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591화>
햇빛이 커튼을 강렬하게 뚫고 들어오는 늦은 아침.
번쩍 눈을 뜬 종혁이 머리를 긁으며 일어난다.
“몇 시지? 어이쿠.”
무려 9시다. 평소라면 이미 출근을 하다 못해 운동까지 끝마칠 시간.
오랜만에 늦잠을 잔 종혁은 평소와 다르게 무거워진 머리에 다시 몸을 뒤로 뉘인다.
조금만 더 자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귀찮은데…….”
하지만 혹시나 제보 전화일 수도 있기에 종혁은 어쩔 수 없이 옆에 놔둔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아이, 씨.”
오택수다.
“왜요.”
-큭큭. 정직 첫날 아침의 기분은 어때?
“오 대장님이 전화하기 전까지는 좋았습니다.”
-……진짜 쉬려나 보네.
“내가 쉰다고 했잖아요. 무슨 일이신데요?”
-놀리려고 전화해 봤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쩝.
“네, 끊습니다. 저녁에 한잔해요.”
-몰라. 바빠. 일찍 퇴근할 것 같으면 전화할게.
“옙! 수고하십쇼.”
통화를 종료한 종혁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가 얼굴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쯧.”
혀를 찬 종혁은 국정원 차장에게 전화를 했다.
“예, 차장님. 아, 댓글을 다 달아 놓으셨다고요? 계속 상위권으로 올리고 계시고요? 예,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핸드폰을 내려놓은 종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뭐하지?”
회귀 후 모든 시간을 계획적으로 써 왔던 종혁.
물론 수사를 하는 와중 충동적으로 움직인 경우도 있지만, 평상시엔 휴가 때도 계획적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장기 휴가를 얻게 되어 버리니 딱히 할 게 떠오르지 않았다.
“뭐…… 일단 움직여 볼까?”
그러면 뭐라도 생각날 터.
꼬르륵!
“밥부터.”
배를 긁은 종혁은 어머니 고정숙이 운영하는 2층의 뷔페로 향했다.
웅성웅성.
9시가 넘었음에도 사람이 제법 차 있는 뷔페.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이네.’
절반 이상이 이 정혁빌딩의 세입자다.
‘아, 오늘 토요일이구나.’
다들 자신처럼 늦잠을 잔 것 같다.
“어머, 종혁아!”
“하하. 안녕하세요, 이모님.”
카운터에 앉아 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직원의 모습에 종혁은 씩 웃었다.
“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휴가예요. 장기 휴가.”
“뭐야. 경찰이 그래도 돼? 너 얼마 전에도 장기 휴가였잖아?”
“경찰은 사람 아니랍니까? 엄마는요?”
“사장님은 주방에 계시지.”
“그래요?”
이젠 몸 편히 사람을 부려도 될 텐데 꼭 주방에서 일을 하시는 어머니.
주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종혁은 한쪽에서 나물을 볶고 있는 어머니를 쳐다봤다.
“오마니! 밥!”
흠칫!
쟤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나, 하고 의아해했던 고정숙은 이내 곧 얼굴을 구겼다.
“알아서 처먹어! 바빠!”
“계란프라이 해줭!”
“네가 해 처먹든가!”
“……쯧!”
입술을 삐죽 내민 종혁은 음식들이 주르륵 깔린 곳으로 향했다.
“아니, 아들이 그렇게 노력해서 어? 이런 빌딩도 사주고 그랬으면 어? 오우, 오리불고기.”
넓은 보온 스테인리스 용기에 가득 담긴 빨갛고 기름진 영롱한 빛깔에 방금 전 서운함을 모두 잊은 종혁은 비빔밥용 그릇을 가져와 오리불고기를 수북하게 담았다.
오늘 아침의 공복에 괴로워하는 배를 채울 메뉴는 최종혁식 오리불고기 덮밥이었다. 밥보다 고기가 세 배 많은 오리불고기 덮밥.
“예, 이 집 아들입니다. 예. 사장 아들인데 돈은 다섯 배 더 냅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그릇 두 개와 비빔밥용 그릇에 음식을 가득 채운 종혁은 냉장고를 스쳐 지나치다 잠시 멈춰 선다.
오리불고기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녹색 병들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에이 씨, 몰라.”
결국 소주 두 병까지 챙겨 들고서 빈자리에 앉은 그.
꿀꺽꿀꺽!
“크으으!”
아침부터 시원하게 목구멍을 적시는 소주와 입안을 농락하는 오리불고기 덮밥이 그의 정신과 전신을 뒤흔들며 깨운다.
“어흐으. 좋다, 좋아.”
탕!
“아침부터 잘하는 짓이다.”
“오! 계란프라이!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어머니.”
고작 계란프라이 몇 개에 진심이라는 단어까지 붙는 것에 자신이 그렇게 못 먹였나 떨떠름해하던 고정숙은 고개를 털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한 달간 정직이에요.”
움찔!
“왜?”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어서? 위험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마시고.”
“……잘하는 짓이다. 그럼 한 달 지나면 다시 복귀하는 거야?”
“당연하지. 왜? 이 아들을 대체할 인력은 없으니까!”
고정숙은 과장되게 가슴을 펴는 아들의 모습에 작게 안심을 하며 코웃음을 쳤다.
“지랄하네.”
“아, 거 아들한테 험한 말 좀 쓰지 말라니까.”
“너도 쓰는데 난 쓰면 안 되니?”
“……사랑합니다.”
“됐고. 아무튼 오늘부터 쉰다는 거지?”
고정숙의 눈이 빛나자 종혁은 흐뭇히 웃었다.
“바쁩니다.”
“이따가 나 대신 백화점에 가서 뭐 좀 찾아와.”
“바쁘다니까.”
“다 먹으면 빈 그릇 잘 치우고.”
할 말을 다 한 고정숙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고, 종혁은 소주병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유혹에 저버리지 말았어야 했나…….’
“에라이. 몰라, 일단 적셔.”
머리를 벅벅 긁은 종혁은 컵에 다시 소주를 따랐다.
“아흐으.”
낮술은 언제나 진리였다.
* * *
키긱!
백화점 앞에 선 택시에서 내린 종혁이 멍하니 백화점 건물을 바라본다.
아침에 소주를 두 병 마신 후 한숨 자서 그런지 졸음이 사라지지 않는 그의 눈. 하품을 한 종혁은 배를 긁으며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 명품관으로 향했다.
띵! 스르릉!
“디올이…… 저기였던가?”
수군수군.
“여기 명품관 수준이 많이 낮아졌네요.”
“그러게요. 어떻게 명품관에 오는데…….”
귓가를 자극하는 말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던 종혁은 시선을 피하는 중년 여성들의 모습에 잠시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이상하게 안 입었는데?’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제로 만든 추리닝. 쉬는 날이면 자주 입는 옷이다.
“아하?”
아무래도 추리닝이라서 문제가 된 것 같다.
“별 시덥잖은…….”
그때였다.
또각또각!
정장을 입은 한 여성이 빠르게 다가와 종혁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그녀의 등장에 종혁을 힐끗거리던 중년 여성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어머어머, 저 사람 VIP 전담관리팀의 이 부장님 아니에요?”
“블랙 고객만 관리한다는?”
연간 수억 원 이상 명품을 구매하는, VIP 내에서도 0.01%의 VVVIP 고객만이 선정되는 블랙 등급 고객.
그 블랙 등급의 고객만을 전담하여 관리한다는 부장이 종혁에게 허리를 숙인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얼굴이 확 붉어진 아줌마들은 재빨리 자리를 떴고, 종혁은 피식 웃음을 흘리곤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이 부장님.”
“갑자기 정문으로 들어오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한 번 들렀다 하면 기본으로 몇 천만 원씩 구매를 하는 블랙 등급 고객.
VIP 중에서도 0.01%에 불과할 만큼 숫자가 적은 그들이지만, 그들이 안겨다 주는 매출액은 백화점의 전체 매출액 20%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났다.
당연히 특별관리대상이고, 백화점에선 그들의 차량 번호까지 파악해 두고 그들이 주차장에 들어서면 곧장 고객관리팀으로 연락을 보낸다.
그런데 오늘은 종혁이 느닷없이 정문으로 들어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우연히 CCTV를 확인하고 있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아, 술을 좀 마셔서요.”
“그러시면 쇼핑을 하시기 전에 마사지를 받으시는 건 어떠십니까?”
“흠. 그럴까요?”
그렇지 않아도 오택수와의 술 약속이 잡힐 수 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형사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잠은 좀 깰 필요가 있었다.
“물론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녀의 안내를 받아 마사지를 받으며 남은 술기운과 졸음을 모두 털어 낸 종혁은 그제야 세상이 다시 맑아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그 새끼 때문에 스트레스를 좀 받았나 본데?’
똥을 무더기로 안겨 준 놈을 떠올리자 종혁의 속이 다시 부글부글 끓는다.
“아,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
아무래도 이 스트레스를 풀어야 할 것 같았다.
“아르마니부터 가죠.”
“모시겠습니다.”
블랙 등급 고객은 프라이빗한 퍼스널 쇼핑룸에서 모든 매장의 물건을 구경하고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가 제공되지만, 그런 블랙 등급 고객이 걸어서 쇼핑하길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따라야 했다.
종혁의 명품관 쇼핑 투어가 시작됐다.
1시간 후 슈트부터 시계까지 쫙 빼입은 종혁.
그는 디올에서 수령한 카드 지갑들을 이 부장에게 맡겼다.
“입고 온 것들까지 해서 집으로 배달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음…….”
‘더 해? 말아?’
오택수가 퇴근할 때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잠시만요? 예, 대장님. 어쩔 거예요?”
-야, 미안미안! 사건 터졌어!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
“에라이. 그냥 가야겠네요.”
“오늘도 즐거운 시간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부장님 덕분에 만족스러운…… 응?”
종혁은 옆 루이비통 매장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껌뻑였다.
‘어? 저 사람은?’
이근수 소방장이다.
‘옆에 계신 분은 아내분이신가?’
종혁은 반사적으로 발을 뗐다가 미간을 좁혔다. 이제야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계속 이렇게 다른 손님들의 쇼핑을 방해하시면 곤란합니다, 고객님.”
턱을 치켜세우고 있는 한 셀러의 앞에서 이근수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부인으로 추정되는 옆의 여성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이근수의 팔을 잡아끌고 있었다.
“아니, 그놈의 쇼핑백이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사람을 이렇게…….”
“와! 이 소방장님 아니십니까?!”
움찔!
“최, 최 부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혹시 옆의 사모님과 쇼핑 오신 거예요? 이야, 여성이랑 백화점에 오시다니…… 큰 결심 하셨네요. 아, 그런데 사모님 맞으시죠?”
“맞습니다! 아, 여보 인사드려. 내가 며칠 전에 말했지? 경찰 본청 홍보부장님이신 최종혁 총경님.”
“어머!”
여성은 방금 전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환한 미소로 종혁의 손을 덥썩 잡았다.
“정말 감사해요! 부장님 덕분에 저희 오빠가 새 방화복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됐어요!”
“하하. 뭘요. 제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했을 일인데요, 뭘. 그런데……무슨 일이세요?”
서글서글 웃던 종혁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자 이근수가 울컥한다.
“아니, 부장님도 한번 들어 보십시오!”
결혼 15주년 기념으로 백화점을 찾은 그들.
결혼하고 이날 이때까지 변변한 선물 하나 사 준 적 없어 미안해하던 이근수는 오늘 하루 아내가 원하는 모든 걸 사 주려 했지만, 평소 만 원짜리 티셔츠를 사는 것조차 벌벌 떠는 아내가 원한 건 고작 7만 원짜리 원피스와 이 브랜드의 쇼핑백이었다.
요새 친구들 사이에서 이 쇼핑백이 인기라고, 지금 우리의 사정 어려우니까 25주년 때는 정말 좋은 거 사 달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근수는 억장이 무너졌었다.
그런데…….
“돈을 준다고 해도 쇼핑백을 주지 않는다지 않습니까! 없다고! 방금 전 다른 사람이 원하니까 그냥 줘 놓고! 정말 누굴 거지로 아나! 내가 여기 있는 물건 사면 됩니까? 어?! 얼만데요! 얼마야!”
“오, 오빠, 그만해…….”
“재밌네.”
쿵!
순간 이근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입이 다물어진다.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그린 종혁은 이근수 부부에게 무안을 준 셀러를 응시한다.
“아, 요새 왜 이렇게 재밌는 일이 많지? 부장님, 앞으로 여기 오려면 꼭 정장을 입어야겠어요.”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모두 제 불찰입니다. 이 직원은 제가 책임지고 교육시키겠습니다. 뭐해요! 어서 사과 안 드리고!”
‘이 미친 인간이! 이분 모자가 우리 백화점에서 한 해에 쓰는 금액이 얼만데!’
“죄, 죄송…….”
이제야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한 건지 하얗게 질린 직원이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종혁은 손을 들어 말렸다.
“아, 말뿐인 사과는 됐습니다. 이 부장님, 이 직원분 절대 자르지 마세요. 내가 경찰인데 그런 부당 해고를 당하게 할 순 없잖아요.”
하지만 앞으로 그녀의 직장 생활은 지옥 그 자체일 것이다.
사람 눈에서 눈물을 뽑았으면 본인 눈에선 피눈물을 흘릴 각오를 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나 분명히 자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당한 대우도 안 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고객님?”
“네?”
이 부장은 놀라는 이근수의 아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저희 직원의 모자란 응대에 기분이 상하신 점 이렇게 사과드립니다. 그 사과의 의미로 저희 백화점의 프라이빗한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고 싶은데, 받아 주시겠습니까?”
“네?!”
이근수의 아내는 이근수와 종혁의 눈치를 봤고, 종혁은 그런 그녀의 귀에 귓속말을 했다.
“살려 달라는 거예요, 사모님. 제가 여기 VVVIP거든요.”
“힉?!”
귀가 예민한지 깜짝 놀랐던 그녀는 이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건지 이 부장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다른 사람도 같이 이용할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고객님.”
“감사합니다! 오빠! 아까 그분들 부르자!”
“누구? 현식이? 어, 그래. 잠시만?”
눈치가 좋아서 그런지 돌아가는 상황을 금세 파악한 이근수는 얼른 오늘 이 백화점에서 만난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현식아. 난데, 너 여기로 와라. 제수씨랑. 응, 여기가…….”
“이 부장님, 여기서 이러지 말고 사모님 먼저 라운지로 안내 좀 해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뒤이어 종혁은 이근수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어, 그래. 여기서 이러지 말고 편하게 기다리고 있자. 먼저 가서 기다려. 난 이분이랑 잠시 애기 좀 하고 갈게.”
“알았어! 얼른 와!”
이근수의 아내는 신나서 먼저 이 부장을 따라나섰고, 종혁은 이 부장이 붙여 준 직원을 따라 이근수와 함께 흡연실로 이동했다.
“허어. 지, 진짜 흡연실이 있네요?”
“하하. 명품관엔 있더라고요. 그보다 얼마 전엔 감사했습니다.”
이근수가 현장에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조성배가 죽었다는 걸, 그리고 그냥 죽은 것도 아니라 살해당한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더 걸렸을 거다.
수습이 끝나지 않은 화재 현장에 외부인을 들여보낸다는 건 자칫 징계를 받을 수도 있는 일. 이근수는 그런 징계를 각오하고 종혁을 들여보내 준 것이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수사하시는 데 당연히 협조해 드려야죠. 앞으론 더 적극적으로 경찰에 협조하겠습니다.”
“어휴. 그런 걸 바란 일은 아니었는데……그래도 그래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청에서도 동조하는 친구들이 많으니 맡겨만 주십시오! 하하.”
지이잉! 지이잉!
“어, 현식아! 도착했어? 잠깐만?”
얼른 흡연실을 나선 이근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성이는 남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종혁은 그런 이근수를 보며 흐뭇이 웃었다.
‘그 충동적인 선행이 이렇게 돌아오네…….’
소방관들만큼 경찰도 골치 아파 하는 게 바로 방화 및 화재 사건이다. 방화라면 그나마 범인을 찾기 쉽겠지만, 문제는 화재 사건이다.
한순간의 부주의, 혹은 건물의 노후 때문에 발생하는 화재 사건.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화재가 방화인지 화재인지 밝혀내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는 점이다.
그런데 불과 일평생을 살아온 소방관들이 수사에 협조를, 조언을 해 준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된다.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부를 빨리 해 버렸을 텐데…….’
그동안 너무 경찰 내부 문제에만 집중했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여기야, 여기!”
종혁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현식과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아내를 보곤 살짝 놀랐다.
‘외국인?’
백화점이 처음인 듯 잔뜩 웅크린 채 다가오는 동남아 여성.
“아니, 형님. 여긴 대체 어떻게 온 겁니까? 여긴…….”
“아, 이분 덕분에 오게 됐지. 내가 얼마 전에 말했지? 이분이 그 최종혁 부장님이셔.”
움찔!
“……아, 그분이요?”
‘음?’
종혁은 무슨 일인지 엉덩이를 살짝 뒤로 빼는 현식의 모습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