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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4)화 (4/129)

4화

에디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흔들리는 동공을 각종 보고서에 간신히 맞추며 서류의 탑을 차곡차곡 깎아 내려야 했다. 마음은 급하고 옆방에는 수십 명의 인원이 대기 중이었다.

속독으로 겨우 읽자마자 그가 손가락을 다각 튕겨 주의를 환기했다.

“이제 보고해. 시간은 3분 주지.”

뒷골이 쭈뼛 곤두설 만큼 무시무시한 시간제한과 함께 제일 작은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3분이라니, 지금 장난하나.

마음 한편으로는 열이 뻗쳤지만 지금은 1분 1초가 아쉬웠다.

여유 부릴 틈이 없다.

그녀는 어버버 더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어, 사, 상비군의 유지비가 지나치게 많이 든다는 탄원이 몇 건이나 접수되었습니다. 전시체제도 아닌데 이럴 필요가 있느냐는 견해와 함께, 감히 누가 황실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느냐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계속해.”

“반면에 상비군 옹호 글은 한 건이었습니다. 카티네스 백작은 지금보다 황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면서, 귀족을 상대로 세금을 매길 영지 규모와 재산을 상세히 조사해야 한다고 제안을…….”

“좋아, 그만.”

생긴 건 천상에서 방금 떨어진 존재 같으면서 하는 짓은 엄청 가차 없었다.

마음에 영 안 든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클라이드의 말꼬리가 짧아졌다. 마치 친한 사이처럼.

그가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주목 당하는 얼굴과 어깨, 손에 술렁술렁한 기분이 들었다.

메인 공다운 외모가 심히 부담스러운 데다가, 문서를 정리해서 설명한 게 제대로 되었는지도 걱정이었다.

3분을 채우지 못하고 그가 설명을 끊은 걸 보면 역시 별로였겠지.

달리 보면 설명을 못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래 봤자 조금 혼나고 쫓겨나겠지.

맞아, 왜 그 생각이 이제야 떠올랐을까.

클라이드가 너무 몰아붙이는 바람에 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던 것 같다.

배꼽 앞으로 모은 에디스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다가,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손가락에 시선을 멈춘 순간 픽 웃었다.

책상 위의 작은 종을 치자 시종장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새로 서기로 온 케츠모리스 경이 내 시험에 통과했네. 꽤 쓸모 있을 것 같아.”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초로의 시종장이 에디스를 곁눈으로 보며 작게 감탄했다.

“오오, 전하의 시험에 통과하는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군요. 유능한 인재를 찾으신 것에 감축드립니다.”

“원래 지원한 부서는 우리 궁이 아니라던데, 그건 그대가 나서서 해결해 주게나. 경을 딴 곳에 빼앗길 수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시험?

말도 안 되는 분량의 서류를 들이밀며 시간제한까지 걸었던 게 시험이었다고?

“케츠모리스 경.”

너무 황당한 기분에, 그가 부르는데도 대꾸하지 못한 채 어벙하게 입만 뻐끔거렸다.

클라이드는 심경을 추스를 틈을 주지 않고 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 잘난 얼굴을 에디스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굴곡이 깊은 이목구비가 제멋대로 매력을 과시하는 가운데, 특히 요사하게 접히는 눈꼬리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경?”

정신이 번쩍 났다.

“네? 네!”

“그대는 오늘부터 내 집무실과 별실을 오가며 업무를 돕도록 해.”

이 남자, 얼굴을 치우지 않는다.

다른 의미에서 또 정신이 혼미해진다.

메인 공이라면 수한테 매력 발산해야지 저한테 이러면 어쩌란 말인가.

엉덩이 찍히고 서류로 달달 볶이고 이젠 부서 변경까지 어려워지는 사태에 이르고 있지만, 에디스는 소설 전체의 개연성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의 눈부심에 억지로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그러고 보니 불길한 말을 또 들은 것 같다. 클라이드가 내린 새로운 지시사항에 에디스의 머리로는 상상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별실…… 이라시면?”

애매한 방 이름이라서 궁금해했더니 그가 명쾌하게 확인 사살을 날려 줬다.

“침실과 붙어 있는 방이야.”

그녀의 동공이 바람 거센 겨울날의 마른 잡초처럼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러니까 클라이드의 침실과 붙어 있는 방이 자신의 업무 공간이 된다는 말인가.

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황태자씩이나 되어서 헛소리가 너무 심하시다.

“아니, 저…….”

설마 하는 심경으로 확인하려는 찰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원했던 부서보다는 방 크기가 작을 거야. 지내기에 다소 불편함이 있어도 업무의 일환이라 생각해 주길 바라.”

문득 클럽의 조명처럼 나타났던 소설의 한 부분을 되새기게 되었다.

‘에디스를 늘 곁에 두곤 했다.’

이 말이 그 말이었구나.

문맥 그대로 늘 곁에 붙여 놨던 거였어.

악의 마수에서 벗어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 *

황태자의 집무실을 나서며 다른 시종이 그녀를 별실로 안내했다. 그 사람은 뒤따르는 에디스를 연신 흘끔거렸다.

“왜 그러세요? 뭐가 잘못됐나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시종이 작게 귀띔했다.

“케츠모리스 경에게 놀랐습니다. 시험에 통과하다니.”

“네? 아, 어쩌다 보니 난감하게 됐네요.”

“난감하다니요. 전하가 내놓는 턱없이 어려운 관문을 넘은 사람은 여태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도 당한 경험이 있던지 시종이 혼자 구시렁거렸다. 생전 처음 보는 내용의 보고서를 불시에 왕창 던지며 요약과 브리핑까지 하라니. 그것도 하늘 같은 전하께서 노려보는 앞에서.

“하긴, 입이 얼어붙긴 하더라고요.”

“신입 관리 중에서 운 나쁘게 전하의 눈에 띄면 그런 식으로 전하께 시험을 치르게 되지요.”

“그런 거였나요.”

에디스는 귀 끝을 쓱쓱 긁으며 쑥스러운 기분을 숨겼다.

별실이 좁을 거라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많은 인원이 공장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일하는 정무부 사무실에 비하면 면적이 좁다는 뜻이었다.

클라이드가 잠을 자는 침실과 같은 분위기로 황가의 품격에 맞는 인테리어가 되어 있어서, 일반 사무실과는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지내기에 불편하리라는 걱정은 붙들어 매 놔도 되지만 황태자의 침실과 너무 가깝다는 점은 신경 쓰였다.

침실과 별실의 경계가 고작해야 절반만 둘러친 가벽이었다. 문도 없고 가릴 만한 커튼도 없었다.

별실 책상 위에는 검토하다가 만 듯한 문서가 제법 많았다. 클라이드가 잠들기 전에 여기서 남은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거 좀…… 황태자의 개인 비서 느낌인걸.’

불시의 시험에 통과해서 출셋길이 열린 건지, 크나큰 재앙이 닥친 건지 아직 판단하기 힘들었다.

에디스가 그를 피하려고 한 이유는 원작에서 워낙 클라이드의 주변에 사건과 사고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 밑의 직속 부하는 당연히 무지하게 고달팠다.

하지만 힘들 것 같은 예감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문제는 원작이 25화까지만 무료 연재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승전결 중 ‘기’만 공개된 것이다.

아마 작가는 작품의 뒷이야기를 충분히 써서 유료 연재하려는 계획인 듯했다.

현실의 그녀는 캐시를 장전하고 출간 공지를 기다렸지만 몇 달째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에디스가 가진 정보는 25화 분량과 소개 글이 전부였다. 거기에 클라이드가 폭군이 된다고 쓰여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믿었을 뿐, 실제로 어떤 격변의 세월을 겪을지는 알 수 없었다.

추측과 불길함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그나마 에디스가 글로 읽어서 확실한 부분이 있었다. 메인 공인 클라이드가 메인 수인 아드리안을 만나 갱생한다는 점이었다.

이건 소설의 큰 흐름이라 아마도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세계관 최강의 우성 알파한테는 그에 알맞은 오메가가 필요한 법이 아니겠어?’

이곳은 현실과 달리 알파와 오메가라는 기질이 존재했다.

사람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기준이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베타이다.

이것은 남녀 성별보다 중요해서 가정을 꾸려 아기를 낳는 단위가 되기도 하고, 군림과 복종의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각각의 성향은 어느 쪽이 우월한 게 아니라 단지 다른 것이다. 알파는 힘과 논리에서 앞서고 오메가는 통솔력과 사교성, 베타는 협동심과 동화력이 뛰어나다.

또한 알파와 오메가 중 극소수는 특별히 기질이 강해서 우성으로 일컬어진다.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는 주로 핏줄을 따르는 탓에, 소위 훌륭한 부모 밑에 잘난 자식이 태어나곤 하는 것이다. 그들이 곧 지배 세력이 되고 최상위 귀족과 황족으로 자리 잡는다.

황태자인 클라이드는 바로 그 정점에 있었다.

남다른 우성 알파의 기질을 뽐내는 이 남자. 남들은 타고난 재목이라고 칭송하지만 에디스의 눈에는 기피 대상 첫째로 손꼽는 캐릭터였다.

그의 그늘에서 과로사할 위기를 피하려면 하루빨리 아드리안을 붙여 줘야 했다.

그녀의 목표는 급여 꿀만 빨면서 일 적게 하고 뺀질뺀질 사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메인 수 아드리안이 클라이드를 만나는 시기는 아직 멀었는데…… 이거 어쩌지.’

에디스보다 한 살 많은 클라이드는 현재 21살이다. 로맨스가 시작되는 나이가 되려면 앞으로 2년이나 남았다.

그동안 에디스는 말단인 서기에서 고속 승진을 통해 수석 서기를 거쳐 시종까지 올라가고 클라이드의 심복이 된다.

무려 2년을 클라이드의 밑에서 굴러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한번 시기를 바꿔 볼까?’

아까의 기현상을 섣불리 단정 지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 본대도 뭐 어때.

실패하면 그만, 잘되면 좋은 거지.

골 아픈 고민을 너무 많이 해서 편두통이 올 것 같았다.

황태자 궁에서의 점심 식사는 당연하게도 엄청 잘 나왔다. 에디스는 배고프면 화나는 성격이라 그나마 먹을 것으로 속풀이 했다.

먹방 크리에이터처럼 실컷 먹어 치운 후에는 복잡한 생각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클라이드의 책상을 함부로 손댈 수도 없으니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했다. 사이드 테이블에 보조 의자를 끌어다가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종국에는 엎드려 잠들고 말았다.

낯선 환경에서 이른 아침부터 너무 긴장한 탓인지 그녀는 완전히 숙면을 취해 버렸다. 클라이드가 나타나는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고, 두꺼운 카펫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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