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의 집착 받는 시종이 되었다 (2)화 (2/129)

2화

< 1장. 굴러도 하필 침실에서 구르는 인생 >

BL 세계에서 말도 안 되는 인생을 살기 전까지, 그녀는 제법 직장 생활을 잘한다고 평가받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특출하게 뛰어난 능력도 없으면서 좋은 얘기를 듣고 일했던 건 이유가 있었다. 스스로 자화자찬하긴 뭣하지만 저는 말발을 잘 세웠다.

입을 잘 턴다고도 하지.

윗분들한테 칭찬과 현실적 평가의 중간을 오가는 아부를 하면 제법 효과가 좋았다. 그녀의 얼굴이 썩 미모가 돋보이지는 않는 편이라도 벙글벙글 웃으면 또 플러스 점수를 받았다.

덕분에 남들 야근할 때 은근슬쩍 바쁜 일 있다며 빠져나오더라도 미운털 박히는 일은 없었다.

그녀에게 각박한 직장 생활의 활력소는 단연 싯구싯구한 소설이었다. 출퇴근 길에 글을 읽다가 흐뭇하면서도 흡족한 내용이 나오면 주변에 누가 제 액정을 보는 사람이 없는지 살피며 머리카락으로 가리곤 했다.

하지만 재미있고 따끈따끈한 소설은 읽기에나 좋지, 누가 여기에서 살고 싶다고 했나.

느닷없이 BL 세계에서 열여섯 살짜리 베타 여자아이가 되었을 때, 돌아갈 방법도 찾지 못하고 그냥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면서 에디스의 목표는 원래 살던 세계와 비슷해져 버렸다.

중간만 가자. 튀지 말자. 대충 살자.

언제 되새겨도 참으로 주옥같은 좌우명이다.

바람직한 가치관 덕분인지 이곳에서 4년이나 살며 환경에 적응하는 동안 아무도 그녀가 딴 세계에서 왔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에디스는 별로 가족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편이었다.

가문의 지위는 공작이지만 돈은 없었다. 아버지가 쓸데없는 사업으로 가산을 절반 탕진하고,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술과 도박에 빠져 나머지 가산 절반을 탕진했다.

그녀가 낯선 세계에 갓 적응하던 무렵 아버지는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도박장을 들락거렸고 어머니는 심신이 쇠약해져 에디스의 동생과 함께 친정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다지 유능하지 못한 가정교사의 손에서 학습하고 아카데미에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동안 가세가 끝장으로 기울면서 종국에는 돈벌이에 나서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원작대로 에디스가 피치 못하게 관리가 되는 과정이다.

에디스도 자신의 밥벌이를 직접 해야 하는 것에 불만은 없었다.

책 속에서까지 현실처럼 삶이 쭈글쭈글하다는 점은 애석하지만, 아카데미를 통해 지원서를 넣은 자리에 무사히 임관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분명 제국의 공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정무부에서 일하기로 했는데…….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황태자 클라이드의 궁으로 출근해야 한단 말인가.

‘이거 좀…… 인생 꼬이는 느낌인데?’

황궁 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의 허름한 사무용 별관이 아니라, 정면으로 쭉 들어가 으리으리한 아치형 홀 입구로 진입해야 하는 그녀에게서 폐가 목구멍으로 넘어올 만큼 깊은 한숨이 흘렀다.

‘에효, 빙의했으면 현실보다는 멋져야 하는 거 아냐? 이건 무슨, 나 혼자만 찌질찌질 궁상이야.’

원작의 에디스는 메인 공과 메인 수 사이를 오가며 메시지를 전해 주는 심부름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원작과 달리 아예 처음부터 클라이드를 만나지 않고 싶었다.

서로 엮여 봤자 좋은 꼴 하나 못 볼 게 뻔했다.

연애 놀음은 저희끼리 알아서 하라지. 두 주인공 사이에서 셔틀 돈다고 급여 더 받지도 못하면서 고생만 오지게 하니까, 아주 멀리 떨어져서 나름대로 유유자적하는 봉급쟁이 인생을 살려고 했다.

그런데 에디스의 첫 시도는 마음먹기가 무섭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인사 담당자의 말도 안 되는 실수가 벌어진 것이다.

이게 바로 원작의 힘일까. 정무부의 신입 정무원으로 배정되어야 하는 것이 황실부, 그것도 콕 집어서 황태자 궁의 서기가 돼 버렸다.

인사 담당자의 탓을 무작정 할 수도 없었다. 그 사람은 공작가의 영애씩이나 되어서 일반 관리로 일하겠다는 에디스의 지원서가 도리어 오류라고 생각했다.

지위 높은 가문은 으레 서기를 거쳐 시종, 시종장의 단계로 오르며 황실과 친분을 쌓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돈 없다고 동네방네 떠들며 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

체념에 가까운 불평을 입 안으로 중얼거리며 그녀는 클라이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황태자 궁은 글로 읽은 것보다 굉장했다. 그녀의 상상력이 부족했던 탓인지 작가의 표현력이 모자랐던 건지는 모르겠다.

천장이 까마득한 홀 가운에 서서 풋내기처럼 입을 어벙하게 벌렸다가, 어떤 궁인이 지나가며 흘끔거리는 바람에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다.

집안이 파산 지경에 이르기 전에는 어린 에디스가 이따금 궁에 들렀다고 하니 모르는 티를 내선 안 됐다.

에디스는 되도록 황태자의 눈에 띄지 않도록 행동하면서, 인사 부서에 들러 이의 신청을 했다.

“1순위 희망에 정무부라고 여기 지원서에 분명히 써 놨잖아요.”

인사 담당자가 서류철을 뒤적여 꺼낸 그녀의 지원서에서 착오가 생긴 대목을 콕콕 집어 가며 항의했다.

“하지만 부서 배정이 끝나서 인제 와서 바꾸기가…….”

“바꿔 주셔야죠, 당연히! 담당자님 실수로 한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그래도.”

“안 바꿔 주면 정무부 장관님한테 면담을 요청하겠어요. 장관님이랑 저희 아버지랑 막역한 사이인 거 혹시 아시는지.”

되지도 않은 허풍이었지만 상급 귀족끼리의 친분을 알지 못하는 인사 담당자는 희게 질렸다.

“최, 최대한 해 보겠습니다.”

“가능한 한 서둘러서요.”

“……예, 빨리.”

단단히 얼러 두고 인사 부서를 나오며, 며칠만 황태자 궁에서 버티면 될 거라고 예상했다.

에디스는 최선을 다해 원작에서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고달픈 심부름꾼이라는 역할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역사상 길이 빛나는 폭군이 될 클라이드의 주변으로는 목숨줄이 오락가락하는 칼부림 사건이 숱하게 벌어질 예정이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최선이었다.

황태자 궁에서 한동안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조용하고 무탈한 근무 환경을 맞이할 수 있었다. 궁의 비품을 체크하는 담당이 되었는데, 골 아프면서 티는 전혀 안 나는 일이었다.

* * *

하지만 클라이드의 시야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놈의 원작 버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근무한 지 고작 사흘째 되던 날, 황태자의 집무실 비품을 점검하던 중이었다. 클라이드가 나타나기 전에 재빨리 처리한 후 사라지려고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비품 목록에 적힌 것과 집무실에 갖춰진 물건이 일치하는지, 혹여 분실한 건 없는지 확인하느라 손과 발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낡아서 교체할 부분이나 수리한 곳을 기록해 두는 일도 함께해야 했다.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를 나온 에디스가 맡은 업무로는 보잘것없지만, 며칠 있다가 부서를 옮길 거니까 임시로 하는 일이 무엇이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엄하신 황태자 전하의 공간에서 도둑질할 간 큰 인간은 없는 덕분에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래도 큰 설비는 물론이고 작은 페이퍼 나이프 하나까지 모조리 고가의 물품이다 보니 꼼꼼히 체크했다.

문득 출입문을 둘러싼 몰딩에 칠이 벗겨진 부분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장부에 메모를 남기며 다시 살펴봤다.

“흠, 문틈이 좀…….”

잠깐 맡은 일에 이렇게나 성실히 임하는 신임 서기가 바로 나 에디스라고 자부심을 느끼며 문 반대편도 기웃거렸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거대하고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문은 여닫는 소리도 없었다.

퍽—.

물컹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엉덩이에 격한 통증이 불꽃처럼 피었다.

열린 문이 그녀를 강타하고, 문고리가 정통으로 골반 옆 엉덩이를 찍었다.

“악!”

기겁하는 비명도 잠시.

열리는 문의 기세에 떠밀린 몸뚱이가 앞으로 쏠렸다. 바로 몰딩을 관찰하던 벽으로.

철푸덕—.

속수무책으로 날아가는 허수아비 꼴이 되어 벽에 부닥쳤다.

어깨가 기우뚱하게 기운 채 문짝과 벽 사이에 끼고 말았다.

긴박한 순간에도 다행히 머리를 박는 불상사만은 피했다.

눈부신 반사신경을 발휘한 자신을 속으로 칭찬하는 한편으로, 일절 운동 따위는 하지 않아 말랑말랑한 어깨가 완충작용을 해 주는 것에 약간의 자괴감을 느꼈다.

엉덩이 찍힌 건 꽤 아프지만 벽과의 만남은 별다른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메인 수라면 불의의 사고로 연약하게 상처 입는 장면이 그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문짝과 벽 사이에 끼어 바동거리는 일개 서기가 있을 뿐이었다.

1초도 못 되는 짧은 순간에 벌어진 사태.

곧이어 문 너머에서 환한 후광이 비치는 존재가 나타났다.

같은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눈부신 미모의 사내였다.

머리통이 예상보다 한참 위에 걸려 있었다. 에디스 시선도 위로, 더 위로 올라갔다.

삼백안이 될 만큼 눈매를 치뜨자 놀란 표정의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클라이드…….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주인공이라고 아예 써 붙이고 다니는 대단한 면상이다.

청명한 밤의 빛깔과 같은 머리칼 뒤로 공교롭게도 햇살 밝은 창문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살짝 웨이브 진 머리칼은 하이라이트 효과로 사진 보정을 한 것처럼 눈부셨다.

사교계에서 널리 회자되는 외모의 핵심인 황금색 눈동자는 진짜로 번쩍번쩍했다.

눈매가 날카롭고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에 안광이 강렬한 탓에, 그저 홍채의 색이 비치는 거라고 치부하기 어려울 만큼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메인 공의 감상 포인트는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에디스의 상태가 여의치 않았다.

손잡이에 찍힌 엉덩이가 참을 수 없도록 아팠다.

본능적으로 몸이 뒤틀렸다.

장골 바로 옆으로 살점이 적은 부위에 집중하며, 에디스는 허리를 꿈틀꿈틀 방정맞게 버둥거렸다.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면 분명 엉덩이 까고 얼마나 다쳤는지 살펴봤을 것이다.

클라이드가 문을 닫고 다가오는 순간에도 ‘하, 씁, 하, 쓰으읍.’ 하는 소리를 내며 통증을 견디느라 낑낑거리고 있었다.

아픈 티를 감추지 않는 에디스를 보며 그가 덩달아 당황했다.

“이런……. 많이 다쳤나?”

정신 사납게 난리 치는 엉덩이로 얼떨결에 클라이드의 손이 뻗어 왔다.

되게 아파하는 누군가를 보면 저절로 손이 가는 보편적인 심리와 비슷했다. 별 의미 없고 무의식의 발로에 의한 행동이었다.

에디스의 엉덩이에 커다란 손길이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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