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8)화 (8/129)

8화

주절주절 긴 얘기를 풀어내면서도 아드리안은 에디스의 곁을 떠나지 않더니, 테이블 모서리에 기대며 아예 편히 자리를 잡았다. 다과를 내어 온 하녀가 찻잔을 올려놓기 난감해했다.

아카데미 얘기가 이어지자 에디스는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날 아는 줄 몰랐어. 실은 연락하면서도 에디스라는 이름을 못 알아볼까 봐 걱정했어.”

“모를 리가. 우리 아카데미의 자랑이 너였잖아.”

“에이, 그건 아니지. 자랑은 누가 봐도 너였지 않아?”

몇 달 전에 졸업한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대화할 거리가 많아졌다. 그녀 혼자 팽팽하던 긴장감도 사그라들어 갔다.

“나이 들면 주름이 자글자글 잡힐 얼굴이 무슨 소용이야. 진정으로 빛나는 건 네 지성과 재능이었지.”

“겸손이 지나치네, 아드리안.”

그가 어여쁜 아미를 찡그렸다.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미안. 아티. 입에 붙지 않아서 말이야.”

이내 표정을 달리해 부드러운 미소를 녹아내리는 셔벗처럼 뚝뚝 흘리는 아드리안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을 웃도는 키에 허리선이 잘록하고 늘씬한 몸매를 가졌으면서,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아기 천사를 방불케 했다.

“아티라고 저절로 말할 수 있도록, 우리 자주 만나면 되겠네.”

또한 이런 식으로 마음을 터놓는 대화가 그의 주특기라고 했다. 한 사람에게만 친절한 오메가가 아니다.

자주 만나자는 말은 흔히 할 수 있는 예의일 뿐, 괜히 앞서서 생각하고 홀라당 넘어갈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땅딸보에 주근깨 난 사람이 ‘자주 보자’고 했을 때와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드리안은 단지 신이 내린 미모를 가진 탓에 유난히 인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에디스는 그의 행동이 추근거림과는 다르다고 판단했다.

차 시중을 드는 시종이 찻잔을 채우고 물러나자 차양막 아래의 테라스는 다시 둘만 남았다.

“…….”

잠시 어색한 침묵이 지나갔다.

오늘따라 봄 날씨답지 않게 기온이 높아서, 미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 순간은 살짝 후덥지근했다. 무슨 말이든 꺼내서 대화를 이어 보려고 생각할 즈음, 아드리안도 답답한지 자신의 셔츠 목둘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당겼다.

날씬한 손가락이 목선을 거쳐, 더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머리를 묶었던 끈을 뺐다.

보랏빛의 긴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차르르…….

눈앞에 북극의 오로라가 펼쳐졌다.

‘나를 홀리려는 게 아니야. 유혹이 절대 아니야. 날이 더워서 그래.’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기다란 베일의 머리칼을 드리우며 에디스에게 속살거리는 그의 행동에는 아찔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작은 음성조차 요정 같았다.

“갑자기 날 보자고 한 이유를 기대해도 될까?”

폭이 넓고 날씬한 남자 어깨가 살갑게 기울었다.

그 고운 얼굴을 성큼 가까이하는 몸짓에 그녀는 얼이 빠지기 직전이었다.

남자를 보는 일 순위 기준이 무조건 외모인 에디스는 순수하게 푸른 눈동자로 ‘드디어 에디스와 만나다니!’ 식의 기쁨을 드러내는 그에게 꼼짝도 못 했다.

피부밑 혈관조차 투영될 만큼 맑은 아드리안의 얼굴에 고대하는 기색조차 살짝이 내비쳤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아한 시선이 에디스의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괜스레 아드리안을 의식하게 돼서 입술을 혀로 살짝 축였다.

“그냥…… 오늘 갑자기 네 생각이 났으면 이상한 건가?”

역시 이상한 거겠지.

중얼거리는 혼잣말도 아드리안은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하지만 에디스는 자신의 의도를 감추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중이었다. 아드리안을 클라이드와 만나게 하자는 크고 웅장한 계획을 여기서 들킬 순 없었다.

마음 쓰는 심정이 역력히 뵈던 그의 표정에 단번에 햇살이 비쳤다.

“아냐! 안 이상해. 나도 에디스가 줄곧 마음에 남았거든.”

역시 오해할 만한 친근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 전 응접실을 가득 채웠던 알파들이 떠오르자 에디스는 작게 고개를 털었다. 몇 달 만에 재회한 아드리안에게서 접한 첫 장면이 현실감을 불러일으킨 덕에 혼미해지던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반면에 아드리안은 점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마에서부터 어깨까지 살짝이 쓸어내리는 머리칼에서 유혹의 향이 풍기는 듯했다.

“용건이 없어도 돼. 아니, 용건이 없으면 더 좋아. 방문 서신 보내지 말고 아무 때나 와 줘.”

일반적인 타인과의 경계선이 정말 이 정도인가? 비로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건 너무 무례하잖아.”

“그래서 지금 말하잖아. 네가 내 집에 수시로 올 수 있도록 집사한테 얘기해 둘게.”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면 남의 저택에 무제한 출입까지 허용되지는 않는다. 이건 대단한 호의가 분명하다.

아무리 봐도 아드리안답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지킬 건 지킨다던 소문과 달랐다.

에디스는 고민이 되었다. 친분을 쌓으려고 온 게 아니다 보니, 환대의 수준을 넘어서는 그의 태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시커먼 속셈을 드러내기가 좀 미안했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마침내 기회를 봐서 은근히 운을 띄웠다.

“나 있잖아, 요즘 궁에 들어갔어. 뜻밖에 황태자 궁에 배정돼서 클라이드 전하를 모시게 됐어.”

상큼한 감탄과 함께 그가 반색했다.

“와! 에디스한테 어울리는 자리구나. 그보다 높은 직책을 맡아도 좋았을 것을.”

아드리안은 저를 얼마나 대단하게 봤기에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까.

신입 시종이 황태자를 직접 모신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따로 친분이 깊어 특례를 받지 않는 한에는 에디스가 원래 담당했던 물품 관리쯤이 적당하다.

단순한 겉치레 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의 분위기가 진심 같았다. 그래서 한층 더 신경 쓰였다.

이번에는 그의 근황을 확인할 차례였다. 에디스는 조심스레 눈치를 봤다.

“아티는 정계에 진출할 생각 없어?”

아드리안의 맑은 눈매에 어떤 의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아직은……. 집안일을 돌보기도 바쁘더라고.”

그건 어렵지 않게 이해가 갔다. 신흥 상공업계에 뛰어든 레이먼드 백작가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집안일이란 깨진 접시를 새로 사는 식의 단순한 일이 아닐 터였다.

“으응, 그렇구나.”

에디스는 조금 땀이 배는 손을 스커트 위로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난 매일 궁에서 살다시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혹시…… 우리가 만날 일이 있으면 황궁으로 연락해 줄래?”

미리 작전을 세우고 온 것이면서도 밀려오는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생글거리던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강아지처럼 커다란 눈동자가 다 보일 만큼 놀란 눈을 한참이나 깜빡거렸다.

“그래도 돼?”

궁으로 연락하는 부분은 에디스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종으로서 고작 사흘 일한 시점이라 황태자 궁의 분위기를 알기 힘들었다.

업무 시간 중에 친구가 만나러 오면 절대 안 되는 걸까?

설마 그럴 리가……. 어디에나 융통성은 있게 마련일 거라고 추측했다.

궁에서 아예 사는 시종은 외출할 짬이 안 날 때 정문 근처에서 사람을 만나 개인적인 일을 처리한다고 들었다. 그녀는 출퇴근하는 직책이지만, 아드리안을 한 번쯤 궁에 초대해도 엄청난 문책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될걸.”

시커먼 속셈을 숨기며 그녀는 태연히 대꾸했다.

무엇보다 아드리안은 클라이드의 상대역이다. 2년 후에 벌어질 둘의 첫 만남을 며칠 후로 바꿀 수만 있다면 둘 사이에 스파크가 파바박 튀겠지.

문책은커녕 에디스가 두 주인공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풀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드리안은 순수하게 기쁨을 표현했다.

그가 손을 들어 에디스의 어깨 근처에서 머뭇거렸다. 손을 대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잘게 떨리는 듯도 했다.

손을 길게 펼치다가 결국은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절반쯤 주먹 쥐어 오므렸다.

가볍게 툭 치면서 ‘좋아, 한번 찾아갈게.’ 식으로 굴었으면 한결 대응하기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바심 내는 행동이 도리어 에디스의 마음도 술렁거리게 했다.

“옆에 앉아도 돼?”

소년같이 뺨을 붉힌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된다고 말할 생각도 못 하게 만드는 사랑스러움이었다.

“응? 어어…….”

그의 오므린 입술 사이로 희미하게 한숨이 새는 걸 눈치챘다.

“다행이다. 드디어 옆에 앉아 보네.”

티 테이블을 중심으로 놓인 네 개의 의자 중 하나를 끌어온 아드리안이 에디스의 옆에 바짝 붙였다. 옆으로 넘나들어도 될 정도로 간격이 좁았다.

조금 떨어져 주면 안 될까 하는 말을 꺼낼 틈도 없었다. 아드리안은 상큼한 미소를 띠며 그녀와 팔꿈치가 겹치도록 가까이 앉았다.

근접한 아드리안은 한층 눈부셨다.

갸름하면서 색이 선명한 입술 사이로 눈처럼 새하얀 치아가 돋보였다.

어떤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아드리안은 고개를 그녀 쪽으로 최대한 내밀었다.

한 뼘 거리로 서로의 코끝이 좁혀졌다.

부담스러운 거리.

또는 마음이 붕 뜨는 간격.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갈비뼈부터 명치까지 죄다 뻐근했다. ‘어라, 얘가 왜 이래.’ 따위의 이성적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정지한 상태로 왼쪽 가슴만 요란하게 펄럭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드리안과 만난 이후 내내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도 있다.

호의인지 호감인지 아니면 유혹인지…….

몽롱해져 가는 뇌리는 어떤 쪽으로도 가늠하지 못했다. 찬란한 보랏빛에 속절없이 물들어 갈 뿐이었다.

거기에 더운 날씨도 한몫했다. 체온이 오르고 그에게 후끈거렸다.

이런 기분을 아드리안도 같이 느끼는지, 푸르른 꽃망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면서 그녀를 오롯하게 응시했다.

“에디스.”

응석 부리는 듯 야릇한 음성.

“응?”

그녀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넋이 거의 다 나갔다.

“에디스…….”

최면에라도 걸린 양,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음성이 마냥 따사하게 들렸다.

늘씬한 남자 손이 아주 느릿하게 올라왔다.

어느 순간 그녀의 턱을 꿈결처럼 쥐어 잡고 엄지손가락을 턱에 살며시 문질렀다.

지극히 가벼우면서 아무것도 아닌 감각이, 치명적으로 깊은 감명을 남겼다.

사양할 여지도 없이 조금씩 스며드는 감촉은 마법과 같았다.

손끝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멍하니 풀린 입 사이로 손톱만큼의 틈이 생겼다.

입이 벌어지자 아드리안의 청아하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조금 타락한 듯하다. 악에 물든 천사처럼 예민하고 진한 접촉을 시도하면서, 집요한 시선으로 그녀의 삐죽 드러난 아래 치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