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6)화 (16/129)

16화

적힌 내용이 안 보이도록 그녀가 몸으로 가리자, 클라이드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뭔데 그래.”

“지인이 잠시 얼굴이나 보자네요. 근처에 와 있다고.”

“지인? 지인 누구.”

그가 호기심을 역력히 드러내며 추궁해 물었다.

에디스는 조금 신경 쓰였다. 제가 나랑 무슨 관계라고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내는 걸까? 이성으로서는 그다지 관심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더니.

지난번에 에디스가 저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선뜻 긍정하면서도 황태자비로 청하지는 않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에디스는 뭔가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사적인 감정과 친한 시종으로서 감정 사이의 어딘가에서 그가 느껴졌다.

하지만 어차피 딱히 클라이드와 길게 엮일 계획은 없으니 지금처럼 선을 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아드리안이 보낸 메모지를 손에 쥔 채 보여 주지 않으며, 어떤 식으로 클라이드에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심했다.

그를 꼬드겨서 아드리안과 만나게 할 속셈은 단단히 숨겼다.

“아카데미 때 친구요. 잠시 나갔다가 와도 될까요, 전하?”

의뭉스럽게 말을 던지며 클라이드의 반응을 살폈다.

“이름은?”

담담한 질문이 되돌아왔다.

깔끔하게 방문자의 이름만 묻다니, 제법 희망적인 분위기였다.

그들 둘은 원작 커플이다. 2년 후에는 어차피 깊은 관계로 발전할 사이다.

비록 에디스가 세월을 당겨 만남을 주선한다 해도, 소설 주인공들이다 보니 이끌림이 생길 가능성이 컸다. 우연한 만남을 가지며 서로 호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 쪽지가 전해진 순간 마침 클라이드가 옆에 있는 것도 운이 좋았다.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둘이 잘 풀릴 징조가 보였다.

에디스가 대답을 미루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자 클라이드가 재촉했다.

“왜 대답이 없어? 설마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친구는 아니겠지?”

메모지를 낚아채고 싶어 그의 손가락이 안달 난 걸 보니, 잠시 후 제가 벌일 사건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에디스는 부루퉁하게 아랫입술을 내밀면서 별 내용도 쓰이지 않은 쪽지를 접어 품에 넣었다.

“하늘 얼음 절벽의 아드리안 레이먼드예요. 저는 아티라고 부르는 친구죠.”

클라이드의 짙은 눈썹꼬리가 마뜩잖게 올라갔다.

“아티?”

“그럼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에디스는 눈치를 살피며 뭉그적뭉그적 일어났다.

그의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다. 에디스를 보내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이성으로서 보는 게 아니라 그저 측근 시종에 관한 관심이기를 바라며, 얘기를 건넬 적절한 시기를 노렸다.

클라이드의 시선이 그녀를 끈질기게 따라왔다. 팔짱 끼고 지켜보는 모습도 심상치 않았다.

지금이 미끼를 던질 절호의 기회인 듯했다.

그녀는 클라이드가 덥석 물 만한 탐스러운 지렁이를 흔들었다.

“전하께서도 함께 가실래요? 바깥바람도 쐴 겸, 그리고 아드리안을 인사 올리게 할 겸.”

“그럴까?”

잽싸게 대답이 돌아왔다. 권하기가 무섭게 당장 결정이 내려졌다.

“레이먼드 경은 나와 안면만 있는 정도니, 이 기회에 얘기를 나눠 보면 되겠군.”

“그런가요? 전하께 도움이 된다니 기뻐요.”

회심의 미소를 짓는 에디스에게 그는 이런저런 핑계까지 만들어 덧붙였다.

“그리고 너무 일만 하면 건강을 해치게 마련이지. 주치의도 자주 산책을 하라고 권하더군.”

매일 아침 취미 삼아 체력 단련을 하고 꼬박꼬박 사격장까지 나가 총도 쏘는 사람이 운동 부족을 운운하다니.

“맞아요. 건강이 최고죠.”

입으로는 흔쾌히 맞장구쳤다.

그는 예정에 없던 산책을 나가며 이후의 일을 모두 마감하도록 아랫사람에게 일렀다.

며칠 클라이드의 생활을 지켜보며 느낀 건데, 그는 이미 차고 넘치도록 군주의 역할을 잘해 내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아침부터 줄곧 국사를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대집무실에 각종 사안을 보고하기 위한 관리가 여러 차례 들락거렸다. 어차피 대기 줄의 끝이 보이지도 않는 자들을 내일 오라며 돌려보내도 절대 게으른 게 아니다.

훗날 황제가 되어도 이대로만 잘 살아 주면 더 바랄 게 없으련만.

에디스는 궁을 나가 단정하게 깎인 벽돌길을 클라이드와 나란히 걸으며 소설 같은 미래를 상상해 봤다.

따지고 보면 그가 폭군이 될 기질이 전혀 없지는 않다. 상비군을 증강하는 데에 적극적이고 총기류에도 상당히 관심이 많다.

대신과 귀족을 상대할 때는 무지무지하게 까칠하다. 전해 듣기로는 그의 뜻에 반하는 자에게 가차 없는 응징을 내린다고도 했다.

‘클라이드가 나이 들면 성질도 내고 막말도 하려나.’

악인이 되어 패악을 떨 그의 모습은 잘 상상이 안 됐다. 차라리 제멋대로 구는 폭군이 어울렸다.

여론을 무시하고 군비를 증강해 이웃 나라를 치는 폭군.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을 제정해 제국민의 원성을 사는 폭군.

‘흐음, 클라이드와 그럴싸하게 어울리는걸. 내가 원작자라면 호전적인 폭군으로 스토리를 풀어 갈 거야.’

그러다가 폭동이 일어나는 거지. 기요틴에 목이 잘리는 비운의 군주가 되는 거야.

에디스는 지금의 황태자 성정에 기반해 예상한 미래가 꽤 설득력 있다고 여겼다.

줄곧 계획해 온 대로, 클라이드와 덩달아 골로 가지 않도록 시기적절하게 퇴직해야겠다. 주인공은 어찌어찌 살아남아도 조연 따위는 스토리 중간에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기에 십상이니까.

클라이드에게는 아드리안을 붙여 줘서 극적인 반전을 이룰 수 있도록 해 놓고 말이다.

여기까지 공상이 펼쳐지자 내심 흐뭇해졌다.

“무슨 생각 하길래 막 웃어?”

고개 돌려 그녀를 향하는 클라이드의 까만 눈썹이 매 날개처럼 날렵했다.

당신의 비극적인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꿔 줄 생각으로 행복 회로가 돌아가고 있다고 털어놓지는 않았다. 그러면 바보 될 거다.

“아티와 전하를 함께 만나게 된 것이 신기해서요.”

아직 원작을 바꿔 보려는 시도를 이룬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만나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이다.

주인공들의 첫 만남 시점이 달라지면서 반드시 원작과 똑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증거를 잡은 다음에는 또 다른 계획도 세울 수 있다.

연재 분량까지는 클라이드의 심복으로서 에디스가 드문드문 등장하는데, 작품의 흐름으로 봤을 때 죽을 때까지 부려 먹힐 듯하다. 제가 비명횡사하든 엔딩까지 살아남든 무조건 노동자의 일생이라니. 그건 너무 슬프잖아.

둘을 연결해 주며 열심히 아부해서, 황실 관리 지원금이라던 걸 왕창 뜯어내야지. 그리고 시종을 관두는 거야.

유유자적하게 될 자신의 미래를 떠올리자 더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클라이드의 발길은 봄꽃이 핀 화단을 지나 미로 정원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레이먼드 경하고는 지난 신년 하례 때 인사를 받은 이후 처음 만나는군.”

“아티가 궁에 걸음 할 여지가 별로 없기는 하지요.”

아드리안은 이민족 출신의 가문이라 중앙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집안 대대로 정치에는 발을 담그지 않고, 상회를 운영하며 재산을 불리는 데 재미를 들여 왔다.

“많이 친한 사이야? 애칭이 친근하게 들리네.”

당신 때문에 접근했다고는 절대 말 못 한다.

“그럭저럭이요. 아카데미에서는 흔히들 그렇게 불렀어요.”

그는 아티라고 부르는 것을 걸고넘어지며, 지나치게 가까운 사이로 느껴진다는 둥, 풀 네임이 낫지 않냐는 둥 불평했다.

에메랄드 나무가 빽빽하게 세워진 미로 정원은 궁전의 대표적인 자랑이자 랜드마크였다. 길쭉한 촛불 모양으로 다듬어진 나무들이 5야드 가까이 되는 높이로 자라 하늘을 찔렀다. 나무 사이의 간격이 아주 좁아서 벽을 뚫고 지나가려면 옷이 망가질 각오는 해야 할 듯했다.

나무를 개선문처럼 다듬은 미로 입구에서 에디스는 잠시 멈춰 섰다.

“아티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미로에 들어가면 못 만날지도 모르잖아요.”

“남쪽 포인트로 데려오라고 일러두도록 하지.”

그는 시종에게 아드리안을 안내해 오도록 지시한 후 먼저 입구를 통과했다.

미로 정원은 굉장히 넓어서 길을 잃기에 십상이었다. 궁전에 행사가 있어서 이곳을 개방할 때면 탈출하지 못해 낭패한 사람이 꼭 생기곤 했다. 그런 경우에 대비해 미로 여기저기에 표시용 깃발이 있었다.

도중에 쉼터도 많았다. 클라이드가 에디스를 데려가는 곳은 남쪽 포인트로 불리는 벤치였다.

“와, 굉장하네요.”

처음 와 보는 에디스가 감탄하자 클라이드는 여상한 얼굴로 돌아봤다.

“글쎄, 난 잘 모르겠네. 여기가 어릴 적부터 놀이터였으니까.”

“그럼 전하는 절대 길을 잃지 않겠군요.”

실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대답이 대신 되었다.

입구 근처는 넓더니 모퉁이를 꺾어지자마자 급격히 길 폭이 좁아졌다.

에디스의 소맷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앗.”

“가만. 찢어지겠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소매에 걸린 잔가지 끝을 빼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떨어져서 걸으면 안 되겠는걸.”

친절한 손길은 에디스에게서 떠나지 않고 울타리처럼 보호했다.

온온한 느낌의 손이 그녀의 어깨 위에 떠 있다가, 닿아도 괜찮냐고 허락을 구하듯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만큼 가까이에 있어야 해.”

너른 팔이 그녀의 어깨에 둘렸다.

폭 싸인 느낌이다. 마치 든든한 망토를 두른 것 같아.

좀 더 가까이로 오라는 음성이 귀를 간질였다. 고막과 함께 마음까지도 간질간질해졌다.

남자 팔의 묵직한 무게감은 안정감을 주는 듯했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묻어 버릴 듯한 자신의 머리칼은 그의 숨결이 지나갈 때마다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렇게 가까울 필요까지는…….”

같은 걸음을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에디스가 오른발을 내디디자 그도 비슷한 보폭으로 오른쪽 구두 코를 내밀었다.

두 번째 모퉁이를 돌자마자 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가 갑자기 나타났다.

확 당겨져, 클라이드에게 끌려갔다.

이젠 완전히 끌어안긴 포즈가 되고 말았다. 그의 겨드랑이가 어쩔 줄 모르는 에디스의 어깨와 딱 달라붙었다. 튀어나오고 들어간 굴곡은 아귀가 잘 맞았다.

“이것 봐. 더 가까워야 해.”

등짝까지 뜨끈뜨끈하다. 클라이드의 커다란 손과 근육 덩어리 팔뚝이 통째로 그녀를 옭아매는 듯했다.

태연하려 했지만 엉겁결에 그를 올려다보고 말았다. 치뜨느라고 동그래진 눈망울이 클라이드의 길쭉한 눈매와 마주하며, 허공에서 파바박 스파크가 튀었다.

어디선가 영화 OST가 흘러나올 것만 같다.

결정적인 순간에 카메라가 줌인하고, 남주와 여주가 격정적으로 입술을 비비적거리곤 하지.

이런 분위기 옳지 않아.

번개는 아드리안과 튀어야지, 왜 나랑?

아니야. 착각일지도 모른다. 눈만 마주친 거잖아.

일단 그녀는 아무 감정 변화도 없었던 양 멀쩡하게 대처해 봤다.

“길 폭이 좁네요.”

어깨를 붙든 손가락에 힘이 꾸욱 들어왔다. 다섯 가닥이 올올이 느껴질 강도다.

뜨겁다. 그의 체온도, 자신의 살갗도.

“마음에 들게 좁지.”

느리게 걷던 걸음이 기어코 멈췄다. 정원 정문으로부터 멀지 않은 거리. 미로가 시작된 지점으로부터는 고작 모퉁이 둘을 돌았을 뿐이다.

클라이드는 팔꿈치를 접었다. 앞을 향하던 그녀의 각도가 그에게로 빙글 돌게 되었다.

시선은 견고한 사슬에 매인 듯 함부로 뗄 수 없었다. 입도 얼어붙었다. 난감한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무슨 말이든 꺼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못했다.

훌쩍 큰 남자의 그림자가 그녀의 이마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