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633화>
막탄섬 라푸라푸시의 한 카페.
새로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듯 모든 게 깨끗한 넓은 카페에 앉은 초췌한 인상의 사십대 한국인 남성이 앞에 놓인 서류를 보며 이를 악문다.
한인 상인연합회에 가입하겠다는 서류와 건물 임대차 계약서, 순이익의 50퍼센트를 한인 상인연합회의 육성회비로 지원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서류들.
“푸후.”
딱!
카페 사장의 맞은편에 앉은 사십대 중반의 남성이 풍선껌을 터트리며 입술을 비튼다.
“뭐하십니까? 아직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흠칫!
놀란 카페 사장이 한인 상인연합회의 임원을 본다.
석 달, 그 끔찍했던 고난의 시간.
다시금 겪고 싶지 않은 시간을 떠올린 카페 사장은 눈을 감으며 서류들에 도장을 찍었고, 임원의 얼굴은 푸근한 미소를 그렸다.
“그래요. 처음부터 이렇게 협조해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습니까. 서로 얼굴도 안 붉히고 말이야. 사장님이 기부하시는 돈은 세부 한인들의 생존권 보장과 발전을 위해 잘 쓰겠습니다. 같은 한국인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죠. 흐흐. 그럼 이사는 보름 안으로 해 주시면 됩니다.”
고개를 까딱인 임원은 카페를 나섰고, 이윽고 뒤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카페 사장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피식 웃은 임원은 핸드폰을 들었다.
“어, 나야. 회장님 지금 어디 계셔? 사봉? 알았어.”
투계, 닭싸움을 일컫는 사봉.
통화를 종료한 임원은 카페 앞에 세워진 세단에 올라탔고, 세단은 그들의 사업체 중 한 곳인 투계장으로 향했다.
“와아!”
“죽여! 죽여 버려!”
허름한 창고 같은 공간.
티켓을 손에 쥔 도박꾼들이 의자에서 일어나 경기장을 노려보며 죽음을 외치고, 두 마리의 닭이 허공을 날며 서로의 몸에 날카로운 발톱을 박아 넣는다.
추악하고도 탐욕스러운 공간.
흐뭇이 웃은 임원이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객석으로 향한다.
“회장님.”
“죽여! 죽…… 왔어, 김 상무? 이쪽 분은 알지?”
후덕한 덩치에 탄탄한 피부, 정광이 넘치는 눈을 한 김정식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린 임원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청장님.”
세부를 중심 도시로 두며 3개 주와 3개 도시를 관할하는 행정 구역인 센트럴 비사야.
무려 68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그 거대 행정 구역을 담당하는 경찰청이 바로 센트럴 비사야 경찰청이다.
선글라스를 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임원은 잠시 물러났다.
그때였다.
“와아! 그렇지!”
“아아악!”
함성과 비명이 함께 터져 나오는 투계장.
고개를 돌린 임원이 발견한 건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도도히 고개를 들고 있는 하얀 닭과 그 아래 쓰러져 숨을 헐떡이는 갈색 닭이었다.
환한 얼굴과 일그러진 얼굴을 한 닭 주인들의 손에 들린 두 마리의 닭은 경기장 바깥의 닭 전문 수의사에게 넘겨지고, 이내 두 마리 모두 다 그 옆에 있는 요리사에게 넘겨진다.
“꼬꼬댁! 꼬오오오!”
난 이겼는데 왜 죽는 거냐는 듯 주인을 애타게 부르는 하얀 닭.
그러나 승리 수당금을 든 하얀 닭은 주인은 희희낙락 웃으며 돌아서고, 요리사의 중식도는 매정히 떨어져 내린다.
콰앙!
“하, 정말 청장님의 눈은 따라갈 수 없나 봅니다.”
“으하핫!”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김정식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는 경찰청장.
“내가 사봉만 50년이야! 이제 십 몇 년을 한 김 회장이 어떻게 날 이겨 먹어?”
“두고 보십시오. 다음엔 꼭 제가 이길 테니까!”
“두고 보자는 사람 안 무섭다고 했던가?”
“에이!”
결국 화를 주체하지 못한 김정식은 몸을 일으켰고, 경찰청장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딸 만큼 땄으니 이젠 그만둘 때였다.
그렇게 투계장을 나선 둘은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이동해 식사를 했다.
“요새 암보 놈들이 김 회장을 귀찮게 한다고?”
세부의 중요 관광지인 막탄섬과 두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도시, 만다우에.
그 세부의 요충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도시에서 암약하는 갱단이 바로 암보였다.
청장이 아픈 곳을 찌르자 김정식의 낯빛이 굳는다.
“괜찮습니다, 청장님.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어허! 김 회장, 날 친구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그런 경우 없는 사람으로 만들 거야?”
더욱이 오늘도 선물을 넉넉하게 받지 않았던가.
투계장에서 그가 딴 돈은 모두 김정식이 주는 선물이었다.
“그 문제는 내가 만다우에 경찰서장들에게 말해 놓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감사합니다. 청장님 덕분에 오늘도 2만 한인 교민들이 무사히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정식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청장은 흐뭇이 웃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둘은 악수를 하며 헤어졌고, 그제야 한인 상인연합회 임원이 김정식에게 다가선다.
“그 카페 마무리 지었습니다.”
무려 세 달 동안 버티며 분위기를 흐렸던 놈에 대한 마무리가 끝났다. 조금만 더 버텼다면 아마 먼바다에서 산호가 서식하는 한 덩이의 콘크리트가 됐을 거다.
“수고했어. 드라이브나 하지.”
“모시겠습니다.”
차를 타고 세부의 한인 상가들을 도는 그들.
“호오. 저긴 손님이 많군.”
만석이다 못해 줄이 족히 20미터는 서 있는 한인 식당.
“톱스타들이 식사를 한 곳 아닙니까. 세부에 들르는 전 세계 관광객들의 필수 여행 코스라고 합니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저곳뿐만이 아니다. 세계경찰태권도 대회에 응원단 및 서포터로 참가한 톱스타들이 들른 모든 곳이 호황이라고 한다.
그 낙수 효과로 인해 주변 상권들도 살아나고 있고, 전년 대비 관광객의 숫자가 무려 10퍼센트나 늘었다고 한다.
“……쯧.”
아쉽다. 세계경찰태권도 대회의 합숙 장소로 자신의 리조트가 사용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실 처음 그의 리조트에도 협조 요청이 왔었으나, 괜히 경찰에서 무언가 낌새라도 알아차릴까 우려되어 거절했던 김정식.
그러나 그로 인해 장사가 이렇게 잘되는 꼴을 보니 괜히 배알이 꼴린다.
차에서 내린 김정식은 한인 식당으로 걸어갔다.
“헉! 회, 회장님.”
“장사 잘되네.”
“하하. 이, 이것도 한 철 아니겠습니까. 드, 들어오시죠!”
식당 안을 둘러본 김정식은 코웃음을 쳤다.
“앉을 자리가 없는데?”
“회, 회장님을 대접하는 건데 없는 자리라도 만들어 드려야죠!”
“됐고. 다음 달부터는 육성회비 10퍼센트 높여서 내도록 해.”
“회, 회장님!”
“왜? 가게 빼려고?”
“……내겠습니다.”
“20퍼센트.”
경악하면서도 결국 다시 고개를 숙이는 식당 사장을 보며 콧방귀를 뀐 김정식은 돌아 나와 주변 상가들을 둘러봤다.
낙수 효과를 톡톡히 누리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주변 상인들. 한인 상인도 있고, 필리핀 상인도 있다.
김정식과 눈이 마주친 그들은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그제야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김정식에게 사십대 필리핀 남성이 다가선다.
단추를 모두 푼 하와이안 셔츠 안으로 드러난 새까맣게 탄 피부를 뒤덮은 문신들. 배 앞에 쑤셔 넣은 은색 리볼버 한 정이 위협적이다.
수하들을 거느린 채 거만하게 다가온 그는 김정식의 앞에 서더니 누렇고 까만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다.
“김 회장님.”
“라딧.”
이 구역을 주름잡는 갱단인 딘도의 행동대장 라딧이 고개를 숙이자 김정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사 잘되지?”
“모두 김 회장님 덕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내가 그거 유치한다고 애를 많이 썼어.”
세계경찰태권도 대회의 합숙 훈련으로 세계 각국의 톱스타가 모인 덕분에 그 낙수 효과로 활발히 살아난 세부의 상권.
덕분에 갱단 딘도는 종전보다 보호세를 20퍼센트가량 더 걷을 수 있게 되었다.
김정식은 마치 그 일을 자신이 이루어 낸 것처럼 말하고 다녔으나, 일개 갱단에서 그 진위를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보스께서도 감사하고 계십니다. 감사의 의미로 곧 정식으로 초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그때 보지.”
둘은 손을 맞잡았고, 주변 상인들의 얼굴은 더 공포에 질린다.
직후 차를 타고 떠난 김정식은 자신의 리조트, 샹그릴라로 향했다.
우르르!
김정식의 차가 도착하자마자 몰려나와 열과 오를 맞춰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리조트 직원들.
그 적막한 침묵 속, 김정식은 뒷짐을 지며 리조트 안으로 향했고, 그 모습은 마치 엎드린 신하들을 스쳐 지나가는 왕의 행차 같았다.
“지랄 염병을 하네.”
김정식의 리조트가 훤히 보이는 어느 건물 옥상 위, 망원경을 내린 종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어디 피해자들의 증언만 듣고 수사를 시작할 수 있을까. 그래서 김정식을 살피고자 지난 이틀간 미행을 했는데, 이건 더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경찰청장에, 갱단…….”
오늘 하루 참 많은 것을 봤다.
암군. 김정식은 이만여 한인 교민들의 쥐어짜는 암군이자 폭군이었다.
덜컹!
“최.”
종혁은 옥상의 문을 열고 들어온 CIA 요원이 건네는 서류를 살피곤 헛웃음을 터트렸다.
딘도. 조직원이 총 팔십여 명에 이르는 거대 갱단.
인신매매에 마약, 매춘, 살인 등 안 하는 게 없는 새끼들이다.
“김정식에 대한 자료는 없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그가 넘기는 다른 서류를 살핀 종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리조트의 예상 수익이 생각보다 크군요.”
현재 세부에 들어와 있는 글로벌 호텔 체인들과 거의 맞먹는 예상 수익.
이외에 김정식의 모든 사업체와 부동산 등 공식적으로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암중 사업체들까지 더한다면 그의 재산은 못해도 최소 천억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됐다.
한국 깡패들뿐만 아니라 필리핀 갱단들까지 껌뻑 죽을 만했다.
“햐, 진짜 난 놈은 난 놈이네.”
17년이다.
짧은 시간은 아니라지만, 8억으로 무려 100배 이상 불린 것이다. 난 놈은 난 놈이었다.
“이러면 어디까지 얽혀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 정도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면, 세부의 정관계 인사 대부분에게 돈을 먹이고도 남았다.
“부장님, 이거 잘못 부딪쳤다가는 대가리가 깨질 수도 있겠는데요?”
이번엔 종혁이 실패할 수도 있었다.
그건 종혁도 같은 생각이었다.
약간은 다른 비유지만, 귀농이 실패하는 이유가 뭐던가. 마을의 구성원 전체가 외지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 세부에서 저희에게 도움을 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최재수의 낯빛이 흐려질 때였다.
-오! 오오오! 오빠를 사랑해!
때마침 걸려온 전화에 종혁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예, 홍 대표님.”
홍정필 원내대표. 종혁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오, 내 전화를 기다렸습니까?
“무척이나 기다렸습니다.”
-대답을 하기 전에 뭐 하나 묻고 싶습니다.
“100억을 넣으시면 3년 안에 원금뿐만 아니라 두둑한 배당금까지 회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쿵!
-허허. 약속 잡았습니다.
종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누굽니까?
“세부에서 한인의 왕이라 불리는 놈입니다.”
-……한국으로 송환만 시켜요. 이후엔 내가 나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종혁은 기대 어린 표정을 짓는 최재수를 봤다.
“가자.”
“어딜요!”
“마닐라.”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만나야 될 사람은 그곳에 있었다.
* * *
부우웅! 빵빵!
매연과 몽환적인 노란 불빛들이 가득한 어두운 도로를 한 대의 차량이 나아간다.
한참을 달려 멈춘 곳은 마닐라의 산 아구스틴 성당.
마닐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찰칵!
그 웅장함에 잠시 넋을 잃었던 종혁은 내리자마자 라이터를 켜는 최재수의 입에서 담배를 뺏었다.
“예의는 지키자.”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도저히 담배를 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지금부터 만나야 할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짜 부장님은…….”
카라락!
성당의 대문을 넘어 고급 세단 한 대가 들어오자, 하얗게 질린 최재수가 다급히 자세를 바로잡는다.
“아니야, 인마.”
“예?”
그렇게 그들의 앞에 멈춰 선 세단. 운전석에서 뛰어나온 서양인이 뒷좌석의 문을 연다.
그와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뿌연 연기.
쿵!
대지를 묵직하게 지르밟은 커다란 발의 주인이 연기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다.
새하얀 코트를 어깨에 걸친 거한.
“……흐읍?!”
경악한 최재수가 종혁과 종혁의 앞에 서는 남성을 번갈아 바라본다.
똑같다. 너무 똑같이 생겼다.
종혁과 똑같이 생긴 남성이 두꺼운 시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며 연기를 뿜는다.
“Давно не виделись(오랜만이군, 애새끼).”
“избит ребенком(그 애새끼에게 맞은)…….”
뻐어억!
종혁은 아래로 내린 팔뚝에 틀어박히는 아이반의 주먹에 이를 드러냈다.
“죽여 버릴까, 진짜.”
“빅터도 없으니 오늘 끝을 보는 게 어때?”
“죽는 놈이 산 놈에게 재산 다 넘기는 거다.”
“좋군.”
거리를 두고 물러난 둘이 외투를 벗는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어흠!”
성당 입구에 서서 헛기침을 하는 신부님.
혀를 찬 종혁이 고개를 숙이고, 아이반 역시 양손을 모아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시 고개를 숙인 그들은 성당 안으로 안내됐다.
커다란 문을 넘자마자 그들을 반기는 경건함.
아무도 없는 적막한 침묵이 그들로 하여금 한 가지의 예절을 강요한다.
아이반이 정면의 예수상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성호를 그리고, 종혁도 경건히 성호를 그린다.
그렇게 신께 예를 표한 둘은 닫히는 문을 뒤로하며 예배객이라곤 아무도 없이 조용한 성당에 홀로 앉아 있는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정면을 보며 기도를 하는 장년인.
종혁은 그에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허리를 숙였다.
“다시 뵙습니다, 시메온 아키노 의원님.”
시메온 아키노 상원의원.
불과 몇 달 후 이 필리핀의 대통령이 될 인물.
이번 세계경찰태권도 대회 준비 당시 세부에 왔던 정치인이다.
세부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다?
그러면 세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칠 권력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는 거다.
종혁의 눈이 흉흉하게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