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9)화 (9/129)

9화

에디스는 잇몸이 드러난 것 같아 민망했다. 하지만 왠지 털어 내기가 어려웠다.

남자의 엄지가 입술을 문지르다가 약간 더 안쪽으로 옮겨 가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간……지러워, 아티.”

손가락이 입술에 박힌 바람에 옹알거리는 말투가 새어 나왔다.

입술은 파닥파닥 경련했다.

그저 지그시 눌렸을 뿐인데, 저절로 몸서리쳐졌다. 그와 맞닿은 피부의 느낌이 뭐라 표현하기 힘들게 짜릿했다.

솔직히…… 기분 좋아. 나 돌았나 봐.

어느새 그를 뿌리칠 의지는 사라진 채였다. 우리가 친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뭐였더라. 입술에 닿는 감각을 느끼는 동안 다른 사고는 정지해 버렸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탓에 아드리안의 숨소리가 여과 없이 들렸다.

“하아…….”

애달픈 한숨이 그녀의 뺨을 간질였다.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갈 걸 그랬어. 날 싫어하는 줄 알고 괜히 움츠렸잖아.”

싫다기보다 원작 때문에 꺼렸던 것이지만, 사실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당신들이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게 아니라 단지 소설 속의 존재라고 밝히기가 어려웠다. 이 청아하고 애틋한 시선을 마주하면서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은 클라이드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이드나 아드리안이나 그녀에게는 결국 작품 속 인물일 뿐이었다.

무의식의 흐름 중에서 클라이드가 떠오르자, 에디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때마침 아드리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만지면 쫄깃한 감촉일 것 같은 그의 입술이 보일락 말락 하게 벌어졌다.

머금고 있는 촉촉한 습기가 선정적이다.

맛보고 싶은 빛깔의 입술과 함께, 눈부신 미모의 얼굴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 오랜만에 만난…….”

늦지 않는 타이밍에 겨우겨우 토해 내는 그녀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나마도 띄엄띄엄 단어를 붙여야 했다. 에디스는 가지고 있던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감미로운 그의 손을 밀어냈다.

“친구……라기엔 너무 성급한가, 아티?”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아드리안이 거북하지 않게 사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기껏 머리를 짜낸 게 친하지 않은 사이였다는 핑계였다.

확실히 우리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한 게 오늘로 처음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아드리안이 저를 주목해 왔는지도 여태 몰랐다. 그가 접근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워낙 신중했기에 눈치도 못 챘다.

정상적이라면 우린 제일 먼 의자에 앉아 격을 갖춘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맞춰 아드리안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두 입술이 스치기 직전 거리에서 그가 진하게 속삭였다.

“친구……. 난 싫은걸.”

“뭐?”

“다 큰 어른끼리 무슨 친구야.”

아드리안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과 함께 겨우겨우 그녀를 놓아주긴 했다. 하지만 어루만지던 손길이 멀리 가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살갑게 둘렸다.

이런 모습의 아드리안을 만나게 되려고 원작의 한 대목이 나타났던 거구나.

그는 알파를 만나는 오메가가 될 수도 있지만 여성을 만나는 남성이 될 수도 있는 캐릭터였다.

어찌나 그의 눈빛이 따사한지, 이젠 모르는 척할 수가 없게 됐다. 행동으로 표현해 주며 아주 적극적으로 대시해 오고 있으니.

그래도 달리 생각하면 관계를 원만히 정리할 여지가 웬만큼은 남아 있지 않을까? 정말 죽자 살자 좋아했으면 몇 번 접근하다가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디스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보내니까 접어 뒀던 감정을 다시 펼쳐 봤을 가능성이 크다.

알파 남성과 자주 어울려 다녔던 그의 행동을 떠올리며 은근슬쩍 떠봤다.

“하지만 아티는 오메가잖아. 알파가 상대하기 편하지 않아?”

“남자이기도 하지. 오메가지만 키도 크다고.”

태도가 완강하다. 그녀와 잘해 보고 싶다는 의지다.

“그리고 힘도 세.”

힘 얘기를 할 때 구태여 귓가에 대고 속살거리는 저의를 대충 읽을 수 있었다. 어린애가 힘자랑하는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에디스의 19금 사고방식에 의하면 저 힘은 그 힘을 의미한다.

밤에 필요한 힘.

같이 자는 사람을 삐— 하고 삐— 하게 만드는, 침대 부숴 먹는 바로 그 힘이다.

낯부끄러운 속뜻을 이해하고 말았지만 겉으로는 당당하게 굴었다. 그녀는 현실에서든 이 세계에서든 야한 얘기에 맞장구치면 쳤지,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배배 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약간 홍조 띤 얼굴을 똑바로 쳐들고, 그래도 아주 뻔뻔해지지는 못해서 눈꺼풀을 빠르게 끔뻑거렸다.

“응……. 알았어.”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아드리안도 귀 끝이 빨개져 있었다.

쑥스러움을 무릅쓰며 도전한 한마디라는 걸 읽을 수 있었다. 남성보다는 오메가로 자주 대해졌을 테니, 이런 말은 아마 흔히 꺼낼 일이 없었을 것이다.

“너한테는 내가 이성이라는 거. 그것만 기억해 주면 돼.”

여리여리하고 고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그녀에게만은 거의 돌진하다시피 하는 아드리안을 겪으며. 그가 남자라는 사실을 뼛속 깊숙이 체감해야 했다.

* * *

사흘의 휴가 내내 두 남자에 관한 생각만 진이 빠지도록 했다.

머리 위로 투명 고리가 띄워졌고 고리를 따라 클라이드와 아드리안이 빙글빙글 돌았다. 한 놈은 천사이고 한 놈은 악마여야 하는데, 일단 외모만 따져서 클라이드가 뾰족 꼬리 달린 악마가 되었다.

공통점은 둘 다 아주 많이 잘생겼다는 사실, 그리고 에디스의 평화를 깨뜨리려 한다는 것이다.

절세미인 아드리안이 제게 치근덕거리던 순간, 솔직히 기분 찢어지게 좋았다. 앉은 자리에서 흐물흐물 녹을 뻔했다.

하지만 그의 고백에 예스라고 대답할 마음이 있느냐 하면.

‘글쎄……. 그건 잘…….’

현실 세계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를 덕질한 적이 있었다. 그 배우의 팬이 아닌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굉장한 연기자였다.

당연한 수순으로, 자면서 그와 엮이는 꿈도 꿨다. 비슷한 꿈을 여러 번 꿨다. 이건 팬이라면 조건반사 같은 거다.

헛꿈 이후에 허튼 망상도 했다. 정말 월드 스타와 사귈 운명이 찾아온다면 어떨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냥 좋지만은 않을 듯했다. 사생활은 모조리 까발려질 테고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에게 공개될 것이다. 스타의 연인으로서, 잘못한 일도 없으면서 욕은 또 얼마나 많이 먹겠는가. 수억 명의 시어머니가 생기는 꼴이다.

많은 이들이 목숨 걸고 그를 사랑하리라 외칠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추구하는 바가 다른 법이라, 현실의 에디스는 시끄럽지 않은 나날을 원했다. 그 배우의 골수팬으로서 멀리서 별이 반짝이는 걸 보는 게 더 좋았다.

‘그래서 슈퍼스타 아드리안은 탈락인 거지.’

클라이드는 또 어떠한가. 그가 에디스에게 찝쩍거린 적은 없지만 제 맘대로 후보군에 올려 상상해 봤다.

그는 황제가 될 사람이다. 말도 안 되는 막장 전개가 펼쳐져 에디스가 황후가 된다면, 그건 영부인과 비슷한 느낌이겠지.

가슴에 손을 대고 맹세컨대 영부인을 부러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수많은 행사와 의전, 무조건 점잖아야 하는 행동거지를 상상만 해도 섬찟하다. 게다가 이곳은 황제가 다스리는 사회라 황후가 챙겨야 할 안살림이 어마어마하다.

‘탈락. 무조건 클라이드도 탈락.’

까놓고 말하면 클라이드나 아드리안이나 남편감으로는 빵점이다. 원작의 세계관이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삶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누구든 짝을 물색하긴 해야겠지만, 적어도 저 둘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마이너스부터 시작하는 배경을 극복할 만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모를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하다. 에디스의 희망 사항은 여전히 봉급 도둑이다.

적게 일하며 많이 벌고, 거기에 조기 은퇴까지 해서 유유자적 살 거다. 기필코!

* * *

다시 출근한 황태자 궁. 에디스의 담당 업무가 수발 시종으로 확정된 덕에, 궁의 여러 문을 무사통과하고 곧장 클라이드의 침실로 직행하게 됐다. 일하는 곳이 침실 옆 별실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기겁할 일이다.

클라이드는 눈에 띄지 않았다. 다른 시종이 전하길, 에디스에게 옷을 갈아입고 사격장으로 오라고 했단다.

“사격장이요? 거길 전하께서 왜 가신 겁니까?”

“전하께서는 사격 취미가 있으십니다.”

“취미요?”

“체력 단련도 즐기셔서 거의 매일 단련실을 이용하시지요. 예전에 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이 그립다고 전하께서 종종 말씀하시기도 하거든요.”

클라이드는 태어날 때부터 황태자로 정해진 게 아니었다.

원래는 누나가 황태녀로 후계 수업을 받고 그는 군대에 입대했었다. 그러다가 불운한 사고로 누나가 사망하며, 5년 전부터 클라이드에게 황태자의 지위가 부여되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궁에 틀어박히게 됐을 테니, 확실히 클라이드의 입장으로는 답답할 만도 하다. 일상의 탈출구로 검을 놀리고 총을 쏜다면 그에게 꽤 잘 어울리는 취미 같았다.

에디스는 시종이 갖다준 옷을 확인해 봤다. 바지 형태의 승마복과 코트였는데, 한눈에도 그녀가 가진 옷보다 몇 곱절은 값져 보였다.

“이걸 제가 입으라고요?”

“전하께서 지시하신 일입니다. 입으려면 케츠모리스 경을 시중들 사람을 불러야겠군요.”

소매와 칼라에 섬세한 자수가 새겨져 있고 포인트로 반짝이는 보석도 붙었다. 한낱 신입 시종에게 주어지는 의복으로 여기기 힘들 만큼 고급스러웠다.

옷을 선택한 당사자인 클라이드가 없는 상황에서 다른 이에게 자초지종을 캐묻기도 뭣했다. 그녀는 순순히 옷을 입고 그를 따라나섰다.

사격장은 궁궐을 벗어나 북쪽 숲으로 들어가야 했다. 짧은 거리지만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달리니 기분이 생소했다. 탁 트인 공터에 이르자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날렸다.

클라이드가 과녁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녀가 말이 달리는 속도를 줄여 접근하는 동안 장전된 총에서 불이 뿜어졌다.

타앙!

귀청을 찢을 듯한 총성과 함께 에디스의 눈앞에 글자가 나타났다.

[피의 숙청은 칠일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눈이 돌아 버린 황제 클라이드는 뵈는 게 없었다.]

배경으로 삼은 청명한 하늘을 비웃기라도 하듯, 잔인한 글이 이어졌다.

[궁전과 도시를 온통 피바다로 만들고도 클라이드의 파멸 심리를 채우지는 못했다.]

[위대한 군인이자 명사수였던 황제는 사라지고 실성한 광인만이 남았다. 그가 손수 총을 들었다. 그리고 일생을 헌신한 신하를 향해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때마침 들려 온 다른 총성에 에디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양어깨가 파들파들 떨며 한 뼘도 못 되게 좁혀졌다.

뒤통수에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원작 속의 클라이드가 그녀에게 총탄을 박아 넣은 것처럼 옆구리가 뻐근했다.

“왔군요, 케츠모리스 경.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핫!”

말고삐를 잡으러 다가온 시종에게도 소스라치게 놀란 꼴을 보이고 말았다.

“아, 네에…….”

서서히 사라져 가는 글귀를 보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귀를 찢는 총소리가 무시무시해도 피의 숙청이 벌어질 날은 아직 멀었음을 마음에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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