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높다랗게 걸려 있던 클라이드의 고개가 차츰 가까워졌다.
그 순간.
“에디스?”
새벽처럼 청아한 음색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클라이드보다 톤이 높으면서 귀에 쏙쏙 들어와 박히는, 매끄럽고 맑은 목소리.
에디스는 반사적으로 손을 밀쳐 클라이드와 거리를 벌리며 저를 부르는 이를 돌아봤다. 맑은 물처럼 투명한 피부로 이루어진 얼굴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티…….”
이런 식으로 마주칠 줄이야.
어쩐지 너무 걸음이 느리더라니. 두 사람이 먼저 출발할 때 시종이 아드리안을 데리러 갔지만 미적거리는 틈에 따라잡힌 것이다.
제일 좋지 않은 상황에서 원작의 공과 수를 만나게 하고 말았다.
아드리안의 아래 눈두덩이가 희미하게 일그러진 듯한 건 느낌 탓일까. 도톰하게 차올라 그의 미모를 돋보이게 하던 살점이 가늘게 좁혀 들었다.
망연한 시선은 에디스와 클라이드를 번갈아 오갔다. 아직도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손길을 쏘아보다가, 고급스러운 소매 장식과 복장으로 클라이드의 신분을 깨달았다.
“하늘 얼음 절벽의 아드리안 레이먼드, 리안 백작 3세,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뜻밖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쪽 무릎과 팔을 접어 정중하게 절을 올리며, 느슨하게 묶어 뒤로 늘인 보라색 머리를 예법에 맞는 각도로 숙였다.
클라이드는 위엄을 갖춘 태도로 아드리안의 인사를 받았다.
“에디스 덕분에 레이먼드 경을 궁에서 만나게 되는군.”
“황공합니다.”
“두 사람에게 친분이 있는 줄 이제야 알았어. 자주 걸음 하는 것을 허락하겠네.”
고개를 든 아드리안의 안색이 도통 밝지 못했다. 에디스와 황태자의 사이를 특별하게 보는 걸지도 몰랐다.
분위기가 영 싸늘하다.
“말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종종 에디스를 만나러 오겠습니다.”
클라이드가 형식상 한 말을 아드리안은 콕 집어서 받았다. 그녀와의 만남을 자주 갖겠노라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에디스가 한 걸음 물러서며 클라이드의 손길을 떼어 내자, 이번에는 클라이드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번뜩이는 황금 눈동자가 꼭 늑대 같았다.
“왜 그래, 에디스? 내 손 잡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가 다시 에스코트하러 다가왔다.
뭔가 이상했다. 둘의 만남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인사만 시켜 주면 어떻게든 잘 풀리리라고 기대했는데,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원작의 주인공이니까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들이는 맛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웬걸. 아무리 눈치를 봐도 두 남자 사이에 특별한 느낌이 피어날 기미가 없었다.
아드리안은 법도를 지키면서도 연거푸 날카롭게 째려봤고, 클라이드는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는 연인처럼 굴었다.
분위기를 바꿔야 해. 둘을 엮어 주고 자신은 슬쩍 빠지려던 게 애초 작전이었잖아.
에디스는 클라이드가 내민 손을 못 본 척하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전하, 남쪽 포인트 벤치가 어디예요? 여기서 먼가요?”
“최단 코스로 가면 금방이야. 미로가 헤매고 빙 돌아가는 재미라서 길이 복잡하게 꼬였을 뿐이지, 거리로 따지면 멀지 않아.”
“와, 잘됐네요.”
당장 가자는 의미로 그의 뒤에 줄을 섰다.
실은 아까부터 이러고 싶었다. 길 폭이 좁으면 일렬로 서서 가면 되지 않나. 구태여 바짝 붙어서 어깨동무할 이유가 뭐람.
클라이드는 내밀었던 손을 주먹 쥐었다. 매우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앞장섰다.
* * *
에디스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걷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수습하기 힘든 분위기에 난감해하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남몰래 품었던 기대를 무참히 꺾는 상황이 계속됐다. 슬쩍 뒤를 돌아봤을 때 아드리안은 따로 얘기 좀 하자는 눈짓을 했고, 클라이드는 앞에서 자꾸 손을 내밀었다.
문제는 둘이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다못해 싸우다가 정드는 스토리로 흘러간다 해도 그렇다. 싫어하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텐데, 싫기만 하고 관심은 엿보이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다. 원작과 너무 다른 까닭이 뭘까.
겨우겨우 포인트에 도착할 즈음에는 열심히 잔머리 굴리랴, 속도에 맞춰 걸음을 옮기랴, 여러모로 바빠 등에 땀이 배었다.
저 멀리에 잔디가 깔린 원형의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 정원에 핀 꽃과 같은 꽃도 주변에 잔뜩 피어 있었다. 아담한 대리석 조각상으로 꾸며진 벤치 세트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섬세한 천사 조각에 한눈판 바람에 순간적으로 발밑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발이 돌부리에 걸리며 앞으로 자빠졌다.
“앗!”
휘청, 몸이 꺾였다.
청명한 하늘이 빠르게 회전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귀 옆으로 갑작스러운 바람이 지나갔다. 시야가 하얗게 번지며, 눈앞에 헛것이 어른거렸다.
단순히 넘어지는 것과 달랐다.
심상치 않다고 깨달은 순간, 대리석 석상과 화면이 겹쳐지는 것처럼 원작의 대목이 떴다.
[클라이드는 ==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구름처럼 몰려들어 연회장을 가득 채운 타인의 웅성거림이 어느새 아득하게 사라졌다. ==의 흔들리는 시야에, 이명조차 들리지 않는 귀청에, 오직 클라이드만이 가득했다.]
대체 이게 뭐야. 왜 클라이드의 상대역 이름이 지워진 거지?
원래 아드리안이었잖아. 내가 본 얼마 안 되는 내용 중에 분명히 이 대목이 있었는데.
[홀 서빙을 위해 준비되어 있던 서빙 카트가 ==의 뒤에 닿았다. 더는 물러설 공간이 없었다. ==는 바짝 가까워진 클라이드와 뒤쪽의 음식들 사이에서 발이 얼어붙었다.]
표시되지 않는 사람은 대체 누구지? 당연히 아드리안이어야 하는데 ==로 지워졌다면, 다른 누군가가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는 걸까?
게다가 이런 환상이 눈앞에 나타난 시기도 절묘했다. 지금은 에디스의 작전에 따라 최초로 원작이 바뀐 직후였다.
어쩌면 두 주인공의 첫 만남 시기가 바뀌어서 원작도 달라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배경이나 상황이 바뀌어야지 이름이 지워지면 어떡하란 말인가.
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동안 글은 계속 올라왔다.
[와장창! ==는 손을 헛디뎌 접시를 뒤집어엎었다. 옷소매에 얼룩이 선명하게 번졌다. 딸기가 손바닥에 눌리는 바람에 하얀 레이스에 점점이 자국이 늘어났다.]
[클라이드가 달곰한 즙이 묻은==의 손을 움켜쥐었다. 딸기가 잔뜩 뭉그러졌다.]
그러니까 접시 엎은 사람이 누구냐고.
[과일의 단내와 클라이드의 짐승과 같은 알파 향기. 넋이 빠질 듯 밀착한 거리.]
[==는 그와 손가락을 사이사이 낀 채 가늘게 떨었다.]
이 와중에 소설은 차츰 열기가 피어오르는 대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다음 장면을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상황이 이어졌다.
에디스는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홀로그램 같은 글에 집중했다. ==의 정체를 캐낼 만한 힌트도 찾아야 하고, 딸기를 뭉개면서 그들이 뭘 어쨌는지도 다시 읽고 싶었다.
하지만 에디스는 넘어지던 중이었다.
아주 짧은 찰나에 원작이 지나간 것이다.
머리를 땅에 박기 직전, 뒤따라오던 아드리안이 재빨리 그녀의 팔꿈치를 붙들었다.
“조심, 에디스.”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팔꿈치를 당기는 것만으로는 중심을 잡기 어려웠던지 그녀의 허리도 재빠르게 안았다.
배꼽 언저리에 가늘고 긴 손이 넓게 펼쳐졌다. 감싸서 당기는 힘은 생각 외로 세고 안정감이 있었다.
뜬금없지만 아드리안이 힘 세다고 강조했던 순간이 기억났다. 마치 체력을 쓰는 일에 자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여리여리한 오메가로만 보지는 말아 달라는 의미도 숨어 있었다.
그녀는 발끝에 힘을 줘 똑바르게 서며 슬쩍 아드리안을 돌아봤다.
“…… 고마워.”
“고맙긴. 하마터면 너 다칠 뻔했어.”
허리에 감겼던 팔은 곧 풀어졌지만 그녀의 팔꿈치는 놔주지 않았다.
앞장서 가던 클라이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반사적으로 내뻗은 손을 아직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손 놓지.”
짓씹는 말투로 클라이드가 끼어들었다.
“길 한가운데에 돌이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제가 에디스를 에스코트하겠습니다.”
“그럼 내가 부축하도록 하겠네.”
“감히 전하의 도움을 어찌 받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솔직히 이런 부분은 에디스가 원작을 읽을 때 좀 닭살 돋게 여기곤 했다. 내가 왜 부축을 받아? 건강하고 사지 멀쩡한데.
고작해야 발을 잠깐 헛디딘 것 가지고, 두 남자는 서로 에디스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저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그리고 바로 저기가 남쪽 포인트 아닌가요?”
그녀는 공연히 신경전을 벌이려고 하는 두 남자에게서 벗어나며 혼자 벤치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구두 뒤축이 덜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돌부리에 걸릴 때 구두가 망가졌나 보다.
이번에도 아드리안이 빨랐다. 급한 걸음으로 쫓아오더니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눈여겨봤다.
“왜 그래. 다쳤어?”
“다친 건 아니고, 굽이 망가졌나 봐.”
“저런. 내가 한번 봐 줄까?”
그때 돌연히 몸이 번쩍 들렸다. 뒤에서 클라이드가 그녀를 안아서 든 것이다.
“앗!”
거의 봉변당한 모양새가 된 채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클라이드는 그녀의 무릎 아래와 등허리를 받치며, 가뿐하게 자신의 가슴 앞으로 붙였다. 성인 여성의 체중 따위는 그에게 별 의미 없는 건지 동작의 흐름이 너무나 수월했다.
“걷지 못하니 어쩔 수 없군. 안아서 옮길 수밖에.”
“내, 내려 줘요.”
“바로 요 앞이야. 잠시만 이대로 있어.”
마음 같아서는 버둥거려서 그의 품을 벗어나고 싶지만 공연히 중량감을 늘리게 될까 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여기서 클라이드가 무거워 저를 떨어뜨리는 최악의 사태만은 면해야 했다.
경직된 발끝을 가지런히 모았다. 무게중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저기요, 전하. 구두 굽 나갔다고 못 걷지는 않거든요.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는 모양새가 빠지겠지만.
속내에 담아 둔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수컷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강렬한 품에 안겨 있으니 입이 얼어붙은 듯했다.
“전하, 제가 에디스를 살펴보겠습니다.”
클라이드는 바짝 뒤를 쫓는 아드리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녀와 눈 맞춤을 하기에 바빴다.
미로의 마지막 통로를 지나는 게 왜 이리 더디게 느껴지는지. 초조한 기분에 에디스는 남자 코트의 어깨선을 꼭 쥐어 잡았다.
그런데 왠지 안긴 포즈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예전에도 안긴 적이 있는 듯, 그의 두 팔과 상체가 몸을 착 감쌌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자신이 클라이드에게 공주 안기를 받을 일은 없으니.
“전하 혹시, 제가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죠? 없을 거야.”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없지 물론. 내가 널 안아 들 일이 뭐가 있었겠어.”
모르는 척 잡아떼며, 클라이드는 속으로 즐거워 어쩔 줄을 몰랐다.
무리해서 야근한 밤에 에디스는 그에게 안겨서 침대로 옮겨졌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밤을 기억하는 사람은 클라이드뿐이었다.
저절로 웃음이 피어나 그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벌어졌다. 뇌쇄적인 매력이 줄줄 흘러넘치는 미소였다.
지난밤을 회상하면서, 클라이드가 어떤 새로운 꿍꿍이를 품는지는 뜻 모를 표정 속으로 감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