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576화>
그들이 모인 회의실에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 침묵을 깬 건 경기지방경찰청장이었다.
“경찰 전용 보험이라……. 그건 이미 하고 있지 않아?”
임용을 받아 발령지에 도착한 경찰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바로 보험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거다.
“그건 어디까지나 수사과에 배치되는 형사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 경기청장님.”
그마저도 경찰 전용이라고 특별한 약관이 들어 있는 게 아니다. 아니, 도리어 일반 보험과 비교하여 보장 내용이 형편없었다.
상해를 입거나 사망할 확률이 여타 직군보다 높은 경찰. 보험사로서는 보장 내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수사과의 형사들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가입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일반 보험보다는 가입도 쉽고, 보험료도 저렴하긴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망한 형사의 유가족들이 보험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이 나라의 치안을 위해, 이 나라의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사망했음에도 남은 유가족에게 보장된 미래가 없는 것이다.
“조사된 바에 따르면 전국의 경찰 중 자가 주택을 가진 경찰의 비율이 약 14퍼센트. 나머진 모두 전월세에서 살고 있는 걸로 나왔습니다.”
“그것…… 밖에 안 된다고?”
인식의 사각. 몰랐던 이야기라 그런지 고위 간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서울 20평대 아파트의 평균 가격이 2억을 돌파했고, 지방 도시의 아파트 가격도 평균 1억을 돌파했습니다. 박명후 대통령께서 정책을 잘 펼치셔서 나날이 솟던 부동산 가격이 안정기를 찾고 있다지만…….”
부동산의 오름세는 결코 멈추지 않을 거다.
“가장을 잃은 유가족들이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누가 그걸 몰라? 하지만…….”
보험사들이, 대기업들이 해 주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종혁은 처참하게 무너지는 그들의 얼굴에 최재수를 봤고, 그는 얼른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탁!
[보험료 월 3만 6천 원, 상해 및 재해 사망 시 최대 15억 원 지급]
“미국의 글로벌 보험사가 한국에 진출할 때 경찰이 홍보를 돕는 조건으로 제시한 경찰 전용 상품입니다.”
“뭣?!”
장희락 경찰청장을 비롯해 고위 간부들의 엉덩이가 들썩인다.
“작년 지주 회사가 경영 위기에 빠져 사모펀드에 매각되긴 했지만, 1928년에 설립된 전통과 노하우를 지닌 회사입니다.”
정확히는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도산 위기에 빠진 걸 종혁이 인수한 거다. 바로 오늘을 위해 말이다.
“결정적으로 이 회사를 매입한 투자사의 주인이 한국계 미국인으로, 한국에 무척 호의적입니다.”
“……호오?”
그 말에 고위 간부들의 눈에 서려 있던 미약한 거부감이 사라진다.
“흠. 이 사람, 최 부장이 미국에 있을 때 인연을 맺은 거야?”
장희락 경찰청장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종혁에게로 몰린다.
“예. 제가 FBI 연수를 할 때 감사하게도 인연을 맺어 주신 분이시며, FBI에서도 교차 검증을 끝낸 분이십니다.”
“오!”
“그렇다면야…….”
“아니, 이건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보험 가입 기간은 어떻게 되지?”
종혁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경무인사기획관을 봤다.
“경찰에 임용된 순간부터 퇴직을 하는 그 순간까지입니다. 퇴직 이후 3년 안에 우울증이나 암 등의 병이 발견될 시에도 보험료는 지급됩니다.”
쿠웅!
종혁은 입을 떡 벌리는 그들을 향해 쐐기를 박기로 했다.
탁!
신이 난 최재수가 얼른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경찰관 퇴직연금 보험]
[경찰관 가족 우대 보험]
[경찰 전용 무이자 대출]
“김옥수 경사의 일은 다 아실 테니 퇴직 보험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고위 간부들의 표정은 심각해진다.
무려 삼십여 년간 조직에 충성한 경찰의 참혹한 삶.
남의 이야기 같지 않기에 그들은 TV를 시청하는 내내 생각이 많아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라고 퇴직 후 저런 삶을 살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가족 우대 보험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가입 조건은 가족 중 경찰이 있는 것뿐.”
“……가족이라고 하면 어디까지 포함되는 거야?”
“본인과 배우자의 사촌까지 가입 가능합니다.”
“뭐? 이야, 이거 그러면 도대체 몇 명이나 가입할 수 있는 거야?”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에 좌중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무이자 대출도 자세한 내용 좀 말해 봐!”
“계급별, 호봉별로 차등이 있고, 순경 1호봉은 최대 3천만 원까지 대출이 가능합니다. 참고로 경무관 이상은 3억 이상도 대출이 가능합니다.”
담보는 이 회사에서 발행한 보험들이다.
그 말에 고위 간부들의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최 부장, 이거…….”
종혁은 이 보험들의 숨겨진 진의를 알아챈 듯한 장희락을 향해 싱긋 웃었다.
“예. 앞으로 저희 수십만 경찰은 조직에, 그리고 상부에 충성을 할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칭송은 장희락 경찰청장과 여기 모인 고위 간부들이 받게 될 거다. 현 정권의 사랑도.
이 말은 즉, 위로 혹은 여의도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는 것.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경찰의 정점으로 향하기 위한, 그 어떤 경쟁자도 불허하는 계획.
“하……!”
역시 종혁이다. 자신들의 가려운 곳이 어딘지 잘 알고 있다.
‘이건 통과되겠군.’
당장이라도 박명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싶어 안달이 난 장희락의 모습에 속으로 웃은 종혁은 지금까지처럼 덤덤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다음으로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넘어가!”
탁!
[지방 전근 시 사택 제공]
“현재 지방 치안 공백의 위험성에 대해 다들 아실 테니 다른 설명은 안 하겠습니다. 행복의 쉼터 재단에서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 중 일부를 정부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경찰을 위해 써 달라고.
쿠웅!
또 다른 폭탄이 그들의 머리를 후려쳤다.
* * *
“청장님, 그리고 고위 간부님들. 국민과 직원들이 바라고 있습니다. 부디 현명한 결단 부탁드리겠습니다.”
짝짝짝짝짝!
박수를 쳤지만 생각이 깊은 얼굴들.
거수경례를 하고 회의실을 나선 종혁이 숨을 탁 내쉰다.
‘끝났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남은 것은 하늘에, 아니 저들의 결단에 맡길 뿐.
종혁은 자신을 조마조마하며 쳐다보는 홍보부 직원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워 줬고, 그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씩 웃은 종혁은 손뼉을 쳤다.
“자! 이제 마무리합시다!”
“옙!”
홍보부 직원들이 가슴을 펴며 종혁의 뒤를 따른다.
묘한 시선의 김덕출까지도 말이다.
‘이러면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그의 표정이 더 묘해졌다.
한편 종혁이 사라진 회의실 안.
다시 너구리굴을 만들던 고위 간부들이 피식 웃는다.
“최 부장의 야망이 크군.”
브리핑을 받는 내내 느꼈다. 이 모두 종혁이 이 나라 경찰의 정점, 경찰청장으로 향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걸.
“그래도 이 정도 능력이라면 인정해 줘야지 않겠습니까?”
“인정은 이미 했지. 다만 이렇게까지 해낼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이젠 확실히 인정할 수 있다. 종혁은 자신들의 상식을 벗어난 존재라는 걸 말이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청장님?”
이렇게 상부가 원하는 음식을 차리다 못해 떠먹여 준, 그러나 후에 그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종혁을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
장희락은 피식 웃었다.
“내년에 경무관으로 올리면 말이 나올 테니, 4년 후에 특별 진급으로 올리도록 하지.”
“……역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면 안 돼죠.”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허. 그럼 그때 최 부장의 나이가 33살인가? 33살에 경무관이라…….”
역대 최연소 총경인 것도 모자라 이 역시 역대 최연소다.
“이건 뭐 만화 아니고…….”
“하핫!”
“자, 그럼 다들 일어나지. 오랜만에 모였는데 뒤풀이 안 할 거야?”
“어이구, 가야죠. 오늘 메뉴가 뭡니까?”
“참치입니다! 일인당 4만 원씩 주시면 됩니다!”
“에이, 그놈의 기름 참치. 그냥 깔쌈하게 피꼬막 어떠십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예약하기 귀찮아.”
그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조용해진 건물을 나섰다.
* * *
정부, 경찰 및 소방공무원 등 위험 직군을 위한 전용 보험을 만들겠다!
그동안 위험하단 이유로 보장이 적었던 경찰, 양팔 벌려 환영! 정부의 결정에 감사하다!
더 몸 바쳐 국민의 안전을 지키겠습니다, 충성!
골머리 아파진 보험사들!
미국의 KP보험! 가장 먼저 경찰 전용 보험 창구 신설!
사망 보험금 최대 15억?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몸 바쳐 일하는 경찰들에겐 부족한 액수!
대한민국의 언론들이 약간 시끄러워졌다.
* * *
“푸른 언덕에! 배낭을 메고-!”
“소원을 말해 봐!”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 안,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한참 멀었는데도 벌어진 놀자판에 모든 사람들이 흥겨움에 취한다.
특히나 그 가족들이 더 흥겨워한다.
그동안 야근이다 뭐다 해서 제대로 가지 못했던 휴가. 비록 단체로 가는 것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거기다 이번에 경찰의 날이라고 또 상여금을 타 오지 않았던가.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모르는 아내들이 종혁을 향해 애정 어린 시선을 듬뿍 보낸다.
“아이고, 아쉽네. 여름이었으면 우리 부장님 전세기로 딱 동남아에 갔을 텐데!”
“저, 정말요?”
“그럼요. 내가 따뜻한 밥 먹고 흰소리할까요. 우리 부장님이 부자예요, 부자! 건물이 몇 챈데!”
혹시나 종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종혁의 최측근인 최재수의 할머니를 찔러 봤던 아내들의 눈이 번뜩인다.
“부장님 연세가 어떻게 되신다고 했죠?”
“스물아홉! 아직 서른도 안 됐어요!”
‘스물아홉?!’
더 타오르는 시선에, 그리고 오묘해지는 어머니 고정숙의 시선에 종혁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술을 홀짝였고, 최재수는 그런 종혁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웃지 마라, 짜샤.”
“푸하핫!”
콰악!
“악! 항복, 항복!”
겨우 헤드록에서 풀려난 최재수가 눈을 흘기다 빛낸다.
“아, 부장님. 지방 사택 그거…… 부장님 거죠?”
“내가 그렇게 부자로 보이냐?”
“네. 제가 아는 사람들 중 최고 부자죠.”
“네 맘대로 생각해라.”
“하, 진짜 부장님이 다 하십쇼.”
종혁은 너무 퍼 준다며 툴툴거리는 최재수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하지만 어쩌겠냐.’
이 정도까지 하지 않으면 종혁이 바라는 개혁은 결코 이뤄지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만큼 경찰 예산이 부족했다.
‘그나저나 박명후 그 양반…….’
이쪽의 공을 아주 예쁘게 낚아채다 못해 위험 직군들의 지지를 얻었다.
다급히 사연의 자세한 내용을 담은 후속 보도를 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돈만 쓸 뻔했다.
‘그런데 또 미안하다고 전화를 해 오니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러면서 경찰 예산을 원상태로 돌리다 못해 증대한다고 하니 더 화를 낼 수 없었다.
정말 능구렁이 같은 양반이었다.
“부장님! 한 곡 하시죠!”
“아, 그럴까요?”
마이크를 받아 든 종혁은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 속에 노래 번호를 눌렀다. 직후 다시 버스 안을 쿵쾅쿵쾅 울리는 빠른 비트.
“달려 봅시다-! 저 푸른 바다 끝까지!”
“와후!”
“달리자!”
그들을 태운 버스가 강원도 횡성으로 향했다.
* * *
술과 흥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횡성.
한 식당 앞에 우르르 몰려선 사람들이 종혁의 입을 집중한다.
“저희 홍보부의 첫 단체 휴가인 이번 휴가의 테마는 한우와 단풍, 가족입니다! 집안의 가장들께서 눈물을 머금고 큰 지출을 한 거니까 각자 3인분 이상씩 먹지 않으면 놓고 갈 겁니다! 알겠습니까!”
“네-!”
“그럼 씹고 뜯고 마음껏 즐기세요! 돌격 앞으로-!”
“와아아아!”
“앞으로-!”
“이게 얼마 만의 한우야!”
사람들이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자 흡연자들은 잠시 남아 담배를 하나씩 물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강제로 참아야 했던 담배.
“저…… 감사합니다, 부장님.”
“응? 뭐가요?”
“아니, 이런 곳에 데려와 주셔서…….”
“어이구. 이거 다 여러분께서 내신 회비로 온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가족에게나 가세요. 괜히 여기까지 와서 왜 늦게 들어오냐고 눈치 받지 말고.”
종혁은 얼른 가라는 듯 손을 저었지만, 그들은 더욱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낸 회비라고 해 봤자 소고기 1인분 값도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옙!”
“어이구, 들어가자고.”
“횡성 한우는 서울과 다르려나?”
종혁은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가을은 가을이네.”
어느덧 빨갛게 물들어 버린 나무들.
‘그리고 시골은 시골이고.’
농약병을 든 채 어딘가를 향해 걷는 할머니와 경운기를 탄 채 멀어지는 소년, 비료가 잔뜩 실린 트럭을 몰고 다가오는 중년인. 고약한 개소주 냄새도 정겹기 그지없다.
“이런 게 힐링이지.”
종혁의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