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518화 (518/837)
  •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518화>

    퇴직 후 돌연 자취를 감춘 김학일.

    “그러니까 갑자기 이혼 서류 한 장만 보낸 후 자취를 감추셨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몇 번이나 말해요!”

    어디 그뿐인가. 갑자기 생활비도 끊어 버리고, 카드마저 끊어 버렸다.

    남긴 건 달랑 이 집, 수원시에 있는 아파트 한 채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LA에서 온 거잖아요! 그것도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서! 지금이 우리 애한테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데!”

    김학일이 돌연 자취를 감추자 다급히 귀국을 했던 김학일의 아내가 불을 토해 낸다. 그 옆 이십대 중반의 딸도 말은 하지 않지만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박승철의 일도 있기에 바로 김학일의 뒤를 쫓는 것보다 일단 그의 가족부터 만나러 왔던 종혁은 씁쓸히 웃었다.

    ‘참 이놈의 유학은…….’

    가장으로서의 부담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걸로 추정되는 박승철. 자녀의 유학 준비도 그에게 많은 부담을 주었을 거다.

    “김학일 씨가 이혼 서류를 보내기 전 뭐라 말하신 건 없었나요?”

    “몰라요! 갑자기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도 김학일 씨가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리신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그게 요새 돈이 부족하다고 좀 쪼기는 했는데……. 하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만큼 공부에 들어가는 돈도 많고, 다른 집도 다 그런단 말이에요!”

    ‘다 그런 건 아니지.’

    김학일의 금융거래 내역을 살펴보니 성과급을 포함한 연봉의 대부분을 이들 모녀에게 송금하고 있었다. 무려 8년간 말이다.

    제아무리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이 돈이 든다고 해도 그 정도나 들 리는 없었다. 실제로 이보다 적은 금액으로 유학을 무사히 마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런데 그 8년 동안 이 모녀가 한국에 들어온 건 고작 3번.

    아내와의 평균 통화 시간은 1분 14초.

    하나뿐인 딸과는 평균 42초.

    딱 용건만 말하고 끊었다는 소리다.

    지독해도 이렇게 지독할 수 있을까.

    김학일의 아내는 충분히 악처였고, 딸은 불효자식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라도 내 모든 수익을 보내는데 계속 돈, 돈 그랬다면 지쳤을 거야. 그가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도리를 다 했다면, 당신들도 아내와 자식의 도리를 했어야지.’

    거기다 김학일의 아내와 딸이 몸에 두르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명품이었다. 그녀들이 미국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이걸 알아차렸을 확률이 높겠네.’

    퇴직 권고를 들은 후 아내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미국으로 향했던 김학일.

    그리고 미국에 도착하고 겨우 하루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후 퇴직을 하자마자 곧바로 이혼장을 날리곤 잠적을 해 버렸다.

    정황상 미국에서 무언가를 보았을 가능성이 백 퍼센트였다.

    “흠. 그러니까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는 말이죠?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만나셨을 때도요?”

    “네! 그보다 정말로 아이 아빠가 산업스파이라는 건 맞아요? 그거 정말 우리에겐 피해가 안 오는 거 맞아요?”

    “아직은 혐의일 뿐입니다. 그럼 혹시 김학일 씨가 갈 만한 곳이 있을까요? 평소 어딜 가기를 좋아했다거나 어딜 가자고 했다거나.”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부산일 뿐, 그가 부산에서 어디로 이동했을지 가늠을 할 수가 없다.

    일단 확실한 건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는 것.

    “그, 글쎄요? 도통 그런 걸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 사람 맨날 저녁 늦게 퇴근해서 아침 일찍 출근했다고요! 주말도 없이!”

    “맞아요! 아빠도 우리에 대해 모르는 건 마찬가지일걸요?!”

    ‘그게 할 말이냐.’

    순간 속에서 욕지기가 치민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형사님?”

    “예?”

    “만약 정말로 아이 아빠가 산업 스파이라면 이혼을 할 때 저한테 유리할까요?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가족을 버리고 나간 거니까 저한테 유리한 거 맞죠!?”

    “……죄송합니다. 저희는 법률 자문 같은 걸 하지 않아서요. 그럼.”

    “아, 아니……!”

    잰걸음으로 김학일의 집을 나선 종혁은 다급히 양쪽 귀를 후볐다.

    “씨발, 귀가 썩는 줄 알았네.”

    저런 인간도 아내라고, 딸이라고 애를 썼을 김학일을 생각하니 작은 동정심이 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는 이번 사건의 용의자였다.

    동정은 혐의를 벗은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종혁은 인천에 있는 오택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최 대장. 거기서 건진 건 좀 있어?

    “내가 김학일 입장이라도 보상을 받고 싶어 할 거라는 거?”

    가정이든, 회사든 김학일은 지난 세월의 헌신이 짓밟혔다. 충분히 앙심을 품을 만했다.

    -……그 정도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입니다. 나라면 벌써 연을 끊었을 거예요.”

    -흠. 그 정도로 돈을 밝힌다면 자칫 언론에 새어 나갈 수도 있겠는데?

    “괜찮아요. 알아보니까 엠바고 걸어 놨더라고요.”

    거기다 삼전과 검찰이 무슨 말을 해 놨는지, 김학일의 아내가 산업스파이란 단어를 운운할 때 꽤 겁에 질려 있었다. 딸도 마찬가지였다.

    당분간은 둘의 입이 열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 그래?

    “삼전이랑 검찰이 어떤 곳인데요. 그보다 서대우는 좀 어때요?”

    -창식이가 여러모로 분발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전 부산에 다녀오겠습니다.”

    -혼자 괜찮겠어?

    “찾으면 바로 콜 할게요.”

    -오케이.

    “그럼 수고해요. 서대우 위치 뜨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알았어. 수고.

    통화를 종료한 종혁은 차에 시동을 켜려다 잠시 한숨을 쉬었다.

    “부산까지는 또 언제 내려가냐.”

    혀를 찬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부르릉!

    *   *   *

    아무도 없는 작은 해변가.

    조용한 파도 소리와 함께 사박사박 노란 모래가 발밑에서 뭉개진다. 그와 동시에 가을의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지만, 김학일은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옆에서 팔짱을 꼭 낀 채 온기를 나눠 주는 미녀 덕분일 거다.

    일본을 여행하던 중 만난 여성, 미즈하라 키코.

    삶의 모든 게 무너져 악만 남은 상태에서 내려온 부산까지 찾아와 참 많은 걸 도와준 일본 친구의 조카.

    “키코, 춥지 않아?”

    “으응. 전 괜찮아요. 김 상은 춥지 않아요? 나이가 들면 몸이 약해져서 추위를 잘 탄다고 하던데.”

    “흐음.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몸이 너무 떨리는데?”

    “앗! 이건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얼굴이 빨개져 허둥거리는 키코의 모습에 김학일은 미소를 지었다.

    참 숨기지 못하는 여자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아내와는 성품부터 다른 여자.

    왜 자신을 좋아해 주는지 의문일 정도로 완벽한 여자.

    그러나 안식처를 찾고 싶은 김학일은 그 의문을 잠시 가슴 한구석에 밀어 놓았다.

    “저, 정말이라고요! 기, 김 상은 싫은가요?”

    “그럴 리가. 그럼 더 걸을까?”

    “아, 아니 그게…….”

    “집으로 돌아가자. 당신이 끓여 주는 레몬차를 마시고 싶어.”

    “레몬차가 드시고 싶으셨어요? 그럼 빨리 말했어야죠! 알았어요, 가요!”

    “천천히 가. 넘어져.”

    움찔!

    다시 속도를 늦추는 그녀의 모습에 김학일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게 행복인가 싶었다.

    찰랑찰랑 바지에 채워진 열쇠고리가 흔들리며 싱그러운 소리를 냈다.

    *   *   *

    김학일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부산 기장군의 오래된 어항(漁港)인 학리항.

    학리항 방파제의 등대 아래에 선 종혁은 찬바람이 맹렬히 부는 바다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다.

    ‘김학일은 왜 하필 부산으로 온 걸까.’

    역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밀항이다.

    일본에 어떤 로망이 있었던 건지 여행이 비교적 자유롭게 변한 90년대가 되자 일본을 자주 찾았던 김학일.

    아내와 딸이 LA로 떠난 뒤로는 버는 돈의 대부분을 송금하다 보니 제주도급으로 싸게 갈 수 있는 대마도만 가고, 1년에 한 번만 후쿠오카를 갔지만 여행 자체를 그만두는 일은 없었다.

    ‘이 돈은 어디서 난 거지?’

    아무리 대마도 여행이 제주도급으로 싸다고 해도, 또 후쿠오카 여행도 그리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월급의 태반을 미국에 부쳐야 하는 김학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액수다.

    아내에게 송금을 한 김학일이 한 달에 쓸 수 있는 금액은 대략 오십만 원.

    “일본 기업의 브로커가 이런 김학일의 사정을 알아차리고 금전적인 도움을 줬다면 굳이 부산으로 내려온 이유까지 어떻게든 설명이 가능하긴 한데…….”

    하지만 종혁의 마음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다.

    “그 콧대 높은 일본 놈들이 한국 기술을? 굳이?”

    전 세계에 스마트폰 세상이 열렸을 때도 피처폰을 고수하던 게 일본이다. 2010년 중후반이 되어서야 조금씩 스마트폰을 받아들인 일본.

    거기다 일본 기업의 브로커가 김학일의 주머니 사정을 알았다면 그 주머니부터 채워 줬을 터.

    “으음. 여태까지는 계속 거부를 하다가 이번에 받아들인 걸까?”

    그럴 확률이 높다.

    “아, 모르겠네.”

    머리를 긁은 종혁은 일단 부산에서 암약하는 밀항조직부터 조져 보기로 했다.

    “그럼 뭐가 나와도 나오겠지. 어디 보자…….”

    몇 번의 특수본, 특별수사대책본부를 통해 인연을 맺은 부산 쪽 인맥들 중 적당한 인물을 찾은 종혁은 냉큼 전화를 걸었다.

    “충성! 선배님, 저 종혁입니다.”

    -오! 최 팀장! 아니 지금은 최 대장이제? 다시 한번 축하한데이. 어데고? 밥은 뭇나?

    “흐흐. 사 주실 겁니까?”

    -뭐꼬? 니 부산 왔나? 어딘데?

    “기장에 있습니다. 시간 되시면 술이라도 한잔하시죠?”

    -음마야. 또 무신 일이기에 이로코롬 꼬시는 걸까……. 됐다 마. 그냥 퍼뜩 말해 봐라. 술 먹다 체하기 싫데이.

    “큼. 하여튼 누가 경상도 남자 아니랄까 봐.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저랑 부산에서 암약하는 밀항 조직들 한번 조져 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아, 갸들.

    ‘응?’

    종혁은 미간을 좁혔다.

    -뭘 노리고 금마들을 찾는지는 몰라도, 금마들 요새 영업 안 할 끼다. 아니, 못 할끼다.

    “아, 설마?”

    -맞다. 이미 한 달 전에 일제 단속했다. 한 서른 명 잡았제? 아마 살아남은 놈들 있어도 바다엔 당분간 얼씬도 안 할 끼다.

    ‘염병? 아니, 잠깐?’

    “그거 혹시 검찰에서?”

    -뭐꼬? 알고 있었네! 읭? 니 설마 김학일 갸 찾으러 온 기가? 그 사건 니가 보조하게 된 기가? 와, 글네! 창업 첫 일감으로 딱 좋네!

    “아 나, 씨발.”

    -쯧, 뭔 짓을 저질렀기에 길들이기 당하는 기고? 무슨 일인지 몰라도 빨리 협의 보래이. 아, 검거된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라도 알려 주까?

    “끙. 감사합니다.”

    -있어 보레이.

    통화를 종료한 종혁은 담배를 물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긴 한데…….”

    시간을 단축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입맛을 다신 종혁은 문자가 들어오는 핸드폰을 확인하며 몸을 돌렸다.

    *   *   *

    “잘 봐. 자세히 보라고. 내가 영치금 넣어 준다니까?”

    “……으으응. 아무리 봐도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 없잖습니까.”

    “에라이.”

    고개를 젓는 밀항 및 밀수전문업자의 모습에 혀를 찬 종혁은 몸을 일으켰다.

    “어? 아, 아직 덜 먹었…….”

    “닥쳐. 접견 끝났습니다.”

    치킨을 사수하는 놈을 뒤로하고 구치소를 빠져나온 종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금 전, 그놈이 이번에 잡힌 밀항업자들 가운데 마지막이다. 그런데 서른 명 중 단 한 명도 김학일을 본 사람이 없다.

    “아오! 이놈을 어디서 찾냐고!”

    화를 내며 핸드폰을 찾던 종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철아, 이게 무슨 말이야? 김학일이 대리를 뛴 것 같다고?”

    -그렇습네다. 김학일이 주말마다 대리운전을 한 것 같다는 정황이 발견됐고, 지금 확인 중입네다.

    “그걸로 여행 자금을 충당한 건가…….”

    지이이잉!

    “알았어. 일단 끊어 봐. 나 전화 왔…… 지랄 났네.”

    박종명 경찰청장의 전화다.

    부산, 박종명이 경찰청장 취임 전 나와바리였던 곳이다.

    검찰이 일제 단속을 벌였어도 경찰이라면 알았어야 할 일. 그러나 박종명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안 했다.

    ‘당신도 참, 씨발…….’

    “예, 청장님.”

    -서대우? 김학일?

    “김학일입니다.”

    -최 대장은 김학일이 밀항을 한 걸로 추정하는 건가?

    “청장님도 김학일이 일본으로 여행을 자주 갔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언제나 우리를 한 수 아래로 보는 일본 놈들이 과연?

    “기술은 일단 비축해 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흔적은?

    “아직까진 없습니다.”

    -도움은?

    “필요하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알았어. 끊지.

    통화가 종료되자 종혁은 이를 갈며 부산의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

    “어디십니까! 퇴근하셨으면 저 술 좀 사 주십시오!”

    -퍼뜩 서면으로 온나! 내가 부산 풀코스로 대접할게!

    “오오. 바로 날아가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종혁은 혀를 차며 부산 서면으로 향했다.

    “니 청장님이랑 뭔 일 있나?”

    서면의 유명한 전집, 2차로 온 술집에 앉아 종혁의 잔에 소주를 따르던 부산경찰청 광수대의 지인이 눈을 가늘게 뜬다.

    “제가요? 일은 무슨 일이요. 없어요.”

    “글나? 그럼 됐다. 마시라.”

    “뭐예요.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에휴. 니가 검찰한테 길들이기 당하는 중 아이가. 그것 때문에 말하는 기다. 청장님이 좀 꼬롬하게 대해도 서운하다 생각하지 말래이. 그 양반 성격이 배배 꼬여가 예뻐하는 사람 있으믄 막 시험한다 아이가. 그래서 튕겨 나간 아들이 좀 있어서, 혹시나 최 대장 니가 오해를 할 까 봐 말했던 기다.”

    “튕겨 나갔다고요?”

    “수사하다 지원 못 받아서 숟가락 놓고 밥집 차린 아들이 몇 명 있다.”

    그리고 박종명은 그렇게 퇴직한 형사들이 차린 밥집, 술집에 찾아가 매상을 올려 주며 수고했다고 위로도 해 주었다.

    “그 양반 일부러 그라는 기는 아니니까네 너무 고깝게 생각지 마라.”

    “흐음. 그렇다는 말이죠…….”

    눈을 빛낸 종혁은 생각에 잠겼다.

    ‘박종명이 내친 인간들이라……. 이번 사건이 끝나면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겠네.’

    “그보다 김학일 그놈아는 우째된기고? 정말 스파이 맞나?”

    “혐의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긴 해요.”

    “뭐? 와?”

    종혁은 김학일이 아내와 딸을 미국으로 보낸 후 대마도를 어떻게 놀러 갔는지에 대해 알려 주었다.

    “여행을 갈라꼬 대리를 했따고? 와, 여행에 미칬네!”

    “숨통이 막히면 뚫어야죠. 김학일에겐 여행이 그런 의미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라믄 혐의가 벗겨지고 있는 게 맞네. 정말 스파이라믄 그쪽 브로커가 돈을 안 줬겠나?”

    “김학일이 퇴직 권고를 듣고 미국을 다녀온 후 결심을 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일단 찾아는 봐야죠.”

    “욕본데이. 와? 좀 도와주까? 혼자 왔다며?”

    “……저 요새 돈 없습니다.”

    “이 짜슥이! 마! 내가 뭐 사례를 바라고 말하는 것 같나! 됐다, 치아라!”

    “에이. 맛있는 거 못 사 드린다는 말이죠. 선배님 도움 기꺼이 받겠습니다! 자, 그럼 건배! 에이, 건배-!”

    “니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말래이. 마, 친구가 부싼에 왔는데, 부산 사람이 친구보고 돈을 쓰게 할 것 같나?”

    “에이. 죄송하다니까요.”

    둘은 술잔을 부딪치며 잠시의 해우를 즐겼다.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취기가 알딸딸하게 올라오자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선 완전히 취하고 싶지만, 서로 사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만 일나자. 내일 니가 머무는 호텔로 비번인 놈 하나 보낼 테니까네 데꼬 다니라. 그놈이 부산 통이라 모르는 곳도 다 갈켜 줄 끼다.”

    “감사합니다!”

    “씁. 어데. 내 아까 말 안 했나. 친구가 부싼에 내려오믄 부산 사람이 쏘는 기라고. 난중에 내가 서울 올라가믄 그때 쏴라.”

    “알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종혁과 형사 지인은 웬 커플이 꽁냥거리는 계산대 앞에 섰다.

    “아니다, 오빠야. 오빠야가 오늘 많이 썼다 아이가.”

    “씁. 니 자꾸 나 이상하게 할래?”

    “그럼? 나는? 나는 오빠야 돈만 쪽쪽 빨아먹는 거머리로 만들 생각이가? 오빠야 니도 내 이상하게 할래?”

    “아, 아이다! 내가 무슨!”

    “그럼 됐다! 아이다. 이 참에 그냥 데이트 통장 만들자!”

    참 보기 좋은 모습을 보이는 커플.

    부산 커플답게 참 화끈했다.

    그러나 그런 커플을 보는 종혁의 눈이 흔들린다.

    ‘데이트 통장? 더치페이?’

    “하이고, 보기 좋네. 계산도 빨리 해 주믄 더 보기 좋을 긴데.”

    “엄마야!”

    “죄, 죄송합니다!”

    얼른 계산을 한 커플은 도망치듯 술집을 빠져나갔고, 종혁은 왜 보기 좋은 광경을 방해하냐며 지인을 타박했다.

    “그럼 가래이.”

    “옙! 서울로 복귀하기 전에 연락드릴게요!”

    손을 흔든 형사 지인은 종혁이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자 핸드폰을 들었다.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은 눈.

    “예, 청장님. 김학일이, 아무래도 혐의를 쪼매 뱃겨도 될 것 같습니다. 대리 뛰어가 여행 자금을 마련했답니더.”

    그는 박종명 청장에게 방금 전 종혁과 나눈 대화를 낱낱이 고해 바쳤다.

    한편 택시를 잡아탄 종혁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진짜 대단하네. 그사이에 쁘락지를 붙일 생각을 하셨어?”

    아니, 애초부터 그는 쁘락지였던 거다. 자신이 그걸 모르고 그를 지인으로 생각한 것뿐.

    “이러니 팀원을 함부로 못 뽑지.”

    씁쓸히 웃은 종혁은 방금 전 커플의 일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일본…….”

    더치페이의 나라, 일본.

    그런 일본의 문화를 생각하니 예전에 제외시켰던 가정 하나가 떠오른다.

    “혹시 김학일에게 현지처가 있던 게 아닐까?”

    숙소를 비롯한 체류 비용을 나눠 내거나, 그 여성의 집에 머물렀다면 다소 부족한 돈으로도 여행을 할 수 있었을 터.

    물론 이랬다면 김학일은 아내의 무언가를 알아차렸을 때, 이를테면 외도 같은 것을 알아차렸을 때 얼씨구나 하고 곧바로 이혼 서류를 보냈을 것이다. 아니면 이미 그 전에 보냈거나.

    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일단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조사해 볼 가치는 있었다.

    종혁은 핸드폰을 들었다.

    “철아, 김학일이 부산에 내려올 시간을 기점으로 한 달 전후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온, 아니 정확히는 수원과 부산에 체류한 일본 여성이 몇 명인지 또 누군지, 겹치는 인물이 있는지 싹 다 조사해 볼 수 있을까? 어, 그래. 부탁해.”

    통화를 종료한 종혁은 다음으로 일본의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

    “응, 쿄 형.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연락한 건 아니지?”

    일본의 지인인 무로이 코헤이.

    현재 계급은 경시정. 사상 최연소라 불릴 만큼 경시청의 역사를 새로 써 가고 있는 엘리트 중 엘리트다.

    “응. 다름이 아니고, 사람 한 명 동선 좀 추적할 수 있을까 해서. 그런데 이 사람이 쓰시마와 후쿠오카를 자주 갔어. 하루? 오케이. 인적 사항은 바로 보내 줄게. 고마워.”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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