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464화>
“앉으시죠.”
종혁의 권유에 소파에 앉은 버락 루터가 종혁의 펜트하우스 안을 둘러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다.
미국의 정치인이기 전에 한 사람의 미국 시민으로서 종혁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러 왔던 그.
시간이 없어 감사 인사와 작은 부탁만 하고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내는 건 예법에 어긋난다는 권유에 이렇게 종혁의 보금자리까지 올라오게 됐다.
“집은 넓지만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서 그런지 대접할 게 별로 없네요.”
버락 루터는 앞에 놓이는 국화차에 눈을 껌뻑였다.
“……한국인은 꽃도 먹나 보군요.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민족인 것 같습니다.”
“차나 커피도 결국엔 식물의 일종이죠. 근육 이완과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스트레스?”
“따뜻할 때 드셔 보세요.”
버락 루터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성의를 봐서 국화차를 입에 가져갔다.
후룩!
“음? 으음…….”
오묘한 탄성이 흘러나오는 그의 입.
농축된 국화 특유의 향기와 쌉쌀한 뒷맛이 입안을 차분하게 적신다.
종혁의 말 때문인지 살짝 이완이 되는 것 같은 굳은 어깨.
버락 루터가 신기하다는 듯 찻물 안에서 활짝 핀 국화꽃을 응시했다.
헌화의 상징인 국화.
그래서 약간 떨떠름했는데 썩 나쁘지 않았다.
종혁은 국화차가 마음에 들었는지 차분히 차를 즐기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버락 던햄 루터.’
다음 대 미국의 대통령이자,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및 유색 인종 대통령.
‘그리고…….’
‘루터 케어’라는 서민 및 빈민을 위한 복지를 펼치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미국을 만든 대통령이다.
물론 이 루터 케어의 대상인 서민 및 빈민들 중 다수가 흑인이나 소수의 유색 인종이다 보니 말이 참 많긴 했다.
실제로 루터 케어의 혜택을 직격으로 받은 흑인들 일부는 드디어 흑인들의 세상이 됐다고 기고만장해져 공식석상에서 다백인 및 다른 유색 인종들을 서슴없이 비하했고, 이것에 선동된 멍청한 것들이 역으로 인종 차별이나 인종증오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놈들은 모두 국민과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루터 케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수에겐 성공했지만, 소수에겐 실패한 정책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지.’
버락 루터의 진짜 업적은 바로 서브 프라임 모기지에 박살이 난 미국을 고작 8년 만에 거의 원상태로 되돌렸다는 것.
그러며 흑인을 비롯하여 차별받던 이들이 활발하게 사회 진출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면서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버락 루터.
‘솔직히 월 스트리트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월 스트리트를 깎아내리는 스태파니 클린턴보다는 백배, 천배 나아.’
스태파니 클린턴은 겉과 속이 다름에도 그걸 들키고 마는 부주의한 사람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걸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함으로써 시민들에게 비호감을 사는 인물.
반면 버락 루터는 상류층 백인들에겐 지지를 받지 못하더라도 서민과 빈민층들에겐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 덕분에 퇴임 후에도 정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
‘쩝.’
종혁은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종혁 자신의 선택으로 역사가 어그러지고, 그 결과 누군가는 불행해질 수도 있는 상황.
설령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종혁으로서는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버락 루터도 그게 뒤바뀐 역사라는 사실은 모를 테지만, 그러한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을 느끼고 이렇게 찾아온 것일 터.
다만 무작정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고 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흐음…… 한번 시험해 볼까?’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고 해도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본래의 역사 더 올바른 길로 나아간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종혁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판단을 내리고 싶었다.
“입에는 좀 맞으십니까?”
“아! 후우, 이런. 제가 처음 맛보는 맛에 너무 흠뻑 빠졌나 보군요. 최 요원, 고국을 위해 헌신한 군인들과 그 유가족의 목숨값을 지켜 줘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경찰로서, FBI 요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스태파니 클린턴에게도 했던 대답.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기에 종혁의 눈빛에는 한 점에 가식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 눈빛을 본 버락 루터는 감탄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핫! 정말 훌륭하군요. 그래도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미국인이 아님에도 미국인을 위해 끝까지 매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사기가 끊이지 않는 것이 창피할 따름입니다.”
“걱정이 많으신가 보군요.”
“미국은 사기에 취약하니까요.”
“총기와 아메리칸드림 때문에 말이죠.”
흠칫!
‘호오?’
버락 루터는 종혁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종혁이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 냈기 때문이다.
총기 사건이 매일같이 뉴스를 타면서 어떻게 보면 범죄에 대한 인식의 범위가 좁아진 미국.
그런 미국의 국민들은 언제나 아메리칸드림을 꿈꾼다.
버락 루터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교육 문제도 있죠.”
사립과 공립학교 간 교육의 질이 심각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 미국.
문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싶어도 사립학교는 학비가 지나치게 비싸고, 공립학교는 제대로 된 정부의 지원이 없어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빈부격차로 인한 교육의 차이가 또다시 빈부격차를 만들어 내는 악순환.
종혁은 그런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똑똑하다고 사기를 당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선동을 당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보다 사기를 당하지 않을 확률이 높을 뿐이다. 사기꾼이 작정하면 대통령도 당하는 게 사기다.
“흠. 현장에선 그렇게 판단을 하나 보군요.”
“사기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건드리니까요.”
“……돈. 아메리칸드림. 성공의 지표.”
종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범죄 유형 전체로 보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범죄자가 될 확률이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글과 수학이 아닌, 인내와 책임을 배우지 못한 이들이 말이죠.”
“인내? 책임?”
생각지 못한 말이었던 것일까.
버락 루터가 가슴께 앞에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긴다.
“인내라……. 그러면 학교 문제와는 상관없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결국 학교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인내와 책임 또한 기르게 되는 거니까요.”
배우지 못해서 범죄자가 된다?
그것만큼 개소리도 없다.
대체 배우지 못한다의 기준이 뭘까.
성적? 지식?
어떠한 사정에 의해 배우지 못해도 정도를 잘 지키며 사는 사람이 수백 배, 수천 배 많다.
그건 범죄자가 면피를 위해 지껄이는 말이고, 시청률을 위해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는 언론의 프레임일 뿐이다.
“……마치 심리학자나 철학자 같은 말이군요.”
평론가 같은 말이기도 하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입니다.”
흥미롭다. 버락 루터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 종혁과 비슷한 견해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은 그가 생각하는 복지 정책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
팔짱을 푼 그의 상체가 종혁을 향해 기울어진다.
“그렇다면 인내와 책임을 기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된다고 보십니까.”
아주 예전부터 자신이 계획하던 정책에 필요할 것 같은 조각.
그래서인지 그는 종혁에게 투자할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잊으며 질문을 던졌고, 종혁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이 양반 보소?’
스스럼없이 의견을 구한다.
성공한 자의 특징 중 하나다.
종혁은 이야기를 들으려는 자세를 취하는 그의 모습에 보다 진지해졌다.
“일단 공립학교에 대한 지원과 선생들의 월급부터 올려야 합니다.”
흠칫!
“흠. 이건 생각지 못한 견해군요. 계속 들을 수 있을까요?”
“현재 미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의 학력을 보면 60퍼센트 이상이 공립학교 출신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가관이다.
학교 자체의 예산도 예산이지만, 일용직 노가다꾼보다 벌이가 적은 공립학교 선생들.
그렇다 보니 옛날의 한국처럼 촌지가 판을 치고, 선생들은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지 못하니 의욕이 없다.
이렇게 선생들이 의욕이 없으니 엇나가는 학생들을 케어할 수 없고, 학생들도 그런 선생을 업신여기며 더욱 엇나가게 된다.
이 또한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이건 한국도 다를 게 없지.’
“통렬하군요.”
“그리고 학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학교 밖에서의 생활, 주변 환경의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흑인들만의 독특한 문화인 Thug와 Homie 문화.
Thug 문화는 쉽게 말해 다른 인종과 어울리는 흑인을 흑인답지 않다며 따돌리는, 그들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며 억압하는 문화다.
그리고 Homie 문화는 성공한 흑인이 가난했던 시절을 잊지 않고, 어린 시절 함께했던 가족과 친척뿐만 아니라 고향 사람들을 모두 부양해야 된다는 문화다.
타 인종에게 배타적이면서도 이기적이고, 게으름뱅이를 양산하는 문화.
이것도 문제인데, 흑인의 미혼모 비율과 고아 비율이 굉장히 높다는 것도 문제다. 즉, 가정 환경이 불우할 수밖에 없단 소리다.
이 부분은 흑인인 버락 루터도 비호할 수 없는 문화였다.
“아니, 흑인뿐만이 아닙니다. 상당수의 미국인이, 미국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가야 할 아이들이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알고 있어도 해결하긴 쉽지 않으실 겁니다.”
“엄청난 반발이 뒤따를 테죠.”
극단적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부르짖는 미국이다.
이러한 정책을 앞세운다면 버락 루터 자신의 강력한 지지자인 서민들부터 가정일에 간섭을 한다며, 문화를 말살하려 든다며 등을 돌릴 거다.
‘흐으응.’
종혁이 속으로 재밌어 한다.
‘흑인이 아니라 미국인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건가?’
종혁은 미간을 찌푸리는 그를 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후보님, 교육기관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인성을 키우는 것입니…… 아!”
“각 인종 특유의 문화를 잘못됐다고 지적하라는 게 아닙니다. 인성을 가르치라는 거죠.”
인성이 좋아지면 인내와 책임감은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또 인내와 책임을 통해 인성이 좋아진다.
“자연스럽게 화합시켜야 합니다.”
“상식이라는 기준을 세워서? ……아, 그래서 교사들의 월급을!”
잘못된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만들 존재가 누굴까.
부모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교육자가 가르쳐야 한다.
결코 편협하지 않는 시선으로.
외부의 압력을 이겨 내면서.
교사들조차 인종 차별을 비롯한 각종 차별을 하는 게 미국. 그런 교사들을 걸러 내면서 교사들과 학교에 대한 지원이 커져야 하는 거다.
“그리고 아주 길게 봐야 하죠.”
지금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이 장성하고 늙을 때까지.
세대에 세대를 거듭해야 된다.
너무도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그래도 해야 된다.
그래야 바뀌게 되는 거다.
덥썩!
돌연 종혁의 손을 붙잡은 버락 루터가 웃음을 터트린다.
교육에 대한 지원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는 버락 루터다.
이것 역시 그의 공약 중 하나.
하지만 종혁과 같은 시점으로 접근을 한 건 아니다.
보다 평등하고 차별 없는 교육을 위해 학교에 대한 지원을 늘리며 여태껏 소외받았던 이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것이 골자이지, 종혁처럼 교육자를 지원해야 한다는 발상은 하질 못했다.
‘맞아! 나도 선생님의 훈육이 있었기에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지!’
어렸을 적 말썽꾸러기라는 말이 우스울 정도로 망나니였던 버락 루터. 그는 교육에 대한 공약의 마지막 피스를 찾은 것 같아 속이 후련했다.
“하하핫! 이거 제 캠프에 모셔야 될 분을 이렇게 만나게 됐군요!”
“하하. 죄송합니다. 정부와 수사기관은 약간 내외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라서요.”
“저런. 아쉽군요. 그래도 훌륭하신 의견입니다.”
“전 이런 타국인의 말을 귀담아들으시는 후보님이 더 훌륭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아뇨, 아뇨. 이럴수록 문제를 냉정하게 바라봐야죠. 제삼자의 시선으로요.”
버락 루터는 그렇게 말하며 재밌다는 눈빛을 지었다.
부탁을 하러 왔다가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난 느낌.
“그럼 최는 앞으로 이 나라 정부가 흑인을 비롯한 그동안 소외받았던 이들에게 어떤 대우를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제가 타국의 정책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말할 입장이 아니지만, 경찰인 제 입장으로서 말하자면 공평한 처벌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받았던 피해부터 보상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요?”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계속 퍼 주기만 한다면 결국 후보님의 공약 대상인 서민들의 미래를 죽이게 될 겁니다.”
무분별한 복지는 뉴욕 할렘의 거지에게 백만 달러를 안겨 주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로 인해 혜택을 보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테지만, 문제는 욕심이 많은 소수다.
“이들이 물을 흐리기 시작하면, 아무리 좋은 뜻에서 시작한 복지라도 그 욕은 후보님께서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에 버락 루터의 눈이 흔들린다.
“그 부분은 저와 의견이 다르군요. 최 요원, 인간은…….”
“대다수가 편리함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고대로부터 그래 왔지만, 현재는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의 발전도 이 편함을 위해 진화되어 왔으니까요.”
손을 뻗으면 모든 게 다 있는 세상이다.
집에서도 원하는 모든 걸 살 수 있는 세상이다.
향상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나태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바로 현대인 거다.
“나태…….”
버락 루터의 눈이 더 크게 흔들린다.
“그리고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편중된 복지는 그동안 성실히 세금을 납부하던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올 겁니다.”
지금까지 이들이 정당하게 누리던 권리가 축소되면 안 된다. 절대로.
“인종과 계층의 갈등이 심해질 거라는 겁니까?”
“복지를 받는 사람들 중 소수의 뻔뻔함이 그렇게 만들 겁니다. 나는, 우리는 여태까지 피해를 봤으니까 이 정도는 받아도 되잖아? 너흰 돈이 많으니까 조금만 나눠 줄 수 있잖아? 다들 안 그래? 이런 말로요.”
“맙소사.”
“억눌려 왔던 게 터지는 거? 예,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죠. 하지만 그건 무조건 잘못된 방향으로 터지게 될 겁니다.”
인간은 한 번 쥔 것을 놓지 않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존재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이기에 서로 뭉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만들어진 집단은 개인의 양심을 무시해 버린다.
“인간의 이런 면모는 후보님께서도 아주 잘 아시고 계시겠죠.”
“하지만…….”
그건 욕심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좋은 삶을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다를…… 빌어먹을.”
그제야 종혁의 커리어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현재 FBI도 차용한 수사기법을 창시한 천재.
심리학의 대가. 책상머리에 앉아 연구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뛰며 온갖 부류의 인간들을 만나 온 경찰.
그래서 더 만나려 했다는 걸 잊어버렸던 버락 루터는 이를 악물었다.
종혁이 언급한 그 소수의 악한 사람들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선량한 피해자들은 그들의 감언이설에 따르게 된다.
종혁은 자괴감에 빠지려는 그를 달래 듯 입을 열었다.
“이러니 방금 전 후보님이 말하신 상식을 기준 삼아 인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겁니다.”
“……이래서 교육에 대해 말하신 거군요.”
버락 루터는 고개를 저었다.
“후우. 정말 캠프에 데려가고 싶네요.”
‘대단하군.’
욕심난다. 완벽하다 생각했던 정책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잡아 주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젊은 나이임에도 결코 지지 않은 채 스스로의 의견을 피력한다. 버락 루터 자신 같은 정치인에게.
버락 루터는 최종혁이란 사람이 욕심나기 시작했다.
지이잉! 지이잉!
“이런. 아쉽군요. 오늘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쩝. 저도 아쉽군요. 아, 잠시만요.”
종혁은 백지수표에 숫자를 적어 내밀었다.
“뜻을 펼치시는 데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이런 것을 바란 게 아닌…….”
수표에 써진 금액을 확인한 버락 루터가 눈을 부릅뜬다.
1억 달러.
종혁은 그런 그를 보며 옅게 웃었다.
시험 통과였다.
‘마냥 이상론자였다면 달리 생각했을 테지만…….’
종혁은 그에게 한 가지 선물을 더 주기로 했다.
“후보님, 현재 미국의 상황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 인해 지옥을 겪고 있죠.”
미국은 이걸 견디고 이겨 내야 한다. 이것이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됐을 때 내세울 슬로건이 될 것이다.
“역시 아시는군요. 그런데 러시아에 있는 제 친구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이건 고작 지옥의 입구에 불과하다고. 미국은 미국 스스로 지옥의 입구를 넘을 거라고.”
쿵!
현재는 장난으로 치부되는 진짜 최악이 도래할 거다.
그 말에 눈을 부릅뜨며 종혁을 한참 동안 응시하던 버락 루터는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1억 달러를 가볍게 내는 천재의 친구가 일반적인 사람일까.
거기다 러시아다.
“내일 오전까지 모든 스케줄을 취소해 주세요.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
-헉! 후보님! 내일은 사우스다코다주에서……!
통화를 종료한 버락 루터는 종혁에게, 갑자기 거대 후원자가 된 종혁에게 빈 찻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종혁은 옅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 * *
이른 아침,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에 탄 버락 루터가 눈을 가늘게 뜬다.
‘쓴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유익했던 대화지만…….’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던 종혁과의 대화. 화술이 대단해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보좌관을 봤다.
“오늘 만난 최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봐요.”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버락 루터는 시트에 등을 묻으며 생각에 잠겼다.
‘천재. 그리고 러시아라…….’
한편 테라스에 서서 멀어지는 그의 자동차를 보던 종혁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 이 정도로 해 줬으니 좀 더 봐주겠지?”
미국 경제가 주저앉으면 미국 정부는 어떤 입장을 취할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고 분노를 집중시킬 역적을 만드는 거다.
이 사태를 불러일으킨 원흉이지만, 모든 정치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쉬이 건드릴 수 없는 월가의 괴물들이 아니라 때려죽여도 별 상관이 없는 역적을.
이 지옥 속에서 이득을 본 역적을.
거기에 권&박 홀딩스가 엮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 무조건 엮일 것이다.
그걸 막는 김에 미국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패도 얻었다.
‘이 패를 어디다 쓸지는 생각해 봐야겠지만…….’
일단은 버락 루터의 선거에 개입을 해도 좋을 것 같다.
거창하게 뭘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 때문에 어그러질 수 있는 역사 정도는 바로잡아야 할 듯싶었다.
종혁은 핸드폰을 들었다.
“예, 헨리. 기빙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 양반이 접근하게 둔 의도가 뭡니까?’
아무래도 오늘 아침 운동은 가지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