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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12)화 (12/129)

12화

노을이 지고 사위가 어둑해지자 그가 일어나 촛불을 댕겼다. 외부에서는 먼지 한 톨도 남이 털어 주지만 여기서만은 모든 걸 클라이드가 했다.

“아, 그 꼬리표는 더 중요하단 표시야.”

에디스가 어떤 문서철을 꺼내자 그는 빨간 꼬리표에 별이 쳐진 것을 멀리서도 대번에 알아봤다. 직접 꼬리표를 붙였을뿐더러 각각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뺀질댈 수가 없다. 날로 먹는 인생은 물 건너가고 있었다.

깊은 한숨이 에디스의 불퉁한 입에서 절로 샜다.

상황이 이 지경이라 좀 쉬었다 하라는 당부도 편치 않게 들렸다.

시각은 어느덧 퇴근할 때를 한참 지났다. 그녀는 오후 4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책상에서 서류를 팠다.

글을 읽느라 거북목이 되고 생각을 적느라 손목이 시큰거리긴 하지만 부득부득 한 자리에 머물렀다. 자주 수석의 자리를 차지했던 아카데미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적은 없었다.

서슬 퍼런 윗분이 집에 가란 소리를 안 한다. 악덕 상관이라는 욕이 절로 모가지에 치밀어 올랐다.

‘그냥 확 집에 가버릴까? 클라이드가 제 입으로 말했잖아. 편히 대하라고.’

고민 끝에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전하, 저어 이만.”

열심히 일하는 에디스 앞에서 낙서나 끼적이고 있던 그는 깜빡했다는 양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이만 잘 시간이 되었나?”

순간, 그녀의 동공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잘…… 시간?”

“에디스가 너무 집중하길래 말을 붙이기 힘들었어. 그러게 쉬엄쉬엄하라니까.”

수월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가 에디스에게 에스코트하는 신사의 손을 내밀었다.

지금 장난하나. 본 업무 시작한 첫날부터 야근시켜 놓고, 말 붙이기 힘들어서 내버려 뒀다고? 깊은 빡침이 뒷골을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상대는 황태자였다. 아무리 별실에 단둘밖에 없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함없었다.

속으로는 부아가 치밀어 올라도, 씰룩거리는 뺨을 좌우로 늘여 미소 지으며 퇴근을 향한 열망을 긍정적인 표정에 담았다.

사회생활의 본 게임에 접어든 그녀는 예전 세계의 기억을 새록새록 되살렸다.

나름대로 처세술에 능하다고 스스로 평가했던 나. 좋은 말로는 정치력이 만렙이라고도 하지. 할 수 있어, 에디스. 창밖으로 밤의 풀벌레가 울어 대도, 지금이라도 집에 갈 수 있다고.

“그으……러니까, 저는 이만 집으로.”

“밤길에 무슨 험한 일을 당하려고. 그냥 여기서 잠깐 눈을 붙이는 건 어때?”

“……네?”

“어디 보자……. 카우치에서 재우기는 내가 좀 미안하군. 에디스가 쉴 공간을 만들려고 했지만, 지난 사흘만으로는 공사가 다 끝나지 않았어.”

쉴 공간 따위는 필요 없다고요. 퇴근하겠다니까요.

“전하.”

“차라리 내 침대를 빌려줄까? 내가 카우치에서 잘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당최…….”

여과 없는 발언이 쏟아져 나갈 것만 같아서, 함부로 나불대려는 주둥이를 자신의 손으로 부여잡았다. 마음의 소리가 어느덧 뇌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발사되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클라이드의 폭탄 발언에 된통 말리는 느낌이었다.

황태자의 침실은 엄밀히 따지자면 개인 공간이 아니다. 이곳에서 중신의 보고를 받기도 하고 절친한 사이임을 과시하기 위해 누군가를 부르기도 한다. 이웃 나라에서는 심지어 침실을 뭇 귀족들에게 공개한 황제도 있었다.

따라서 에디스가 황태자의 침대를 점령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아침에 기상을 알리는 시종이 들어오는 순간 난리가 날 게 분명하다. 설사 클라이드의 허락을 받고 누웠다 하더라도 온갖 구설에 휘말리다가 결국은 해고당하겠지.

놀고먹는 봉급쟁이에 이어 유유자적하는 연금 생활이 인생의 목표인 에디스에게는 최악의 종착지인 것이다.

난감해 죽겠는데 클라이드는 계속 헛소리를 한다.

“오늘 힘들었을 텐데 에디스, 푹 쉬어야지. 맘 놓고 내 침대를 써.”

“그러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멋대로 잘 준비를 하려는지 그가 에디스를 침실로 데려가려 했다. 일어날 때 의자를 빼 주려는지 옆에서 대기했다.

“안 될 이유가 뭐지?”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

“우선 오가는 시종도 엄청 많고요.”

“내가 부를 때까지 아무도 안 와. 아침이 되어도 침실 커튼을 젖힐 간 큰 놈은 없지. 아무리 중요한 행사가 있어도 날 건드리지 않도록 해 놨거든.”

조금 의외였다. 클라이드는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사람인가.

곰곰이 떠올려 보니 황태자의 침실에서 누군가가 국사를 논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그래도…… 내가 침대에 누웠다가는 큰일 나니까요.”

엄지손가락으로 모가지를 쓱 긋는 시늉을 했다.

그는 도통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에디스에게 특단의 조처를 내렸다. 양 팔뚝을 붙잡아 번쩍 일으켰다. 그러고는 기차놀이 하듯이 뒤에서 밀며 침실로 향했다.

“절대 큰일 안 나. 만에 하나 누가 보더라도, 내 측근은 다들 입이 무거워.”

“하지만 전하.”

“씻을 물을 2인분 준비하라 해야겠군. 아랫것들이 한번 휩쓸고 갈 텐데, 그 정도는 참아 줄 수 있지?”

신혼부부 놀이라도 하는 분위기다. 말로는 그가 카우치를 쓰겠다고 하면서 왜 발길은 같이 침대로 향한단 말이냐.

“아뇨!”

그녀는 홱 돌아서서 클라이드를 노려봤다.

수발 시종이 황태자와 같이 씻는다? 그건 정말 아니지. 사귀는 사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나.

“전하께서는 주무실 준비를 하세요. 전 이만 정리하고 집에 가겠습니다.”

단호하게 선을 긋자, 그는 조금 섭섭한 표정과 함께 팔을 감싸던 손을 내렸다.

하지만 잠자리 시중을 들 사람을 부르지 않고 도로 별실로 돌아갔다. 책을 한 권 들고 카우치에 절반쯤 눕는 꼴을 보니,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 심술 맞은 말투로 에디스를 찔렀다.

“에디스가 수고한 거 알아. 그런데 오늘 검토한 분량은 보고해야 하지 않겠어?”

“보고하라는 말은 없었잖아요.”

“지금 생각났어. 그렇다고 매일 할 필요는 없고, 아무튼 보고서를 봤으면 해. 네 의견을 첨부해서 말이야.”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가 왜 변덕을 부리는지 알 수 있었다. 자고 가라는 권유에 따르지 않아서이다.

이 남자, 대체 나한테 왜 이래.

혹시 나한테 관심 있어요? 이 말이 갓난아기 옹알이하듯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물어볼까 말까 수없이 고뇌했다.

에라, 관두자. 보고하라니 일단은 해야지 뭐. 클라이드의 속내가 궁금하지만 이 자리에서 따지듯이 물어보는 건 좀 아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확인하는 편이 낫다.

그의 대답이 ‘노’라고 하면 쪽팔린 거고 예스라고 하면 엄청 난감해진다. 게다가 받아 줄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으니.

에디스는 어금니를 앙다물어 짓씹는 말투로 대꾸했다.

“알았어요. 보고서.”

이젠 갈 데까지 간 상황이라 격식 따위는 깡그리 날려 버렸다.

제가 정중히 모시든 불알친구처럼 막 행동하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자리로 돌아가 털썩 소리가 나게 앉았다. 분통 터져서 씩씩거리는 소리를 클라이드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예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곧이어 여태껏 발을 조이던 구두를 힘차게 벗어 던졌다. 책상 아래로 구두 한 켤레가 데굴데굴 굴렀다.

발이 편해지자 한결 살 것 같았다. 그녀는 폭신폭신한 카펫에 파묻힌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씩씩하게 종이를 펼쳤다.

늦은 밤까지 사각사각 펜 놀리는 소리만 고요한 별실에 가라앉았다.

하루 동안 그녀에게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사격장에 나가야 했고 총도 직접 쏴 봤고 접견실까지 따라 들어갔다.

취침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때, 절반쯤 채워진 종이 위의 펜은 멈춰 있었다.

고요히 감은 에디스의 눈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새 곁에 나타난 클라이드가 백금발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도, 뒤통수에 달린 머리 장식을 신중하게 빼내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풀어진 머리를 한 가닥 쥐어 몰래몰래 자신의 입술에 댔다.

“그러게 왜 버텨.”

속삭이는 음성에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아까의 삐뚤어진 심술쟁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자고 가랄 때 그냥 누우면 됐을걸.”

클라이드는 고개를 숙여 그녀와 얼굴을 나란히 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동그란 선의 콧방울이 귀엽다. 소녀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보면 볼수록 어여뻤다.

입술이 자석처럼 끌려갔다.

자신의 숨결이 묻을까 봐 호흡을 멈추며, 함부로 그녀의 키스를 훔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저절로 앞으로 쏠리려던 고개를 의식적으로 물렸다.

“이제 널 침대로 옮길 거야.”

솜털이 보송보송한 귓가를 눈으로 훔치는 건 괜찮겠지.

보기만 하는 건 잘못이 아니니까.

“깨어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며칠 전에 보니 에디스가 깊이 잠드는 편 같기는 하지만, 안아서 옮기기는 쉽지 않을 듯했다.

“조심해서 안겠지만 그래도 혹시 네가 깨어나면……. 그냥 잠들어 있는 척해 줄래? 그럼 나도 모르는 척 널 눕힐게.”

책상에 엎드려 자는 자세가 안정되어 있는 거로 미루어 아카데미에서 많이 해 본 솜씨 같았다. 학창 시절에는 흔히들 그런 법이겠지. 등을 침대에 붙이고 눕지 않아도 완전히 곯아떨어질 수 있다.

클라이드는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끼워 넣었다. 다른 팔은 무릎 아래를 살며시 받쳤다.

소리를 죽이고 최대한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힘을 준 것보다 훨씬 에디스의 무게가 덜 나가서 하마터면 상체가 뒤로 젖혀질 뻔했다.

잠시 휘청이다가 중심을 잡았다. 둥그렇게 팔을 말아 몽글몽글한 여체를 품에 안았다.

훅, 끼치는 아찔한 향기.

잠든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고유의 이미지가 온기와 향으로 와닿았다.

곁에서 지분거릴 적에는 고작해야 비누 내음이나 맡았을 뿐이다. 그런데 단단히 끌어안자 명확한 느낌이 클라이드의 비강 점막을 찌르고 들어왔다.

생동감 있는 꽃 내음이었다.

사람의 피부에서 자연히 풍기는, 아주 가까이에서 코를 박고 맡아야 알 수 있는 체취가 어질어질하도록 향기로운 꽃이라니.

‘이게 베타의 체향이라고? 절대……. 절대 그럴 리 없어.’

따끈따끈한 체온을 타고 독특한 향이 피어올랐다. 들꽃 같기도 하고 은방울꽃 같기도 하다.

사람의 피부에서 만들어 내는 내음은 인위적으로 제조된 향수와 전혀 달랐다.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아 마구 들이켜고 싶은 욕구가 들 만큼 육감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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