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496화 (496/837)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496화>

라비 일병이 잠시 뉴욕을 떠날 준비를 하던 그날.

엄마 주안이 일을 가자, 화장을 하고 건물을 나선 린이 옥상을 바라보며 혀를 찬다.

“칫. 뻔뻔해.”

정신을 차렸으면 나가야 할 것 아닌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방을 차지한 나쁜 사람.

온몸이 불덩이였던 사람.

물론 그 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갑자기 이 낯선 땅으로 도망쳐 온 것도 모자라 저딴 집에서 살게 되고, 그러다 못해 방을 잃게 된 린으로선 짜증만 날 뿐이다.

고향 베이징에서 살 때가 그리웠다.

엄청 큰 신문사에서 여러 부하 직원을 뒀을 만큼 대단했던 아빠.

그래서인지 남부럽지 않게 잘살았다.

가정도우미도 쓰고, 용돈 대신 신용카드를 받아서 생활했을 만큼 잘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더니 모두가 잠든 밤 엄마가 자신을 깨웠고, 이곳 뉴욕으로 오게 됐다.

처음엔 돈이 많았다.

베이징에서 살던 집과 거의 비슷한 집도 빌렸고, 밥도 사 먹었다.

아빠와 친구들만 없을 뿐 베이징에서와 크게 다를 게 없던 삶.

그런데 엄마가 사기를 당했다.

미국에서 살려면 영주권이라는 게 필요한데, 외국인이 영주권을 받으려면 돈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일단 불쌍하게 보여야 영주권을 인정해 준다고 했다.

그래서 바보처럼 순진한 엄마는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브로커에게 넘겼고, 그 사람은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저 옥상의 돼지우리 같은 집으로 가게 됐다.

그에 린은 약간의 옷들과 노트북만 겨우 챙겼다. 아빠가 소학교 졸업선물로 사 줬던 노트북만.

그런데 엄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군식구를 늘렸다.

“이러니 내가 집에 붙어 있고 싶겠냐고.”

콧방귀를 뀐 린은 차이나타운을 벗어나 워싱턴스퀘어공원으로 향했다. 커다란 워싱턴스퀘어 아치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기 시작한 린.

그때 그녀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띠리링! 띠리링!

린 같은 소녀의 감성이 흠뻑 묻은 분홍색 핸드폰.

약간 낡았지만 오늘 만날 남자친구가 준 선물.

얼굴이 확 밝아진 린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응! 나 워싱턴스퀘어 아치 안이야! 왼쪽? 6번가 쪽으로? 아, 보인다!”

린은 얼른 6번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빠앙!

골목에서 큰 소리가 울리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던 린은 골목 속에 숨겨진 차와 그 옆에 선 이십대 후반의 백인 남성을 보곤 활짝 웃었다.

“알렉스!”

백인 남성에게 달려간 린은 폴짝 뛰어올라 안겨 들었고, 그녀를 힘들지 않게 받아 낸 알렉스는 웃음을 흘리며 린의 귀를 간지럽혔다.

“후후. 그럼 갈까?”

“응!”

린을 차에 태운 알렉스는 후진으로 차를 뺐고, 그렇게 그들의 심야 데이트가 시작됐다.

“와아아-!”

린이 넓은 허드슨강을 보며 그동안 쌓여 왔던 것을 토해 낸다.

짜증과 울분, 설움. 허드슨강을 향해 흘려보낸다.

“좋아?”

“알렉스!”

다시 알렉스에게 안겨 든 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맺힌다.

오늘도 황홀했던 데이트.

이 새벽녘 강가의 드라이브까지 완벽했다.

그녀는 사랑스럽다는 듯 알렉스를 봤다.

대학생인 알렉스.

중국에서 만난 또래의 아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숙한 어른.

“응? 왜 그래?”

“아냐! 우리 이다음엔 어디 가? 멀리 가? 아니, 멀리 가자! 나 나이아가라 폭포 보고 싶어!”

“와우. 진정해, 아가씨. 폭포까지 가는 건 문제가 안 되지만 괜찮겠어?”

움찔!

순간 집에 늦게 들어오면 불같이 화를 내던 엄마가 떠오른다.

“……흥! 괜찮아! 상관없어!”

‘나랑 상의도 없이 내 방을 줘 버렸는데 하루 외박하는 건 괜찮겠지! 내 방이 없어서 그랬다면 엄마도 할 말이 없을 테니까!’

“정말 괜찮아? 부모님이 안 찾겠어?”

“안 찾아! 어차피 집에 늦게 들어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닌걸?”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응?”

“아냐. 목마르지? 일단 이거 마셔.”

“으응.”

왜인지 순간 오싹해졌던 린은 이내 신경을 끄며 남자친구가 주는 음료를 마시며, 다시 허드슨강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젠 제법 더워진 날씨. 그래도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불어오는 강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도시에서 맡을 수 없는 흙냄새도 꽤 좋았고, 이 모든 것을 남자친구와 이렇게 어깨를 맞댄 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점점 더 좋아지는 기분.

몸도 나른해지는 게 더 이상 있다가는 잠들 것 같다.

린은 보닛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착지를 하지 못하고 넘어져 버린 그녀.

얼굴이 빨개져 몸을 일으키려던 린은 당황했다.

“어? 모, 몸이 왜 이러지? 아, 알렉스. 나 이상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일어설 수가 없다.

저벅! 저벅!

“그렇겠지. 이제 약발이 돌 테니까.”

“으응?”

“린, 미국에서는 남이 주는 건 무엇이든 먹지 말라는 격언이 있어. 그것이 혹여 남자친구라고 해도 말이야.”

“자, 장난치지 마, 알렉스! 나, 나 무서워!”

“장난 같아?”

콰드득!

순간 린이 입은 셔츠가 뜯긴다.

그러며 드러난 귀여운 속옷과 작은 가슴.

“흐. 이 예비 창녀 년도 속옷을 이렇게 입었네? 봐, 너도 기대했던 거잖아.”

“시, 싫어! 싫다고! 너 왜 그래!”

“마음껏 반항해 봐. 난 그런 걸 좋아하니까.”

“싫어-!”

애달픈 비명이 아무도 없는 숲을 울렸다.

* * *

“그러니까 범인이 피해자의 반항을 즐겼다는 겁니까?”

부검실 안, 종혁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는다.

“이거 보이지?”

검시관이 린의 손목을 잡아 약간의 손상을 입은 손톱을 보여 준다.

“놈은 이번에도 마약과 근육이완제를 동시에 써서 피해자를 무력화시켰어. 이 체구라면 독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을 거야. 딱 그 정도 수준으로 무력화시킨 거지. 그리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즐겼어.”

장장 사흘 동안.

피해자의 손톱과 피부에 겹겹이 쌓인 DNA와 흙 등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죽였어. 이렇게.”

양손으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는 검시관.

“아마 이땐 맨정신이었을 거야. 최, 이 새끼 이상성욕자다.”

빠득!

“아…… 씨발.”

얼굴을 쓸어내린 종혁의 눈이 지독한 살의를 내뿜기 시작한다.

“피해자의 몸에 남은 흙으로 피해자가 강간을 당했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습니까?”

“힘들지.”

샘플의 양이 너무 적은 것도 있지만 너무 뒤섞여 있다.

검시한 샘플과 비교할 수 있는 있는 흙이 있다면 모를까, 이 정도만 가지고는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다.

“다만 피해자가 허드슨강에서 발견됐다고 하니까 강 상류 쪽이 아닐까?”

“……알겠습니다. 더 나오는 게 있다면 연락 주세요.”

“뭐야, 보니를 지원하려고?”

현재 연쇄강간살인을 담당하고 있는 동료 보니.

“그러려고요.”

이후 또다시 피해자가 발견됐다.

린까지 해서 벌써 피해자가 여섯 명. 이젠 보니와 그의 파트너 둘만으로는 감당할 사이즈가 넘어섰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고개를 숙인 종혁은 몸을 돌렸다.

“아, 최.”

“예?”

“이 자식 꼭 잡아.”

“……그럴 겁니다.”

그래야 했다.

살인의 주기가 무척이나 짧은 연쇄강간살인범. 지금 잡지 않으면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길지 모른다.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머리가 아파 왔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부검실을 빠져나온 종혁은 부검실 출입문 옆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는 주안을 발견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 * *

뉴욕주에 위치한 군교도소.

죄수복을 입은 라비가 다가오며 옅게 웃는다.

“요원님.”

“신수가 훤하네.”

얼굴에 어둠이 없고, 그 사이에 살이 제법 올라와 있다.

“자, 먹고 싶었죠?”

“와! 저 주시는 겁니까?”

라비가 평소 좋아했다는 브랜드의 햄버거.

얼른 포장을 벗겨 한입 크게 베어 문 라비가 몸을 떨며 전율한다. 그리고 밀크쉐이크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한번 더 전율한다.

게 눈 감추듯 햄버거를 먹어 치운 그는 마지막으로 커피 한 잔에 세상을 다 가진 미소를 짓는다.

“후우.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요원님.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뭐가 그렇게 급해요? 천천히 대화나 나누면서 소화 좀 시켜요.”

“제가 체할 수 있다는 거군요. 혹시 린에 관한 이야깁니까?”

자신의 부모님이나 친구, 혹은 선임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지금 같은 표정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 라비는 이내 종혁이 린에 대해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닐까 추측해 낼 수 있었다.

그 추리력에 종혁은 감탄을 토했다.

“출소하고 경찰이 될 생각 없습니까? 한국에서. 고민해 봐요. 나 지금 진지하게 하는 말이니까.”

“하하. 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종혁은 품에서 사진을 꺼내어 내밀었다.

파랗게 질린 린의 시체 사진.

라비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는다.

“린 양을 마지막으로 본 게 라비 일병이라더군요.”

“……주안 씨는 괜찮으십니까?”

“말할 정신이 없으신 상태입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도 하지 않은 채 딸이 있는 부검실만 보며 하염없이 우는 그녀.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기에 일단 조치를 취해 놓았지만, 그녀에게 무언가를 바랄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을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치 이성을 만나려는 듯 예쁘게 꾸미고 나갔습니다. 자신의 물건에 절대 손을 대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요.”

‘가출을 했다가 봉변을 당한 게 아니군.’

가출을 할 거였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다.

“좋아하는 이성이 있었다는 거군요. 혹시 린 양이 그 사람에 대해 언급한 건 없었습니까?”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하다.

그동안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나갔다가 실종된 후 변사체로 발견된 피해자들.

여기엔 ‘친구’라는 키워드가 있다.

그것이 남자친구이거나 썸을 타는 관계의 사람일 수도 있었다.

종혁은 드디어 무언가 단서를 잡을 수 있나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라비는 고개를 저었다.

며칠을 함께 보냈음에도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수 없었을 만큼 자신을 경원시했던 린.

그러나 짐작이 가는 건 있다.

“아마…… 랜덤채팅으로 만났을 확률이 높습니다.”

“랜덤채팅?”

종혁의 눈이 부릅떠진다.

단서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것으로 추정되는 단서.

피해자들 사이에 이렇다 할 공통분모가 없는 이번 사건. 그 공통분모가 생기려 하고 있었다.

“린 양이 채팅을 하며 이성을 만났다는 겁니까?!”

“린의 노트북에 자주 접속하는 랜덤채팅 사이트가 있을 겁니다. 사이트 이름은 하트온 닷컴입니다.”

“잠시만요!”

종혁은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보니! 저예요, 최! 지금 피해자 전원의 컴퓨터 로그를 확인할 수 있겠어요? 지금 당장 확인해 봐요! 사이트 이름은 하트온 닷컴!”

-아, 알았어! 지금 당장 확인해 볼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종혁의 어깨를 짓누를 때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이, 있어! 하트온 닷컴이 있다고!

“알았어요. 일단 끊어요.”

종혁은 라비를 봤다.

“가 보세요, 요원님. 그리고 꼭 잡아 주세요.”

“……출소하면 무조건 한국으로 와요. 내가 당신 인생 책임져 줄 테니까! 이건 영치금으로 쓰고!”

가진 돈을 모두 라비에게 쥐여 준 종혁은 다급히 면회실을 빠져나갔고, 라비는 그런 종혁을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는 다가오는 교도관을 향해 100달러 지폐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교도관님, 전화 한 통 쓸 수 있겠습니까?”

자신에게 큰 은인인 종혁.

아무래도 도움을 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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