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중문을 돌아 별실로 들어서는 그의 인기척은 오후의 나른함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만큼 나직했다.
“에디스.”
팔뚝을 베고 엎드린 자세의 에디스는 꿀잠에 빠진 채 가만히 눈꺼풀을 볼 위로 내리고 있었다.
클라이드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녀가 자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 사뿐하던 발걸음이 아예 멈췄다.
별실 멀찌감치에서 한동안 분위기를 지켜보다가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다가왔다.
클라이드는 숨죽인 채 작은 테이블 건너편에 느리게 앉았다.
입 모양만 뻐끔뻐끔하게 해서 ‘에디스.’ 하고 또 불렀다.
반응이 없다.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 속 얼굴을 살펴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여쁘게 자는 그녀를 클라이드는 깨우고 싶지 않았다. 일어날 때까지 이대로 지켜보며 기다릴 셈이었다.
아무도 함부로 들락거리지 못하는 공간, 고요하면서도 은밀한 별실, 잠이 절로 쏟아지는 식사 후의 시간.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기에 제격인 분위기였다.
그는 대리석 좌상의 조각처럼 오랫동안 마주 앉아 그녀를 눈에 담았다.
날렵한 턱선으로 감싸인 입가에 다감한 미소가 어렸다.
그녀에게 높이 쌓인 서류를 당장 읽어 치우라고 닦달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클라이드는 먼지가 내려앉는 소리만 날만큼 조용히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렸다. 턱을 고이는 움직임도 역시 신중했다.
긴 손가락이 뻗어 나와 그녀의 머리칼을 향했다.
느낌도 없을 만큼 가벼운 움직임으로 한 가닥 삐져나온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그는 꿈결처럼 작은 속삭임을 흘렸다.
“너도 나처럼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니?”
여트막한 한숨이 들킬세라 조금 날숨을 내쉬다가 멈췄다.
“아니면 날 잊었다는 아까 얘기가 진짜니?”
나머지 숨은 조금씩 나눠서 쉬었다.
이렇게까지 조심할 까닭은 없건만, 일단 깨우지 말자고 마음먹고 나니 그녀의 잠든 모습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해 왔다. 에디스는 꿈꿔 왔던 대로 잘 자라 줬고, 어린 시절의 천재성을 적절히 계발해 그의 시험을 가뿐하게 통과했다.
그런 그녀가 대견하고 고마웠다.
클라이드는 그간 별실에서 근무할 시종을 찾고 있었다. 집무실의 공식 문서를 처리해 줄 시종과 별개로 전략적인 기획을 함께 짤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자리를 채울 첫 시종이 에디스라니.
조금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삐져나온 머리칼을 만지작거려도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자 그는 조금 더 과감해졌다.
음험하면서도 본능적인 욕심이 무럭무럭 자라서 그녀가 깨지 않는 동안 뭐라도 해 보고 싶어졌다.
상체를 접어 절반쯤 일어섰다.
그녀의 볼록한 뺨이 시야에 가득 차자 원초의 욕망은 빠르게 부피를 키워 갔다.
잠자는 얼굴 위로 제 얼굴을 겹쳤다.
그녀의 깨끗한 이마에 어둑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남몰래 못된 짓거리를 꾸미는 클라이드의 시커먼 속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해사하기만 한 피부를 탐욕으로 물들였다.
‘색, 색, 새액.’
앉아 있을 때는 들리지 않던 숨소리가 그의 청각을 자극했다.
고이 간직해 주고 싶은 마음과 당장 뒤집어엎고 덮쳐서 더럽히고 싶은 충동이 함께 피어올랐다.
상충하는 심리는 불과 물처럼 격렬하게 싸웠다. 불의 욕망이 이기면 저는 테이블을 뛰어넘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치아를 꽉 깨물었다.
이러지 말자.
뻑뻑하게 씹어 대는 입 안으로 희미하게 피 맛이 났다.
인내하려는 이성은 부글부글 끓는 육신을 괴롭혔다.
자칫하면 자제의 한계를 넘을 순간.
무의식중에 알파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철저하게 통제해 오던 페로몬을 의지와 상반되게 흘린 적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오메가를 홀리는 물질을 뿜어내고 있다는 의식도 없이 귀 뒤에서 꿀럭꿀럭 유혹의 향이 샜다.
에디스는 동그랗게 오므린 등을 달싹거리며 그와 전혀 다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인간의 피부에서 나오는 본연의 체취였다.
언뜻 비누 냄새가 섞이긴 했지만 단지 그뿐, 어떤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베타인 그녀는 지극히 순수했다.
알파 페로몬을 실수로 흘렸음을 깨달은 후에도 클라이드는 구태여 갈무리하지 않았다. 베타는 알파의 페로몬을 의식하지 못하니, 본능이 시키는 대로 내버려 둬도 상관없을 듯했다.
그때, 클라이드의 중얼중얼 혼잣말에는 꿈쩍하지 않던 그녀의 얼굴이 움직였다.
미간이 희미하게 좁혀졌다.
“으응…….”
불편한 신음마저 터뜨리며 에디스가 일어나려 했다.
우연인가.
그가 집적거리는 바람에 때마침 눈을 뜨려는 건가.
설마…….
페로몬에 반응하는 건 아닌가.
줄곧 쥐 죽은 듯 고요하던 에디스가 페로몬을 잠든 얼굴 위로 쏟아 낼 때 타이밍 좋게 일어나다니.
우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메가 기질이 잠재해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길게 휜 백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초여름을 맞이한 듯 상큼한 초록 눈동자가 실낱만큼 나타났다.
이대로 있다간 바짝 들이댄 얼굴을 들킬 것이다. 클라이드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물러났다.
간발의 차이로 에디스가 눈을 떴다.
몽롱하게 풀어졌던 그녀의 눈이 차츰 초점을 맞출 즈음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일부러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냈다.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정리하고 코트 앞섶도 괜히 만지작거렸다.
에디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벌떡 고개를 들었다.
“엇, 오셨습니까. 전하.”
그녀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클라이드가 언제 별실에 왔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쿨쿨 자 버렸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간담.
부스스한 모습을 한 채,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첫 번째 전략은 자지 않은 척하기였다. 일단 이마에 힘을 빡 주고 비몽사몽의 눈매를 멀쩡한 척 가장했다.
하지만 어이없어하는 클라이드의 표정을 보니 시작하자마자 망조가 든 거 같았다.
“자고 있었나 보지?”
들켰네. 그래도 일단은 잡아떼 봤다.
“아뇨.”
이렇게 간단한 대답은 시종이 황태자에게 올리는 경어체로 적절하지 못하다. 하지만 당황한 바람에 말꼬리가 짧아졌다.
클라이드는 별다른 기색 없이 도톰하니 탐스러운 입술을 좌우로 길게 늘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걸 보는 순간 에디스는 헉, 했다.
혹시 제 얼굴에 손수건이 필요한 상황인가?
민망하고 쪽팔려서 울상이 되려 했지만 차마 노골적으로 뺨을 일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왜…… 그러세요?”
그녀는 서둘러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려 했다. 뭐든 얼룩이 있으면 가려야 했다.
“가만히 있어 봐.”
클라이드는 고상한 자수가 놓인 하얀 색 손수건을 에디스에게 건네려다가, 생각이 바뀐 듯 잠시 멈칫했다.
그의 손끝을 손수건으로 살짝 말았다.
손가락에 단정하게 접힌 천 조각이 눈물 나도록 새하얗다. 난감한 눈물이 절로 솟구치려 하는 흰색이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라이드는 태연스럽게도 그녀의 뺨을 살살 닦기 시작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침 닦아 주는 매너는 죄송하지만 사양하면 안 될까요.
마음의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황태자님이 은총을 내려 주시는데 얼굴을 냅다 치울 수도 없었다.
살살 닦이는 입가는 달군 쇠처럼 새빨갛게 불탔고 손가락은 오글오글 오그라들었다. 구두 속의 발가락 역시 안으로 곱아들었다.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의도가 아닐까.
더 민망함을 느끼라고 장난치는 게 아니라면 구태여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절망적인 사고의 흐름은 갈피를 잃고 흘러 과식할 만큼 맛있었던 점심 식사를 공연히 원망하기까지 했다.
심란한 와중에도 클라이드의 섬세한 손길이 지나간 부위는 어찌나 자극적으로 간질거리는지, 주변부터 목덜미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제 됐어, 에디스.”
게다가 이름까지 막 부르신다. 우리가 언제 그리 친했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듣기에 자연스럽지?
그녀의 이름을 혀 위에 올린 클라이드는 늘 그리 불렸던 것처럼 매끄러운 음성을 냈다.
혹시 이성에 엄청 능수능란한 남자는 아닐까.
모든 게 혼란스럽다.
매 순간이 시련이다.
아냐, 원작에서 메인 수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변덕 부리면서 아랫것들 군기 잡기에 바빴어. 별로 오메가가 주변에 많지는 않았는걸.
클라이드는 주인공인 메인 수 외의 다른 등장 인물들에게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캐릭터였다. 정확히는 욕을 진탕 들어 처먹곤 했다.
제국을 다스리려면 절차와 정도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그런 거 홀랑 제치며 그의 뜻대로 몰아붙이곤 했다.
폭군이란 게 사람 목 댕강댕강 자르는 것만이 폭군이 아니다. 주변인을 죽을만치 몰아붙이는 썩을 놈도 폭군 맞다.
클라이드의 오메가를 떠올리니 다른 스토리도 기억났다.
우리의 메인 공께서는 원앤온리, 오로지 메인 수 한정으로 다정다감하고 천사 같으며 살갑게 굴었다. 둘이 폭주 기관차처럼 19금으로 삐― 하고 삐― 해서, 성혼되기 전부터 천사 같은 아기를 혼수로 먼저 챙겼으니 말 다 했다.
스토리와 개연성은 어디로 갔냐는 독자의 비난도 많았지만 90퍼센트 이상이 신으로 뒤덮인 뽕빨물이었던 탓에 그딴 거 중요치 않았다.
에디스가 읽던 소설은 아늑한 쓰레기통을 찾는 독자의 성지였다.
빙의 전의 그녀도 물론 삐― 부분에만 열심히 책갈피 하면서 읽었더랬다.
물론 읽을 때만 좋았다.
뜬금없이 딴 세상에 떨어져 진상 황태자를 직접 수발드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기 전까지만 말이다.
이젠 ‘작가님 제발 개연성 좀!’을 외치며, 한 인간이 어떻게 그리 이중인격적으로 다정남과 폭군남을 오갈 수 있는지 개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클라이드는 그녀를 대할 때도 극단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난도 높은 시험을 갑자기 치를 때는 언제고 지금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톡톡 닦아 주고 있으니.
얼굴 빨개지는 분위기를 뒤늦게나마 수습을 하고자 에디스는 땅 파고 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아직 일거리가 없어서 잠시 휴식했어요. 시간이 지루하게 흐르더라고요.”
말을 뱉고 보니 왠지 실수한 느낌이었다. 긴장을 풀려고 잠시 엎드려 있었다든가 몸이 안 좋다든가 하는 핑계를 대고, 일 얘기는 뺐어야 했다.
그는 다 닦은 손수건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어서 치웠다. 얼룩이 에디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다.
이런 매너란…… 하아, 좋긴 좋은데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기분이었다.
그 얼룩이 무슨 얼룩인지 너무 잘 알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