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710화>
128. 사랑의 대가
민족의 대명절, 추석.
종혁이 종갓집을 가만히 응시한다.
할머님이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명절.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복잡한 머릿속 때문인지도 모른다.
종가의 큰 어르신이자 경주 최씨 충렬공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할머님이 돌아가셨다. 사람들을 결집시켰던 그녀가.
사람들은 많이 왔을까.
적게 왔다면 돌아가신 할머님이 실망하지 않을까.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은 마음이 편안할까.
여러 생각에 쉬이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스윽!
종혁은 자신의 손을 잡는 어머니 고정숙을 봤다.
손바닥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오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종혁아.”
“아, 청장님.”
종혁은 때마침 도착한 최기룡 전 청장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종혁이 고개를 들자 이번엔 최기룡이 고정숙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전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최기룡입니다.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고정숙이에요. 천방지축 망아지 같은 제 아들을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종호입니다.”
“삼촌!”
종혁은 훈훈해지는 분위기를 꿰뚫는 높은 톤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며 활짝 웃었다.
“왔어? 오셨어요?”
윤아와 그녀의 아버지.
“앗! 안녕하세요!”
종혁은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들어가시죠.”
‘스읍. 후우.’
그렇게 종갓집의 대문을 넘은 종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웅성웅성! 왁자지껄!
이른 새벽임에도 드넓은 종갓집이 좁게 느껴질 만큼 빼곡히 모여 있는 사람들.
‘다 오시겠구나.’
그런 직감이 든 종혁은 슬며시 웃고 말았다.
새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채 배례를 한 종혁이 추석 차례상을 본다.
가을 제철의 식재료로 만든 음식들 사이에 놓여 있는 식혜.
‘종부님께서 식혜를 제대로 우리셨구나.’
차례상에 꼭 올라가는 식혜.
할머님께서 종부에서 물러나 당대 종부에게 곳간 열쇠를 맡기셨을 때에도, 몸이 쇠약해져 이불 위를 쉬이 벗어나지 못할 때에도 이 식혜만큼은 언제나 꼭 본인이 만드셨다.
시아버지가 생전 그렇게 좋아하셨던 거라면서 말이다.
그런 식혜의 색깔이 올해 설날과 똑같다. 냄새까지도.
울음을 참으며 이 식혜를 만드셨을 당대 종부의 모습이 떠오르자 눈이 시큰해진 종혁은 부엌으로 향했다.
“종부님…… 응?”
“오셨어요?”
종혁은 그녀의 코에 묻은 하얀 가루와 부엌에서 풍기는 냄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최 부장!”
“어허이, 언제 적 최 부장이야? 왔는가, 최 서장?”
“서장이 됐어? 언제?”
“신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들었어! 이런 몹쓸 놈들!”
사랑방에 도착하자 다과를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인다. 자신도 얼른 넘어왔다 싶었는데, 벌써 와 있는 어르신들.
종혁은 가장 상석에 앉은 어르신에게 고개를 숙인다.
“저 왔습니다, 종조부님.”
“애썼네. 잘해 주셨어. 그리고 잘 오셨네.”
종혁의 손을 꼭 잡으며 주름진 눈시울을 글썽거리는 90세의 노인.
“당연히…… 와야죠.”
애정이 가득한 눈을 차마 볼 수 없는 종혁은 슬픔을 감추며 다른 어르신들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드린 후 빈자리에 앉는다.
그러자 사랑방 안으로 음식들이 들어온다.
1인용 작은 반상에 올려진 음식들.
할머님, 아니 이젠 종부님표 식혜와 다과들.
그중 한 음식에 사람들이 눈을 끔뻑인다.
“이, 이건?”
“이건 젊은 사람들이 먹는 그거 아냐?”
“허어…….”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당황할 때였다.
바삭!
종혁을 향해 모이는 시선들.
그러나 종혁은 입 안에서 뭉개지는 새콤하고도 달달한 토마토소스와 고소한 치즈, 짭짤한 불고기, 그리고 혀끝에서 잠자리 날개처럼 뭉개지는 페스츄리의 눅진한 버터 맛에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러다 아차 하며 사람들을 향해 웃어 준다.
“곧 맏며느리 되실 분께서 양식을 전공하셨다더니, 허투루 배운 게 아닌 것 같네요. 최고급 호텔에서 팔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한번 드셔들 보세요.”
“……하긴. 음식이야 종부님의 소관이지.”
“어흠. 최 서장도 저리 말하니 한번 먹어 볼까?”
이젠 할머님도 안 계시니 완벽히 종부님의 소관인 음식.
일 년에 몇 번 오는 자신들이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할 순 없었다. 치렁한 소매를 걷으며 한 입 사이즈의 네모난 피자를 집어 입에 가져간 사람들이 이내 놀란 얼굴들을 한다.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의 입맛을 고려한 듯 세지 않고 삼삼한 간.
여태껏 단 한 번 피자를 먹어 보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게 피자냐며, 왜 그동안 안 먹어 봤을까 작게 후회를 한다.
종혁은 나쁘지 않은 분위기에 아까 전 들은 말을 이야기한다.
“아까 여쭤보니 우리 밀과 쌀, 임실의 치즈로 만드셨다네요. 다과로 즐기기에는 괜찮지 않나요?”
“허흠.”
“한 번씩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아무리 다과라지만 서양 음식인 피자를 차례상에 내놓는다는 건 종갓집이 아니라, 일반 가정의 차례상이라고 해도 파격적인 것이었다. 당황스러운 건 당연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것으로만 음식을 만들었다는 정성에,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맛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이거 아무래도 종부님께서 후대의 일을 걱정하시는가 보구만.”
가장 상석에 앉은 어른의 말에 깜짝 놀랐던 사람들이 그제야 이 음식을 내온 진짜 뜻을 알아차리곤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찾는 이가 줄어들고 있는 종가.
명절이 아니라 단순한 종가의 행사에도 항상 북적이던 종가였건만, 이제는 그것도 과거의 이야기였다.
젊은 사람들은 종가의 모임을 전통이 아니라, 허례허식처럼만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종가는 결국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통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전통의 일부를 버려야만 했고, 피자는 그 시작이었다.
곧 죽어 흙에 묻힐 자신들이 아니라 항렬이 낮은, 그리고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가를 찾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게끔 만들기 위한 장치 중 하나인 것이다.
“허어어.”
“종부께서 큰 결단을 내리셨나 보구만.”
기대감이 차오른 사람들은 다 먹지 않은 피자를 이리저리 살피며 신기해했고, 최기룡은 물꼬를 튼 종혁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잘했다.”
“뭘요. 그보다 잠시…….”
밖으로 나가자는 손짓에 무언가를 떠올리며 낯빛을 굳힌 최기룡이 종혁을 따라나선다.
찰칵! 치이익!
“놈들의 꼬리를 찾았다고?”
“예.”
최기룡과 이택문 등에게도 전달이 된 놈들의 흔적. 그에 최기룡 일파의 경찰들도 수면 아래서 은밀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허허.”
다시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다.
어떤 목적이 있어 진행했던 신안경찰서 설립, 아니 신안 프로젝트.
‘그런데 놈들의 흔적이 그곳에서 발견될 줄이야…….’
정말 이 정도면 굿도 큰 굿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한 것도 잠시. 최기룡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는다.
“내가 뭘 하면 되겠냐.”
종혁은 흉흉한 그의 얼굴에 입술을 비틀었다.
“인식 프로그램 시리즈, 그것들의 보급화부터 시작하죠.”
그리고 현재보다 최소 3배는 더 많아야 할 CCTV의 설치.
대전경찰청장이 한 손을 보태 주기로 했다. 최기룡 일파를 제외한 여러 거대 파벌 중 가장 큰 파벌의 일원인 그가.
“호오.”
최기룡의 미소도 종혁의 그것과 똑같아졌다.
* * *
-북한에서 새 후계자를 발표한 가운데…….
틱!
TV를 끈 종혁이 눈빛을 가라앉힌다.
“새 후계자라……. 순영씨는 괜찮을까 모르겠네.”
순철과 순희의 큰누나인 순영.
새 왕조가 들어서면 물갈이는 기본 절차이기에 당연히 그녀가 걱정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 후계자 옹립으로 인해 다음 달 아주 큰 사건이 벌어진다. CIA와 SVR의 이름을 빌려 겨우 막았던 3월의 참사와 비견되는 참사가.
이건 또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골치가 아파질 수밖에 없다.
“쯧.”
컴퓨터를 바라본 종혁은 이내 한숨을 내쉰다.
어머니와의 여행 겸 종가에 들르기 위해 미리 모든 업무를 처리했던 종혁.
그런데 추석이 끝나자마자 그의 결재를 기다리는 일이 한 무더기다.
“며칠 사이에 뭔 일이 이렇게 많이 발생한 건지…….”
무전취식부터 살인과 실족사 사건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경찰서의 모든 부서에서 사건이 보고되니, 새삼 참 많은 사건이 벌어지는구나 체감이 됐다.
종혁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김지원 사건만으로는 살짝 부족한 느낌인데…….”
고작 보름 만에 해결된 김지원 사건. 이 중 실질적으로 경찰들이 움직인 기간은 닷새 남짓.
모두 인식 프로그램 시리즈로 김지원과 김성익의 동선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아니었다면 얼마나 시간이 더 소요됐을지, 어쩌면 회귀 전처럼 미제로 전환됐을지 알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경찰이라면 인식 프로그램 시리즈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론이었다.
전 국민이 납득을 할 만한 뚜렷한 명분이 필요했다.
‘어차피 실종 아동 쪽을 지원하려고 했으니…….’
매해 접수되는 14세 미만 아동의 실종 신고는 평균 1만 건.
그중 대부분은 발견되어 보호자에게 인계되지만, 수십 명은 몇 년이 지나도록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인식 프로그램 시리즈가 보급화된다면 이러한 슬픈 이별을 없애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한들 무작정 나설 수는 없었다.
민감한 문제이니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골치 아프네.”
미간을 좁히며 일어선 그는 신안경찰서 인근의 식당으로 향했다.
“아이고! 오셨어라, 서장님!”
“헛!”
“추, 충성!”
식당 주인의 반가운 인사에 고개를 돌렸다가 다급히 일어나는 경찰들.
앉으라는 듯 손짓을 한 종혁이 빈자리에 앉는다.
“일단 제육볶음 여섯 개 주세요.”
“오메. 오늘 스트레스를 좀 받았나 봐요잉.”
종혁이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푼다는 건 이미 주변 상인들이 익히 하는 사실.
“추석이 끝났잖아요.”
“호호호호호!”
맞다. 원래 명절 다음 날이 제일 힘든 법이다.
그건 추석 명절 당일만 쉬는 식당도 마찬가지다.
경찰들은 경찰서장도 자신과 딱히 다를 거 없구나 생각하며 피식 웃곤 다시 편하게 숟가락을 들었고, 종혁도 잡념을 누르며 곧 나온 매콤한 제육볶음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딸랑!
“왔어?”
얼마 전 큰 우환이 있었던 듯 낯빛이 검은 중년인이 어깨를 늘어트리며 들어와 빈자리에 앉는다.
“소주 한 병 주쇼.”
“……알았어.”
할 말이 많지만, 입을 다문 식당 주인이 주방으로 들어가 소주 한 병과 여러 밑반찬을 내온다.
“나 안 시켰는디?”
“빈속에 먹으믄 속 버려.”
“……잘 먹을게라.”
울컥한 중년인은 달아오르는 눈시울을 감추고자 고개를 숙이며 소주병을 땄고, 종혁과 형사들은 그런 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었다.
* * *
-실종 아동이라…….
수화기 너머 장희락 경찰청장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확실히 명분으로 좋긴 한데…….
범죄자를 빨리 잡을 수 있다는 막연한 명분보다는 국민들의 관심도와 호응도가 더 높을 거다.
그러나 약간의 문제가 있다.
“장기 실종 때문이십니까?”
-그렇지.
아동 실종 사건은 공용 CCTV의 보존 기간이 끝난다고 해도 따로 보관을 해 놓을 만큼 사건 해결에 심혈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해결되지 않는 사건도 있는 법.
그렇기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몇몇 언론에서는 악의적으로 경찰이 해결하지 못한 실종 사건을 들먹이며 쓸데없이 예산 낭비를 한다고 성토할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분명 뒤가 구린 정치인들이 있을 터.
-최 서장이 현몽준 당 대표와 홍정필 원내 대표, 여야 양당의 거물 정치인들과 친분이 깊다는 건 알겠지만…….
뒤가 구린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하여 언론과 단체를 움직일 것이다.
“인권 단체에서도 나설 수 있을 테고요.”
미국에서도 하지 않는 짓을 왜 하냐며, 공산국가처럼 국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게 아니냐며 반발을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명분을 들고 나오면 김희건 회장까지 나선다고 해도 무리가 있다.
-그래도 일단 명분으로는 나쁘지 않으니 다음 달 정례회의 때 안건에 올려 보도록 하지. 아동실종전담 부서를 꾸리는 걸로 해서.
일단 인식 프로그램 시리즈를 감추되, 성공 데이터를 모으는 거다. 언론과 정치인들도 반박하지 못할 데이터를.
“감사합니다.”
통화를 종료한 종혁이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저 좋은 일을 하려는 것뿐인데…….”
인식 프로그램 시리즈가 보급화되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건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우선시하는 놈들은 그러한 건 생각도 하지 않고 방해를 해 올 것이다.
그래도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다.
반발을 하는 놈이 있다면 뒤가 구린 놈들이란 뜻. 그놈들을 일시에 쳐낼 수 있는 기회가 될 터였다.
“하여튼 지랄하기만 해.”
콧방귀를 뀐 종혁은 몸을 일으켰다.
퇴근 시간이었다.
“저녁은 그냥 가볍게 술을…… 응?”
콰앙!
거칠게 닫히는 신안경찰서 인근 식당의 문.
종혁은 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는 남성에 기겁하며 달려갔다.
그 순간이었다.
“흐어어어엉!”
“……씨발. 깜짝아.”
종혁의 걸음이 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