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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6)화 (6/129)

6화

클라이드는 입꼬리를 휘며 멋들어지게 미소 지었다. 문득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이 미소, 아까 집무실에서도 봤다.

서류 요약 테스트를 받기 직전에 바로 이런 미소가 떠올랐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전조라고나 할까. 독이 든 사과처럼 맛깔나 보이지만 사악한 기운이 모락모락 풍기는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벽 모서리에 장식처럼 매달린 설렁줄을 당겼다.

“심심하게 해서 미안하군. 졸음을 참는 게 얼마나 힘든지 나도 알아. 그 어려움을 덜어 주려고 이렇게 내가 친히 일감을 갖다주러 왔어.”

방 밖에 대기하고 있었던 듯 몇 명의 궁인이 곧바로 부름에 응해 들어왔다. 묵직한 상자들을 잔뜩 날라 와 책상 근처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그 속의 내용물이 얼마나 그녀를 고달프게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상자는 계속 들어왔다. 궁인들이 여러 번 왕복하면서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울 만큼 상자를 쌓았다.

“전하……. 이건.”

지나치지 않냐는 불평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뻐끔거리는 입술 밖으로 소리가 튀어나오지는 못했다. 때마침 그에게서 예의 사악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자신이 투덜거리면 클라이드는 어떻게 나올까. 저 미소 속에 든 꿍꿍이는 아마 에디스의 평안한 미래에 결코 도움의 되지 못할 것이다.

불길한 예감을 감수하고라도 속는 셈 치고 물어볼까. 미끼 앞의 물고기처럼 그녀는 눈앞에 흔들리는 지렁이를 물까 말까 하는 갈등을 하며 파닥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달랬다.

“이 많은 서류를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기어코 물어봤다.

그의 환상적인 입꼬리가 더욱 구부러지며, 날렵하고 살이 적은 남자의 뺨이 근사한 굴곡을 이뤘다.

멋있기는 지랄맞게 멋있네. 대체 무슨 속셈이길래.

“일단은 검토부터 해야겠지.”

“……전부 다요?”

“너무 많나?”

지금 장난하나. 눈으로 보고도 그런 헛소리가 나오냐는 말은 아무리 제가 극존대하길 때려치운 황태자라 하더라도 차마 할 수 없었다.

다만 불쌍해 보이면 좀 봐주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아기 고양이처럼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열심히 만들어 냈다.

“전하…….”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난 듯싶다.

“이런 보조 테이블과 딱딱한 의자만으로 일하다가는 금세 지칠 테니, 조만간 에디스의 책상도 들여야겠군.”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는 그의 시선에는 어떤 고민도 담겨 있지 않았다. 봐주는 것 따위 없다는 단호함이다.

“아니지, 책상만으로는 부족해. 업무만큼 휴식도 중요하니까 쉴 곳도 마련해 줄게.”

“저어, 말씀은 감사하지만 적당히 일하고 퇴근하면 될 텐데요.”

얼마나 빡세게 굴리려고 일할 곳과 쉴 곳을 고루고루 갖춘단 말인가.

“침대……는 좀 심했나? 누워서 자도 될 만큼 큼직한 카우치면 괜찮을 것 같군.”

에디스는 효과도 없는 불쌍한 표정 연기를 관두고 기겁하면서 황태자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가까이 마주 서니 키 차이가 많이 나는 탓에 시선을 한참 위로 올렸다.

저절로 뎅그렇게 커진 눈이 그를 응시했다.

“제가 왜 여기서 자요?”

심각하게 물었지만 그는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대꾸를 무심히 되돌렸다.

“잘 생각이야? 조금 전만 해도 빨리 해치우고 퇴근하겠다며.”

“그, 게…….”

말이 되냐고요. 농담이 너무 지나치시다고요. 이런 말도 우물우물 입안에 맴돌아야 했다.

장벽처럼 쌓아 올린 상자 중 단 하나만 열어서 검토하더라도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저만한 양의 소설을 읽더라도 연 단위로 기간을 헤아려야 할 텐데, 하물며 골 아프고 글씨도 빽빽한 공문서를 모조리 검토하라는 건 아예 여기서 살라는 의미와 같았다.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다. 클라이드는 자신을 이 황태자궁에 잡아 두고 일 노예로 부려 먹을지 모른다.

당연한 얘기지만 원작에서는 한낱 단역의 출퇴근 문제 따위는 언급하지 않았다.

에디스가 어떻게 2년 만에 고속 승진을 했는지는 오로지 상상에 맡겨야 한다. 이런 식으로 별실에 틀어박혀서 꽃 같은 청춘을 서류 더미에 매장했다면 앞뒤가 제법 잘 맞는다.

빙의한 세계에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일에 파묻혀 산단 말인가.

이번엔 진심에서 우러나온 불쌍한 표정이 되어 클라이드를 하염없이 올려다봤다.

본심은 함부로 발설할 수 없으니 마음속으로만 외쳤다.

‘날로 먹게 해 주세요, 제발……. 내 인생 목표는 봉급 도둑이라고요.’

잔꾀 굴리는 머리와 달리 입으로는 감정에 호소하는 얘기를 했다.

순발력을 발휘해서 당장 떠오르는 생각을 거짓으로 지어냈다.

“전하, 사실은 저 허리가 좀 안 좋아요.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너무 오래 공부하느라고요.”

클라이드가 솔깃했다.

“도서관?”

오오, 말발이 먹힌다.

비스듬히 기울이는 고개를 보니 분명 그녀의 급조한 핑계에 관심이 있었다.

잘됐지 뭐야.

에디스는 이것저것 얘기를 붙여 가며 주워섬겼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아카데미에 다닐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죽자 살자 책만 파느라고…….”

자신이 들어도 꽤 그럴싸했다. 막 지어낸 허풍인데도 은근히 치밀한 구석이 있었다.

장학금이 절실한 건 사실이었고, 분명 도서관에 자주 들락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도서관 서가에서 그녀가 본 책은 이곳 세계의 각종 문물과 풍습 같은 것이었다.

에디스 캐릭터의 두뇌는 고맙게도 아주 뛰어나서 열람실에 오래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녀의 아카데미 생활을 알 리 없는 클라이드는 잠시나마 안쓰러운 표정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인정머리 없는 황태자 녀석 같으니라고. 이만한 과거사라면 좀 더 측은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금세 단호해진 그가 우아한 턱을 높이 들었다.

“어쩔 수 없군. 근무 환경을 제대로 만들고 나서 업무를 시작하는 편이 낫겠어.”

“정말이요?”

성공이다. 일단은 탈출인가.

“나의 첫 수발 시종이 골골거려서야 쓰나. 앞으로 에디스와 함께할 나날이 얼마나 많은데.”

누구 맘대로 많은 나날을 함께하겠다는 건지.

그런 표현은 메인 수한테 써 주시길.

눈부신 비주얼로 저런 핑크빛 언사를 남발하니까, 열심히 일하자는 의미인 걸 알면서도 괜히 심장이 쿵덕쿵덕했다.

그런데 자신의 직책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되게 없어 보이는 뉘앙스의 이름이다.

“수발…… 시종?”

거드름 피우는 황족을 수발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썩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가 오만하게 군 적은 없지만 하여튼 상상은 그랬다.

“말하자면, 공무를 수발드는 시종이라 할 수 있지.”

결국 그냥 시종과 똑같아 보이는 자리를 구태여 수발이라고 강조하다니.

함부로 싫은 내색은 못 하고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클라이드는 충분히 오해할 만한 용어를 선택해서 이름 지어 놓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시원시원하게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더니. 물 떠다 주고 어질러진 거 치워 주는 잔심부름 업무가 에디스에게 맡겨질 리가 없었다. 황태자를 모시는 담당은 낱낱이 세분되어서 먼지떨이를 들고 장식품에 앉은 먼지를 털어 내는 궁인조차 따로 있었다.

그런데 에디스는 이 궁에 소속되어 있는 수십 명의 황실부 인력을 놔두고 그의 공무를 수발들 사람을 따로 두려는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까 집무실만 해도 황실 대소사를 살피는 시종이 한가득이었다. 클라이드의 개인 공간 한 군데에서만 일을 보는 게 아니라 긴 복도를 따라 줄줄이 시종과 관료가 일하는 방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에디스가 뭘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우선은 날 믿고 따라와 줬으면 해. 꼭 내가 원하는 팀을 짜서 할 일이 있으니.”

윗선에서 까라면 까는 게 조직이라, 이쯤 되면 그의 의견대로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침실 옆 별실에서 일하게 된 점도 걱정스럽고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는 것도 불안했다. 그래도 현실 세계에서 갈고닦은 직장 생활의 노하우를 활용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깊은 생각이 있으시군요.’, ‘정말 기대되네요.’ 따위의 긍정적인 추임새도 잔뜩 넣어 줬다.

* * *

며칠간의 휴가를 받은 에디스는 휑뎅그렁한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아버지는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넓기만 한 저택에서 그녀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제 방만 간신히 청소해 주며 세 끼 식사를 챙기는 하인 몇 명이 전부였다.

에디스의 시녀는 가세가 기울던 초기부터 없었다.

딸의 편의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아버지는 저택을 유지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고자 급여가 높은 사람들부터 해고했다. 집사와 시종, 시녀 중에서 딸의 시녀가 첫 번째 대상이 되었다.

덕분에 에디스는 모든 일을 혼자 하는 법을 배웠다. 이건 원작의 에디스가 학습하고 몸에 밴 습관이었다.

빙의 이전의 그녀도 마찬가지로 남의 손을 빌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성격이라 불행 중 다행인 점도 있었다.

일례로 오늘도 목욕 시중을 들 사람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에디스는 차라리 혼자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하인들이 목욕통에 물을 잔뜩 받아 놓고 사라진 후 그녀가 직접 목욕 도구를 사용해 씻었다.

원래대로라면 슈미즈를 입고 물에 들어가야겠지만 누가 보는 사람도 없으니 문고리를 걸고 맨몸으로 입수했다. 천연 재료로 만든 비누로 거품을 내어 씻으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실제 중세시대는 사람들이 일생에 두 번 목욕했다던데, 원작 작가가 깔끔한 걸 좋아하는지 이곳 사람들은 꽤 자주 목욕한다고 설정이 되어 있었다.

씻고 먹고 하루를 뒹굴거리며 놀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아 맞다. 클라이드에 달달 볶이지 않으려면 하루빨리 아드리안을 붙여 줘야 해.’

머지않아 격무에 시달리며 다크서클이 뺨을 뒤덮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침대와 카우치를 오가며 늘어져 있던 몸뚱어리를 일으킬 원동력이 생겼다.

에디스는 아드리안과 구면이었다.

같은 아카데미의 동기로서 수업도 몇 번 겹친 적이 있었다.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아드리안을 모르는 척했다. 클라이드와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과 마찬가지로 메인 수와도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아마 아드리안은 에디스를 이름이나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전 학기 장학생에 시험 기간마다 수석이라며 게시판에 이름이 붙곤 했으니 십중팔구 기억하겠지.

그를 3년 내내 외면해 왔지만 교내에 자자한 명성은 저절로 귀에 들어오곤 했다.

클라이드와 다른 스타일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외모가 워낙 유명했고, 사근사근한 성격에 남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심성이 인기를 부추겼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가 대운동장을 크게 한 바퀴 두르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아드리안의 애칭이 아티라는 사실도 알았다.

사방에서 아티, 아티, 노래를 불러서 나중에는 그가 제 친구라도 된 착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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