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562화 (562/837)
  •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562화>

    “최 과장님!”

    이젠 명실상부 스타 PD라 불리는 나연석 PD가 달려온다.

    경찰 이미지 마케팅과 시절부터 인연이 깊은 그.

    종혁은 방정맞게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오셨어요?”

    “아니, 이제 부장님이라고 해야죠? 아니면 총경님?”

    그렇게 말하는 나연석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종혁 덕분에 확실하게 알게 된 경찰의 직급 체계. 이십대에 총경 자리까지 오른다는 건 전무후무하다 할 만한 엄청난 일이었다.

    ‘그때도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젠 민중의 지팡이, 수십만 경찰 조직의 홍보를 총괄하는 거물이 되었다. 고작 29살이란 나이에 말이다.

    “하하. 아무렇게나 불러 주십시오.”

    “예. 그럼 부장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야아, 사무실이 멋지네요.”

    “미국 실리콘밸리의 IT 업체들의 사무실 인테리어를 차용해 봤습니다. 그보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와야죠.”

    나연석이 손을 저으며 정색한다.

    경찰 이미지 마케팅과 함께 만들었던 입봉작, 연예인 관찰 예능.

    톱스타들이 일일 경찰이 되어 보여 주는 관찰 예능은 예상외의 선전을 하면서 나연석은 PD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오래전부터 하고 싶어 했던, 지금은 국민들의 안방을 차지한 야생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연석에게 있어 종혁은 은인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 종혁은 입맛을 다셨다.

    “그럴 리가요. 피디님이라면 제가 아니었더라도 분명 지금처럼 성공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좀 찔린다.

    “역시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하하.”

    볼을 긁은 종혁은 그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일단 플롯은 이렇습니다.”

    일 이야기로 넘어가자 이내 진지해지는 나연석.

    그는 묵직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기획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는 스타 PD다운 관록이 엿보였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기획안을 읽어 내리는 그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관찰 예능이군요.”

    그런데 기존의 관찰 예능과 완전히 다르다.

    신선하다.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자책을 할 만큼 신선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건 저와 맞지 않겠군요.”

    “그렇습니까?”

    “네. 제가 추구하는 재미와 달라요.”

    그가 추구하는 재미는 잘나가는 연예인들이 제작진이 주는 시련 속에서 망가지고 서로 반목하다가 또 때로는 서로 화합하는 것.

    그러나 이 기획안은 힐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배꼽을 잡고 깔깔 웃는 게 아니라, 소위 아빠 미소처럼 잔잔한 미소를 바라는 내용들.

    나연석은 여기서 자신만의 웃음포인트를 이끌어 낼 자신이 없었다.

    그에 종혁은 살짝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연석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신 이 친구와는 딱 맞을 것 같습니다.”

    “예?”

    나연석의 옆에 앉아 있던 삼십대 중반의 동긍동글한 인상을 지닌 사내가 고개를 번쩍 든다.

    “원호 형, 이것 좀 한번 살펴봐.”

    ‘원호? 박원호 피디?’

    종혁이 살짝 놀란다.

    오래전 종혁과 몰래카메라로 인연을 맺은 개그맨 김경규가 핵심 멤버로서 이끌고 있는, 저마다 한 가지씩은 부족함을 지닌 남자들의 도전을 그린 버라이어티를 연출하며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원호 PD.

    ‘나연석 피디랑 동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네.’

    종혁의 입가가 꿈틀거린다. 방금 전 느꼈던 실망이 싹 사라지는 기분.

    종혁은 잔뜩 기대하며 박원호를 응시했다. 그건 나연석도 마찬가지였다.

    “어때? 형이랑 맞을 것 같지?”

    대답 대신 눈가가 파르르 떨며 더 자세하게 기획안을 살피는 그.

    이거다. 자신이 그토록 만들고 싶어 했던 예능이 바로 이런 거였다.

    시청자들로 하여금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도록 하는, 시청자들에게 힐링을 줄 수 있는 그런 예능.

    ‘거기다 웃음 포인트들이 확실해!’

    제작진이 잡아 가야 할 방향성이 디테일하면서도 완벽하게 설명되어 있다. 자신이 당장 기획안을 짠다고 해도 이보다 좋게 짤 자신이 없었다.

    박원호는 눈을 붉히며 종혁을 쳐다봤다.

    “어떤 분이 짜신 기획입니까?”

    “왜 그러시죠?”

    “저희 팀으로 스카웃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이런 분은 방송을 해야 돼요!”

    “……푸하하하하핫!”

    “하하하하!”

    나연석가 박원호의 등을 두드린다.

    “그거 여기 부장님이 짜신 거야.”

    “예?!”

    “진짜 경찰에 있기에 너무 아쉬운 분이지 않아?”

    “아니…….”

    “하하. 그럼 어떡하시겠습니까?”

    “하겠습니다. 하게 해 주십시오.”

    오래 고민하지 않고 결단을 내린 박원호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제부턴 자신이 이 프로그램의 PD다. 허튼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런데 예산은 정확히 어느 정도 됩니까?”

    “예산 말입니까?”

    “저희 방송국에서도 부담을 하겠지만, 경찰 쪽 예산을 알아야 촬영에 대한 견적을 낼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MC 섭외 비용 같은 것들 말입니다. 출연할 아동들이야 경찰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뽑는다지만…….”

    프로그램의 중심을 잡고 이끌어 나갈 줄 MC는 방송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프로그램 제작에서 가장 큰 비용을 차지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아, 그 부분은 생각해 놓은 게 있습니다.”

    종혁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박원호와 나연석가 눈을 빛낸다.

    “그래요? 어떤 분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들어 봐도 될까요?”

    “장호돈 씨와 김국종 씨, 그리고 김재선 씨입니다.”

    쿵!

    박원호는 정수리를 때리는 충격에 눈을 껌뻑였다.

    “어…… 예?”

    “자, 잠깐만요, 부장님. 예산이 되세요? 부, 분명 얼마 안 되신다고…….”

    현재 국민 MC로 불리는 장호돈과 김재선. 처음 종혁이 전화할 때 말한 예산 가지곤 턱없이 부족했다.

    종혁은 진정하라는 듯 말리는 나연석의 모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잠시만요? 예, 형님. 저 종혁입니다. 며칠 전 제가 연락드린 거 기억하세요?”

    -재슨이랑 단편 예능 출연하는 거 말하는 기가? 당연히 해야지. 한다고 하지 않았노. 와? 그새 맘 바뀌었을까 봐 전화한 기가?

    “에이, 설마요. 피디님이 오셨는데 믿지 않으셔서 확인 차 연락드린 거였어요.”

    -글나? 잠만 스피커로 돌려 봐라. 보소, 피디님. 나 장호돈입니더. 나나 재슨이나 지금 전화하는 놈이랑 돈 보고 만나는 사이 아니니까네 안심하고 진행하이소. 아셨지에? 그럼 촬영 때문에 이만 끊심더.

    “예, 형님. 들어가세요. 아, 형님. 이참에 경찰 홍보 대사도 하시는 건 어떠세요? 재선이 형님이랑.”

    -아이고, 내 같은 사람이 그런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긋나? 그래도 일단 알았데이. 정해지면 연락하래이.

    “옙. 감사합니다.”

    종혁은 됐냐는 듯 박원호를 봤다.

    “원하신다면 김재선 씨와도 통화를 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됐냐는 듯한 종혁의 미소에 나연석와 박원호는 입을 떡 벌렸고, 종혁은 속으로 킬킬 웃었다.

    미래의 스타가 되는 사람들. 그런 이들과 친분을 다져 놓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예산이 부족하다고?’

    그럼 인맥으로 대체하면 되는 거다.

    스타 PD에 스타 MC, 그리고 성공이 보장된 플롯의 프로그램. 이게 종혁이 생각하는 성공의 공식이었다.

    한바탕 경악의 폭풍이 스쳐 지나간 자리.

    “……크흠. 그럼 출연자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 보죠. 기획안을 보니 경찰의 자제분들을 출연시킨다고 되어 있던데요.”

    “아,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경찰의 색채가 너무 묻어나는 게 아닌가 하시는 거죠?”

    명예 경찰을 만드는 특집 프로그램에 경찰의 자식까지 출연시킨다? 너무 경찰 위주다. 거부 반응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예, 아무래도…….”

    “흠. 전 그 문제는 크게 상관없다고 봅니다. 일단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박 피디님은 경찰이, 형사가 집에 언제 들어가는지 아십니까?”

    “그, 글쎄요?”

    “대중이 없습니다.”

    정말 대중이 없다. 한 번 사건이 터지면, 범인을 잡을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형사. 상황이 발생하면 야근을 밥 먹듯 해야 되는 경찰.

    그제야 박원호가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런 부분을 강조하시려는 거군요.”

    “경찰이 이런 수고를 감내하며 국민들을 지키고 있다는 걸 국민들이 알아봐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훌륭한 생각이다.

    하지만 여전히 꺼려질 수밖에 없다.

    “흠. 그럼 이렇게 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예 경찰뿐만 아니라 소방관 등 힘들고 어려운 직종에서 일하는 가족을 전부 불러 모으는 거다.

    “그리고 연예인의 자식도 한 명 출연시키는 겁니다.”

    ‘호?’

    역시 능력이 좋은 PD라서 그런지 육아 예능이 초반에 어떻게 관심을 끌었는지를 단숨에 깨닫는다.

    연예인의 자식은 어떨까, 자신들과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귀여울까. 이러한 궁금증들까지 모여 탄생하고 성공한 게 바로 육아 예능이었다.

    “음. 아니, 좀 부족한데…….”

    박원호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린다.

    “추석 특집…… 추석 특집……. 아, 그래! 부장님, 장애아동도 출연시키는 겁니다!”

    움찔!

    “장애아동이요?”

    순간 종혁의 머릿속에 한 소녀가 스쳐 지나간다.

    그에 종혁의 표정이 미묘해지자 박원호는 얼른 입을 열었다.

    “비하를 하거나 웃음거리로 만들자는 게 아닙니다. 장애가 있는 아동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 겁니다.”

    온 가족이 모이는 게 바로 명절이 아닌가.

    “휴머니즘을 자극하려는 겁니까?”

    “그런 의도가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거북하시다면 못 들은 걸로 하셔도 됩니다.”

    “으음.”

    솔직히 거슬린다.

    이런 방송이 장애가 있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부모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는지는 알고 있지만, 자칫 못난 사람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그 부분은 조심스럽게 진행해 보죠.”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하니 계속 떠오르기 시작한 아이.

    헤어지기 전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빤히 자신을 쳐다봤던 유정민. 안전 교육을 받는 동안 단 한 번도 웃지 않은 것도 모자라 중간중간 인상을 찌푸렸던 아이, 정민이.

    ‘진짜 왜 이리 눈에 밟히는지 모르겠네.’

    종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   *   *

    짹짹짹.

    새가 울어 대는 아침.

    곰팡이 냄새가 가득 풍기는 반지하,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유정민의 볼을 마르고 검버섯이 핀 손이 조심스럽게 쓸어내린다.

    “우리 강아지. 이제 일어나야지?”

    번쩍!

    돌연 눈을 동그랗게 뜬 유정민은 코앞에 드리워진 할머니를 빤히 바라보다 배시시 웃는다.

    그러곤 일어나 배꼽인사를 하곤 꼭 안기는 그녀.

    유정민의 외할머니 김복덕이 흐뭇이 웃으며 등을 토닥인다.

    “어이구. 그래그래. 우리 강아지 잘 잤어?”

    톡!

    맞다는 듯 할머니의 어깨를 두드리는 고사리 같은 손가락.

    “얼른 씻고 와. 유치원 늦겠다.”

    멈칫!

    잠시 몸을 멈춘 유정민은 뽀로로 화장실로 달려갔고,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그 모습을 보던 김복덕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라질. 오늘은 더 안 보이네.”

    정말 갈 때가 된 건지 날이 갈수록 흐려지는 눈.

    돈이라도 있으면 안경을 사겠지만, 나라에서 지급하는 기초생활수급비와 하루 온종일 줍는 폐지, 동사무소에서 제공하는 노인 일자리로는 외손녀를 먹고 입히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아니지. 살아야지.”

    최소한 외손녀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는, 홀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지낼 수 있을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했다.

    “부처님. 보살님.”

    10년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년.

    “내 더 이상은 바라지 않으니 우리 손녀 중학교 가는 것만 보고 가게 해 주세요. 못난 중생이 이렇게 빕니다.”

    자주 가는 절이 있는 방향을 향해 힘들게 삼배를 올린 김복덕은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났다.

    “에고고. 밥 차려야지.”

    김복덕은 온갖 것들이 쌓여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주르륵!

    “어이구. 흘렸네.”

    얼른 씻고 나온 외손녀와 차린 밥상.

    며칠 전 뜯어 말린 쑥된장국에 김치 하나, 외손녀를 위한 김 한 장이 전부지만 달그락달그락 씩씩하게 먹는 외손녀의 숟가락 소리에 정신이 팔렸는가 보다.

    숟가락이 입술에 부딪쳐 국물을 흘리자 김복덕은 당황했고, 유정민은 냉큼 일어나 휴지를 가져와 김복덕의 턱을 닦았다.

    마치 ‘괜찮아, 할모니?’ 그렇게 묻는 듯 걱정이 가득한 눈.

    “그려, 그려. 이 할미는 괜찮어. 탕국은 입에 맞아?”

    파닥파닥!

    고개를 끄덕인 정민은 마저 닦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씩씩하게 밥을 먹기 시작했고, 김복덕도 마저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설거지 후 화장실로 들어가 유치원 복으로 갈아입는 정민.

    “아이고, 벌써부터 내외하냐? 이 할미는 섭섭혀다!”

    뽀로로!

    깜짝 놀라 달려와 할머니를 꼭 끌어안고는 다시 화장실로 가서 마저 갈아입은 정민.

    할머니 김복덕의 코앞에서 ‘예뻐? 예뻐?’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샛노란 유치원복을 뽐낸다.

    “어이구, 잘한다. 잘한다.”

    아침부터 외손녀의 재롱을 본 김복덕은 입가가 주욱 찢어졌고, 그건 유치원 버스가 다가올 때까지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지만 유정민은 좀 달랐다.

    왜인지 할머니랑 헤어지기 아쉬운지 뒤로 빠져 있는 엉덩이. 곧 샛노란 버스가 다가와 서자 발마저 뒤로 뺀다.

    드르륵!

    “정민아, 안녕? 안녕하세요, 할머님.”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선상님.”

    “네, 걱정 마세요. 정민이도 할머니에게 인사해야지? ……정민아?”

    오늘도 망설이는 정민의 모습에 유치원 교사가 당황 할 때, 김복덕은 정민의 볼을 쓸어내렸다.

    “어여 가. 그리고 좀 있다가 보는 거여. 알았지?”

    ‘안 가면 안 돼?’라고 말하는 듯 쳐다보는 유정민.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정민은 이내 할머니를 꼭 안아 주고는 유치원 교사의 손을 잡고 버스에 올랐고, 김복덕은 눈에 더 이상 노란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 돌아섰다.

    “에고고. 가자, 가.”

    그녀는 리어카를 끌며 한 발, 한 발 느릿하게 나아갔다.

    *   *   *

    “와아아아!”

    쉬는 시간이 되자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개나리반 아이들.

    한편 정민은 구석에 앉아 동화책을 읽으며 입술을 달싹인다.

    “아…… 으…….”

    책을 따라 읽으려 하지만,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혀.

    그럼에도 정민은 실망하지 않고 계속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였다.

    “정민아, 책 읽어?”

    봉재 인형을 든 채 다가온 예쁘장한 소녀를 본 정민은 배시시 웃으며 옆 자리를 토닥였고, 소녀는 활짝 웃었다.

    “그럴까? 같이 읽을까?”

    냉큼 옆자리에 앉은 소녀는 정민이 읽는 부분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사슴들의 소리에 잠에서 깬 산타 할아버지가 밖으로 나왔어요.”

    소음과 공해가 가득한 개나리반에 울려 퍼지는 낭랑한 목소리.

    정민의 눈에 작은 부러움이 서렸다 사라진다.

    “자자! 모두들! 합죽이가 됩시다!”

    “합!”

    유치원 교사의 외침에 뛰던 것을 멈추는 아이들.

    “자, 모두들 자리에 앉아야죠?”

    “네!”

    후다닥 아이들이 자리에 앉자 유치원 교사가 활짝 웃는다.

    그런 그녀를 기대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들. 정민도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쳐다본다.

    “오늘도 즐거운 간식 시간이 왔어요.”

    “와아아!”

    “오늘은 뭘까요?”

    “젤리요!”

    “요거트요!”

    “아냐! 과자거든?”

    “요거트거든?”

    “합죽이가 됩시다!”

    “합!”

    “싸우는 아이들에겐 간식을 안 줄 거예요. 계속 싸울 거예요?”

    “아니요-!”

    아이들이 다시 조용해지자 유치원 교사는 오늘의 간식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자, 재진이.”

    “감사합니다! 와아, 요거트다!”

    ‘요거트?’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요거트.

    귀가 쫑긋 솟은 정민은 먼저 요거트를 받고 안절부절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더 눈을 빛냈고, 이윽고 정민의 차례가 됐다.

    “자, 우리 정민이 거.”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요거트를 받아 드는 순간이었다.

    욱신!

    갑자기 칼로 찌르는 듯한 옆구리의 고통에 요거트를 놓치고 만 정민.

    철푸덕!

    “아! 아아!”

    파랗게 질린 정민이 얼른 의자에서 내려와 안절부절못하자 유치원 교사가 얼른 막아선다.

    “괜찮아요. 선생님이 치울게요. 그러니까 우리 정민이는 자리에 앉아 있을까요?”

    혹여 손에 묻는다면, 유치원복에 묻는다면 더 골치가 아파지기에 유치원 교사는 정민을 살짝 밀어냈지만, 정민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둥지둥 바닥에 흐른 요거트를 요거트컵에 옮겨 담는다.

    “아이, 선생님은 괜찮다니…….”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유치원 교사가 벌떡 일어난다.

    “원장 선생님!”

    “거기서 왜 그러고 있나요, 정 선생? 또 정민이가 뭘 흘렸나요?”

    푸근히 웃으며 쳐다보는 원장의 눈에 정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