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829화 (829/837)
  •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829화>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

    종혁과의 통화를 종료한 삼십대 중반의 검사가 책상에 발을 올린 채 이를 드러낸다.

    “싸가지 없는 새끼. 어디 경찰 나부랭이가…….”

    “저기 괜찮으시겠습니까, 검사님?”

    “왜요?”

    “최종혁 서장의 인맥이 엄청나다고 하던데……. 지청장님께서도 각별히 아끼시는 듯하고요…….”

    움찔!

    신안 인신매매 사건 해결의 공로로 내년이면 서울로 올라간다는 소문이 자자한 지청장. 아니면 이번 하반기 인사이동 때 광주지방검찰청의 지검장으로 간다는 말도 나돌고 있다.

    신안 인신매매 사건과 얼마 전 터진 테러 사건으로 검찰도 한바탕 뒤집어지는 바람에 올해 하반기 인사이동이 경찰처럼 늦어지고 있었다.

    “흥. 그래서요? 뭐?”

    어차피 지청장은 갈 사람이다.

    그가 광주에 똬리를 튼다면 다른 지방으로 가 버리면 그만. 더 이상 목포지청에 미련 따윈 없었다.

    ‘내가 여길 왜 왔었는데!’

    어차피 큰물에선 놀 수 없는 학벌이기에 가만히 있어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목포지청으로 온 것이다.

    신안과 목포에 산재한 여러 폭력 조직들. 그리고 검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은근히 노다지라고 해서 있는 돈 없는 인맥 다 써 가며 온 목포지청이다.

    그런데 그렇게 온 지 고작 1년도 안 되어서 돈줄이 모두 잘렸다.

    신안은 완전히 나가리가 됐고, 태흥건설의 태흥파는 일개 평검사가 건드리기 힘든 거물이 됐다.

    이 모두 종혁의 그림자가 닿아 있었기에 종혁은 자신에게 있어 원수와 다름이 없었다.

    “아니, 그래도 지청장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자제를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됐습니다. 어차피 길어야 며칠이에요.”

    그 며칠이면 인사이동 작업도 마무리될 것이다.

    ‘게다가 선배가 부탁을 하는데 그걸 매정히 거부하는 것도 좀…….’

    몇 시간 전 연락이 왔던 대학 선배. 친한 변호사가 이번 사건을 맡아서 내려간다며 부탁을 해 왔다.

    안 그래도 미운 놈인 종혁에게 물 먹일 수 있는 일이라 검사는 당연히 허락해 주었다.

    “그러니까 신경 끄고 계장님은 계장님이 하셔야 할 일이나…….”

    쾅!

    갑자기 거칠게 열린 문에 얼굴을 구겼던 검사는 다급히 일어났고, 그와 대화를 나누던 계장은 문을 박차고 들어온 중년인을 향해 허리를 숙인다.

    “오셨습니까!”

    뚜벅뚜벅!

    계장의 인사를 무시하며 다가온 중년인이 검사를 가만히 바라본다.

    “김 프로, 너 지금 뺑끼 쓰고 있다며?”

    속으로 얼굴을 구긴 검사가 뻔뻔하게 웃는다.

    “부장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입니다. 최 서장이 계속 말도 안 되는…….”

    빠아악!

    “으악!”

    정강이를 걷어차인 검사가 무너지자 부장검사가 그의 앞에 쪼그려 앉는다.

    싸늘하다 못해 무심해지는 부장검사의 시선.

    “어이, 김 프로. 내가 너 돈 받아 처먹은 거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에, 에이. 부장님, 그건…….”

    “내가 전에 경고로 끝내니까 아, 이 새끼한테 증거가 없구나, 그렇게 생각한 거지? 아니야. 목포지청에 온 지 고작 1년밖에 안 된 애새끼니까, 선배들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은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런데…… 못 쓰겠다, 너? 감히 지청장님이 맡긴 사건에 야료를 부려? 검사 된 지 겨우 3년밖에 안 된 새끼가?”

    “부, 부장님!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몸을 일으킨 부장검사가 그의 정강이를 다시 걷어찬다.

    빠아아악!

    “크읍?!”

    검사는 터지려는 비명을 이 악물고 참아 냈다.

    억울했다.

    체포 영장은 솔직히 기분이 상해서 그랬지만, 이번 구속 영장은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든 억울함을 피력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도주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는 피의자에게, 원칙을 벗어나 구속 영장을 발부할 순 없었습니다!”

    피의자는 체포당할 때 반항하지 않았고, 경찰 조사에서도 모든 죄를 인정했다. 또한 변호인까지 함께 대동한 것도 모자라 변호인을 보증인으로 내세움으로써 도주의 우려도 지극히 적다.

    “이건 외압입니다, 부장님!”

    ‘그걸 네가 왜 판단하는데?’

    구속영장 실질심사는 판사의 재량이다.

    그러나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올리는 것 역시 담당 검사의 재량이기도 했다.

    “……하, 새끼. 오케이. 그건 인정.”

    하지만 괘씸하다.

    이 젊은 검사에게 종혁의 사건을 맡기려 했던 이유가 뭐였던가.

    선배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뇌물을 받은 검사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가만히 따라 주기만 했어도 실추된 명예의 일부분은 복구했을 기회. 그런 기회를 걷어찬 놈을, 그것도 딴마음을 품고 거부한 놈을 계속 식구로 품어 줄 순 없었다.

    ‘지청장님이 맡긴 일이라면 알아서 기었어야지. 쯧쯧.’

    가끔 이런 놈들이 있다.

    검사가 된 것에, 주위 사람들이 다 떠받들어 주는 것에 자기가 정말 뭐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놈들이.

    이놈도 그런 부류였다.

    “알았으니까 박 프로에게 사건 넘기고, 해남지청으로 가. 아니면 옷 벗든지.”

    “부장님!”

    “고소당할래?”

    “…….”

    서늘한 부장검사의 눈빛에 검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 * *

    콰지직!

    종혁의 손에서 돌아가던 볼펜이 부서져 내린다.

    “어르신이요?”

    -예. 다른 말들은 너무 웅얼거려서 잘 못 들었지만, 분명 어르신이라고 했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러십니까?

    “아뇨. 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어떻게 그럼 계속 미행할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태흥이 소개시켜 준 목포의 흥신소 직원과의 통화를 종료한 종혁이 심호흡을 한다.

    민영우와 김연진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기 위해 다급히 붙여야 했던 흥신소 직원.

    ‘설마 놈들의 그 어르신인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흐려질 만큼 머릿속이 뜨거워지는 이름, 어르신.

    놈들 조직이 충성하는 어르신이란 미지의 인물을 떠올리던 종혁은 고개를 저었다.

    장담을 할 수가 없다. 어르신이란 단어는 일상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주 쓰이는 지칭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일단 권력자가 뒤에 있는 건 맞군.”

    ‘첩? 스폰? 아님 사생아?’

    뭐든 골치 아픈 놈이 이 사건의 뒤에 있었다.

    혀를 찬 종혁은 핸드폰을 들었다.

    “예, 나탈리아.”

    만약, 정말 만약에 민영우가 놈들 조직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라면 결코 쉽게 움직여선 안 된다.

    -……알겠어요. 요원을 붙이도록 할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종혁은 책상을 검지로 치며 생각에 잠겼다.

    “알아봐야겠어.”

    김연진에 대해서 말이다.

    만약 민영우가 놈들 조직과 연관이 있는 거라면, 그것도 어르신과 직통으로 연결된 놈이라면 어떤 제스처라도 취할 터.

    종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흐그악!”

    쉬는 시간, 커다란 공장을 빠져나온 장년인이 기지개를 켠다. 일이 고됐는지 피로한 얼굴로 공장 한구석으로 향하는 장년인.

    따듯한 자판기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모금이 1시간여 동안 쌓인 피로를 풀어 준다.

    혀끝을 적시는 믹스커피의 단맛에 미소를 지은 장년인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든다.

    “어이구. 또 가족사진 보시오? 그러다 닳겠네, 닳겠어.”

    누군가의 말에 주위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키득키득 웃고, 장년인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는 넌 이렇게 꺼내 볼 가족사진이라도 있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쉬는 시간마다 사진을 꺼내 보게 만드는 이 감정이 뭔지.

    “언제 결혼할래?”

    “에헤이. 난 자유로운 영혼이라니까 그러네.”

    “허이구. 염병.”

    “킬킬킬!”

    사람들은 만담 같은 대화에 잠시 고된 노동을 잊은 채 웃었고, 장년인은 모든 걸 무시하며 다시 사진을 봤다.

    ‘밥은 잘 먹고 있니, 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연진.

    날이 더운데 더위는 먹지 않았을지, 또 대충 먹고 다니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지잉!

    -사무실로 올라와 주세요, 김정태 과장님.

    “응?”

    잠깐의 휴식 후 다시 공장으로 들어가려던 장년인은 인사과 직원이 보낸 문자에 눈을 가늘게 떴다.

    * * *

    “해 저문 소양강에-!”

    가사처럼 해가 완전히 저문 저녁.

    술을 많이 마신 건지 비틀거리며 나아가던 장년인이 잠시 걸음을 멈추며 집을 바라본다.

    지어진 지 30년은 족히 된 허름한 빌라.

    가만히 쳐다보던 장년인이 이내 걸음을 돌려 근처의 술집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허름한 보금자리처럼, 오십대 생산직의 허름한 옷차림처럼 허름한 호프집.

    딸랑!

    “어서 오세요!”

    “응? 사장님은 어디 가시고?”

    “이모는 잠시 여행 가셨어요!”

    손님이 거의 없어서 아르바이트는커녕 주방까지 혼자 도맡아 했던 사장 대신 젊은 남성이 보이자 눈을 껌뻑였던 장년인은 이내 이어진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구. 장하다, 장해. 이모 대신 가게도 봐주러 오고.”

    또래의 딸이 있어서 그런지 더 기껍게 느껴진다.

    “여기 소주 하나랑 우동 하나 줘요.”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사치인 5천 원짜리 우동과 2천 원짜리 소주.

    오늘처럼 마음이 심란해지는 날마다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오늘, 인사과의 직원과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일을 하는 데 힘든 점은 없냐, 지금 회사가 어렵지만 부족한 점은 없냐 등 일상적인 이야기만 나눴을 뿐이다.

    하지만 장년인은 알고 있다. 이것이 퇴직에 대한 압박임을 말이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아직은 아니지. 아직은.’

    딸이 졸업을 하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다.

    가진 거 쥐뿔도 없는 부모라지만, 그래도 딸이 졸업할 때까지 학비와 월세 정도는 대 줘야 하지 않겠는가.

    결혼을 할 때 혼수를 장만할 돈은 줘야지 않겠는가.

    해 준 거 하나 없는데도 한국대에 입학한 딸.

    지탱해야 될 가정이 있는 그는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소주부터 드릴게요!”

    “응? 후라이는 안 시켰는데요?”

    “서비스입니다! 빈속에 술 드시면 안 좋아요.”

    생각지 못한 배려에 장년인의 눈이 흔들린다.

    “대학생이에요?”

    “아니요. 재수생이요. 다른 대학은 다 붙었는데, 한국대 경제학과에 가려고 재수했어요.”

    “어이구?!”

    “왜 그러세요?”

    “내 딸도 한국대 경제학과생인데?”

    “우와! 진짜요?! 그럼 저보다 선배님이시겠네요! 몇 살이신데요?”

    “23살인데, 2학년이에요.”

    “아, 따님도 재수를 하셨나 보네요.”

    “무슨!”

    장년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유학을 두 번이나 다녀와서 그런 거예요.”

    “유학이요?”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뜬금없이 어학연수를 다녀오겠다고 말한 딸아이.

    그렇게 1년을 휴학을 했고, 복학하여 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1년을 어학연수를 갔다 왔다.

    그래서 같은 학번의 동기들은 졸업반임에도 아직은 딸은 2학년이었다.

    “자기가 모은 돈으로, 가서 알바를 하면서 영어를 배우겠다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만 나오고, 가슴이 찢길 듯 미안하다. 그렇게 딸이 노력하는데 해 준 게 없어서.

    그런 장년인의 말에 젊은 청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정말 대단하신데요?”

    “그렇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딸 바보인 장년인은 딸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가게 안쪽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종혁은 낯빛을 가라앉혔다.

    “김연진, 출국 기록 있습니까?”

    “아, 예! 3년 전 호주로 출국해 6개월 동안 체류한 기록이 있습니다!”

    순간 종혁의 눈이 빛났다.

    ‘이거 혹시?’

    “지금 당장 김연진이 호주에 머물렀을 때 흔적들 찾으세요. 어디서 머물렀는지, 누구와 만났는지 모두!”

    그리고 당시 발생한 영아 유기 사건까지 전부. 혹시 모르니 데이터베이스도 모두 뒤져 봐야 했다.

    “……예!”

    종혁은 다급히 뛰어나가는 형사를 바라보다 주먹을 쥐었다.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째서 김연진이 자신의 아이를 살해했는지, 그리고 그녀의 뒤에 누가 있는지에 대한 단서가 말이다.

    * * *

    서울 어느 최고급 호텔의 로비.

    민영우 변호사가 룸키를 김연진에게 넘긴다.

    “경찰이 도어락을 뜯어 놨더군요. 도어락을 다시 달 때까지 여기에 머물고 계세요.”

    “저, 저기……!”

    “아, 재판은 걱정 마십시오. 징역을 피하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형량을 낮출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그게 아니라요!”

    “그럼?”

    “저, 정말 그분께서 보내신 건가요?”

    눈이 흔들리는 김연진을 본 민영우는 속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그럼요. 당연하죠.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떻게 김연진 씨를 찾았겠습니까? 아깐 제가 너무 험한 모습을 보였죠? 저도 너무 급하게 움직였는지라 경황이 없어서 험한 모습을 보였던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김연진의 눈이 흔들린다.

    민영우는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한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김연진 씨.”

    “예?”

    “그분께서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김연진 씨를 방치하신 것에 대해 깊이 통감을 하고 계십니다.”

    “아.”

    “하지만 그것은 젊고 혈기가 넘치는 김연진 씨를 새장 속의 새처럼 구속하기 싫어하는 마음에서 비롯됐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사태가 진정될 때까진 연락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전해 오셨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는 김연진 씨도 아실 테니, 이 말의 뜻이 무슨 뜻인지는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김연진 씨.”

    “예?”

    “혹시 이외에 다른 범죄 사실이 있습니까?”

    움찔!

    “아, 아뇨?”

    순간 민영우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이 부분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정말 없습니까?”

    “없다니까요!”

    “……음.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번호로 연락을 주세요. 그리고 되도록 이 호텔을 나가지 마시고요.”

    ‘어르신 쪽으로 알아봐야겠군.’

    더 이상 협박을 해선 안 된다.

    오는 동안 지켜봤을 때 너무 철이 없던 김연진. 분명 제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반발을 할 것이다. 지금은 다독여야 할 때였다.

    고개를 숙인 민영우는 돌아섰고, 남겨진 김연진은 룸키와 명함을 흔들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그 아저씨가 날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

    입술이 꿈틀거린 그녀는 이내 곱게 웃으며 룸으로 향했다.

    -응애!

    아기 울음소리가 전보다 희미해졌다.

    * * *

    “꺄악!”

    “와아!”

    무더운 여름날,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호텔의 야외 수영장.

    새빨간 비키니를 입은 채 비치체어에 누워 주스를 마시던 김연진이 주위에서 흘기는 시선들에 선글라스 속의 눈을 곱게 휜다.

    ‘좋다.’

    너무 좋다. 이런 수영복도, 이런 명품 선글라스도, 심지어 이 달콤한 주스까지도 전화 한 통만 하면 모든 게 준비된다.

    ‘이런 게 부자의 삶일까?’

    벌써 사흘째인데 지루하기는커녕 맨날 짜릿하다.

    ‘그 아저씨도 맨날 이렇게 살고 있을까?’

    솔직히 뭐하는 사람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명품을 온몸에 두른 것을 봤을 땐 돈이 아주 많은 사람임은 확신했다.

    “……나쁘지 않네.”

    이것이 배 아파 낳은 딸을 죽이고 유기한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니,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한 번도 아닌데 말이다.

    “맨날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네.”

    ‘그 아저씨도 나를 각별히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입술을 비틀며 다시 빨대를 입에 가져갔다.

    쿠르릉!

    “아.”

    선글라스를 내린 김연진은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뿌릴 듯 어두컴컴해지는 하늘에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고, 그녀를 따라 남자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럴수록 더 콧대를 높이고, 엉덩이를 더 씰룩이는 그녀.

    그 순간이었다.

    “어?”

    야외 수영장 안으로 새하얀 옷을 입은 덩치 큰 사람이 들어오자 김연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종혁은 그런 그녀를 향해 씩 웃어 주었다.

    “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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