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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20)화 (20/129)

20화

클라이드는 무제한으로 뿜어내는 페로몬을 줄이고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꾸준히 억제제를 복용해 왔다. 하지만 그다지 몸에 잘 듣지는 않았다. 강한 알파 기질이 약을 이기는 형국이었다.

‘한마디로 혼자 끙끙 앓고 있다는 뜻이지. 녀석, 고집도 참.’

에디스는 속으로 황태자를 고집쟁이 녀석으로 부르며 투덜거렸다.

이 세계에 몇 년이나 있었지만, 에디스의 고정관념에는 아직도 신분제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클라이드는 그녀에게 고작해야 한 살 많은 남자일 뿐이었다. 높은 신분의 황태자라는 인식은 피상적으로 학습만 했을 뿐,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마도 영영 못 할 듯했다.

‘단지 우성 오메가 한 명만 옆에 두면 되는 거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를 걱정하는 마음에 괜히 불평했다.

하지만 클라이드의 고집을 이해하려고 상상의 나래를 더 멀리 펼쳐 봤다.

어쩌면 황태자의 러트 해소용으로 오메가가 발탁될 때, 그 상대가 유력하게 황태자비 후보가 될지도 모른다.

닫힌 침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아무 오메가나 들이겠는가. 클라이드에게 원치 않는 사건이 벌어지기가 너무 쉽다. 어떤 오메가든 넙죽 감사하다며 황태자를 받아들이겠지.

미로 정원에서 그가 사리 분간을 정확히 하지 못하던 때를 떠올리자 약간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다.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아마 뜻하지 않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뭐, 어렵긴 하겠네. 아무 오메가나 침실에 들이지는 못하겠지.’

그의 결정을 내심 수긍할 수 있다는 게 안타깝기도 했다.

시종 사무실에서의 이튿날, 건성건성 시간을 때우고 있던 차에 에디스를 부르러 사람이 왔다.

황태자의 침실로 올라오란다.

이래도 괜찮은 건지 심부름꾼에게 캐묻지는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마음을 숨기며 명에 따라야 했다.

침실에는 막 진료를 마친 주치의를 비롯해 몇 명의 의사와 시종이 있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주치의의 표정이 어두웠다.

두꺼운 휘장이 쳐진 침대 안쪽에서 클라이드의 까칠한 음성이 들렸다.

“휘장을 걷어 놓고 모두 물러가라. 내 수발 시종이 알아서 날 보필할 테니 그대들은 쓸데없이 여길 기웃거릴 필요 없다.”

“전하, 지금은 정무를 돌보실 때가 아닙니다. 오메가가 당장 필요한 상태란 말입니다.”

“그대는 자꾸 선을 넘으려고 하는군. 흠…….”

눈으로 보지 않아도 짜증 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극도의 저기압 상태를 보이는 말투와 쉰 목소리는 클라이드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에디스만 뺀 전원이 물러나야 했다.

주치의는 휘장이 젖혀지는 부산한 틈을 타 에디스에게 슬쩍 눈짓했다. 그러더니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자네가 베타라서 그나마 곁에 두시려는 모양이군. 아예 혼자이신 것보다 낫다고 해야 하나.”

역시 예상대로 클라이드는 오메가를 침실에 들이기 부담스러워했던 것이다.

“아……. 그런 상황이군요.”

주치의가 짧은 한숨과 함께 그녀에게 당부했다.

“자칫하면 전하께서 폭주하실 수 있네. 그때는 전하의 명이 없더라도 꼭 사람을 부르게.”

“폭주……라니요?”

“육체가 감당하지 못하는 알파의 페로몬이 뇌까지 장악하는 것일세. 사람이 아닌 짐승이 되는 상태지. 그렇게 되면 전하는…….”

“거기에서 뭐라고 쑤군거리는 것인가!”

클라이드에게 제대로 걸려 버렸다. 당황한 주치의는 아무 말이나 둘러대며 뒷걸음질 쳤다.

침실 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그녀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사라지고 머지않아 정적만이 맴돌았다.

주치의가 그를 아예 혼자이시라고 말한 걸로 미루어 이런 상황이 매달 반복되는 듯했다. 클라이드는 러트 사이클 동안 알파나 베타에게 시중을 받아도 되었으련만, 이마저도 내친 것이다.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홀로 끙끙 앓았나 보다.

그렇다고 예고도 없이 이렇게 싹 다 내보내다니.

에디스는 난감했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안 왔다.

우두커니 방 가운데에 선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클라이드와 대치한 상태였다.

그가 침의로 입은 하얀 셔츠는 칼라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탄탄한 뒷목이 길게 드러났다. 간소한 스타일의 하의도 늘씬한 다리 선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남자의 몸매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건만. 이놈의 외모 밝힘증이 문제다. 그녀는 잘생김이 뚝뚝 묻어나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채 열심히 클라이드의 위아래 홑겹 옷을 흘끔거렸다.

생각보다 그의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머리칼도 잘 빗질되어 있었고 정면의 허공을 응시하는 표정도 멀쩡했다.

“전하…….”

어쨌든 그에게 도움을 줘야지. 수발을 들어야 해.

“제가 무얼 하면 될까요?”

그는 잔뜩 풀린 표정이었다. 흡사 독한 술에 취한 듯 느슨하면서도, 반대로 칼날처럼 첨예한 눈빛이 에디스에게 향했다.

“이리로.”

카펫을 디딘 맨발이 좌우로 벌어졌다.

클라이드의 시선이 제 발끝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에디스를 응시했다. 그쪽으로 오라는 뜻이다.

ㄱ자로 갈라진 무릎은 일견 평이해 보였다. 허세 부리는 남자가 푹신한 의자에 앉을 때 보통 저만큼 벌려 앉곤 한다.

그런데 클라이드가 이런 자세를 하니 사뭇 낯설었다. 늘 황족다운 몸가짐을 유지하던 남자라 그런가. 러트 사이클 때문에 흐트러진 다리가 은근히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겼다.

느리게 끄는 발걸음으로, 그가 지정하는 포인트 앞에 가서 섰다.

“더 가까이.”

그가 자신의 허벅지 안쪽으로 손목을 늘어뜨리자, 에디스의 시선은 유혹적인 손끝에서 남자 허벅지로 옮겨 갔다.

기다란 남자 손가락이 까딱까딱 구부러졌다.

최면에 걸린 듯 그녀의 발이 거부감 없이 앞으로 나갔다.

얇은 바지 한 장으로만 덮인 다리가 길게 뻗어 나와 에디스를 좌우로 둘러싼 상태가 되었다. 두툼한 굴곡의 대퇴근이 착 감긴 옷 너머로 드러났다.

그가 움찔거리자, 여러 가닥으로 갈라진 근섬유가 요동쳤다.

그녀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 돌이켜 보니 숨을 쉬는 걸 잊고 있었다.

뒤늦게 심호흡을 해 봤다. 부족하던 산소가 갑자기 혈액에 채워져서인지 머리가 핑 돌았다.

하지만 답답한 기분은 여전했다. 실내 공기가 탁한 걸까. 황태자의 침실에 환기가 제대로 안 될 리도 없건만.

주변에 자욱한 알파 페로몬을 깨닫지 못하는 에디스는 어째서 가슴이 답답한지 알지 못했다. 색색대면서 거친 호흡을 하고, 불안하게 창 쪽을 돌아봤다.

“왜?”

광인처럼 번뜩이는 황금안이 그녀를 꿰뚫을 듯 바라봤다.

“좀 답답해서요. 창문 좀 열어도 될까요?”

본능에 치우친 탐욕만이 전부가 아닌 눈빛이었다. 자신만의 의도를 감춘 채 클라이드는 은근히 되물었다.

“왜 답답하지?”

“글쎄요. 환기가 잘 안 되었던 걸까요.”

그가 에디스를 흘끔 올려다봤다. 짐승을 연상시키는 목덜미가 때마침 꿈틀 움직였다.

“헉!”

왠지 속이 부대끼는 것 같다.

그의 강렬한 인상 때문이거나, 러트 사이클의 괴로움을 공감한 탓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클라이드의 넓은 어깨가 펴지는 순간 답답한 기분이 한계에 이르렀다.

숨이 턱 막힌다.

집요하게 주시하는 그의 시선이 뜨거워.

“숨 쉬어. 괜찮으니까.”

등허리에 익숙한 손길이 얹히며, 그에게 홱 끌려 들어갔다.

구부려 앉았던 클라이드의 얼굴이 그녀의 복부에 정통으로 눌렸다. 버둥거릴 틈도 없었다. 강하게 두른 두 팔에 감기고, 윤곽이 선명한 안면과 맞닥뜨렸다.

두 쌍의 다리가 나무토막으로 만든 인형처럼 달그락거렸다. 어딘가는 부딪히고 어느 부분은 엇갈려 지나쳤다.

인형이 내동댕이쳐지듯 에디스가 그와 충돌하려 했다. 그러다가 직전에 겨우 균형을 잡아 바로 섰다.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못하는 거리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고개를 푹 숙인 클라이드가 숨조차 죽인 탓에 그녀는 그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완연한 알파의 모습이 되어 벌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것을.

“하, 이게 어떻게 베타의 향일 수 있지? 말도 안 돼.”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에디스의 복부에 파묻혔다. 그녀에게 들리지 않도록 일부러 감췄다.

클라이드가 그녀의 체취를 깨닫던 처음에는 그저 사람 살냄새뿐이었다. 하지만 며칠 시일이 지나는 동안 알파를 미치게 하는 향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변화를 그는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다. 적절한 때를 노리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에디스는 꿈틀거리다 말고 그에게 압박당하는 꼴이라, 앉은 것도 일어선 것도 아닌 자세였다.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행동에 떠밀려 균형을 잃고 그의 뒤통수를 붙들어야 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푸른 머리칼 속을 푹 파고들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고 딱히 그를 자극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클라이드는 검에 찔린 것처럼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퍼뜩, 알파의 몸이 한순간 경련했다.

그는 동물적인 몸놀림으로 고개를 젖혀, 서슬 퍼런 얼굴로 그녀를 노려봤다.

기묘한 기운이 주변에 가득했다. 에디스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영역이었다.

“나한테 보내는 신호야?”

짙푸른 머리칼에 넣은 손가락을 섣불리 빼내지도, 멋대로 꼼지락거리지도 못하면서 그녀는 경직되어 버렸다.

남자의 넓은 어깨는 움츠린 맹수처럼 신중하게 들썩거렸다.

당장이라도 내달려서 목표로 한 먹이에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을 듯한 흉흉함이었다. 짐승 앞에서, 그녀는 저절로 풀리려는 무릎에 힘을 줘 버텨야 했다.

무시무시한 정적이 흘렀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야 클라이드는 한계까지 치고 올라갔던 충동을 조금이나마 억누를 수 있었다. 입을 벌리고 에디스의 몸뚱이에 알파의 숨결을 토해 냈다.

한꺼번에 내쉬는 호흡이 그녀의 배꼽을 뜨뜻하게 데웠다.

체온보다 더운 입김이었다.

“에디스.”

호수에 던진 돌처럼 파문을 이루며 퍼져 나간 숨결의 온기가 에디스를 전율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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