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에디스는 사소한 연결고리를 빌미로 삼아 아드리안과 만날 계획을 세웠다.
우선 그의 집에 방문 의사를 담은 서신을 보냈다. 아카데미 동기로 각자 유명세를 떨쳤으면 얼굴을 들이밀 명분은 될 듯했다. 다행히 회신이 금세 왔다.
그런데 얄팍한 봉투를 뜯어 아드리안의 편지지를 펼치는 순간, 종이가 스스로 빛을 뿜으며 글씨가 떠올랐다.
원작이 다시 눈앞에 또박또박 적힌 한글로 나타난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아기를 낳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오메가 버스 세계관을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뜬금없이 이게 왜 그녀의 시야에 팔랑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글이 계속 이어졌다.
[첫째, 성향을 이용하는 것이다. 알파의 씨를 받으면 성별에 관계 없이 오메가나 베타가 임신할 수 있다.]
[둘째, 성별을 이용하는 것이다. 같은 오메가라도 남녀 사이라면 남성의 정자를 받아 여성이 임신할 수 있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개체 수가 적어서 혼인 상대를 찾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향에 맞춰서도 임신할 수 있지만 현실 세계처럼 성별에 따라 자손을 둘 수도 있다.
베타가 전 인구 중 70~80%를 차지하는 이곳에서 실질적으로 가정을 이루는 방법은 거의 남성과 여성의 만남이다.
‘알고 있는 내용을 왜 구태여 보여 주냐고.’
괜히 겁나게.
빛이 사그라들자 편지지에는 예의를 차렸으면서도 반가운 기색이 담긴 아드리안의 답신이 쓰여 있었다. 하루빨리 만나길 원하며 오늘 당장도 시간이 된다는 글이었다.
외출복을 갈아입으며 에디스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누르지 못했다.
소설의 메인 수 오메가인 아드리안을 만나러 가기 직전 오메가 버스 설정 대목을 읽게 된 이유에 대해 골똘히 생각을 거듭했다.
아드리안이 사는 레이먼드 백작가는 에디스의 집보다 훨씬 웅장하고 잘 꾸며져 있었다. 작위는 그녀의 집안보다 낮았지만 재력은 탄탄했다.
벌이가 좋은 제조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거뒀다는 소문을 구태여 찾아 듣지 않아도, 주변에서 지지배배 정신 사납게 떠들어 대는 바람에 저절로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화려한 응접실로 접어들자 명랑한 피아노 소리와 함께 아드리안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주변에 여러 명의 알파가 태양을 바라는 해바라기처럼 하염없이 그에게 시선을 향하며 어떻게든 관심을 끌려고 안달하고 있었다.
익숙한 구도와 분위기다. 아카데미에서도 아드리안에게 초점이 맞춰진 장면은 늘 이런 식이었다.
긴 의자 가운데로 주인공인 그가 자리 잡고, 좌우에 번듯한 외모의 젊은이가 한 명씩 붙은 채였다. 다른 알파들은 1인용 의자를 끌어와 아드리안의 가까이에 몰려 앉았다.
아드리안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인 알파들 때문에 옆에 놓인 테이블이 거추장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BL 장르이다 보니 그에게 구애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남자였다. 그리고 외모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봐 줄 만했다.
그녀는 무릎을 굽혀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먼드 경.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해바라기 꽃잎 같은 알파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마치 경쟁자가 늘었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물론 그들의 경쟁자가 자신은 아니라는 걸 에디스는 알고 있었다. 이미 최고의 알파인 클라이드가 반려로 정해져 있으니, 쓸데없이 날 세우는 알파들에게 힘 빼지 말고 다른 오메가를 찾으라는 충고를 해 주고 싶었다.
겉으로는 해사하게 미소 지은 에디스는 자신을 초대한 아드리안에게 주목했다.
길게 찰랑거리는 보랏빛 머리칼을 단정히 뒤로 묶은 그는 아카데미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아드리안은 한 떨기 아이리스를 연상시키는 가늘고 우아한 목선이 압권이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대번에 화색을 띠는 얼굴은 선이 가늘고 하얬다.
너무 진하지 않은 입술로 소담한 모양을 만들어 달싹거리며, 귀에 쏙쏙 들어와 박히는 고운 음성을 지저귀었다.
“에디스, 너무 하잖아. 모르는 사이처럼 레이먼드 경이 다 뭐야.”
학창 시절에 대화 한번 변변히 못 해 본 사이치고는 격한 환영이었다.
그가 산뜻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던 알파들이 지는 꽃잎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반겨 주는 건 고맙지만 급작스럽게 그가 친근감을 표하니까 도리어 어색했다. 에디스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응접실 멀찍이서 쭈뼛거렸다.
“아드리안…….”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람에 마지막 학기를 남겨 두고 아카데미를 그만뒀다. 그리고 이젠 레이먼드 백작가를 이끄는 위치가 되었다.
요즘에는 레이먼드 경으로 더 자주 불릴 것 같지만 그녀에게만은 살갑게 대했다.
“길게 부르는 이름도 오랜만에 듣네. 친구끼리니까 편하게 아티라고 해 줄래?”
초승달의 선처럼 유연하게 휜 눈꼬리가 보는 이의 마음을 간질일 만큼 어여뻤다. 그녀로서는 정면으로 눈웃음을 목격한 게 처음이라 심장이 괜스레 쿵쾅거렸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고작해야 동창으로서 할 수 있는 흔한 호감을 표현했을 뿐이었다.
저절로 들려오는 아드리안의 사람 됨됨이에 의하면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안되어 보이는 사람을 마주치면 그냥 넘기지 못하고 꼭 도와주곤 했다. 남의 부탁도 잘 거절하지 못해서 뜻밖의 사건에 종종 휘말리기도 했다.
다만 굉장히 많은 사람들한테 관심을 받는 탓에, 단순히 집적거리려는 의도인지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지 구분하는 방법을 터득한 듯했다. 그래서 지저분한 농간에는 의외로 쉽게 벗어나곤 했다.
덕분에 여전히 순수한 감성을 지키고 있는 그는 메인 수의 자리가 아깝지 않을 만큼 환상적인 오메가였다.
에디스는 입 안으로 작게 ‘아티…….’라고 중얼거렸다.
그의 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보이지도 않게 좁혀졌다.
이렇게 예쁘게 웃으면 온 세상 여성들은 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여긴 현실이 아니라는 걸 되새겼다. 여성보다 곱상한 남성 오메가는 주변에 적지 않게 있었다.
그중에도 아드리안은 압도적으로 가녀린 미를 과시해 에디스에게조차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그가 얄팍한 다리를 휘저어 그녀와 거리를 좁혔다.
에디스는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모임이 있는 줄 몰랐어. 다른 날을 고를 걸 그랬나 봐.”
그를 추종하는 알파 떼거리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아냐, 자리를 파하던 참이었어. 우리 다른 곳으로 옮길까?”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친절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작별 인사를 마치고, 그가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면적만 넓었지 휑뎅그렁한 에디스에 저택에 비하면, 이곳은 백작 가문의 지위에 맞춰 조금은 좁아도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중앙 복도를 지나자 최신 유행의 차양막이 쳐진 테라스가 나타났다. 안뜰을 향해 펼쳐진 풍경이 궁의 정원에 비견할 만큼 고급스러웠다.
“서신을 받고 깜짝 놀랐어, 에디스.”
연락하기 껄끄러웠던 부분이 제일 먼저 언급되었다.
에디스는 차라리 우리가 안 친한 사이인 걸 툭 터놨다.
“좀 느닷없었지?”
그런데 아드리안은 어딘지 모르게 들뜬 분위기였다. 차양막 아래의 자리를 권하면서 의자 등받이에 한참 손을 얹고 있었다. 그녀가 착석하고 나서도 물러나지 않고 계속 서 있었다.
“솔직히 네가 날 싫어하는 줄 알았거든.”
그녀의 앉은 상체 옆으로 아드리안의 밝은 베이지색 코트가 오락가락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기가 좀 뻘쭘했다.
긴장되고 어색했다.
조금 멀리서 들리던 음성이 은근슬쩍 다가왔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어서인지 그가 허리를 숙이고 귀 근처까지 입술을 가져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가까이 가기가 어려웠는데……. 이렇게 만나고 싶다 하니까 나 혼자 속상해했던 것 같아.”
“싫어하다니?”
그럴 만한 접점이 없었는데.
“아아……. 넌 기억 못 하나 보구나…….”
무심결에 내뱉은 감탄사에 섭섭한 기색이 묻어났다.
늘 남의 주목을 받고 화제의 중심에서 사는 아드리안이 이런 태도를 보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는 간, 쓸개 다 빼 주려고 덤비는 친구라든가 연모를 고백하는 알파와 늘 함께였다. 에디스가 다가갈 틈은 엿보이지 않았고 어차피 그럴 의도도 없었다.
그래서 아카데미 동기로만 저를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와 얘기를 나눠 보니 느낌이 굉장히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아드리안이 그녀의 옆구리에 붙어서 거북하게 치근덕거리는 건 아니었다. 행동이나 말투는 친절함의 선을 넘지 않았다.
괜히 이성으로서 다가오는 건 아닌지 오해해서는 곤란했다. 에디스는 그의 주변에서 멋대로 헛꿈 꾸는 알파를 셀 수 없이 많이 봐 왔다.
“우리 「라그란드 제국의 변천사」 과목도 같이 수강했잖아. 그거 말고 1, 2학년 때는 겹치는 과목이 더 많았지.”
“어…… 맞아.”
과목까지 기억하다니.
뜻밖이다. 저만 의식하던 게 아니었구나.
“언젠가 수업 시간에 내가 너 옆자리에 앉은 거 기억나?”
에디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실은 거북했던 경험이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도록 옆으로 긴 책상에 아드리안이 갑자기 와 앉았더랬다. 한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 자체 발광하는 미모의 오메가가 존재하는 게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그때 일을 까맣게 모르는 척하며, 그녀는 은근슬쩍 시선만 돌려 그를 바라봤다.
저를 뚫어지라 응시하는 푸른 눈과 곧바로 마주치게 됐다.
“줄곧 어떻게 너한테 말을 걸어 볼까 생각했었어. 큰마음 먹고 일부러 옆에 앉았는데, 넌 그때 화장실에 가더라.”
한번 얽힌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몰래 분위기를 살피려다가 그의 올가미에 걸린 꼴이었다.
“그랬……었나?”
겉으로는 시치미를 뚝 뗐다.
“돌아와서는 자리를 옮겼어. 교수님이 열변하면 침 튈 정도로 제일 앞자리에 앉았지. 아무도 앉지 않는 그 자리 말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는 시늉이 부디 어색하지 않길 바랐다.
그는 마치 퇴짜맞은 남학생처럼 부끄러움을 표현했다.
“그래서 더는 알은척할 수 없더라.”
예상 밖으로 제게 내비치는 친근감을 함부로 내치기가 곤란했다.
예전에 아드리안을 피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중이다 보니, 정작 이 자리에서 마음의 거리를 두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오늘은 그녀가 제 발로 찾아오기까지 했다.
“기억이 안 나는걸. 내가 그랬다면 미안해. 아마 우연이었을 거야.”
그랬나. 아드리안은 귀 뒤를 머쓱하게 문질렀다.
“나만 신경 썼나 보네. 에디스하고 얘기 좀 해 보고 싶어서 이런 비슷한 시도를 몇 번 더 했거든. 근데 번번이 실패해서…….”
그는 불발된 과거의 경험을 늘어놨다.
교내 축제에서 마주쳤다가 아무 일 없이 엇갈렸던 때.
도서관의 인적 드문 서가에 아드리안이 나타나자 그녀가 때마침 책을 다 골랐을 때.
의외로 많은 과거를 상세히 기억하는 게 놀라웠다.
에디스가 최대한 메인 수를 피한 건 사실이지만 그가 회상하는 추억을 모조리 떠올리지는 못했다. 아드리안이 그녀를 오히려 더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려 깊고 세심한 성격 덕분인 걸까. 한 사람만 기억하는 과거가 알게 모르게 그녀의 마음에 와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