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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3)화 (13/129)

13화

클라이드는 아쉬움에 머뭇거렸다. 이런 확실한 내음을 아까 사격장에서만 해도 못 맡았다는 게 신기했다.

침대까지의 거리는 너무 짧았다. 얼마 안 되는 걸음을 걷자 그녀를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가만히 내려앉은 백금색의 속눈썹은 조금도 파들거리지 않았다. 깨어 있다면 연기가 수준급인 거다. 축 처져서 오롯하게 제 품에 안긴 그녀의 육신도 곤히 잠든 기색뿐이었다.

‘종일 혹사시켰으니 편히 재워야겠지.’

몰래 에디스의 냄새를 맡는 동안 어느덧 자신이 취해 가는 듯했다.

공연히 헛생각이 나는 걸 보면.

‘내려놔야겠지…….’

어여삐 여기는 상대를 괴롭히는 건 어린아이나 하는 짓이다. 벌써 그 비슷한 짓을 꽤 많이 해서 미운털이 박힌 기미까지 보였다. 앞으로는 잘해 줄 계획을 많이 세워 놨건만, 여기서 또 삐뚤어지면 곤란하다.

클라이드는 침대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이나 넋을 놓았다.

* * *

소위 ‘아침짹’ 장면이란 게 있다.

밤에 두 주인공이 19금 수준의 삐— 행위가 폭발하고 살색으로 가득한 삐—가 이어지는 상황을 고스란히 묘사할 수는 없으니 통째로 삭제하는 것이다.

만리장성 쌓는 시간을 편집하는 건 안타깝게도 심의 규정상 어쩔 수 없다. 뜨거운 밤은 혼자만 상상하고 소설 속에서는 넘어가 줄 수밖에.

그런데 갓 눈 뜬 에디스가 겪는 아침은 좀 달랐다.

흐릿한 시선이 닿는 창 커튼 너머로 삐요삐요 우는 새소리가 들렸다. 바로 아침짹이다.

푹신푹신하니 온몸을 감싸는 매트리스의 죽여주는 쿠션감과, 금사 은사로 수 놓은 이불의 부드러운 감촉은 이곳이 에디스의 침실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녀는 엎드려서 자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잠버릇이 있었다. 깃털이 빵빵하게 채워진 베개 탓에 한쪽 눈으로만 빼꼼히 주변을 살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아무 일 없었어야 할 지난밤에 왜 무슨 일이 생긴 느낌이 드는 것인가.

일반적인 아침짹과 그녀가 겪는 아침은 여기에서 차이가 있다. 다른 커플은 오만가지 짓을 한 밤을 생략하지만, 에디스는 쿨쿨 잘 잤음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통째로 삭제당한 느낌이었다.

옷은 제대로 다 입고 있었다. 구태여 이불을 들춰 확인하지 않아도, 조금만 꿈틀거리면 촉감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기어코 클라이드 녀석이 날 여기에 눕혔네.’

마음속으로 황태자를 떠올릴 때는 그 자식, 또는 녀석으로 불렀다.

구무럭구무럭. 선잠이 깬 몸을 뒤척거렸다.

‘걔는 성격도 변태야. 구태여 빡빡하게 일 시키더니 이런 식으로…….’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린 순간, 내심 욕하던 상대가 떡하니 나타났다.

“억!”

방심하다가 허를 찔렸다. 악덕 상관 클라이드가 바로 코앞에서 희미하게 눈을 뜨는 중이었다.

잠은 따로 자겠다더니 어디서 거짓을 날리나. 사기꾼 같으니라고.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정수리 위로 붕 뜨고 이마에도 몇 가닥이 두서없이 흘러내렸다. 뒷머리는 단정하게 자른 덕분에 귀와 목선이 평소보다 도리어 해사했다.

말끔하게 빗은 머리보다 짐승 털같이 망가진 스타일이 더 마음에 든다면 저는 변태인 걸까.

그녀를 향해 돌아누운 클라이드는 느릿하게 눈을 끔벅였다.

“좋은 꿈 꿨어?”

책상에서 침대로 순간 이동한 기분이 들 만큼 꿈도 안 꾸고 숙면해 버렸으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란 손가락이 에디스의 안면을 가로질러 올라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손의 감촉으로 그녀의 눈썹 사이를 꾸욱 눌렀다.

“여기에 주름 좀 펴지 그래.”

한창나이인 에디스에게 주름이 생길 리 없건만 괴상한 성격의 클라이드가 공연히 트집을 잡았다.

하지만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건 사실이다.

뜻하지 않게 상큼한 아침. 중세 영화 같은 침실 배경. 환상적인 매력의 남자에게 받는 굿모닝 인사.

그 소감을 표현하자면, 목구멍이 간지러워지는 설렘보다 벅차오르는 난감함이 조금 더 컸다. 사태를 파악한 에디스의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집에 가겠다고 했잖아요. 어제처럼 늦게까지 사람을 잡아 두는 법이 어딨어요.”

나른하게 풀린 남자 뺨이 아무리 근사해 보여도 현혹되면 곤란했다. 미간에 머물렀던 손끝이 콧잔등을 살살 간질이는 것도 홀라당 넘어가면 안 됐다.

정신 차려, 에디스. 나는 메인 수 아드리안이 아니고, 원작을 바꿔서 주인공이 될 마음도 없어.

설상가상으로 갓 잠에서 깬 클라이드의 목소리는 살짝 쉬어 있었다.

섹시해 죽는다, 아주.

“그건 사과할게. 하지만 에디스가 아예 마음을 내려놓으면 되잖아.”

자꾸 내려놓고 싶어지는 마음을 클라이드까지 나서서 내려놓으라고 꼬드기면 어떡하나.

“내려놓다니요.”

“궁에서 쭉 지내. 업무는 줄여 줄 테니까.”

꽤 솔깃한 얘기였다. 할 일이 줄어든다는데 환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부루퉁하던 에디스의 뺨이 조금 들어갔다. 가만있자. 궁에서 살게 되면 뭐가 달라지려나. 득실을 따져 보느라고 머릿속이 바쁘게 회전했다.

“업무를 줄여 주는 조건으로 입궁 시종직으로 전환하라는 건가요?”

“맞아. 좋은 방으로 배정하라고 꼭 지시도 해 둘게.”

그건 클라이드가 강조하지 않아도 약간 기대된다. 황태자를 직접 모시는 자는 당연히 대우가 좋다.

“으응……. 생각 좀 해 보고요.”

집에 가서 발 뻗고 편히 자느냐, 24시간 대기 상태 속에서 환경 좋은 궁에 사느냐의 선택이다.

그가 부탁 조로 묻긴 했지만 지엄한 명령이 떨어지면 아랫사람은 꼼짝없이 따라야만 한다. 솔직히 생각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에디스의 집 상황이 요즘 엉망이라 아버지와 집안을 내팽개치고 궁에 들어앉기가 좀 그랬다.

클라이드는 저를 조몰락거리는 게 재미있나 보다. 손가락이 그녀의 콧잔등을 타고 오르내리는 바람에 견디기 힘들게 간지러웠다.

얼굴을 돌려도 기어코 따라와서는 구각의 옴폭 파인 끝을 찔러 댔다.

“이 손 좀 치워 줄래요?”

우아하게 긴 손가락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조금만 더 만지고 싶어. 쫀득쫀득한 감촉이 꼭 새로 구운 빵 같네.”

그의 손에서 에디스는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이대로 계속 내버려 두면 잠자리에서 안고 자는 인형처럼 부둥켜안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할지도 모른다.

심히 부담스럽고 감당하기 힘들다. 그녀는 어른거리는 손길을 덥석 잡아 치웠다.

그리고 입에 올리지 말자며 여러 번 삼켰던 말을 기어코 꺼내고 말았다.

“전하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정확히는 무슨 억하심정이 있길래 이렇게 괴롭히냐는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귀찮을 만큼 자꾸 만지는 행동은 한 가지 심리를 예측할 수 있었다. 내친김에 시원하게 물어봤다.

“혹시 나 좋아하세요?”

“응.”

“……?”

“응이라고.”

에디스는 떡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며 한동안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홧김에 던진 물음에 화답하다니. 말도 안 돼.

기미를 전혀 눈치 못했다면 제가 바보겠지만, 이성으로서의 호감이라기보다는 장난기를 더 많이 느꼈다.

게다가 성인 나이의 황태자나 되어서 행동 패턴이 왜 이래. 아니, 무슨 초딩이야? 좋아한다는 표현을 벽을 가득 메우는 서류 더미로 전하다니.

헷갈리는 상황은 한둘이 아니었다. 클라이드는 진지하게 업무를 지시했고, 뜻한 바를 피력할 때 아주 설득력이 있었다. 늦은 밤에 보고서 내놓으라던 건 진심으로 짜증 났지만 설마 클라이드의 침대에서 같이 자고 싶어서 벌인 짓으로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 의도라면 너무 유치하니까!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들어 놓고 클라이드는 멀쩡하게 미소 지었다.

“대놓고 질색하면 나 좀 상처받는데.”

마음에 눈곱만큼의 흠집도 나지 않은 게 분명한 얼굴로 도톰한 입술을 섹시하게 늘였다.

야하게 반질거리는 입술 살과 그 사이로 엿보이는 촉촉한 혀는 원작이 19금이라는 증거다.

누가 뭐래도 비주얼에서는 압도적인 남자이기에, 에디스는 막 다그칠 수가 없었다.

“전하는 알파잖아요. 그것도 우성 알파.”

그는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고갯짓을 대신했다.

“오메가가 편하지 않아요? 훨씬 매력적으로 느낀다고들 하던데요.”

“그렇긴 하지. 페로몬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알파가 오메가를 선호하는 건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본능이다. 향이 없는 베타보다 선천적으로 알파를 유혹하는 페로몬을 타고난 오메가가 압도적으로 매혹을 불러일으킨다.

더불어 에디스는 원작과 관련해 조금 꼬드겨 봤다.

“게다가 전하는 주변에 여성을 거의 두지 않잖아요. 오메가 중에서도 남성 쪽을 선호하시는 줄로 짐작했는데요.”

클라이드가 잠깐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날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사람이 우연히도 남자가 많긴 하군. 전체 사용인은 성비가 비슷하지만.”

“역시 남성이 나은……?”

겨의 BL로 몰고 가는 유도 질문이었다. 클라이드는 이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 지그시 그녀를 응시했다.

“지금 상황으로는 맞다고 해야 하나.”

에디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스토리가 급진전하는 느낌이다. 클라이드가 자신의 성향을 인정한다면 아드리안과 만나게 하려는 계획도 잘 풀리겠지.

그런데 뭐야. 언제는 나 좋다고 해 놓고, 이번에는 오메가가 좋대? 이랬다저랬다 한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자 클라이드는 그녀가 쳐 내려던 손을 가까이해 부드럽게 미끄러뜨렸다.

서로의 손바닥이 교차하는 감각이 이상야릇했다.

“사람 마음 갖고 장난치려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감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

“안심해, 에디스. 아직은 밑도 끝도 없이 황태자비가 되어 달라고 청하지는 않을 테니. 우리가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잖아?”

클라이드의 말마따나 그녀는 안도의 기색이 너무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어림잡아 추측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저는 단순히 마음에 드는 시종쯤 되려나. 한발 더 나아가 측근으로서 늘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일까.

다행스러운 기분이었다. 클라이드도 선을 넘을 뜻은 없어 보여서.

“물론이죠. 저는 일개 시종에 불과하니까요. 전하께선 머지않아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줄 황태자비를 맞이하시게 될 테고요.”

에디스는 거침없이 대꾸했다.

그런데 왠지 이상하게 속이 답답했다. 그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겼다기보다는 이 상황이 조금 껄끄러웠다.

되었다. 깊이 고심하지 말자.

어차피, 인생 설계를 변경할 만큼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진 않으니.

그가 침대맡의 설렁줄을 당겨 시중들 사람을 부를 때, 에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머리를 털었다.

하지만 보다 충격적인 발언을 되새기느라 세세한 부분을 간과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아직은’이라는 조건이 달렸음을 대충 들어 넘긴 것이다.

그저 짤막한 표현이었기에 한 귀로 흘렸다. 그것이 단순히 사람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를 얘기한 것인지, 클라이드가 뭔가 특별한 의지를 숨긴 것인지, 에디스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 * *

외박 아닌 외박을 한 다음 날은 무사히 퇴근할 수 있었다.

침실과 별실에 추가로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는데, 뭐가 들어올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어수선하기도 해서 겸사겸사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오랜만에 아버지가 있었다. 페들턴 공작 3세이자 케츠모리스 가의 주인이다.

웬일로 도박장에 가지 않았나 의심스러웠다. 도박 자금이 궁한가? 빚을 하도 져서 이젠 융통할 곳도 별로 없다.

거의 만나기 힘든 공작을 집에서 마주칠 때면 술에 취해 있거나 또는 숙취로 고생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관자놀이를 누르는 모양새를 보니 술병이 난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페들턴 공작과 말도 섞고 싶지 않을뿐더러 아예 연을 끊고 싶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빙의해 살며 햇수를 거듭하는 동안 에디스는 몸 주인의 영혼이 하던 방식을 따라왔다. 언제 이 몸에서 빠져나가 현실 세계로 돌아갈지 알 수 없으니, 원래의 행동대로 그를 아버지로 호칭해 줬다.

“오랜만에 뵈어요, 아버지.”

“으응, 에디스…….”

얼굴 꼬락서니는 말이 아니라도 취기가 엿보이지는 않았다.

맨정신일 때의 페들턴 공작은 늘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다. 에디스와 마주친 그는 소심한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혼자 땅굴을 파면서 반성하다가도, 금세 집을 나가 며칠씩이나 도박장에서 사는 게 문제지만.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이 있었어요. 잠시 시간 좀 내어 주시겠어요?”

“뭐, 뭔데 그러니. 중요한…… 거니?”

화제를 꺼내기 전부터 공작은 안절부절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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