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637화>
종혁이 도착한 곳은 마치 달동네처럼 허름한 동네의 한 원룸 건물이었다.
“후. 여기선 뭔가 나올까요?”
“나오길 바라야지.”
샌드위치 판넬로 지어진 옥탑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파리한 안색의 육십대 여성과 삼십대의 여성이 애써 몸을 일으키며 종혁들을 반긴다.
“아이고, 아닙니다. 누워 계세요.”
“죄, 죄송해요. 제가 많이 아파서…….”
알고 있다. 서울로 올라가기 힘들다며 여성이 직접 말해 줬기 때문이다.
위암, 그것도 3기. 이렇게 큰 병이라면 큰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어야 함에도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그녀.
종혁의 시선이 딸로 보이는 여성에게로 향한다.
방금 전 일어났을 때 다리가 불편해 보였던 여성.
“지현아, 손님들 마실 거 좀 내오렴.”
“응, 엄마.”
부엌으로 향하는 그녀를 본 종혁은 그녀의 골반이 많이 뒤틀려 있음을 알게 됐다.
선천적 기형, 혹은 사고를 당한 게 틀림없다.
종혁의 시선을 받은 최재수가 몸을 일으켜 오지현을 도왔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어머님. 경찰 본청 홍보부 최종혁 총경입니다. 이쪽은 같은 부서의 최재수, 이쪽 분은 본청 외사국 외사수사과의 김두호 경위입니다.”
“최재수입니다.”
“김두호 경위입니다.”
“수현이 애미 김성자입니다. 이쪽은 수현이 동생 지현이고요. 그 일을…… 다시 조사하시기 위해 오셨다고요.”
벌써 15년이 지난 일임에도 아들을 입에 담자마자 눈물이 차오르는 그녀.
종혁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예. 이전에 통화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필리핀 여행객 및 교민들의 사망 및 실종 사건들이 많다 보니 이번에 제대로 된 수사 및 예방책 확립을 위해 이전 사건들을 재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녹화도 하는 거다.
종혁은 불편하면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최재수가 들고 있는 캠코더를 가리켰고, 김성자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의 뜻을 표한 종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부군 되시는 분께선 어디에…….”
김성자와 오지현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죽었어요. 수현이가 가고 2년 후에 교통사고로.”
오지현도 그때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치게 되면서 장애를 입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종혁은 외사수사과의 형사를 봤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형사님.”
“떠올리기 힘드시겠지만, 그때의 일을 다시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수현 씨가 필리핀에 넘어가게 된 일부터 말입니다.”
“그게…… 17년 전쯤일 거예요.”
당시 대기업 입사를 앞두고 있었던 오수현.
입사 전 해외여행을 한번 가 보고 싶다며 필리핀 세부로 여행을 갔다가 무슨 헛바람이 분 건지 돌연 세부에서 살고 싶다고 했던 아들.
“지금이야 이렇게 살지만 당시엔 남편도 대기업에 다니고, 저도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면서 집안 사정이 여유로워 그러라고 했죠.”
물론 엄청 싸웠었지만 자식을 이기진 못했다.
오수현은 집안의 지원을 받아 필리핀 세부에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를 열었다.
“나름 잘사는 것 같더라고요.”
가게도 나름 번창했고, 소개시켜 주고 싶은 여자친구를 사귀었다고도 했다.
오수현은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그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세부라는 이역만리에서 살아 아들을 잘 볼 수 없다는 걸 제외하면 김성자도 썩 불만은 없었다.
성격이 무심해 평상시 말이 없던 아들이었는데, 세부에서 살게 된 이후 매일같이 안부 전화를 해 와서 더 그랬다.
“그런데 비자 갱신 때문에 한국에 들어온다던 그날…….”
곧 공항이다, 몇 시 비행기로 넘어갈 거라며 통화를 했었다.
그리고 끝이었다.
아들은 도착 예정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무언가 불길함을 느껴 경찰에 신고를 하고, 대사관에도 연락을 해 봤지만 아들에 대한 소식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필리핀으로 날아가 아들을 찾았다.
“여자친구도 만나 보셨습니까?”
“아니요…….”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만 들었지, 사진으로도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어서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 상인들에게 물어도 몰랐고, 여자친구도 아들의 가게를 찾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대사관에서 아들을 찾은 것 같다고 연락을 해 왔다.
정신없이 달려가 마주한 건 퉁퉁 불어 있던 시신 한 구였다.
너무 불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들은 단숨에 알아보았다. 내 아들이라고, 열 달을 배 아파 낳은 내 아들이 맞다고.
아들이 유일하게 몸에 지니고 있었던 거라며 주민등록증을 내밀었을 땐 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느꼈다.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후에 바다에 버려진…… 것 같다고……흐윽!”
“엄마…….”
두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았고, 종혁들은 그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해 고개를 돌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외사수사과 형사는 겨우 진정한 김성자에게 입을 열었다.
“그럼 범인은 찾았습니까?”
“아니요……. 지금도 못 찾았어요.”
이런 강도 사건은 범인을 찾기 힘들 거라고, 그러니 기대하지 말라고 대사관 직원이 말했는데 그게 정말이었다.
이후 자신들도 백방 노력해 봤지만 찾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비명에 간 아들을, 오빠를 가슴에 묻어야 했다.
“혹시 그 대사관 직원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아니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렇습니까. 아, 가게들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종혁의 물음에 김성자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한인 상인연합회? 그런 이름의 단체에 팔았었어요.”
“……혹시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해 왔습니까?”
“네, 맞아요.”
아들을 잃고 정신이 없던 찰나에 한인 상인연합회라고 이름을 댄 이들이 찾아왔었다.
더 이상 필리핀과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다소 손해를 보는 감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급하게 팔아 버렸다.
“그렇군요. 그럼 힘드시겠지만 몇 가지 더 묻도록 하겠습니다. 오수현 씨께서 세부에 계실 때 누구와 사이가 안 좋다든가 그런 말을 하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요. 애초부터 그런 걸 말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제 아빠를 닮아 힘든 일이 있어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던 아들.
“그렇군요.”
이후 종혁은 몇 가지 더 물어봤지만 유의미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당시 오수현 씨께서 교제하던 여자친구의 이름이 뭔지 알고 계십니까?”
“그게…….”
김성자가 생각에 잠긴 그때, 오지현이 입을 열었다.
“샤론, 샤론이라고 했어요.”
‘샤론?’
낯익은 이름에 종혁이 오지현을 쳐다봤다.
“혹시 나이나 외모 같은 것도 기억하십니까?”
흠칫!
왜인지 몸을 굳힌 오지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빠랑 통화할 때 이름만 들어 본 거라서요.”
“음. 알겠습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혀, 형사님. 우, 우리 아들을 죽인 범인은 차, 찾을 수 있겠죠? 그럴 수 있겠죠?!”
15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멍울.
그녀는 가슴을 잡으며 괴로워했고, 종혁은 차마 그럴 거라고 말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뭔가 더 생각나는 게 있다면 이 번호로 연락을 주십시오. 아, 그리고 이건 저희 경찰과 협력하는 대학병원의 쿠폰인데, 이걸 들고 가시면 90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 치료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네에?! 아, 아니……!”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혀, 형사님!”
건물을 나선 종혁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봄이 찾아오려는 듯 부쩍 맑아진 하늘.
찰칵! 치이익!
“씨벌. 술 땡기네.”
가슴을 친 외사수사과의 형사가 종혁을 본다.
“이번에도 건진 게 없네요.”
벌써 20명의 피해자 유족을 만났음에도 뭔가 나오는 게 없었다. 가슴이 절로 답답해졌다.
“없긴.”
“예?”
“하나 있잖아.”
최재수와 외사수사과 형사가 의아해하자 종혁은 낯빛을 굳혔다.
“대사관 직원.”
“……아!”
맞다. 대사관 직원이 있었다.
여태껏 만난 모든 피해자 유족들 모두 대사관 직원에게 부고를 통보받았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라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겠군요!”
“그렇겠지.”
부디 그러기만을 바랄 뿐이다.
“자, 그럼 다음 분을 만나러…….”
말을 하던 종혁은 계단에서 들리는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혀, 형사님.”
피해자 오수현의 동생 오지현이다.
“응?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생각나는 거라도…….”
종혁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여자친구요.”
“예.”
“당시에 대학생이었어요. 마닐라에서 세부로 여행을 온.”
“……오지현 씨가 그걸 어떻게?”
“오빠가 한국에 왔을 때 술주정을 부리면서 말해 줬거든요. 여기 사진이요. 이건 제가 오빠 지갑에서 훔쳤던 거예요.”
종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샤론?’
김정식에 대한 단서를 얻었던 한인 게스트하우스, 그곳에서 일하던 그 샤론이었다.
* * *
쿵!
신문을 펼친 김정식의 눈이 부릅떠진다.
“이, 이게 뭐야!”
-센트럴 비사야 경찰청장 뇌물 수수 및 26개 범죄 혐의로 구속!
-센트럴 비사야에 부는 부정부패 척결의 바람!
-구속되는 세부의 고위 경찰들! 필리핀, 이렇게 썩었나!
-시메온 아키노 의원! 필리핀을 좀먹는 벌레들을 퇴치하겠다!
-필리핀에 부는 개혁의 바람!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
다급히 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려던 김정식은 손을 멈췄다.
“아니지. 아니야.”
지금 연락해선 안 된다. 지금 연락을 했다간 어떤 꼬투리를 잡힐지 몰랐다.
그는 얼른 시메온 아키노와 같은 당에 소속된 의원에게 연락을 했다.
“예, 의원님. 저 김정식입니다!”
-이 어수선한 시기에 왜 연락을 한 겁니까!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겁니까!
김정식의 소개로 경찰청장과 몇 번 밥을 먹은 적이 있는 의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너무 놀라는 바람에…….”
-됐고. 김 회장, 이거 하나만 말하세요. 경찰청장에게 직접 뇌물을 준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들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찰청장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되긴요! 당수께서 나도 의심하는 거지!
그러니 세부의 의원인 자신을 믿지 못하고 직접 움직인 거다.
지금 센트럴 비사야 경찰청 산하 경찰서장 30퍼센트의 목이 날아갔을 뿐만 아니라, 세부에 있는 경찰청장의 파벌 전부 목이 날아갔다. 간부들까지도 말이다.
게다가 말단 교통경찰까지 경찰 전체에 감찰이 들어간 상태였다.
“아니, 왜……!”
-왜인 왜겠어요! 당연히 표를 얻기 위해서지!
센트럴 비사야 경찰청장의 목이 날아가는 건 기정사실이었고, 이로 인해 지지율이 급등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다른 후보들과 박빙이었던 세미온 아키노 후보가 완벽한 선두 주자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나도 이름이 나오면 좋지 못하니 어떻게든 막아 볼 겁니다. 그때까진 연락하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정식은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제기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이렇게 되면…….”
눈빛을 가라앉힌 김정식은 옆에 선 비서의 전화기를 뺏어 한인 상인연합회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투계장 폐쇄하고, 경찰청장과 서장들, 간부들에게 돈 날랐던 애들 한국으로 피신시켜! 차명 계좌들도 다 해지하고!”
-예, 회장님!
“그리고 그들과 만났던 식당의 직원들 입단속도 시키고, 갱단들도 잠시 피신해 있으라고 해! 뭐해! 빨리 움직여!”
그래야 산다.
부정부패에 대해 참 관대하지만, 본보기가 필요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해지는 나라인 필리핀. 자칫 자신이 그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통화를 종료한 김정식은 이를 갈며 비서를 봤다.
“그, 그래. 알았어.”
“뭐야! 누구와 전화를 하는 거야!”
“아, 샹그릴라 리조트입니다. 지금 공사가 시작돼서 투숙객들이 클레임을 걸고 있다고 합니다.”
“개 같은!”
첩첩산중.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숙박료 50% 할인 들어가고, 투숙객들에겐 싸구려 와인이라도 한 병씩 전부 돌려. 귀마개랑 주변 상가 할인권도!”
“그, 그래서는 인건비도 안 나옵니다, 회장님!”
“그럼 장사 접을까?! 영업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하라면 해!”
“예, 예.”
“그리고 내 비행기 표도 알아봐. 잠시 한국에 가 있을 테니까.”
소나기는 피해야 하는 법. 김정식은 이번 대선이 끝날 때까지 한국으로 피신해 있기로 했다.
지이잉! 지이잉!
“……받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몸을 돌린 비서는 전화를 받았고, 이내 곧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 씨발. 알았어! 일단 지켜봐! 끊어!”
“무슨 일이야?”
가슴을 엄습하는 불길한 느낌. 또 무슨 일이 터진 건가 불안해하던 김정식은 이어지는 비서의 말에 얼굴을 구겼다.
“종배수 사장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뭐?”
‘하필 이런 시기에!’
그렇지 않아도 경찰청장에게 부탁해 세부의 경찰서를 움직여 종배수를 방해하려고 했던 김정식.
빠드득!
“씨발! 어디야!”
한국으로 피신할 땐 피신하더라도 종배수의 얼굴을 봐야 할 듯싶었다.
* * *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솔직히 김정식이 무섭다. 하지만 종배수가 제시한 조건이 너무도 좋았다.
“허허. 걱정 마세요. 결격 사유가 없는 이상 제가 사장님을 뽑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결격 사유라 하시면…….”
“뭐겠습니까. 성실함과 직원들 복지지.”
“예?”
“뭡니까. 설마 푼돈으로 필리핀 현지 직원들을 마구 부리시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흰 팁도 모두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허허. 아, 그리고 제가 이번에 단체를 하나 세우기로 했습니다.”
한인교민위원회다.
“우리 한인교민위원회는 한인 교민의 안전과 편안한 생활, 사회 활동, 그리고 필리핀 현지인들과의 원만한 융화를 위해 설립되는 단체이니 마음이 동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움찔!
“아. 예…….”
순간 껄끄러워하는 한인 식당 사장의 모습에 은은히 웃은 종배수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나저나 여기 유동 인구가 제법 많군요.”
“그, 그렇죠?”
“여기다 굿즈숍을 세워도 좋겠네요.”
한국 가수들 굿즈와 한국 애니메이션, 드라마 캐릭터를 상품들을 판매하는 매장.
“그럼 여길 구경하러 왔다가 사장님 가게도 들르지 않겠습니까?”
“예? 자, 잠시만요! 그, 그게 무슨 말인지 좀만 더……!”
“허허. 그럼 이만.”
종배수는 다급히 붙잡는 한인 식당 사장을 뒤로하며 차에 올랐다.
“흐흐흐.”
차에 타자마자 조간신문을 펼친 종배수의 입에서 웃음이 번진다.
“이거 똥줄 좀 타겠는데요, 형님?”
“형님 아니고 사장님, 인마!”
“흐흐. 예, 사장님. 이제 어떡하시겠습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토껴야지.”
지금쯤 자신이 세부에서 사업을 하는 한인 사장들을 만나러 다니는 게 김정식의 귀에 들어갔을 테니, 지금쯤 눈이 뻘게져 달려오고 있을 테니 잠시 피신해 있어야 했다.
“마닐라행 비행기표는 끊었지?”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인물, 아이반 벨로프.
그의 우산 아래 피신해 있어야 했다. 제 발이 저린 김정식이 세부에서 모습을 감추기 전까지 말이다.
“출발해.”
“예!”
* * *
고속도로의 휴게소, 핫바를 씹던 종혁이 필리핀에서 온 전화를 받고 입술을 비튼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정말 큰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나도 이렇게 뿌리까지 썩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최 부장에겐 낯이 뜨거워 얼굴을 들지 못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게 미안하실 건 없습니다.”
미안해야 된다면 필리핀의 국민들에게 미안해야 된다.
-……그렇죠. 내 국민들에게 참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후우. 그럼 끊겠습니다.
“대통령이 되신 걸 미리 축하드립니다.”
-하하…….
통화를 종료한 종혁은 최재수를 봤다.
“김정식이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단다.”
“오! 이제 세부로 갈 때인가요?
“그렇지. 가서 제대로 파 봐야지.”
가장 먼저 만날 사람은 샤론이었다.
“부장님!”
종혁은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자신을 급히 부르는 외사수사과 형사를 보며 의아해했고,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보여 줬다.
“필리핀 경찰과 외교부에서 실종 및 강력 범죄를 담당했던 대사관 직원 명단을 보내왔는데…….”
피해자 유족들이 만났다는 대사관 직원들 명단도 함께 보내져 왔는데 뭔가 이상하다.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종혁의 표정도 굳는다.
“……필리핀 대사관의 직원이 이렇게 적었던가요?”
17년 동안 총 세 명.
겨우 세 명의 대사관 직원만이 한인 교민 피해자와 피해자 유족들을 담당했다.
종혁의 코가 간질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