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664화>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병원의 산책로.
벤치에 앉은 김희선이 나른한 미소를 짓는다.
“잠 온다.”
“어구구. 우리 희선이 또 졸려?”
어제도 무려 14시간이나 잔 희선.
놀랐다가 푸근히 웃는 간병인의 모습에 희선이 볼을 붉힌다.
“몰라요. 그냥 잠이 와요.”
그래서 참 희한하다.
엄마가 도망친 이후 하루 6시간을 내리 잔 경험이 없는 희선.
언제나 아버지보다 늦게 자야 했고, 아버지보다 빨리 일어나야 했다. 나이가 들어 저녁 늦게 밖에 있을 수 있게 됐을 땐 더 심했다.
그래야 덜 혼나고, 그래야 그 무서운 얼굴을 조금이라도 덜 보니 말이다.
그렇게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던 나날들.
그런데 여기서는 어디든 등만 붙였다 하면 무섭게 잠이 쏟아진다.
“그래도 밥은 먹고 자야지. 의사 선생님께서 식사는 거르지 말라고 하셨잖아.”
“히잉. 더 있고 싶은데…….”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잠시라도 더 산책로의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
퇴원을 하면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희선.
이젠 임산부도, 산모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간병인을 곤란하게 만들기는 싫었던 희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올라가요.”
그렇게 병실로 돌아온 희선은 간병인이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볼일을 보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다가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병실 바로 문밖에서 들려오는 대화 탓이었다.
“고마워, 박 원장. 내 이 신세는 꼭 갚지.”
스르륵!
말소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열리는 문.
고개를 돌린 희선은 안으로 들어오는 종철을 발견하고는 눈을 부릅뜨며 간병인의 손을 잡아당긴다.
“어? 희선…….”
쾅!
갑자기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게 된 간병인은 화장실 문을 잠그자마자 파랗게 질려 주저앉는 희선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희선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쿵쿵쿵!
“희선아. 잠깐 문 좀 열어 봐, 희선아.”
안 된다. 저 개새끼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있으면 안 된다. 저 새끼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
“끄흡! 끕! 끕!”
“희선아!”
간병인은 과호흡을 하는 희선의 모습에 기겁했고, 희선은 갑자기 생각나는 한 사람에 버둥버둥 핸드폰을 잡아 꺼낸다.
‘사, 살려 주…….’
그녀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목을 긁으며 바랬다.
종혁이 달려와 전처럼 구해 주길.
그녀는 다급히 쓴 문자를 보내며 간절히 바랐다.
* * *
쿵쿵쿵!
“희선아,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땐 진심이 아니었어. 그러니 우리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하면 안 될까? 응?”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 오종철이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오춘재를 본다.
그러자마자 눈을 부라리는 오춘재.
‘빌어먹을!’
벌써 몇 십 분째란 말인가.
오종철은 짜증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애써 참았다.
난생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맞았다.
거기에 맞은 자신을 외면한 아버지와 엄마, 고소하다고 웃던 고모들, 원망을 담아 죽일 듯 노려보던 큰아버지.
난생처음 받는 가족의 악의에 그는 눈앞이 먹먹해졌었다.
오종철은 웃으며 다시 주먹을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드르륵, 쾅!
“이게 무슨 짓들입니까!”
문을 거칠게 열며 최재수가 들어온다.
“어? 넌?”
분명 자신을 취조실로 데려갔던 그 경찰이었다.
최재수는 자신을 알아보는 오종철의 모습에 이를 드러냈다.
“하, 이 새끼 봐라? 이 새끼가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뭐? 새끼? 이 짭새 새끼가…….”
“오종철!”
“하, 할아버지.”
오종철의 입을 다물게 한 오춘재가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네는 누구신가?”
“경찰입니다. 절차를 밟은 면회객이 아니시라면 모두 나가 주시죠.”
“허허. 계급이 어떻게 되시는가?”
“왜요? 그 잘난 판사 아들내미에게 이르시렵니까?”
오춘재는 부드럽게 웃었다.
“긴히 할 말이 있고, 용서도 빌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니 자넨 이만 가 보시게. 내 이 무례는 서울청장에게 말하지 않도록 하지.”
“푸핫……!”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린 최재수는 오춘재를 내려다보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대한민국 경찰을 협박하시는 겁니까, 영감님?”
“예의가 꽤 없구만.”
“예의가 없는 건 당신이지.”
“허허.”
최재수는 웃고 있지만, 점점 서늘해져 가는 오춘재의 눈빛에 핸드폰을 들었다.
“예, 부장님. 지금 병실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오종철의 할아버님께서 저를 협박하시네요? 아, 네. 네, 알겠습니다. 예.”
그리고 최재수가 씨익 웃으며 전화를 끊는 순간이었다.
투두두두두두!
“음?”
때마침 창밖에서 들려오는 헬리콥터 소리.
오춘재는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일개 경찰이 헬기를 타고 왔을까.
“자네가 믿는 양반이 오고 있는 모양이구만. 어디 기다리지.”
“예, 뭐 그러세요.”
약간이라도 봐줄 구석이 있으면 지금 당장 도망치라고 충고하고 싶지만, 그럴 가치도 없는 인간들이다.
최재수는 화장실 문을 가로막으며 팔짱을 꼈고, 이윽고 병실 문이 열리며 종혁이 들어온다.
“예, 차장님. 이번 헬기에 대한 빚은…….”
“부장님!”
확 표정이 밝아지는 최재수를 일견한 종혁은 오춘재와 오종철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곤 최재수가 비켜서는 화장실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희선아, 경찰 아저씨야. 문 좀 열어 볼래?”
달칵!
“아, 아저씨.”
눈물, 콧물, 침으로 엉망이 된 희선의 얼굴.
자세히 보니 또 하혈을 한 듯 사타구니 부분이 피로 젖어 있다.
“흐윽! 흑! 아저씨……!”
종혁에게 안기는 희선.
빠드드드득!
종혁은 입을 크게 벌렸다.
“간호사-! 여기 병원장 데리고 와요-!”
쩌렁쩌렁 울리는 종혁의 외침에 오춘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당신 지금 누굴 건드린 거야-!
서울 모든 병원의 VIP 리스트 상단에 있는 최종혁.
서울에 부동산을 무려 수백 채나 가지고 있는 부동산 부자 고정숙의 외동아들이자, 그 본인 또한 수천억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거부(巨富).
여러 편의를 제공해 주는 대가로 병원에 수시로 거액의 후원을 해 주는 종혁이기에, 각 병원의 이사장들은 매일 아침 종혁에게 문안 인사를 올린다.
그런데 그런 종혁이 입원시킨 환자의 개인정보를 유출했다.
그 사실에 병원 이사장은 병원장에게 불같은 분노를 토했고, 병원장은 다급히 달려와 종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신입니까? 저 양반한테 고객 정보를 누출한 게?”
“사, 사장님!”
“여기 병원은 고객 개인정보 보호에 참 너그럽나 보네요. 이번 일, 제 주위 분들에게 잘 말해 놓겠습니다.”
“사장님!”
“꺼져요. 내 입에서 험한 말 나오기 전에.”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사장님!”
종혁은 머리까지 조아리는 병원장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들었다.
“예, 이사장님. 여기 병원장님은 구질구질하기까지 하시네요? 예. 여기 받아 보세요.”
“예, 예! 이사장님!”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으면 아가리 다물고 꺼지세요.
“……예.”
통화를 종료한 병원장이 양손으로 핸드폰을 내밀며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인생이 끝나 버린 병원장은 눈물을 삼키며 돌아섰고, 종혁은 자신의 등 뒤에 숨어 옷자락을 꽉 쥐고 있는 희선을 다독이며 오춘재를 봤다.
낯빛이 한껏 딱딱하게 굳어 있는 오춘재.
“참 재미난 짓을 해 주셨네요, 오춘재 씨. 진짜 너희 새끼들은 왜 이러지?”
“크흠. 죄송합니다.”
‘그 최종혁이 이 경찰일 줄이야!’
눈앞이 아득해진다.
“하, 할아버지?”
“이놈이 그래도!”
당황하는 오종철의 뒤통수를 잡은 오춘재가 그대로 누른다.
일반 환자 백 명을 받는 것보다 VIP 환자 한 명을 유치하는 게 더 좋다는 건 병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상식.
그런데 자신이 그런 VIP의 정보를 빼냈다는 것이 알려진다?
좁디좁은 상류층의 세상.
순식간에 그들 사이로 모든 정보가 퍼질 것이고, 오종철 사건과 상관없이 자신의 병원 매출에 치명적인 타격이 올 터였다.
“제가 이놈 교육을 잘못 시켰습니다. 이 죗값은…….”
“아, 맘에 없는 말 하지 마세요. 어차피 김 회장님 부지 때문에 오신 거잖아요.”
깜짝 놀란 오춘재가 종혁을 본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눈빛에 종혁이 잠시 생각하다 빙그레 웃는다.
“오춘재 씨, 그 땅을 매입한 사람이 나야.”
쿠웅!
“그게 무, 무슨……!”
“왜? 거짓말 같아? 김 회장님께 전화해서 바꿔 드릴까?”
‘미, 미친!’
오춘재의 낯빛이 하얗게 질린다.
“이제 알겠지? 당신은 지금 최악의 수를 둔 거야. 감히 경찰이 보호하고 있는 피해자를 찾아와 협박해? 너 따위 범죄자 새끼들이?”
“혀, 형사님! 자, 잠시 이, 이야기 좀…….”
종혁은 마치 무릎을 꿇을 듯한 그의 모습에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병원 지을 거지? 기대해. 당신이 병원 다 지으면 그 앞 부지 매입해서 더 큰 병원을 지어 줄 테니까.”
“형사님-!”
목에서 피가 터져라 간절히 외치며 종혁에게 매달리는 오춘재.
종혁은 그 손가락을 조심히 떼어 내며 싱긋 웃어 주었다.
“왜 이러세요, 오춘재 씨. 아마추어같이. 돈 싸움, 인맥 싸움을 걸어온 건 당신이잖아요.”
그래서 똑같이 해 주고 있을 뿐이다.
냉혹한 사회의, 비즈니스의 법칙대로.
“혀, 형사님, 병원 사업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희선 양-! 제발 형사님께 이야기 좀…….”
“그 이상 아가리 털면 협박죄로 체포합니다.”
“이, 이이……! 네놈 때문에! 네놈 때문에-!”
철썩! 철썩!
눈이 돌아간 오춘재는 오종철의 뺨을 후려쳤고,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맞던 오종철은 끝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종혁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내가 그랬지? 시작한 건 너니까 울고불고 지랄하지 말라고. 기대해. 네가, 그리고 너희가 겪을 지옥은 지금부터니까.”
오종철의 낯빛이 검게 죽었다.
* * *
오춘재와 오종철이 빠져나간 병실 안, 종혁이 진료를 받고 온 희선의 손을 꼭 잡는다.
극한의 스트레스로 인해 하혈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심각한 건 아닌 수준. 다만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많이 놀랐지? 미안해.”
자신이 처음부터 삼전의료원처럼 인맥이 있는 곳에 입원시켜 놓았다면 당하지 않았을 일.
설마하니 병원 매출을 책임지는 VIP실 입원 환자의 기록이 새어 나갈 줄은 몰랐던지라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종혁으로선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은 병원을 옮길 테니까 좀만 참아 줘.”
그리고 앞으로 이 병원을 이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다 지켜봤잖아.”
오종철은 이제 오춘재, 아니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그 누구의 도움 없이 법정에 서게 될 것이다.
“그건 박유선과 이주혁도 마찬가지일 거야.”
“……고마워요.”
“감사 인사는 나중에 그놈들이 판결을 받은 이후에 받는 걸로 하자. 일단 쉬고 있어.”
“네…….”
희선은 억지로 누우며 눈을 감았고,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종혁은 그녀의 숨이 고르게 변하자 손을 떼며 일어섰다.
스르륵!
“죄, 죄송합니다, 부장님. 모두 제 불찰입니다.”
문밖에 대기를 하고 있다가 허리를 깊이 숙이는 노인, 이 병원 이사장의 모습에 종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 실망이 큽니다.”
“예, 당연히 그러시겠죠. 앞으론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단단히 주지시키겠습니다.”
“……잘 쉬다 갑니다. 주변 사람들에겐 말하지 않을 테니 이사장님도 안심하고 편히 쉬세요.”
‘허어. 끝났구나.’
종혁이 더 이상 이 병원에 오는 일은 없으리라.
“죄송합니다. 그동안 저희 병원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허리를 깊이 숙인 이사장은 몸을 돌려 사라졌고, 최재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돌연 키득키득 웃었다.
“이제 그놈은 어떻게 될까요?”
“존나게 처맞겠지.”
머리채가 잡혀 끌려갔으니 그동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받지 않았던 온갖 멸시와 분노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자수시킬걸?”
“엑?! 진짜요?”
“어. 그게 오춘재에게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니까.”
훗날 병원을 물려받을 오종철을 내놓고, 종혁의 자비를 바라는 것. 그래야 병원이라도 지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에이. 그것도 부장님의 협박을 믿을 때나 가능한 일이죠.”
오춘재가 새로 지을 병원 앞에 병원을 지을 거라던 종혁의 협박.
“믿을 거야. 그 양반은 잘 알거든.”
병원 사업이 얼마나 돈이 되는지 말이다.
“아씨, 그러면 안 되잖아요!”
자수를 하면 아무리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형량이 깎인다. 그게 대한민국 사법계의 현실이었다.
“당연하지.”
종혁은 핸드폰을 들었다.
“예, 검사님. 영장은 어떻게 됐습니까?”
오종철이 경찰에서 풀려난 다음 날 찾은 한 오피스텔.
아마 그곳이 놈들의 아지트, 희선을 유린한 영상이 있는 곳일 것이다.
-나왔데이!
“알겠습니다. 지금 가죠. 가자.”
“예!”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발을 떼는 종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