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492화>
“……마! ……그래?”
“그럼…… 둬?”
귓가를 아른거리는 중국어.
몽롱한 정신을 일깨우는 고향 차이나타운의 언어에 라비 일병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격의 자세를 잡는다.
“후욱!”
순간 눈앞이 빙글 돌지만, 라비 일병은 자신을 깨운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일어나셨어요?”
눈앞이 너무 흐려 잘 보이진 않지만, 낯이 익은 목소리다. 그 옛날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비밀 기지로 가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을 때 들렸던 것 같은 목소리. 맡았던 것 같은 냄새.
“몸은 좀 어때요? 정말 죽을 뻔했던 거 알아요? 당신 이틀 만에 일어난 거예요.”
이마에 닿는 차가운 손에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한다.
“음. 열이 아직 남은 것 같은데…….”
라비 일병은 주안을 멍하니 쳐다봤다.
“당신이…… 절 구한 겁니까?”
주안은 라비 일병의 눈에 서리는 경계심에 씁쓸히 웃었다.
“누워 있어요. 죽을 끓여 올 테니까.”
“아닙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벗어나야 한다. 이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얼른 벗어나야 했다.
한곳에 오래 머무는 건 잡아 달라고 광고하는 행위.
혹시라도 이들이 신고를 했을 수도 있기에 얼른 도망쳐야 했다.
그렇게 딱딱한 나무 침대를 벗어나려던 순간이었다.
핑글!
“아…….”
라비 일병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며 가까워지는 바닥에 얼른 팔을 뻗었지만, 속절없이 머리를 찧고 말았다.
쿠웅!
“에휴. 참 고집불통이네. 린!”
“네, 네. 칫!”
혀를 찬 열네댓 살 정도의 소녀가 다가와 주안과 함께 라비 일병을 부축해 일으킨다.
라비 일병은 그 손들을 뿌리치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다시 눕혀진 그.
“마음 놓아요. 다른 사람이 여길 찾아올 일은 없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내쫓을 만큼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비슷한 처지?’
마치 창고처럼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는 2평 남짓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 라비 일병은 단번에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불법 체류자.’
진정한 자유와 안전을 찾아 중국에서 도망쳐 차이나타운에 스며드는 동포들.
어떻게든 영주권을 얻기 위해 말할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
부당한 일에 대한 항변도, 그렇다고 신고도 못하는 그림자 혹은 노예 같은 존재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쫓겨 도망치는 듯한 모습에, 그를 불법 체류자라고 착각한 듯했다.
“아, 그게…….”
“다 이해해요. 린, 오빠 괴롭히지 말고 따라 나와.”
“내가 뭘 어쨌다고! 그리고 여기가 내 방인데 내가 왜 나가!”
“씁! 빨리 나와!”
라비 일병은 벽이자 출입문인 커튼을 걷으며 나가는 주안과 린을 가만히 응시하다 몸에 힘을 풀었다.
그녀가 정말 불법 체류자라면 안심을 해도 됐다.
‘하긴 불법 체류자가 아니면 이런 곳에 살 이유가 없지.’
차이나타운 상가 번영회에서 대출을 해 줄 테니 말이다. 나라 경기가 어렵다고 해도 그들은 동포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빌려주는 존재였다.
‘이틀이라…….’
주안의 말처럼 정말 죽다 살아난 것 같다.
“후우.”
라비 일병은 갑자기 몰아치는 졸음에 눈을 껌뻑이다가 결국 감고 말았다.
* * *
차이나타운의 한 작은 사무실.
수십 대의 모니터와 몇 명의 사람이 있는 그곳에 들어선 종혁이 혀를 내두른다.
“어떠십니까?”
앤드류 칭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종혁은 엄지를 치켜세웠고, 앤드류 칭은 헛기침을 했다.
“이런 곳이 열 곳 더 있습니다.”
오늘 3천 대의 CCTV가 모두 설치됐다.
그러나 3천 대의 CCTV를 하나로 연결할 시간이 부족했고, 또 그러면 너무 요란했기에 앤드류 칭은 임시로 11개의 사무실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에겐 어떻게 설명하셨습니까?”
“말하신대로 전봇대 전선 및 전기 점검과 건물 안전 점검을 한다고 말해 놨습니다.”
“다행이군요.”
혹여 말이 새어 나가 라비 일병이 도망치기라도 하면 낭패다.
앤드류 칭은 고개를 끄덕이는 종혁의 귀에 입술을 가져간다.
“그런데 이분들은 믿을 수 있는 겁니까?”
아니라면 자신이 소개시켜 줄 수도 있었다.
현재 일이 없어 집에서 쉬는 차이나타운의 주민들을 말이다.
“걱정 마세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레이스 탐정사무소를 통해 알선받은 사람들이고, 은퇴한 FBI 요원들을 고용해 관리를 맡겼다. 라비 일병을 찾을 때까지 숙식을 이곳에서 해결할 테니 이곳의 일이 바깥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었다.
“칭 씨께서는 주민들이 이곳에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그보다 음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을 수 있는 곳과 계약해서 배달해 주세요.”
“입이 무거운 식당들로 골라 놓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종혁은 각자 네 개의 모니터를 담당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자, 이제 움직여 봐라.’
라비 일병이 차이나타운에 들어오거나 차이나타운 안에서 움직이는 그때가 바로 검거의 순간이었다.
종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 * *
라비 일병이 몸을 추스른 건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이후였다.
“여기였다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흐릿한 하늘. 저 멀리 부모님의 마트가 보인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이곳은 차이나타운에 도착하자마자 부모님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정찰 포인트로 삼았던 건물의 옥상이었다.
그리고 창고처럼 보여 안심했던 건물이 바로 주안 모녀가 사는 집이었다.
“후우.”
라비 일병은 쉬는 날이라 문을 닫은 부모님의 마트를 하염없이 응시하다 돌연 입술을 깨물었다.
‘가까이 가야 하는데…….’
NCIS는 언제 물러날까.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으니 빨리 부모님을 만나고 뉴욕을 떠야 하는데 왜인지 꺼림칙하다.
골목 전체, 아니 차이나타운 전체에 부비트랩이 깔린 것 같은 섬뜩함.
“왜일까. 대체 왜…….”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자세를 잡았던 라비 일병은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흥!”
콧방귀를 뀐 린은 쿵쿵거리며 창고 같은 집 안으로 들어갔고, 라비 일병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본의 아니게 뺏어 버린 린의 방.
성인도 꺼려 할 일인데 저 나이라면 오죽할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떠나야겠어.’
몸도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회복됐다 할 수 있으니 떠나야 할 것 같다. 더 이상은 마음이 불편해서 힘들었다.
라비 일병은 조금 더 부모님의 마트를 지켜보다가 창고 같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으응?”
“아저씨가 내 노트북 썼어요?”
“노트북? 아니?”
썼다. 혹여 수배가 내려졌을까 확인하기 위해 썼었다.
“……절대 쓰지 마요. 알았어요?”
“알았어.”
마치 소중한 보물인 듯 재작년 산 노트북을 꼭 끌어안은 린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그걸 가만히 응시하던 라비 일병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랜덤채팅을 하는 것 같던데…….’
군 입대 전, 잭 웡이 여자친구를 여기서 만났다면서 가르쳐 줬던 랜덤채팅 사이트.
별도의 신분 인증 없이 아이디와 패스워드, 사진과 간단한 프로필만 등록하면 무작위로 선정된 사람과 채팅을 할 수 있는 사이트인데, 온갖 인간군상들이 많았기에 한 번 접속을 했다가 관둔 곳이다.
라비 일병은 이에 대해 말할까 하다가 관뒀다.
지금 자신이 누굴 신경 쓸 처지던가.
덜컹!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라비 일병은 환하게 웃는 은인 주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밤이 됐다.
“다녀올게요.”
“흥. 내 물건에 절대 손대지 마요.”
웃으며 출근을 한 주안과 그런 주안이 나가고 30분 뒤에 집을 나선 린. 오늘 누구를 만나는지 평소와 다르게 예쁘게 차려입었다.
그렇게 그들이 나간 후 새벽 1시가 되자 라비 일병이 이불 위에 감사의 쪽지를 내려놓고 일어선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맛본 사람의 온기.
그는 씁쓸히 웃으며 건물을 나섰다.
빛 한 점 없는 골목에 발을 내딛자마자 눈빛이 가라앉은 그.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수배 전단이 붙은 건 아니야.’
차이나타운에 수배 전단이 붙었다면 주안이 무슨 반응을 보였을 터.
그걸 비춰 보면 역시 NCIS, 아니 해군부에서 자신의 사건을 묻으려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인 사건 속에 숨은 진실을.
‘나도 함께 말이지.’
부모님과 친구들 곁에 딱 달라붙어 함정을 판 채 기다리고 있을 거다.
자신이 그 덫에 걸려들 때까지 계속.
‘잘못 생각했어.’
군인의 집요함을 떠올린 라비 일병은 입술을 깨물었다.
NCIS가 철수를 할 때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철수를 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낯빛을 굳힌 라비는 몸을 돌렸다가 전봇대에 붙은 종이 같은 걸 발견하곤 살짝 놀랐다가 이내 미간을 좁혔다.
[억울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FBI를 찾아 주세요]
움찔!
왜인지 마음을 흔드는 글귀.
“억울한 일…….”
마치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말.
가만히 그 글귀를 응시하던 라비 일병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고, 라비 일병은 곧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 * *
FBI 뉴욕지국의 사무실.
고개를 뒤로 젖힌 종혁이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와, 이 자식 진짜 독하네.”
라비 일병이 잭 웡에게서 돈을 넘겨받으려다 실패를 한 지 벌써 닷새째다. 혹여 남아 있을 돈도 모두 떨어졌을 시간이다.
그런데 라비 일병이 CCTV에 잡히질 않는다. 늦은 저녁, 빛이 없는 곳으로만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돈을 구할 방법이 없을 텐데…….”
리자춘 부부와 잭 웡을 비롯한 3명의 친구, 그리고 혹시 몰라 중고교 동창들에게까지 모두 감시를 붙여 놓은 상태다.
“설마…… 뉴욕을 빠져나간 건가?”
‘아니야. 그럴 거라면 이미 예전에 빠져나갔어야 했어.’
그럴 생각이었다면 진작 더 이상 NCIS가 가족과 친구들을 건드리지 않도록 자신이 떠났다는 흔적을 남긴 채 뉴욕을 떴을 터.
종혁은 라비 일병이 아직 이 뉴욕 안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분명 버티기 힘들 때가 됐는데…….’
보통 범인이 자수를 하는 건 심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궁지에 몰렸을 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힘들 때 범인은 도주를 그만두고 자수한다.
물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어떻게든 부모를 만나려고 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 그냥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모든 게 간단히 해결될 텐데.’
물론 라비 일병이 정말 가혹 행위를 당했다는 것이 전제가 되는 이야기이지만,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면 종혁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를 도울 생각이었다.
털썩! 쿠웅!
“하아아.”
종혁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골머리를 싸매다가 책상에 머리를 박는 옆자리의 요원을 보며 혀를 찼다.
“잘 안 풀려요?”
“몰라. 죽을 것 같아.”
벌써 올해만 들어 네 차례 발생한 미성년 동양인 여성을 타깃으로 한 연쇄강간살인.
피해자들 사이에 공통점은 연령대와 성별을 제외하면, 동양인이라는 점과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가 변고를 당했다는 것뿐.
무엇 하나 범인을 유추할 만한 공통점이 없었다.
그에 며칠째 제대로 잠도 자질 못한 듯 퀭한 눈빛의 요원이 종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흰 좀 어때? 벤이랑 드롭은 어디 가고?”
“우리도 죽을 맛이죠. 벤이랑 드롭은 잠시 옷 갈아입으러 집에 갔고요. 둘이 오면 저도 옷을 갈아입으러…….”
“최!”
“응?”
종혁은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몰리를 쳐다봤다.
“떠, 떴어!”
“뭐가…….”
“라비 일병이 카드를 사용했다고!”
라비 일병이 살인을 저지르기 전 동선을 추적한 결과, 그가 몇 차례 카드를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카드가 라비 일병의 아버지인 리자춘이 아들에게 휴가 때만큼은 마음껏 놀라며 쥐여 준 것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에 FBI와 NCIS는 라비 일병이 궁지에 몰리면 그 카드를 쓸지도 모른다며 예의 주시하고 있던 상황.
그리고 오늘 드디어 라비 일병이 카드를 사용한 것이다.
“미친!”
종혁이 헐레벌떡 몰리에게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예, 최종혁입니다!”
-그레이스입니다! NCIS가 다급히 숙소를 나서고 있습니다!
“알았습니다! 계속 미행해 주세요!”
전화를 끊은 종혁은 얼른 몰리의 뒤에 섰다.
“어디서 쓴 겁니까?”
“올버니시! 아무래도 캐나다로 가려는 것 같아!”
뉴욕주의 도시 올버니. 그 위로 쭉 올라가면 캐나다 국경이 나온다.
‘튄다고? 정말로 튄다고?’
순간 머릿속이 엉클어진다.
“뭘 샀는데요?”
“껌이랑…….”
움찔!
종혁이 미간을 좁힌다.
“우비랑 지도, 나침반, 가방, 다량의 보존식 식품, 핫도그 하나를 샀어. 아, 의약품도 구매했어.”
모두 종합마트에서 살 수 있는 것들.
“아무래도 도보로 국경을 넘으려는 것 같아.”
“……흐음. 현금서비스는요?
“아직 받지 않은 것 같아.”
“그래요?”
지금쯤이면 배가 고프다 못해 배가 찢어질 수준일 라비 일병. 몸 상태가 꽤 안 좋을 거다.
그러니 위치가 들통날 각오까지 하며 카드는 쓴 것일 터. 그런데 따뜻한 음식이 겨우 핫도그 하나다?
말이 안 된다. 어차피 쓰는 거 살 수 있는 건 다 사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이 자식, 뺑끼 쓰네?”
종혁은 입술을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