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에디스는 서재로 자리를 옮겨 심각하게 분위기를 잡았다.
“우리 집안에 관한 얘기예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거,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다 내 죄다. 옛날에 사업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린 바람에 결국 이 지경으로…….”
“그 얘기는 넘어가죠.”
말을 싹둑 잘랐다. 내버려 두면 당시의 사연을 몇 시간이고 풀어내곤 해서였다.
“그보다 아버지, 재산 문제를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앞으로 봉급을 받게 될 텐데, 이대로 가다간 돈 들어오는 족족 아버지가 도박장에서 쓰실지도 모르잖아요.”
워낙 심각한 문제라서 직설적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궁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 난관을 타개할 길을 궁리해 왔다.
“재산은…… 그래도 영지를 매각하지는 않았다. 이 저택의 소유권도 그대로 남겨 뒀어.”
“다행이네요. 하지만 영지의 징수권은 채권자에게 있다고 알고 있어요.”
현재 집에는 수입이 끊긴 상황이었다. 거액의 도박 빚을 진 탓에 긴 초록 뿔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수익을 전부 채권자들이 가져가고 있었다. 이자 명목으로 가져가는 돈이라서 원금을 갚지 않으면 영지로부터는 영영 한 푼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에디스는 영지의 소유권이 유지되는 이유가 아직 아버지가 팔아치우지 않아서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추세로 가다간 땅까지 잃고 파산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겠어요.”
“무슨……?”
자신이 진짜 에디스라면 혈육의 정에 이끌려 차마 못 했을 제안을 했다.
“공작의 작위와 가주 권한을 저에게 물려 주세요.”
공작의 혼미하던 인상이 잠깐이나마 보통 사람만큼 나아졌다. 불규칙한 생활 탓에 퉁퉁 부은 눈두덩이를 밀어 올리며,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갑작스럽게 그게 무슨 말이냐.”
통상적으로 가문을 이끄는 지위는 선대가 죽어야 물려받는다. 성문화되어 있지 않더라도 오랜 세월 관습으로 그리 이어져 왔다.
예외는 아주 드물다. 이를테면 가문이 휘청거릴 만큼 큰 문제가 생길 때라든가.
에디스는 현재 상황을 그러한 특례에 빗대어 생각했다. 가만히 넋 놓고 있으면 큰일 난다. 일차적으로는 공작이 그녀의 봉급까지 탈탈 털어서 노름으로 쓰는 걸 막을 수가 없다. 나아가 머지않아 집안이 쫄딱 망하게 생겼다.
사태가 이 지경이라, 공작이 허락한다면 자신이 작위와 지위를 물려받는 게 낫다고 여겼다.
“지금은 가문이 몰락할 위기예요. 아버지가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저에게 모든 걸 물려주셔야 해요. 그래야 최악의 결과를 막을 수 있어요.”
“으음, 작위라…….”
“지금보다 상황이 악화하면 그대로 파산이에요. 하지만 저한테 맡겨 주시면 적어도 빚이 더 늘어나지는 않잖아요.”
공작을 설득하는 동안 에디스는 클라이드 앞에서도 이렇듯 똘똘하게 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클라이드 앞에만 서면 자꾸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말이 꼬여서, 이성적인 대응이 어려웠다. 상황만 허락한다면 지금처럼 야무지게 행동할 수 있건만.
그녀는 공작에게 전후 상황과 앞으로 예견되는 점을 조목조목 짚어 주었다.
도박에 미친 건 중대한 정신 질환이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소설 설정상 둘은 혈육이다. 공작이 가산을 탕진하면 에디스는 막을 수가 없다. 유일한 수입원이 될 시종 봉급도 그가 가주의 권한으로 빚 담보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평생에 걸친 수입까지도 가능하다.
장시간에 걸친 대화와 논리적인 설명 끝에 공작은 거의 절반쯤 넘어갔다. 장단점이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그는 심약한 성품을 가진 탓에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아버지, 도박을 끊을 마음은 있으신 거죠?”
“당연하지. 앞으로는 그곳에 절대 발을 들이지 않을 거다. 그래서 오늘도 집에 있지 않니.”
물론 그녀는 믿지 않았다. 단지 설득에 필요해서 물었을 뿐이다.
이런 사안은 판을 벌여 놨을 때 단번에 결정해야 한다. 미적대다가는 공작에게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바로 오늘 저녁에라도 도박장에 가서 돌이킬 수 없는 빚을 질지 모른다.
아버지를 너무너무 걱정하는 딸의 가면을 쓴 에디스는 가문보다 자신의 미래를 더 많이 고려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걸 내색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믿어요. 그런 의미에서 뜻하지 않은 불운도 같이 극복해야겠지요.”
공작의 표정에 감동에 마구 밀려왔다.
“에디스…….”
“이제껏 빚진 건 제가 최대한 갚아 볼게요. 가주의 역할이 그런 거잖아요. 가문을 책임지고 이끌어야 하지요.”
어차피 딸인 자신의 돈은 빚과 이자에 떼이게 되어 있다. 그걸 돌려서 말했을 뿐이다.
“네게 너무 큰 짐을 지우는 것 같구나.”
거의 다 넘어왔다. 에디스는 말로 하던 설득에 쐐기를 박았다. 억지로라도 눈물을 자아내며 격정 어린 포옹을 했다.
공작의 어깨를 다독이며 힘내라는 뜻을 전했다.
“해내야지 어쩌겠어요.”
“그래……. 그래, 에디스.”
공작이 맑은 정신 상태로 중대한 결심을 한 순간, 그녀는 여세를 몰아 함께 손을 잡고 황궁까지 갔다. 귀족의 승계를 기록하는 정무 부처에 들러 서류까지 작성했다.
케츠모리스 가문에 워낙 흉흉한 소문이 나돌던 터라, 담당자는 연신 두 사람을 흘끔거리면서도 에디스가 요청하는 대로 문서를 꾸몄다.
작위와 가문 승계에 둘의 사인이 채워지자 마침내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그녀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페들턴 공작 4세가 되었고, 막대한 채무와 함께 케츠모리스 가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젠 선대 공작이 된 아버지는 궁을 나서자마자 볼일이 있다며 다른 길로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지 뻔했다.
아버지는 돈 문제에서 완전히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에디스에게 잘해 보자는 공치사만 했다 뿐이지, 자신이 이미 진 빚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에디스가 그 많은 채무를 지며 독박 쓴 상황인데도, 아버지 된 자로서 죄스러워하기는커녕 또 도박판으로 달려간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 이 시간 이후로 만들어질 선대 공작의 빚은 단지 개인 채무가 된다. 에디스가 아무리 딸이라도 대신 갚을 의무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가주는 가문 구성원의 빚을 갚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서 에디스는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래도 이게 최선이었어. 온갖 방법을 다 찾아보고 결론을 내렸잖아.’
졸지에 왕창 빚이 생겨 버렸지만, 속이 쓰려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현행법상 부모의 채무는 자식이 갚게 되어 있었다. 그 굴레를 뛰어넘을 길은 가주뿐이었다.
선대 페들턴 공작은 이제 영지를 매각할 수도 없고 집의 물건에 손을 댈 수도 없다.
모든 빚과 재산은 에디스의 것이었다.
* * *
“이보게, 페들턴 공작.”
클라이드가 도수도 없는 장식용 안경을 콧대 위에서 추어올리며 그녀를 의뭉스럽게 쳐다봤다.
“그런 대접은 사양해도 되겠습니까, 헬리어드 대공 전하.”
에디스는 황태자가 가진 여러 작위 중 하나를 들먹이며 똑같이 받아쳤다. 치아를 앙다물어 질겅질겅 씹는 말투였다.
그가 살갑게 실소했다. 처음에 비해 뻣뻣한 기색이 한결 사라진 둘 사이의 분위기를 꽤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감탄할 만큼 대단하다는 뜻이야, 에디스. 그렇지 않아도 네 집안 문제가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이런 식으로 해결하다니.”
“해결……일까요? 제 빚이 얼마나 되는지 안다면 기겁하실 텐데요.”
“아직 앞날이 창창한 걸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잖아?”
“말씀이나마 감사해요.”
말끝에 ‘에휴—’ 한숨이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 그는 집무실에서 할 일이 있었다. 황제가 몸져누운 지 몇 해가 지난 탓에 클라이드는 대리청정을 하느라고 쉴 틈이 없었다.
그가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 에디스도 바늘 따라가는 실처럼 가까이에서 공무 수발을 맡았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낮 동안 그는 잠시나마 유희 거리를 찾았다. 서랍 속에서 장식이 화려한 안경을 몇 개 꺼내 이것저것 거울에 비췄다. 꼭 코스튬 플레이를 하는 것 같았다.
일상이 답답하면 페이퍼 나이프나 펜대를 바꿀 때도 있었다. 황태자의 유희치고는 어찌 보면 굉장히 올곧고 성실하다고 볼 수 있었다.
“에디스도 하나 써 볼래?”
곁에 있던 그녀에게 손짓했다.
“아뇨, 난 이상해 보일 것 같아요.”
“그러지 말고 한번 해 봐.”
세밀한 문양이 새겨진 동그란 금 테두리 안경을 고른 다음 에디스를 거울 앞에 세웠다. 괜찮다고 거절하는데도 부득부득 씌워 주겠단다.
“도수도 없어서 안 어지러워. 얼굴이 달라 보이면 재미있다니까.”
넓은 집무실에는 둘 외에도 사람이 많았다. 다른 시종과 관리들은 클라이드가 그녀를 사적으로 친한 사이처럼 대하는 것에 놀라워하면서도 차츰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황태자의 유난스러운 총애와 수발 시종의 거리낌 없는 행동거지를 목격해도 부러 못 본 척했다.
에디스는 원래 살던 세상에서 액세서리 안경이 흔했기 때문에 클라이드의 물건에 별로 호기심이 크지 않았다.
“안 쓴 얼굴이 나은데…….”
하지만 하도 그가 닦달하는 바람에 원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그래도 해 보고 싶어.”
마주 선 클라이드는 그녀의 잔머리를 정리해 줬다. 손끝으로 귀밑머리를 가지런히 쓰다듬은 다음 귀 뒤로 넘겼다. 오른쪽과 왼쪽이 모두 깔끔해지도록 연신 손을 놀렸다.
역시 인형 같은 기분이 든다. 혼인을 하고 싶다는 감정으로 이러는 게 아니랬으니, 분명 갖고 놀기에 편한 장난감이다.
얼굴을 대준 채 볼이 불퉁하니 부풀어 있자, 클라이드는 손가락 마디로 동그란 둔덕의 볼살을 살짝 눌렀다.
“이러면 너, 아이 같은 거 알아?”
“나이 먹을 만큼 먹었거든요.”
“어릴 때처럼 귀엽다고.”
입이 놀라서 벌어지며, 안에 들어 있던 공기가 빠졌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유년기의 에디스를 그는 기억하는 걸까.
에디스에게는 그와의 예전 추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학습할 수 있는 정보는 뇌리에 그대로 남아 있지만 감정이 실린 기억은 빙의하는 순간 모조리 날아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기억하지 못하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어릴…… 때?”
두려운 심정과 함께 되묻는 동안에도 에디스의 귀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멈추지 않았다.
클라이드는 야하게 도톰한 입술을 좌우로 길게 늘이며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능청스럽게 굴었다. 대꾸는 하지 않고 안경 씌우기에 열중했다.
허리를 조금 숙인 그가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상하게 뜨거운 기운이 갑작스레 에디스를 덮쳤다. 실내가 조금 더운 건지. 그의 온기가 민감하게 느껴지는 건지.
반짝거리는 황금의 홍채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찬란한 태양이 내리쬐는 모래사장처럼, 똑바로 쳐다보려니 시야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은 있게 마련이지. 별 뜻 없이 한 말이야.”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가 에디스의 얼굴에 안경을 씌웠다.
커다란 손이 시야를 가렸다. 흐릿하게 뒤덮는 눈앞도, 한 뼘만큼 떨어진 거리에도, 클라이드의 손과 얼굴뿐이었다.
그에게서 수컷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배 속이 간질간질할 만큼 강렬하면서 인상적이었다.
너무 가까이 와닿는 남성의 육감적인 느낌에, 그녀의 아래로 내린 눈두덩이가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