줄줄이 이어진 미사여구가 혼인 얘기를 담기 위해서였다.
서브 공인 페이튼이 뜬금없이 에디스한테 혼담을 넣다니.
대체 왜?
원작의 페이튼은 에디스가 아닌 아드리안에게 전략적인 혼담을 제의했다. 상공업계에서 전도유망한 상회를 보유한 아드리안의 집안과 바다 건너의 먼 대륙을 개척하고 있는 페이튼의 집안이 사업적으로 결합하자는 의도였다.
사업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척 일리 있는 선택이었다. 혼인 의사를 전하는 방식도 무난했다.
글 소개에서는 페이튼을 악역으로 설정해 놨지만 그녀가 읽었던 이야기 초반까지는 그리 밉게 볼 만한 구석이 없었다. 어쩌면 나중에 그가 엄청난 패악을 부리는 걸 잔뜩 터뜨리기 위해 전반부만 멀쩡했을지도 모른다.
에디스는 반짝반짝한 봉투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덧그리며 고민했다.
아드리안에게 가야 할 서신이 왜 제게 온 걸까.
자신이 페이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길래.
‘설마 내가 작위를 물려받아서?’
순수하게 전략적인 선택만을 한다면 페이튼의 혼인 상대로 에디스도 순위 안에 있을 것이다.
우선은 같은 공작 가문이라는 장점이 있다.
이 제국에서 공작 위를 가진 가문은 한 손에 꼽는다. 그 가문 중에서 혼인 적령기에 있는 영애는 방계를 포함하더라도 극히 수가 적다.
어느 집안이든 웬만하면 저희와 같은 지위의 가문과 맺어지길 원하는 게 당연한 욕심일 테다.
두 번째 장점으로서 에디스는 공작 영애가 아니라 직접 작위를 가진 공작이다.
‘어떤 접점도 없던 페이튼이 나한테 이러는 건 역시 작위 때문?’
사업도 좋지만 이곳은 명예가 더 중요한 세계다. 페이튼에게 공작 배우자를 맞이하고 싶은 욕심이 충분히 생길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아직 공작 영식이다 보니 에디스의 지위가 현재로서는 더 높다.
그런데 페이튼은 그녀가 얼마나 많은 채무를 지고 있는지 제대로 짐작한 걸까? 상황상 아버지의 빚을 에디스가 대신 갚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 텐데.
아마 액수를 확실히는 모를 거다. 일단 알아보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혼담을 넣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그녀는 한 가지 가정을 해 봤다.
자신이 원작의 에디스와 다르게 움직인 게 원인이 되어서, 지금 페이튼도 다른 쪽으로 혼담 상대를 결정했다면.
세밀히 따져 본 후 사업적으로 유리한 아드리안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가 나은 에디스를 선택했다면.
‘이렇게까지 바뀌어도 괜찮은 거야? 원작과 실제가 지나치게 다르잖아.’
변화의 정도가 너무 커서 당황스러웠다. 브라질에서 나비가 날갯짓한 결과가 텍사스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격이었다.
소설과 실제의 차이는 작은 것부터 시작했다.
원작 속의 에디스라면 친부에게 작위를 내어놓으라고 강짜를 놓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의 성품이 세밀히 묘사되진 않았지만 상식적으로 그렇다. 따라서 자신이 공작이 되는 바람에 페이튼의 혼인서를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클라이드나 아드리안은? 제가 그들에게도 변화를 주었을까? 미로 정원에서의 만남을 주선하기 전부터 이미 달랐던 건가?
클라이드가 자신을 골려 먹기를 즐기는 것도 의심스럽다.
아드리안이 아카데미 시절에 제게 접근하려 했던 것도 수상하다.
감당하기 힘든 깨달음이 막혔던 둑 터지듯이 급격하게 그녀의 뇌리로 쏟아졌다. 변화는 진작부터 있었고 자신은 여태 모른 채 이 세계에서의 4년을 지내 왔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시종 생활을 하다가 물러나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겠다던 포부도 너무 안일했다. 세상은 그녀가 희망하는 바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바삐 머리를 털어 본다.
‘아니야. 혼담서 하나만으로 섣불리 판단하기는 일러.’
헤어 나오지 못할 늪에 빠져 발버둥 치듯이, 억지로 긍정 회로를 돌려 생각했다.
이 서신은 원작에 적히지 않은 일반인의 생활일 수도 있다. 어느 소설이든 모든 등장인물의 일대기를 글로 옮기기에는 불가능하다.
지금은 원래 스토리가 시작되기 2년 전이다. 혹시 페이튼이 이때 에디스의 집안에 혼인 얘기를 꺼냈다가 철회했다면. 그러고 나서 훗날 아드리안에게 꽂히고 각종 모략을 만들어 내게 된다면.
그러면 앞뒤가 맞는다.
에디스는 잡목 숲을 방불케 하는 자기 집 정원을 멀거니 내다보며, 이 사태를 어찌해야 좋을지 골몰했다.
혼인 문제는 이제 막 운을 띄운 상태다.
고작 서신 한 장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페이튼을 상대한 다음에 마음을 돌리게 만드는 방법도 있다.
‘아냐, 아냐. 적당한 정도로는 안 되겠어. 단단히 미운 꼴을 보이는 편이 낫겠지.’
갖가지 궁리를 했지만 그중에서 혼담을 받아들이는 건 고려하지 않았다.
원작이 어떻든, 중후반부의 스토리가 어찌 흘러가든, 에디스 자신의 기준으로 봤을 때 페이튼을 남편으로 맞이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설사 그가 악역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얼굴도 못 본 남자와 혼인이라니. 절대 별로다.
* * *
중매를 서는 사람이 왔다 가고 에디스가 정중한 필치로 쓴 회신도 보냈다.
원래 이런 혼사는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이 나서야 하는 건데, 에디스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직접 진행했다.
조건에 따른 혼사인 탓에 판을 깨려면 조건이 틀어져야 한다. 그걸 논의하는 자리도 나갈 사람이 에디스밖에 없었다. 친정으로 돌아간 어머니는 너무 멀리에 있고, 얼굴도 보기 힘든 아버지는 노름꾼이니.
혼담의 핵심인 작위가 자신에게 있다는 점도 만남의 자리에 참석할 명분이 되었다. 파산 직전의 가문이지만 공작은 누가 뭐래도 공작이었다.
만날 장소는 페이튼의 저택이었다. 거리도 멀지 않았다.
라그란드 제국에서는 최고 귀족의 몇몇 가문을 일컬어 흔히 ‘대지의 기둥’이라 부르곤 했다. 에디스가 사는 동네는 고위 귀족이 모인 곳이어서 같은 이름으로 대지의 기둥 언덕이었다.
언덕을 통틀어 가장 허름한 저택인 에디스의 집으로부터 몇 블록 떨어진 곳에 페이튼의 저택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신흥 귀족 계열도 부유하지만 페이튼의 집안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영주였다. 에디스의 어린 시절 부유함에 비해 봐도 페이튼이 더 떵떵거리고 살았다.
폭이 몇십 야드는 되는 대문을 지나자 황궁 저리 가라 할 만큼 조형미 넘치는 정원이 나타났다. 마차로 한참이나 들어가고 나서야 저택 정문에 다다를 수 있었다.
고급스러운 복장을 한 집사가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주인님께서 고대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로 잰 듯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운동장만 한 응접실로 향했다.
눈에 띄는 것 전체가 귀물이고 돈다발이었다. 덕분에 공연한 망상이 스쳐 지나갔다. 눈 딱 감고 페이튼과 혼인하면 시종으로 고생할 필요 없이 잘 먹고 잘살지도 모른다는 헛생각이었다.
잠시 후,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길쭉한 키가 저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젓가락 같은 다리로 훌쩍 다가오는 동안, 태양을 머리에 인 듯 화려한 금발이 샹들리에에 부딪칠까 봐 겁이 날 만큼 높이에 떠 있었다.
“케츠모리스 경, 그동안 진심으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서글서글하니 호감을 주는 얼굴이 불꽃처럼 눈부시게 다가왔다.
원작에서 페이튼의 인물 묘사가 이런 식으로 표현됐던가? 아니면 내가 대충 읽고 넘겨서 기억나지 않았나?
긍정의 에너지가 전신을 타고 흐르는 남자는 따뜻한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최고의 예를 갖춰 인사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일어나서 답례하는 에디스의 발끝이 살짝 긴장했다. 기분이 바뀐 것은 역시 외모 위주의 가치관이 한몫하고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으며 자란 페이튼은 기대에 부응할 만큼 사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원작에서의 그는 아드리안과 만나 서서히 악역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에디스가 공작 작위를 물려받지 않았더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스펙이었다.
“직접 와 주신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는 동안 무척 설렜습니다. 편히 계십시오. 혹시 음악을 연주해 드리면 더 마음이 누그러지시겠습니까?”
이 정중함이라니.
로설 남주가 실제로 튀어나온 듯한 인상이라니.
원작 중 페이튼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장면에서 이만큼의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랬다면 잊었을 리가 없다.
따뜻한 화사함을 후광처럼 드리운 남자가 공손하게 손을 내리는 모습을 어떻게 기억에서 지울 수 있으랴.
“초대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왔습니다. 제가 너무 서두른 건 아닐까요?”
“절대요. 지난밤에 제가 한숨도 못 잔 걸 보셨다면 경께서는 웃으실 겁니다.”
“그레이브즈 공자님. 말씀도…….”
호호 미소를 날릴 때, 속사정으로는 헤벌어지게 웃고 싶었다.
와, 이 남자가 서브 공이자 악역이라고?
말도 안 돼.
세계관 최강은 바로 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