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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21)화 (21/129)

21화

거친 호흡이 잠시나마 클라이드의 숨통 안으로 갈무리되었다.

본능을 부득부득 인내하고 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느릿하게 터지는 알파 짐승의 목울음은 잔뜩 사나웠다. 목소리가 인간의 언어를 담았다는 사실이 도리어 놀라웠다.

“에디스, 베타로 진단받은 게 언제야?”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조금 고개를 든 클라이드의 눈썹이 날카롭게 일어서 있었다. 왜 이런 걸 물어보는지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분위기에 압도된 듯 순순히 털어놨다.

“흔히들 기질이 결정되는 나이대에 나도 결정됐어요.”

“나는 열 살에 알파의 러트가 처음 찾아왔어. 에디스는 정확히 언제였지?”

그녀는 원작의 에디스가 가진 기억을 더듬어 봤다. 빙의하던 시점인 열여섯 살까지 에디스는 어떤 기질도 피어나지 않았다.

알파나 오메가가 될 사람은 흔히 10대 초반에 첫 발정기를 거치며 기질이 결정된다. 클라이드는 꽤 이르게 발현한 편이고, 늦더라도 스무 살이 넘는 경우는 없다.

발정기가 오지 않은 사람은 성년식을 즈음해서 의사의 진단을 받는다. 이변이 없는 한 베타로 결론이 나는 것이다.

빤히 쳐다보며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클라이드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대답하는 말소리가 우물우물 기어들어 갔다.

“아마…… 스무 살?”

“그 애매한 얘기는 뭐야. 의사가 언제 확진해 줬냐고.”

당황스러운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렀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머뭇거리는 기색을 눈치챈 클라이드는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재차 다그쳤다.

“에디스가 지금 스무 살이잖아. 의사가 몇 월 며칠에 진단했는지, 아니다, 어디에서 영업하는 의원인지 말해 봐.”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하며, 그에게서 이젠 덤벼드는 맹수 같은 느낌이라기보다 죄를 캐묻는 심판관의 느낌이 났다.

이 화제가 그렇게 추궁당할 만한 일인가. 의문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딱히 감출 일은 아니지만, 반발심이 생긴 탓에 술술 불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왜 자꾸 캐묻는 거죠? 이건 내 개인적인 문제예요. 내가 베타이든 베타가 아니든, 시종으로서 일하는 것에는 상관이 없잖아요.”

“과연 상관없을까?”

그가 반문하자 지금의 상황이 새삼 피부로 와닿았다. 에디스는 할 말을 잃고 입술을 말아 물어야 했다.

등허리에 얹힌 묵직한 손이 열병 환자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오메가라면 발정을 도와줄 수 있을 테니 그에게 기질은 깊은 관련이 있다.

어쩔 수 없었다.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올해 들어 의사를 만난 적은 없어요. 딱히 아픈 데도 없었으니까요. 기질은…… 뻔하잖아요. 아무 페로몬도 없으면 베타인 거죠.”

두 번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원작에서의 에디스도 베타였고 지금도 베타였다. 그래서 황실 관리 지원서에도 주저 없이 베타라고 적었다.

이 세계는 베타가 하등하게 취급당하지 않는다. 세 가지 기질은 특색이 다를 뿐 우열 관계에 있지 않다. 그중 베타는 전천후 능력을 갖춘 부류로서, 노력을 통해 성장할 가능성이 컸다.

사실 에디스는 자신이 베타인 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어딜 가든 베타의 인원수가 가장 많아서 스스럼없이 섞여들기에 편했다.

당연하게 여기던 자신의 정체성을 인제 와서 클라이드가 꼬치꼬치 캐묻는 게 달갑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지낸 4년여의 세월이 길면 길다고 볼 수 있어서 나름대로 애착도 있었다.

하지만 클라이드는 안색이 크게 바뀌었다. 충혈된 흰자위가 다 드러날 만큼 눈을 홉뜨면서 경악해 마지않았다.

“그러니까…… 정해지지 않은 거라는 뜻?”

진료비가 적은 비용이긴 해도, 쪼들리는 살림에 구태여 헛돈 쓰고 싶지 않았다는 얘기는 뺐다.

“아니죠. 의사한테 보일 필요조차 없다는 거죠.”

에디스는 허리에 둘린 손을 살짝이 풀어놓고 서둘러 물러났다. 지금은 실랑이를 벌이기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의 지나치게 뜨거운 체온과 불그스름한 눈자위가 줄곧 신경 쓰이던 차였다. 하나 마나 한 기질 얘기는 관두고 클라이드의 이마에 물수건이라도 얹어 줘야 할 것 같았다.

“전하, 인제 그만 쉬세요.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여요.”

단호하게 선을 긋는 태도가 먹혀들었는지, 그는 비워진 손을 주먹 쥐면서 묵묵하게 침대맡을 지켰다.

침실 구석에 놓인 콘솔에는 물이 담긴 큼직한 볼이 있었다. 간단히 손을 씻거나 얼굴을 닦기 위해 갖춰 둔 것이다. 에디스는 옆에 놓인 수건을 물에 적셨다.

깔끔하게 한번 헹궈서 꾹 짜려던 차에 그가 달려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물수건이 좀 필요해서요.”

“어디에 쓰려고?”

그걸 말로 해야 아나. 당연히 네 녀석 이마에 붙여야지.

“전하 열이 심하신 것 같아…….”

클라이드 특유의 독수리 눈썹이 날아오를 듯 삐죽이 올라갔다.

그녀의 손에 들린 물수건을 낚아채면서 격정 어린 어조로 으르렁거렸다.

“이런 거 하지 마.”

화난 게 틀림없었다. 지난 며칠간 클라이드를 겪어 오면서 자신에게 이만큼 잘라 말한 건 처음이었다.

물기를 짜내려던 수건이 내동댕이쳐진 채 볼에 둥둥 떠다녔다. 비틀어 짜기를 잘하지 못해 어차피 많이 축축한 수건이긴 했지만, 물속에서 외따로 부유하는 모양새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런 거라니요. 전하는 지금 열이 높아요.”

에디스가 도로 콘솔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그는 몸으로 막았다.

“내 뇌가 녹든 말든, 에디스는 잔심부름이나 하려고 여기에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명색이 황태자 전담 수발 시종이면서 물수건조차 만지지 못하게 하다니.

제게 잔일을 시키지 않겠다는 마음 씀씀이는 고맙지만, 아무래도 러트의 영향으로 뜨끈한 체온이 걱정됐다. 근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자 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클라이드는 직접 수건을 비틀어 짜낸 다음 네모난 모양으로 가지런하게 접었다.

“이러면 된 거지?”

에디스의 손을 끌어다가 말끔한 물수건으로 닦아 줬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던 손을 수건으로 감싸고 찬찬히 앞뒤로 문질렀다.

클라이드를 위해 만들려던 수건은 어느새 그녀의 손에 남은 물기를 지우기 위해 쓰이게 되었다.

“에디스. 내친김에 일러두는 건데, 이 궁에서는 네 손에 종이와 펜 말고 어떤 것도 들지 말도록 해.”

조금 무리하게 단정 짓는 건 아닐까? 에디스의 위치는 분명 황태자의 최측근인 데다가 수발 담당이다.

게다가 둘만 있는 경우가 또 생길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꼬박꼬박 클라이드만 자잘한 일을 하면 아무래도 좀 그렇다.

“그래도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지금처럼요.”

“절대. 허락하지 않겠어.”

그는 에디스가 손을 담갔던 물에 시원하게 세수한 다음, 그녀를 닦았던 물수건으로 물기를 훔쳤다. 옆에 마른 수건이 있는데도 그렇게 했다.

찬물로 열기를 식히고 상의 버튼을 몇 개 더 풀었다. 명치까지 갈라진 셔츠 사이로 가슴이 훤히 드러났지만, 그녀는 남자의 맨살을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했다. 옷 좀 챙겨 입으라는 말도 차마 하기 힘들었다.

분위기를 바꾸고 나니 클라이드의 컨디션이 상당히 나아졌다. 발정의 수위는 여전히 위태로워 보이지만 인지 능력은 평상시 상태로 돌아왔다.

시원한 레모네이드까지 한 잔 같이 들이켠 후에는 딱히 에디스가 할 일이 없게 되었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봐도 될까요?”

못되게 입꼬리를 올리는 표정을 보니 그가 말짱해졌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딜 가게. 여기가 사무실 아냐?”

“네?”

“아직 근무 시간이고.”

그러면서 클라이드가 별실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 난리를 쳐 놓고 일하라고? 그 고약한 성질머리가 어디 안 가는 녀석이다.

“아니, 그래도 이 상황에서 서류를 검토하라는 건…….”

“내가 에디스를 물수건 만들라고 불렀겠어? 아니면 레모네이드 따르라고 불렀겠어? 며칠 밀린 일을 해야 할 것 아냐.”

와, 완전히 독사가 따로 없다. 악마. 사탄. 지옥 불 화신.

레모네이드도 클라이드가 준비해 준 건 맞지만,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러트 사이클이 한창인 알파의 침실 건너편에서 밀린 업무나 하라니.

“아니 전하, 좀 쉬셔야…….”

클라이드의 손가락이 빙글빙글 돌며 책상 방향을 가리켰다.

“에디스가 쉬고 싶은 건 아니고?”

희게 질린 얼굴로 가벽 너머의 별실로 들어갈 수밖에.

켜켜이 쌓인 정책 보고서와 방대한 양의 세정 건의안 앞에 초라하게 앉은 에디스는 며칠간 열어 보지 않았던 문서를 한 장 한 장 들춰야 했다.

농땡이 피울 여지도 없도록, 클라이드는 건의안이 담긴 몇 권의 문서철을 지난번처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다 할 때까지 집에 못 간다는 엄포도 덤으로 뒤따랐다.

나 또 집에 못 가는 거야?

오늘 밤은 어디서 자게 되는 걸까.

시선은 문서의 깨알 같은 글씨 위를 달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클라이드의 푹신한 침대를 떠올렸다.

골치가 지끈거리다 못해 뺨까지 발그스름하게 열이 올랐다. 지난번 한 침대를 썼던 경험과 앞으로 닥칠 고난이 뇌리에서 교차했다.

‘둘이 나란히 눕는 잠자리. 그것도 한창 러트 사이클을 겪고 있는 알파와 함께라니.’

문짝 없는 문 너머로 클라이드가 열에 들뜬 채 그녀를 내내 주목했다.

* * *

< 3장. 제대로 내 취향의 서브 공 >

황태자의 러트 사이클이 시종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엄청난지, 실제로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클라이드가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올 때까지 에디스는 침실에 붙박이로 눌러앉아 살아야 했다.

러트 기간만은 직책대로 수발 시종이 맞았다. 24시간 황태자의 곁을 지키는 일이 막중했다.

에디스는 원래 업무인 보고서 정리에만 열중했지만, 그가 홀로 앓지 않는 것만으로도 주치의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잘 먹고 잘 쉬는 건 둘째치고 심리적으로 내내 팽팽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집요하게 주목을 당하는 탓에 두 다리 뻗고 쉴 수가 없었다. 매 순간 클라이드의 시야각 안에 있었고,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팔딱거리는 먹잇감을 집어삼킬까 말까 고심하는 맹수 같았다. 본능적으로 다가가서는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드는 분위기였다. 에디스는 오돌오돌 떨고 긴장하며 클라이드의 러트 사이클을 겨우 버텼다.

그래서 마침내 집에 돌아갈 무렵에는 지렁이처럼 흐물흐물해졌다.

남들은 때깔 좋아졌다고 말해도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겉은 반드르르해도 속은 새로운 이세계로 진입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다행인 점은 집안일을 핑계로 삼아 입궁 시종으로 전환하는 걸 잠시 미뤄 뒀다는 것이다. 같은 황태자 궁에서 아예 살아 버리면 클라이드의 등쌀에 머지않아 피골이 상접할 것 같았다.

큰 고비를 넘기면서 좋은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러트 사이클 동안 꼬박 근무한 대신에 휴가를 넉넉하게 받았다는 사실이다.

에디스는 누추하지만 마음만은 편한 제집에서 꿈도 안 꾸고 긴 잠을 잤다.

이튿날은 저택의 테라스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정말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삐 굴러가는 황태자 궁에서는 한가로운 시간이란 윗분들만이 누리는 것이었다.

먼지 쌓인 테이블은 건드리지 않고 대충 의자 하나만 닦고 앉았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있노라니 인력이 부족한 저택 상태도 그다지 중요치 않게 여겨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꾸벅꾸벅 졸던 중,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이 나타났다. 하인이 금박 테두리를 두른 봉투를 쟁반에 받쳐 가져온 것이다.

“이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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