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533화 (533/837)
  •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533화>

    2년 전, 신설이 된 여성아동범죄조사부의 한 검사실.

    “예. 그럼 오늘 저녁에 뵙겠습니다.”

    온갖 사건 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한 곳에 라꾸라꾸 침대가 세워진 그곳에 앉은 덥수룩한 머리에 안경을 낀 삼십대 후반의 검사가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생각에 잠긴다.

    “공 계장님.”

    “네, 검사님!”

    한쪽에서 열심히 사건을 처리하던 오십대 여성이 얼른 다가온다.

    “혹시 경찰 본청 특별범죄수사대에 대해 알아요?”

    “아, 이번에 신설된 곳 말하시는 건가요? 글쎄요. 부서 이름은 들어 봤지만…….”

    “그럼 최종혁 경정에 대해서는요?”

    “아! 그 이름은 알고 있죠!”

    “알아요?”

    “네! 저희 여성아동범죄조사부 설립에 공을 올린 경찰인걸요!”

    “……경찰 따위가요?”

    “그때 최 경정이 해결한 사건들이 꽤 이슈가 됐다고 해요.”

    그 사건들을 기점으로 전 정권의 강력한 의지 아래 여성아동범죄조사부가 신설되었다. 이는 종혁이 회귀하기 전보다 무려 5년이나 빠르게 창설된 것이었다.

    “거기다 강철선 부장검사님과도 인연이 깊고요!”

    “특수부의 강 부장님이요?”

    “네. 이건 저도 여기 와서 들은 소문인데…….”

    다른 사무원들의 눈치를 본 공 계장이 검사의 귀에 입술을 가져간다.

    “강 부장님을 특수부에 올려놓은 게 그 사람이란 말이 있더라고요.”

    움찔!

    “그딴 개소리를 믿는 겁니까? 감히 경찰 따위가요?”

    “저, 저도 들은 소문이라고요! 거, 거기다 그 사람이 엄청 유능하다고 하고…….”

    “어떤 게요? 어떤 사건을 해결했는데요?”

    “그, 그게…….”

    검사의 눈이 한심함으로 물든다.

    그에 공 계장은 억울했다.

    ‘나도 당신이랑 같이 왔잖아요!’

    충남 서산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눈앞의 검사와 함께 올라온 그녀. 서울 깍쟁이들은 그녀를 시골 사람이라고 도통 상대해 주지 않았다.

    “하아.”

    “어, 어디 가시게요?”

    “내가 그런 것까지 보고해야 됩니까?”

    혀를 찬 그는 곧바로 부장검사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당연히 그래 드려야죠. 예, 하하. 걱정…… 직원이 찾아왔네요. 이따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안 프로.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야?”

    “형님.”

    “……쯧. 회사에선 부장님이라고 했잖아, 매제.”

    “예, 부장검사님. 하하하.”

    충남 서산지청에서 구르던 그가 서울 중앙지검의 신설부서로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혈연이었다.

    아내의 오빠가 바로 눈앞의 부장검사였다.

    “그런데 절 왜 부르려고 하셨는지…….”

    “으응. 별거 아냐. 그보다 무슨 일인데?”

    “혹시 저번에 스쳐 지나가듯 말하셨던 경찰 본청의 최종혁 경정에 대해 기억하십니까?”

    움찔!

    부장검사의 시선이 잠시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으로 향한다.

    “누구? 최종혁 경정?”

    “그때 이놈이 하는 일은 태클 걸지 말라는 검사장님의 지시가 있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아, 그래. 그랬지.”

    과거에 한 검사가 종혁의 사건에 태클을 걸려고 했다가 대검 중수부 부장검사 출신인 중앙지검 검사장에게 한 소리 크게 들은 걸 말한 적이 있다.

    “저도 웬만하면 그러려고 했는데 이놈이 감히 경찰 주제에 검사보고 오라 가라 해서 말입니다.”

    “……안 프로가 지금 맡고 있는 사건이 뭐였지?”

    “운동부 코치가 운동부원들을 성추행한 사건입니다.”

    “흠. 사소한 사건이네?”

    “그렇죠. 모름지기 운동을 하려면 그런 치욕도 겪으면서 어? 하하하.”

    “흠. 사소한데 그런다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표정이 복잡해진다.

    “알았어. 일단 만나 봐. 그리고…….”

    검사는 이어지는 부장검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청담동의 한 일식집.

    아직 약속 상대가 도착하지 않은 방에 앉은 종혁이 생각에 잠긴다.

    ‘안동호. 나이 39세.’

    지방대 출신의 검사로, 작년까지 충남의 대전지검 서산지청에 있다가 서울중앙지검으로 픽업이 된 인물.

    여성아동범죄조사부 부장검사의 막냇동생과 결혼을 한 사이로, 그 때문에 픽업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인물이다.

    ‘30살 늦은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선 중위권 성적을 유지, 군법무관도 다녀왔고.’

    이는 이번 사건의 담당 검사인 안동호 검사가 실질적으로 검사 생활을 그리 오래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타입이려나.’

    부디 말이 통하는 타입이면 좋을 것 같았다.

    똑똑똑!

    “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종혁은 몸을 일으켰고, 문이 열리며 안동호 검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얼굴을 뵙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검사님. 경찰 본청 특별범죄수사대를 이끌고 있는 최종혁 경정입니다.”

    “어흠. 안동호요. 중앙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 소속이고.”

    꿈틀!

    너무 짧은 그의 말에 종혁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설마…….’

    “하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앉으시죠.”

    “큼.”

    종혁의 맞은편에 앉은 그가 아닌 척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본다.

    마치 이런 고급스러운 곳은 처음인 듯 미묘하게 경직된 자세와 흔들리는 눈동자. 그와 동시에 음식이 들어오고, 종혁은 한 번 더 놀라는 그의 모습에 속으로 다행이라고 옅게 웃으며 사케 병을 들었다.

    “진즉에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늦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이건 그 사과의 의미로 사는 것이니 만약 제게 노여움이 있다면 이 기회에 푸셔 주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종혁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자 안동호의 어깨가 슬쩍 펴진다.

    “흐음. 나이가? 꽤 동안인 것 같은데 말이야.”

    “스물여덟입니다, 검사님.”

    “어린데?”

    동안이 아니라 그냥 어리다.

    순간 안동호의 눈에 거만함과 경멸, 짜증 등 복잡한 감정이 차오른다.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괘씸함이 더해진다.

    “그 나이에 이런 곳에서 밥을 살 정도라…… 집이 잘사나 봐?”

    “부모님께서 자산이 좀 많으십니다.”

    “그 나이에 본청 과장이 된 걸 보니 어디 재벌의 사생아? 어느 집안이야?”

    “그냥 평범한 집안입니다, 검사님.”

    “그래, 나 같은 일개 평검사는 감당이 안 된다는 거지?”

    종혁은 미소를 잃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음식이 식습니다. 어서 드시죠.”

    “그래, 어디 재벌 사생아가 사 주는 밥 좀 먹어 보자.”

    “지금 집으신 건 일본에서 공수되어 온 혼마구로의 볼살입니다. 처음엔 와사비만 살짝 찍어 먹는 걸 추천 드립니다.”

    “그래? 어디…… 오! 입에서 살살 녹네! 역시 비싼 건 다른데?”

    “다음으로는 여기 중뱃살을 드셔 보시죠. 따뜻한 사케와 함께 드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오! 오호!”

    기름기가 적은 부위마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린다.

    그동안 자신이 먹어 왔던 참치는 마치 쓰레기였던 것처럼 느껴지는 고급스러움의 향연.

    ‘크! 이래서 사람은 서울로 와야 한다니까!’

    안동호는 충남 서산 그 시골에선 꿈도 꿀 수 없었던 대우에 흡족하게 웃으며 연신 참치와 사케를 즐겼고, 종혁은 그런 그의 모습에 술을 홀짝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부류면 골치 아파질 확률이 높은데…….’

    정말 그렇다는 듯 어느 정도 배가 찰 때까지 안동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크! 좋네! 어우, 배부르다.”

    “입에 맞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식사 메뉴를 들이라고 할까요?”

    “됐어. 여기까지. 밥은 이따가 먹자고.”

    “예?”

    “그래서 감히 중앙지검의 검사를 소환한 이유가 뭐야?”

    종혁은 말속에 가득 들어 있는 권위주의에 한숨을 내쉬었다.

    “영장을 좀 신청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결국 구속까지 시키겠다고? 이봐, 최 대장. 압수수색 영장도 내가 무리해서 통과시킨 건 알고 있어?”

    아니다. 부장검사에게 들은 말이 떠오른 것도 있지만, 딱히 반려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경찰 놀이나 하는 재벌가의 사생아인지, 아니면 비리 경찰인지는 몰라도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아. 검사장님하고 아는 사이라서 뭐?’

    검사장이 뭐라 하든 경찰은 검찰의 밑, 따까리였다.

    검사가 명령을 하면 그대로 해야 되는 개.

    이렇게 겸상을 한 것만으로도 검사장에게 충분히 예의를 차린 것이었다.

    “안 그래도 박상영을 유치장에 가두고만 있다며? 그런데 구속 영장? 또? 야, 지금 나랑 장난해? 검사가 지금 네 따까리로 보여? 어?!”

    종혁은 그의 급발진에 놀랐지만 흔들림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부분은 정말 감사하지만,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서 말입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제 말을 조금만 더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새로운 사실이고 나발이고!”

    쾅!

    “네가 말하면 내가 들어야 하는 거냐고! 이 대한민국 검사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식탁에 종혁의 표정이 오묘해진다.

    ‘햐, 이건 또 오랜만이네.’

    회귀 후 일이 잘 풀려서 검찰과의 협업이 잘됐을 뿐, 종혁에게 있어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참 다양한 이유로 반려되던 영장들.

    이것이 단순히 경찰을 밑으로 봐서인지, 아니면 길들이기인지는 몰라도 회귀 전 참 많이 당한 짓이었다.

    이 이상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안동호가 듣지 않을 거란 걸 종혁은 깨달은 종혁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큰 결례를 끼쳤습니다.”

    그런 그의 사과에 안동호는 그의 뒤통수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란 말이지?’

    안동호 자신처럼 경상도 촌놈이었던 강철선을 특수부 부장검사로 만든 존재. 강철선이 해결한 초대형 사건 중 다수가 눈앞의 종혁의 손을 거쳤다고 했다.

    ‘이런 놈을 잘 컨트롤해서 사건을 가져다 바치게 만든다면?’

    자신이라고 그런 승진 가도를 걷지 못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물론 형님부터 올려 드려야겠지만. 흐흐흐.’

    “그래요. 이렇게 사과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우리 잘합시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내용이 뭔데요?”

    종혁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방금 전 말이 심한 것 같아서 들어나 보려고 그래요.”

    “그게…….”

    종혁은 오늘 밝혀낸 사실에 대해 말했고, 안동호는 몸을 굳혔다.

    “그러니까…… 피의자 외에 다른 범인이 더 있다?”

    “예. 아무래도 여러 명인 것 같습니다.”

    그것도 십대로 추정된다.

    “그래서 진명고 학생들 전원의 핸드폰을 검사해야…….”

    “야!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뭐? 학생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학생 전원?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에라이, 씨발.’

    종혁은 얼굴에 튄 침을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피해자를 구하는 일이다.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아니면 2학년만이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촤악!

    순간 얼굴에 뿌려지는 술에 종혁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과한데?’

    분명 무리한 부탁이었다는 건 알고 있다. 어떤 혐의도 없는 일반 학생들의 핸드폰까지 검사한다는 건 그 누구라도 받아들이지 못할 일이니까.

    혹여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는 일.

    하지만 반응이 너무 과격했다.

    “이 미친 새끼가 검사를 얼마나 호구로 봤으면……! 야, 검찰이 우습지? 아니지? 그냥 내가 우스운 거구나? 내가 서산 그 깡시골 출신이라고! 어?! 이 새끼가 좋게 말로 해 주니까!”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한 번 말이라도 들어 보려고 했던 내가 미친 새끼지. 야, 나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이거나 원상복구시켜 놔. 알았어?!”

    안동호는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화장실을 향했고, 종혁은 그 모습을 빤히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콧속으로 고약한 냄새가 빨려 드는 게 뭔가 이상하다.

    종혁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문 근처에 서 있는 종업원을 향해 입을 열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 새로 세팅해 주시고, 파손된 것도 제 앞으로 달아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고개를 끄덕인 종혁은 방을 빠져나갔다.

    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안동호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예, 형님. 아주 윽박을 질러 놨으니 고분고분해질 겁니다.”

    -흠. 그래? 잘 알아들은 것 같아?

    “아유, 그럼요. 형님께서 말하신 대로 사건이 길어질 겁니다.”

    부장검사가 안동호 검사에게 부탁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최대한 사건이 길어지게 만들라는 것.

    쏴아아아!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낸 안동호가 눈을 가늘게 뜬다.

    “그런데 정말 이유가 뭡니까? 이거 자칫 강 부장과 척을 질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강철선 부장검사는 언제든 검찰총장에 도전할 수 있는 중앙지검 검사장의 직속 라인.

    신설된 지 고작 2년밖에 안 된 부서의 부장검사가 감히 덤벼 볼 상대가 아니다.

    “이거 삐끗하면 저뿐만 아니라 형님도 큰일 나십니다.”

    아직 자리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여성아동범죄조사부. 자칫 쓸려 나갈 수 있었다.

    여성아동범죄조사부가 소속된 차장검사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커버를 쳐 주지 못할 거다.

    -내가 큰 은혜를 받은 분의 부탁이라서 그래.

    “아,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대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으셨기에…….”

    -부탁할게, 매제. 가족 좋다는 게 뭐겠어?

    “끙. 알겠습니다. 그럼 영장은 반려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부담은요. 걱정하지 마세요. 예. 들어가십시오!”

    전화를 끊은 안동호는 콧노래를 부르며 방으로 향했고, 잠시 후 여자화장실에서 종혁이 담배를 문 채 걸어 나온다.

    입술이 이죽이죽 비틀리는 그.

    “그러니까…… 사건을 일부러 딜레이시키시겠다?”

    그것도 누군가의 부탁이라는 굉장히 악의적인 이유다.

    종혁은 핸드폰을 들었다.

    “예, 저예요. 검사님, 지금 제가 맡은 사건이 하나 있는데 여성아동범죄조사부에서 담당하고 있거든요? 이거 가져가실 수 있겠습니까?”

    -와? 뭔 일이고?

    “담당 검사님이 사건을 딜레이시키려고 하시네요?”

    -……니 말 잘하래이. 누가 와 딜레이시키는데?

    “안동호 검사님께서 아내의 오빠인 강두희 부장검사님의 부탁을 받아서요.”

    -아따, 마. 강 프로 간 크네.

    검사장이 종혁의 일은 원만하게 처리하라고 직접 말했다. 그것도 검사 한 명을 족치며 말이다.

    그걸 깠다는 건 검사장뿐만 아니라 강철선 본인을 비롯해 전 검찰총장까지 있는 검사장 라인 전체와 대립각을 세우겠다는 뜻.

    강철선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너겠다는 데 우야겠노. 명분 만들어라. 커버 쳐 줄게.

    “감사합니다.”

    -시간 잡아라. 밥 묵자.

    전화를 끊은 종혁은 안동호가 걸어간 방향을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강두희…… 놈들의 하수인인가?”

    타이밍이 참 공교로우니 당연히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아니, 혹시나 아니라도 맞는 거다.

    살생부가 작성되는 순간이었다.

    담배를 끈 종혁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며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건 전화가 오는 바람에!”

    종혁의 허리가 폴더폰처럼 접혔다.

    *   *   *

    “햐앗!”

    “앗!”

    이른 아침, 기합이 울려 퍼지는 진명고 여자유도부.

    삑! 삐익!

    “10분간 휴식!”

    “수고하셨습니다!”

    “으아! 죽겠다!”

    호각 소리가 울리자 땀을 비 오듯 쏟아 내던 유도부원들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건 누리도 마찬가지다.

    ‘아니지.’

    종혁의 조언을 떠올리며 벌떡 일어난 누리는 스트레칭을 하며 숨을 골랐고, 몇몇 유도부원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누리와 함께 사라졌던 박상영 코치.

    그런 그가 지금까지도 복귀를 하지 않고 있다.

    한창 상상력이 풍부할 나이대의 소녀들로서는 온갖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고, 누리는 입술을 깨물며 애써 무시했다.

    그런 누리에게 주장이 다가섰다.

    뭔가 많이 고민하다 결심한 듯한 표정.

    “누리야.”

    “아, 주장님.”

    “아침 운동 끝나고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이야기요? 네, 알겠…….”

    과아앙!

    화들짝 놀란 누리뿐만 아니라 모두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그때였다.

    “왔구나! 오셨구나!”

    호들갑을 떨며 밖으로 뛰쳐나간 감독이 곧 덩치가 크고 잘생긴 누군가를 데리고 들어온다.

    “꺅!”

    “엄마야!”

    갑작스런 미남의 등장에 다급히 얼굴을 가리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소녀들.

    그러나 누리는 그들과 반응이 좀 달랐다.

    “어어어?”

    “하하. 애들아, 안녕? 내 이름은 최종혁이야. 혹시 내 이름 들어 본 사람 있니?”

    종혁이었다.

    “중심을 뺏어야지. 네가 끌려다니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후속 공격을 대비해! 중심을 더 낮추고!”

    귀여운 후배들이라 진심을 다해 코치를 하는 종혁.

    함께 온 임세라도, 경찰대 4년 동안 종혁에게 미친 듯 유도 코칭을 받은 임세라도 그 코칭에 합류했다.

    타 스포츠 선수 출신인 임세라에게 한판을 따내지 못하자 충격을 받는 소녀들.

    그러나 곧 승부욕이 발동한 소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갑도 아낌없이 베풀자 어느덧 오후가 됐다.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애들아, 너무 아쉽지만 이제…….”

    “아아아!”

    “안 돼요! 가지 마세요!”

    숫제 종혁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는 듯 방방 뛰는 아이들.

    종혁은 그 귀여운 반응들에 히죽 웃었다.

    “왜? 가지 마? 너희 수업 들으러 가면 난 혼자 있어야 하는데?”

    아침 운동을 끝낸 운동부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한다. 학생이니 당연했다.

    “아니요! 안 들어도 돼요!”

    “저희랑 평생 운동해요!”

    “어휴. 나도 같이 운동하면 좋긴 한데 평생은 안 되지. 너희가 나한테 시집 올 거야? 그럼 계속 있고!”

    “네!”

    “시집갈게요!”

    “꺄르르르르!”

    낙엽이 굴러가도 웃음을 터트릴 나이의 소녀들의 카랑카랑한 웃음소리. 함께 웃던 감독이 이내 낯빛을 진지하게 굳힌다.

    “여기 최종혁 선수가 경찰인 건 다들 알지? 그래서 고맙게도 진로 상담을 해 주신다니까 다들 수업 가지 말고 대기하고 있어.”

    진로 상담이라는 말에 3학년들의 눈이 빛나며 종혁을 본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무제한 체급 세계 랭킹 1위, 국가대표 최연소 주장이자 수석 코치였던 종혁.

    유도계에 남아 있었다면 분명 역사를 써 갔을 텐데도 돌연 은퇴를 하더니 경찰이 됐다.

    유도 외에 다른 걸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녀들로서는 솔직히 충격이면서도 종혁의 한 마디가 간절했다. 성적이 좋지 않은 선수들은 더욱더.

    그들의 갈망을 읽은 종혁은 옅게 웃으며 한 사람을 봤다.

    “일단은…… 주장부터 할까?”

    박상영의 비밀폴더 안, 어느 모텔 침대 위 눈물 자국이 있는 얼굴을 가린 채 알몸으로 누워 바들바들 떨던 소녀.

    아침 동안 함께하며 마음의 거리를 좁혔으니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아픔을 들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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