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귀 옆으로 안경다리가 지나가고 콧잔등에 동그란 테가 얹혔다. 차가운 금속과 남자의 뜨끈한 체온이 극명하게 대조됐다.
“다 됐어.”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녀의 세상이 클라이드로 뒤덮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지러워. 왜지?
휘청, 상체가 뒤로 넘어갔다.
“엇!”
재빨리 뻗어 나온 그의 팔이 비틀거리는 몸뚱이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너른 남자 품에 안긴 채 에디스는 빈혈기인지 뭔지 모를 어지러움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역시…….”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뭐가 역시예요?”
“아무것도 아냐. 어디 아파?”
아주 잠깐 머리가 핑 돌았던 정도라, 머지않아 나아질 수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초점을 맞추려 눈을 깜빡이며 클라이드를 올려다봤다. 그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우선은 부둥켜안고 있는 자세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제 허리에 둘린 든든한 팔뚝을 내리며 어색하게 둘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주변을 둘러봤더니, 어떤 시종이 입을 떡 벌리며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며칠 전 사격장에 없던 시종이다. 그자는 에디스와 시선을 마주치기 직전에 재빨리 고개를 돌려 못 본 척했다. 사격장에서 비비적거렸던 낯뜨거운 과거를 아는 시종들은 그나마 표정 관리를 낫게 하고 있었다.
에디스는 민망함에 못 이겨 공연히 어, 음, 하는 감탄사를 남발했다.
“이 안경이…… 도수가 없는 건 줄 알았는데 있나 봐요. 쓰니까 앞이 잘 안 보이더라고요.”
“그랬나? 다시 확인시키도록 하지.”
클라이드는 잠시 비틀거렸던 그녀의 상태를 변명하는 대로 받아들여 줬다.
“그런데 뭐가 ‘역시’인지 물어봐도 돼요?”
“역시 안경이 잘 어울린다는 뜻이었어.”
아무래도 핑계인 것 같지만,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에디스는 그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만 화끈거리고 나머지는 썰렁한 분위기의 집무실.
클라이드에게 정신이 팔린 상태라 저만치 멀리에서 속닥거리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눈치 없는 시종 한 명이 옆 사람에게 전하의 알파 페로몬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쑥덕거렸다. 그러자 클라이드가 그쪽을 사납게 노려봤다. 하다 만 얘기는 당장에 쏙 들어가 버렸다.
클라이드는 그녀의 컨디션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편한 자리까지 끌고 가 구태여 제 손으로 앉혔다. 귀빈이 오셨을 때나 쓰는 소파였다.
“여기서 쉬고 있어.”
화려한 금장 장식과 안락한 쿠션이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시종 중에 앉은 사람은 자기뿐이었다.
“죄송하지만 별실로 올라가 개인 업무를 봐도 될까요? 여기에 있기는 좀…….”
“몇 가지 사안만 처리하면 일이 곧 끝나. 그리고 맘 편히 있어도 돼. 내가 억지로 안경을 권한 거잖아.”
눈이 팽팽 돌도록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쓴다고 해도 잠깐만에 빈혈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걸 에디스는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내심 자신의 건강에 이상 징후가 생기지 않았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지난번 사격장에서도 어지러웠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네에…….”
“손 놓고 쉬기만 하는 게 곤란하면, 에디스의 집안일을 간단히 처리해도 돼.”
“그래도 될까요?”
그가 수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에디스는 사생활을 돌볼 시간이 매우 부족하던 차였다. 어제는 저택 사용인을 모아 놓고 자신이 주인이 되었음을 밝히기만도 바빴다. 그 외에도 할 일이 태산이었다.
우선 아버지가 도박 빚을 함부로 지지 못하도록 주변에 널리 알려 둘 필요가 있었다. 이제 페들턴 공작은 에디스이며, 선대 공작에게 섣불리 대출했다가는 원금마저 떼일 수 있다는 경고성 서신을 사방에 날려야 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지위를 넘긴 사실을 슬쩍 감추며 돈을 빌리려 할지도 몰랐다. 그래 봤자 에디스가 떠안은 피해가 커지지는 않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혈연관계인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한시바삐 통보하는 편이 나았다.
“그럼 개인적으로 서신 몇 통만 작성할게요.”
클라이드는 다음 업무를 재개하며 이따금 에디스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녀가 필기대를 받치고 집중해서 글을 써 내려가는 동안, 속을 헤아릴 수 없는 그의 시선이 한참이나 머물렀다.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음 사안의 담당자가 들어왔다. 보고를 하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 평소와 같았다.
클라이드가 또 다른 사안을 집어 들기 전에 잠시 시종장을 불렀다.
“중책을 맡은 신하가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내가 어떤 방식으로 도와주는 게 좋겠는가?”
“금전적인 도움 말씀입니까?”
“내탕금을 내어 주면 되나?”
시종장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차분하게 답변했다.
“전하께서 원하시면 물론 내탕금이야 언제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공식적인 절차로 신하를 지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예전에 비슷한 사례가 기억납니다. 10여 년쯤 봉직한 궁 관리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을 때 시중의 대부업자보다 훨씬 낮은 이자를 받고 황실에서 자금을 빌려준 적이 있습니다.”
클라이드는 바라던 대답을 들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개인 재산인 내탕금을 선뜻 건네면 에디스가 무조건 달가워하지만은 않으리라 짐작해서 다른 길을 찾은 것이다.
“좋군. 그 방법으로 케츠모리스 경을 지원하도록 하게.”
“케츠모리스 경 말씀입니까?”
화제의 당사자가 바로 집무 책상의 바로 건너편 소파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시종장은 에디스의 뒷모습을 흘끔 쳐다본 후 담담한 어투로 황태자의 명을 받들었다.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우선 지원 신청이 들어오면, 전하의 허락이 미리 떨어졌으니 곧바로 처리하겠습니다.”
황실 지원금이라니. 이건 땡큐지. 당장 받을 거다.
그녀는 옳다구나 싶으면서도 클라이드가 제게 너무 잘해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옛 추억이 있으려나. 아무리 추측해 봤자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손은 바삐 편지지 위를 움직이면서도 잡생각이 많아졌다.
서신을 보낼 곳이 수십 군데는 됐다. 작위를 물려받은 사실을 일가친척에게 두루 알려야 하고, 친분이 있는 집안에도 다 편지를 띄워야 했다. 채무 관계에 있는 자에게도 물론이었다.
여기에 더해 아버지가 돈을 융통할 가능성이 있는 질 나쁜 사채업자도 최대한 연락해 둬야 했다. 그들이 선대 공작에게 융통해 준다고 해도 자신은 절대 대신 상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는 편이 아버지의 도박 중독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수신자마다 다른 내용을 적으려니 팔이 빠지게 아팠다. 남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클라이드에게 보고를 올리는 상대가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황실 주치의였다.
백발이 성성한 의사가 황태자 앞에 길게 인사드리고 용건을 꺼냈다.
“전하, 러트 사이클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되었나? 날짜 한번 빨리 가는군.”
듣고 싶지 않아도 에디스와 가까운 곳에서 대화가 이루어져서 저절로 귀에 들어왔다.
러트 사이클 얘기를 들으니 클라이드는 알파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러트 사이클은 알파가 주기적으로 겪는 발정기이다. 동물의 세계로 표현하자면 번식의 욕구가 최대치로 오르는 상태로서, 이 시기에는 짝짓기를 하려는 본능이 매우 강해진다.
이때는 흔히들 기분이 들뜨고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게 된다. 성적으로 흥분해서 사고 치는 사례도 잦고, 심하면 눈에 뵈는 것 없이 오메가를 찾는다. 알파의 기질이 강할수록 성적 욕구도 심하게 솟는다.
클라이드는 강한 기질의 우성 알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아마 러트 사이클도 호되게 겪을 게 분명했다.
“이번 주기는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제 권유를 한 번이라도 따라 보시는 건 어떨지요.”
“되었네. 늘 하던 대로 약을 준비하게.”
주치의의 청을 단호하게 거절하며 얘기를 짤막하게 끝내려는 분위기였다. 의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거듭 권했다.
“아시다시피 전하께서는 기질이 너무 강하셔서, 러트 사이클에 드시는 약도 특수하게 처방해야 합니다. 센 페로몬을 누를 만큼 억제제도 독하게 써야 하니 몸에 심하게 무리가 갑니다.”
“사이클이 올 때마다 비슷한 얘기가 나오는군. 아예 외울 정도로 많이 들었어.”
“전하께서 강건하시니 당장은 티가 안 나지만, 나중에 연세가 드시면 억제제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걱정은 고맙지만 난 멀쩡하네.”
“시험 삼아서라도 오메가를 곁에 둬 보시는 건…….”
듣다 못한 클라이드가 언짢은 기색으로 의사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대, 참견이 지나치군.”
“……황송합니다, 전하.”
더는 입을 놀리지 못했지만 의사의 주름진 눈가에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클라이드는 야멸치게 손을 내저었다. 번거롭게 굴 필요도 없이 이만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황태자로서 그의 태도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누구를 대하든 엄격하면서 단호했고 결단을 내릴 때는 칼로 자르듯이 자비가 없었다. 제국의 중심이자 최고 결정권자라는 지위에 걸맞게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용납하지 않았다.
클라이드에게 지위 고하를 무시하는 상대인 에디스가 생긴 것은 이런 전례에 비춰 봤을 때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녀 한 사람만이 이례적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수발 시종에게 찝쩍대는 상황이 제법 여러 번 공개됐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표정 관리를 못 하는 시종이 있을 정도였다.
클라이드가 또 그녀를 흘끔거렸다.
“에디스, 아직 멀었어?”
고개도 들지 않고 뒷모습만으로 대꾸했다.
“한참 남았어요. 오늘 내로 못 끝내겠네요.”
“빈혈기는 나아졌어?”
“네, 말짱해요.”
“올라가서 쉬게 하고 싶지만, 지금쯤 방에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라서.”
무슨 인테리어인지는 몰라도 침실의 한쪽 벽면을 많이 손보는 것 같았다. 낮에는 공사하느라 어수선하고 저녁이 되면 잘 정리되어 말끔했다.
클라이드가 사용하는 침실이 여러 군데 있지만 별실이 달린 곳은 주 침실뿐이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곳에서 잠드는 모양이었다.
에디스는 컨디션을 걱정하는 소리를 듣는 김에 슬쩍 말을 던졌다.
“조퇴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응, 여기서 계속 편지 쓰고 있어.”
역시 씨알도 안 먹힌다. 그녀는 부지런히 펜을 놀리면서도 구시렁구시렁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이후로도 집무실에 많은 귀족과 관리가 오고 갔다. 근엄하고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 클라이드는 정사를 돌보고, 에디스는 빚쟁이들한테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 * *
한참 후 시종이 바깥에서 전언을 가져왔다.
클라이드가 아닌 에디스에게 온 전언이었다. 황태자의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그녀의 손에 작은 메모가 건네졌다.
아드리안이 궁 입구에 와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번 들러 달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만나러 온 것이다.
클라이드는 글을 확인하는 에디스보다 더 메모에 관심을 보였다.
“그거 뭐야?”
연신 흘끔거리다가 기어코 고개를 쭉 빼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