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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8)화 (18/129)

18화

에디스는 뻘쭘한 분위기에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가 안아 든 자세대로 벤치에 앉자, 그녀는 클라이드의 무릎 위에 살포시 내려지게 됐다.

말 허벅지 같은 남자 다리는 커다란 근육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제 됐어요. 저는 다른 자리에 앉을게요.”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굳게 둘러싼 팔뚝이 풀리지 않았다. 꼼짝없이 클라이드를 깔고 앉아 있게 생겼다.

아드리안은 눈에서 레이저 빔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황태자를 쏘아보는 눈빛은 거의 하극상이었다.

그녀 나름으로는 주인공들을 엮어 주려고 애써 작전을 짰건만, 분위기가 썰렁하다 못해 얼음 화살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호감이 피어날 기미가 엿보이지 않았다.

원작을 비틀어 보려던 시도는 좋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엉뚱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까 원작의 대목이 나타날 때 아드리안의 이름이 아닌 ‘==’로 표현되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레이먼드 경, 깃발을 세워서 시종을 부르게. 에디스가 갈아신을 구두를 가져오라 해야겠어.”

아드리안은 명에 따라 시종을 호출할 깃발을 세웠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에디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췄다. 스커트 끝으로 삐져나온 발에 아드리안의 손이 닿았다.

“에디스, 발은 다치지 않았어?”

발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친절했다. 두 남자 사이에 팽팽하게 흐르는 긴장감과는 대조적이었다.

“괜찮아. 그냥 놔둬도…….”

사양할 여지도 주지 않고, 아드리안은 절룩거리던 발의 구두를 벗겼다.

신발을 신지 않은 발이 그의 손안에 올려졌다.

괜찮다고 거듭 강조해도 소용없었다. 클라이드에게 안겨서 옮겨진 것이나 아드리안에게 발을 잡힌 것이나 그녀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만두게 하려면 얼굴을 굳히며 정색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선물을 포장하듯이 에디스를 두 손으로 감쌌다. 발 날에 섬세한 감촉의 손바닥이 오롯이 뒤덮였다. 걸어 다니던 그녀의 발보다 주먹 쥐었던 그의 손은 한결 따뜻했다.

“발이…….”

느릿하게 마사지하는 손가락은 발바닥 중앙에서 피아노를 치는 듯했다. 엄지 지문으로는 발등을 진득하게 문질렀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발이 왜?”

“귀여워서.”

안쪽으로 곱아 들어간 발가락을 하나씩 펴 주는 행동에 에디스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쑥스럽고 무척 난처했다.

“그, 그만 만져.”

멀쩡하기만 한 그녀의 발목을 부득부득 보자던 아드리안은, 정작 구두를 벗기고 나서는 조몰락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 손은 발 받침을 하고 다른 한 손은 발목으로 올라왔다. 복숭아뼈 안쪽의 팬 자리를 손끝으로 살살 만지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어여쁜 눈매를 유선형으로 휘자, 세계관 최강의 미모에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미소가 만들어졌다.

“……응.”

목소리마저 다디달았다.

에디스는 발을 뺄 생각도 잊고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움에 넋을 놓았다. 그녀의 남자 보는 기준은 무조건 첫째도 외모, 둘째도 외모였다.

하지만 화사하게 피어나던 아드리안의 뺨 실루엣은 클라이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돌변했다. 갑자기 서늘한 온도로 경직해 버렸다.

에디스의 옆에서 들리는 클라이드의 말투도 마찬가지로 냉랭했다.

“그런데 레이먼드 경은 무슨 일로 에디스를 만나러 온 건가?”

아래로 내리뜬 보랏빛 속눈썹 안으로 불온한 기운이 감춰져 있었다.

아드리안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녀와의 오붓한 만남을 기대하고 왔더니 느닷없이 황태자를 불청객으로 맞이한 꼴이었다.

말이 곱게 나올 리 없어서 최소한의 예의만 지켜 대답했다.

“우연히 급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케츠모리스 가의 가주가 바뀌었다더군요.”

에디스가 놀라서 물었다.

“어제 있었던 일인데 벌써 알았어?”

“볼일이 있어서 정무부에 들렀다가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 여기저기에서 소곤거리고 있더라고. 혹시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돼서 말이야.”

아드리안은 그녀 앞에 무릎 꿇은 채 살갑게 굴었다.

그 옆에 황금으로 이글대는 클라이드의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했다.

큰일 났다. 이래서야 어떻게 둘 사이에 로맨스를 싹틔운담. 에디스는 부랴부랴 수습에 나섰다.

“내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자. 우선은 전하께서 함께 계시잖아.”

장사꾼처럼 억지로 미소를 만들며 클라이드에게도 말을 던졌다.

“사실은 아드리안이 궁에 자주 올 기회가 없어서, 시간 날 때 날 만나러 오라고 해 뒀어요. 덕분에 이렇게 전하를 뵙게 됐으니 잘된 일이지요.”

부디 잘된 일이기를 바라. 마음속으로 간절히 염원했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발목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신발을 다시 신겨 줬다. 정성 들여 발을 어루만지고 두 다리를 가지런히 놓아 주는 세심함이 에디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원래 상냥한 성품인 데다가 그녀에게 호감이 더해져서인지 작은 손짓 하나까지 남달랐다.

그동안 클라이드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옷매무시가 정리되는 동안 참아 넘기기 힘들어하는 느낌이 역력히 들었다.

엉덩이 밑이 이상스럽게 뜨끈거렸다. 화가 나서일까.

아드리안이 일어서자마자, 클라이드는 목젖까지 차올라 있던 불만을 터뜨렸다.

“유감스럽지만 레이먼드 경. 오늘은 에디스가 중요하게 맡아 하던 일이 있었네.”

고작해야 빚쟁이들한테 편지 쓰는 중이었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도저히 나설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니 다음 기회를 빌었으면 좋겠네. 그때는 경이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지.”

황태자의 결정이다. 누구든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일이 있었군요. 아쉽지만 전하의 말씀을 따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드리안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클라이드를 외면하려는 듯이 고개를 숙인 채였다. 먼저 물러가라는 명을 듣고 뒤돌아서 가는데, 그녀는 차마 미안해서 부를 수도 없었다.

러브 라인은 고사하고 중간만큼도 못 가는 만남이 되어 버렸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한담.

에디스는 감조차 잡지 못하고 아드리안의 그림자가 사라진 미로 정원을 멍하니 바라봤다.

* * *

두꺼운 미로 벽을 만든 에메랄드 나무에서 신선한 숲의 향이 솔솔 풍겼다. 피톤치드로 가득한 정원 한가운데는 고즈넉하고 아늑했다.

시종이 잠시 들렀지만 구두만 바꿔 줬을 뿐 금세 둘을 남기고 되돌아갔다.

드문드문 클라이드가 말을 걸었다. 그저 사소한 잡담이었다. 정원의 다른 계절은 어떤 풍경이라는 둥, 꽃은 뭐가 핀다는 둥. 하지만 에디스는 성실하지 못하게 대꾸하며 다른 생각에 잠겼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채 그녀가 일어나지 않자 클라이드도 별다른 말 없이 기다렸다.

두 사람은 대화 대신에 이따금 흐르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우선, 원작을 바꿀 수 있는 건 확실해.’

처음에는 그것조차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부서에서 황태자 궁으로 이관될 때, 특히 그런 불안감이 들었다. 원작을 비틀어 자신이 시종직을 벗어나려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데 어찌어찌 바뀌기는 했다. 두 주인공의 첫 만남 시점을 2년 앞당겼으니.

‘그렇다고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냐.’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있나. 둘은 연인이 아닌 앙숙이 되게 생겼다.

예상과 달랐던 점은 에디스를 향한 지나친 관심이었다.

클라이드는 제게 어떤 감정인지 알기 힘들었다.

총애하는 시종을 빙자해서 저를 재미나게 갖고 노는 장난감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황태자비 감이 아니라고 돌려 말한 적도 있었다. 반면에 어떨 때는 굉장히 진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집착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아드리안은 아카데미 3년 내내 겉돌았다는 점이 의심스러웠다.

정말 제게 마음이 있었으면 아카데미에서도 남다른 행동을 보였어야지. 인제 와서 적극적으로 달라질 이유가 뭐란 말인가. 찔러나 보자는 심리인가.

어쨌든 에디스는 월드 클래스 스타의 여자친구도 별로이고, 대통령 영부인도 싫었다. 그런 단점을 극복할 만큼 애정이 싹튼다면 모를까. 엄청 좋아서 죽을 것 같은 상대는 둘 중에 없었다.

그녀는 딱히 누구에게도 반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또 괴이한 점.

BL 소설인데 왜 BL 같지 않지?

두 주인공의 성향이 원작과 많이 다른 듯하다. 어디서부터 그 차이가 생긴 건지 모르겠다.

아드리안은 그나마 알파인 남자친구들이 많다. 그런데 클라이드는 상태가 심각하다. 주변에 남자가 많다고는 해도 죄다 공적으로 만나는 사람이고, 누구에게도 이성으로서의 느낌을 갖지 않는다. 까놓고 보면 사귀는 것에 아예 관심이 없다.

“전하, 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태양에 비친 클라이드의 머리칼은 검정보다 청색에 가까웠다. 그가 이마에 흘러내린 앞머리를 천천히 쓸어넘겼다.

“뭐든지.”

“원래 동성 쪽으로 마음이 가는 거 아니었어요?”

아예 대놓고 묻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뭐?”

그는 무척 놀라는 기색이었다. 빙빙 돌려서 떠봤을 때와는 달랐다.

“알파 성향이시니까 오메가는 당연히 좋아할 테고, 거기에 성별은 남성 취향이실 거라고 짐작했는데요.”

그녀의 물음을 되새기던 얼굴이 차츰 일그러졌다. 절반쯤 드러난 이마에 못마땅한 기색을 담아 힘이 가득 들어갔다.

“내 취향을 왜 네 맘대로 결정해?”

“네? 그야…….”

말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누가 그래.”

다그치는 클라이드의 태도에도 그녀는 입술을 말아 물고 대꾸하지 못했다. 원작에서 다 봤다고 털어놓으면 너무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이겠지.

그는 열이 좀 오르는 듯 제 이마에 손등을 올렸다. 오늘 여러 번 심기 언짢은 황태자님이시다.

“그리고 알파의 기질은 약으로도 잘 다스릴 수 있어. 오메가 반려가 있으면 몸은 편하겠지만 필수는 아니야.”

거의 투덜거리듯이 말을 내뱉었다.

클라이드는 몸을 그녀에게 돌렸다. 고개를 낮춰 눈높이를 맞출 때, 그의 성대에서 짐승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번뜩이는 금안도 맹수의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목청을 잔뜩 조인 음색은 이상하게도 어디 아픈 사람처럼 까칠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 내 황태자비로 베타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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