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핫.”
놀라서 움찔하고 말았다.
얼얼한 엉덩이를 잠시나마 잊을 만큼 놀랐다.
편히 일하기 위해 차려입은 드레스는 실용성이 좋았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성장을 한다면 고래 뼈를 박은 보정 속옷을 받쳐 입고 스커트도 엄청나게 크게 부풀렸겠지만, 지금은 업무 중이었다.
따라서 온종일 책상에 앉아 일하거나 급할 때 걸음을 재게 해도 걸리적거리지 않을 만큼 간소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주름 잡힌 허릿단 아래로 손이 스치려 했다.
옷 주름이 여트막하게 살랑거리고, 그 너머로 닿지 않은 타인의 감각이 느껴졌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은 남성적인 매력이 돋보였다.
섬세한 근육이 숨은 손목과 팔꿈치는 표준적인 인간형을 잡아 늘인 듯 길쭉했다. 현실 세계에서 살 때 가장 인기 있던 게임의 캐릭터도 클라이드만큼 완벽하지는 않았다.
희미하던 감각이 그녀에게 점점 부피를 키워 갔다.
풍성하지 못한 스커트를 뚫고 그가 그녀에게 존재감을 전했다. 덥석 엉덩이를 움켜쥘 만큼 무례하지 않으면서도, 살랑거리는 옷자락을 통해 클라이드가 저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만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희미하게 온기까지도 체감되는 듯했다.
워낙 짧은 찰나였던지라 실제로 체온이 전해질 리는 없지만 화끈거리는 엉덩이가 마치 그에게서 끼치는 열감과 비슷한 착각이 들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동영상의 멈춤 버튼을 누른 듯, 그도 그녀도 꼼짝하지 않았다.
에디스는 억지로 그의 이목구비를 응시하도록 강요라도 받은 양 딴 데로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어색해 죽겠고, 제 허리 아래로 들이닥친 손길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서너 번의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도록 둘 사이의 한 뼘 공간에 침묵만이 흘렀다.
“아……. 실례.”
실크처럼 매끄러운 음성이 도리어 현실감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메인 수를 빼놓고 등장인물 모두가 반하고 극찬하던 클라이드의 남성미는 비단 외모만이 아니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위엄이 깃든 말투가 청각을 자극했다.
“아…….”
맹하게 감탄사만 따라 했다.
에디스는 이성을 볼 때 성격보다 외모를 먼저 보는 솔직한 내면세계를 가진 사람이라,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의 손길이 스커트 주름을 따라 미끄러졌다.
유연하게 휘젓는 손목의 곡선이 어찌나 우아한지, 아픈 엉덩이를 만지려 한 게 아니라 단순히 손을 뻗어 그녀를 달래려 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허리를 쭉 내민 채 정지해 있던 에디스가 도리어 엉뚱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었다.
묘한 기류가 잠시 머물다 간 것을.
그녀가 스커트 자락을 톡톡 털어 내며 몸가짐을 바로 하는 동안 클라이드는 공연히 제 입가를 주먹으로 막고 딴청부렸다.
“그대, 못 보던 얼굴이군.”
사흘 전 임관하던 날 여러 사람에 섞여 한꺼번에 인사를 드렸지만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엊그제 서기로 임명받아 일하게 됐습니다. 긴 초록 뿔의 에디스 케츠모리스, 페들턴 공작 3세의 장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가문과 영지를 포함한 풀네임을 밝히자, 그가 뭔가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긴 초록 뿔의 영지라면…….”
클라이드와 비슷한 표정을 에디스는 다른 데서도 이따금 보곤 했다.
사람들은 망해 가는 공작 가문을 대하며 다양한 반응을 보였는데, 안쓰러워하거나 피하려고 하는 이가 있는 반면에 그처럼 놀란 기색만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긴 초록 뿔의 케츠모리스 가는 한동안 황실의 행사에 얼씬도 안 했다. 값어치 있는 물건을 죄다 팔아 치워 연회에서 기본적인 체면도 차릴 수 없게 되어서였다.
옷은 평상복을 제외하고 할머니가 입던 곰팡내 나는 드레스만 남았고 장신구는 모조품뿐이었다.
비단 외부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몇 시간보다 더 큰 문제는 남의 연회를 즐긴 만큼 케츠모리스 가에서 보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연회에서 잘 대접받은 후에는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보내거나 자신들도 만찬을 준비해야 하는데,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인 에디스의 집안은 그럴 수 없었다.
사교계에서는 케츠모리스 가가 파산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과거의 영화를 반영하듯 대귀족이 밀집한 언덕에 자리 잡은 저택은 정원에 잡초가 무성하고 철제 대문은 녹슬었다. 아직 저택이 근근이 유지된다고 아는 사람도 있었고, 다른 이에게 팔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용인이 거의 다 나간 상태로 공작은 허구한 날 도박장에, 딸인 에디스는 아카데미에 있었으니 주변에서 쑤군댈 만도 했다.
그래도 클라이드는 떠도는 소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그녀를 단순히 새로 온 서기로 대했다.
“내 사람으로 그대가 들어왔는지는 몰랐군. 워낙 오랜만이라 얼굴도 잊었어.”
“저도 황궁이 오랜만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모든 게 낯설어 보이네요.”
“그럼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가?”
“황송하지만 그렇습니다.”
빙의한 육신은 좌뇌와 우뇌가 따로 노는 것 같았다.
학습한 것이나 논리적인 사고는 원작의 시종 에디스처럼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갔다. 옛일도 단순한 사건은 온전히 기억했다. 반면에 감정은 초기화되어서 사람에 대한 호불호를 새로 정해야 했는데, 감정이 포함된 기억도 남지 않았다.
따라서 클라이드와 추억이 있지만 아무것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상태는 두 가지 경우가 가능했다.
별일 없이 지나친 탓에 기억할 여지도 없거나, 또는 특별한 감정이 깃든 기억이거나.
“그대가 날 모른다니 아쉽군. 앞으로는 자주 마주칠 기회가 있겠지.”
그녀는 자칫 오해가 생길지 모르는 상황을 짚어서 설명했다.
“여기서는 임시로 며칠만 일하는 중입니다.”
“임시라니?”
“원래 정무부에 지원했는데 인사 담당자가 실수로 잘못 배정했거든요. 조만간 제자리로 돌아가기로 얘기가 되었습니다.”
황태자 궁의 정식 시종이 아니라는 말에 클라이드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기분이 좀 나빴으려나.
황태자 궁에 있기 싫어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여지도 있을 것 같아 그녀 나름대로는 조심히 얘기했건만 별로 효과가 없어 보였다.
군림하는 위치의 황족은 제 손에 들어온 것을 내어놓기 싫어하는 습성이 있게 마련이니 클라이드도 그와 비슷한 심리이지 않을까 싶었다.
읽었던 소설 내용을 떠올려 봤지만 그의 수족 중에 딱히 탈주 각을 잡은 사람이 없어 참고가 되지 못했다.
에디스가 아직 욱신거리는 엉덩이의 아픔을 꾹 참으며 군신의 예를 갖추자, 클라이드는 그녀의 단정하게 정리된 백금발 정수리를 지그시 응시했다.
함부로 눈 마주치기가 뭣하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처분을 기다렸다.
길지 않은 시간이 초조해서 저절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태자의 집무실은 대형 응접실을 방불케 할 만큼 넓었다. 정면으로는 거대한 금도금의 책상과 푹신한 의자가 있었고, 왼쪽 공간에는 소파와 낮은 테이블, 창가에는 티 테이블 세트, 벽에 빙 둘러서는 책과 서류가 빼곡히 꽂혔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물러난 클라이드가 황실을 상징하는 사자 문양의 카펫을 가로질렀다.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는 모습이 영 삐딱했다.
불길한 예감이 에디스의 뇌리를 번개와 같이 스쳤다.
“그렇다면 재배정되기 전까지 나 좀 도와주겠나.”
윗분이 도와달라는 말은 반드시 명을 따르라는 말과 같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의 준비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 쌓인 문서를 내가 미처 다 파악하지 못했어. 일이 좀 많아야 말이지. 그러니 그대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요약해서 구두로 보고해 주게나.”
까딱 기울이는 고개가 책상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고갯짓하는 방향을 따라간 에디스의 눈이 순식간에 댕그랗게 커졌다.
책상 구석에 쌓인 서류 더미가 거의 탑 높이였다.
저렇게 많은 걸 당장 읽고 정리하라는 걸까. 설마 이 명령이 진짜란 말인가.
그렇다면 한마디로 엿 먹으라는 거다.
제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서로 만난 기억도 없고 이름만 간신히 아는 신하에게 이런 시련을 안기는지.
집무실에 알짱거렸지만 황태자 궁에 근무하기는 싫다는 것이 클라이드의 배알을 단단히 뒤틀리게 한 듯했다.
“어서.”
재촉하면서 얄궂게 휜 입꼬리가 예술적으로 멋있지만 한편으로는 재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삐질삐질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책상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구르라면 굴러야지 뭐.
시종 중에서도 제일 말단인 서기가 하늘 같은 황태자 전하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다행히 에디스는 영민한 두뇌를 타고난 캐릭터였다.
하드웨어가 훌륭하다는 건 큰 장점이다. 덕분에 문서를 들추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내용을 웬만큼 파악할 수 있었고, 두 권째 넘어가면서 속도도 붙어 빠르게 훑게 됐다.
그런데 세 권째 보고서를 넘길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평범한 종이인데, 넘기자마자 마치 형광 물질이 발린 듯 심상치 않은 빛이 뿜어졌다.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어야 할 글은 보이지 않고 가독성 좋은 한글이 큼지막하게 두드러졌다.
[클라이드는 최측근 시종인 에디스를 늘 곁에 두곤 했다. 그녀는 어려운 집안 배경을 딛고 일어나 황태자 궁에서 우수한 능력과 수완을 발휘한 자였다.]
“앗, 이건…….”
빙의해서 4년 남짓을 살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깜짝 놀라서 헛숨을 들이키자 옆에 있던 클라이드가 보고서를 곁눈질했다. 의아하게 여기는 표정으로 미루어 에디스밖에 보지 못하는 현상인 듯했다.
“무슨 일이지?”
한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아닙니다.”
이건 소설의 한 대목이었다. 지문으로 대충 읽고 넘어가는, 전혀 중요치 않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하필 에디스의 시야에 이것이 어른거린다면 특별한 암시가 있다는 뜻이지 않을까.
설마……. 까불지 말고 여기에 적힌 대로 따라 하라는 뜻?
아니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은 황태자의 측근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뜻?
앞날이 어느 쪽으로 흐를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의지를 갖고 어떤 일이든 꾸미는 게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아냐, 글 한 단락만으로 성급히 판단할 필요는 없어.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해 머리를 퍼뜩 흔들었다.
그동안 클라이드는 팔짱 낀 채 도도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에디스가 서류에 집중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다가, 중얼거리며 혼자 도리질 치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구경했다.
이따금 뾰족 꼬리를 단 악마처럼 눈매를 못되게 세우며 비밀스러운 궁리도 했다.
머지않아 시종장이 나타나 클라이드에게 고했다.
“전하, 회의에 드실 시간입니다.”
“다들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게. 곧 갈 테니.”
심술이라면 너무 지나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는 집무실 옆의 대회의실에 잔뜩 몰려 있을 고위 귀족과 장관급 인사를 무작정 기다리게 하며 에디스가 서류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