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410화>
부우웅!
모스크바의 시내를 가로지르는 차 안.
노랗고 하얀 불빛들이 스쳐 지나가는 차창을 밖을 보던 사십대의 중년인이 입술을 달싹인다.
“최종혁이 러시아에 왔다고?”
최종혁. 그들 회사와 지독한 악연인 놈.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프로젝트가 종혁에 의해 실패한 이후, 본사에선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종혁을 죽여야 한다와 아직은 아니다로 나뉘어 의견 다툼이 벌어졌고, 서로 칼을 휘두르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그런 종혁이 다시 러시아에 왔다. 그것도 자신들이 한참 공을 들이고 있는 러시아에.
“예. 이번에 러시아에서 개최되는 수사기법에 관한 포럼에 특별 강연을 하기 위해 어제 입국했다고 합니다.”
이마저도 러시아 파견 직원이 알려 준 정보였다.
몇 년 전 다단계 투자사기 프로젝트의 실패로 러시아 파견 직원이 실종되면서 러시아에 커다란 정보 공백이 생겼고, 본사는 부랴부랴 파견 직원들을 파견했다. 혹여 한 명이 사라진다고 해도 정보의 공백이 생기지 않게 여러 명을.
이 때문에 굉장히 많은 예산과 인력이 소모됐었다.
이 파견된 직원들이 물어다 준 정보에 의하면 종혁이 머무는 곳은 SVR에서 마련해 준 모스크바 외곽의 대저택.
“총경 백이도, 경감 오택수, 경장 최재수와 함께 어젯밤 저택에서만 머물렀다고 합니다.”
“왜 최종혁이 러시아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몰랐지? 아직도 외사국에 우리 쪽 사람들이 침투하지 못한 건가?”
“함경필 국장이 만만치가 않다고 합니다.”
평소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며 다니고, 소심해 보이지만 함경필 국장은 무려 10년 동안 외사국의 국장으로 있었던 존재다.
그가 모신 경찰총장만 이번 박종명 청장까지 무려 4명. 그럼에도 국장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걸 보면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 외에도 다른 무언가가 있단 소리다.
그들이 파악한 외사국은 그 어떤 외부의 침입도 불허하는 철옹성이었다.
“최기룡과 이택문의 칼춤에 의해 외사국 라인이 전부 잘려 나간 뒤 외부 수혈을 극도로 자제하며 내실을 다졌다고 합니다.”
죄다 뇌물 따위로 목이 날아가니 충격을 받은 함경필은 그때부터 부하들을 꼼꼼히 보살피기 시작했다.
이에 외사국의 과장들은 전부 함경필의 수족이 되어 버리니, 외사국에 이쪽의 사람이 들어간다고 해도 요직에 앉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최종혁쯤 되지 않고는 외사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군. 쯧. 역시 본청이라는 건가.”
참으로 허술해 보이는 게 경찰 조직인데, 의외로 빡세다.
최기룡과 이택문이 그렇게 만들어 놨다.
“본사에선 이들을 왜 제거하지 않은 건지…… 쯧. 아, 그런데 최종혁과 빅토르 로마노프 사이에 접점이 생겼다고?”
이미 그보다 훨씬 전에 러시아에 와 있던 사십대 중년인으로선 아무래도 정보의 질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영국 지부에서 말하길 런던에서 발생한 도난 사건 때문에 접점이 생겼다고 하는데…….”
그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정보가 스쳐 지나간다.
러시아에서 시뮬레이션으로 행해졌던 다단계 투자 사기 프로젝트에 연관되어 있던 빅토르 로마노프, 그리고 그의 친구 아이반 벨로프.
‘설마?’
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차장님.”
이번 바이칼호 보물선 인양 사기 프로젝트의 러시아 현지 총괄인 사십대의 중년인은 백색의 거대한, 마치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처럼 거대한 저택을 보며 혀를 찼다.
“내가 평생 벌어도 저걸 살 수 있으려나.”
“이번 프로젝트처럼 대형 프로젝트에 계속 소속될 수 있으면 언젠가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유지나 관리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문이나 열어.”
“하하!”
열린 문을 통해 차를 빠져나온 중년인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활짝 열린 저택의 문을 향해 발을 뗐다.
“차장님, 가방이요!”
“아.”
서류 가방을 받아 왼손에 든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초대장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확인됐습니다. 빅토르 님의 만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집사로 보이는 이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고, 그들의 등 뒤로 소개가 터져 나왔다.
“한국에서 오신 선유 컴퍼니의 도경수님 외 한 분께서 입장하십니다!”
잠시 그들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돌려지는 시선들.
도경수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
“여기에 다 있네.”
이 러시아의 상류층들이 말이다.
“아, 저기에 계십니다.”
도경수를 보좌하는 삼십대 사내가 로비의 한구석, 강화 플라스틱으로 감싸인 보물을 감상하는 배불뚝이 노인을 가리켰다.
그들을 이 이 파티에 출입할 수 있게 도와준 인물이자 이 저택의 주인인 빅토르 로마노프의 고향 이르쿠츠크의 거물 정치인, 올라프 다비예프.
그에게 다가간 도경수가 고개를 숙인다.
“늦었습니다, 올라프.”
“쉿.”
검지를 입에 가져간 올라프는 빅토르가 영국에서 가져온 표트르 대제의 여인, 예카테리나가 생전에 착용했다는 귀걸이와 목걸이를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경이롭지 않은가?”
러시아가 강국으로 발돋음하던 시기를 그대로 담아낸 예술품.
러시아의 사내로서 어찌 이걸 보고 가슴이 흔들리지 않을까.
“확실히 아름답군요.”
“그렇다면 자네도 러시아의 남자일세.”
껄껄 웃은 올라프는 옆에 있던 노인에게 이들을 소개했다.
“호오. 이들이 전설로만 내려오던 표트르 대제의 숨겨진 보물선을 찾는다는 멍청이들인가?”
표트르 대제가 자신의 사후에 혹여 자신이 이룩한 러시아가 무너질까 걱정되어, 어느 귀족에게 명령하여 바이칼 호수에 숨겨 두려 했던 보물.
그러나 기상이변에 의해 운반 도중 배가 좌초되며 사라졌다는 그 보물.
정사에는 기록되지 않고 야사로만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인 터라 그 보물의 존재를 실제로 믿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아니면 몽상가나 사기꾼으로 불러야 할까.”
‘멍청이. 몽상가. 사기꾼!’
마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매서운 시선에 도경수 차장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그 흔적을 찾았으니 사기꾼은 아닐 겁니다.”
“호오?”
어디 증명해 보라는 듯한 도발적인 시선에 도경수는 가방을 열어 조심스레 반이 잘린 반지 하나를 꺼냈다.
“읍?!”
노인뿐만이 아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 전부 도경수가 꺼낸 반지를 보고 헛숨을 삼켰다.
그에 도경수는 눈을 빛냈다.
사기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표트르 대제의 밀명에 의해 러시아 전역으로 흩어진 황실의 보물 중 바이칼호로 향한 약 500여 톤 상당의 보물과 금괴, 그 전설의 흔적입니다. 보시다시피 이것과 양식이 똑같죠.”
그 말에 빅토르 로마노프가 오늘의 파티를 위해 전시해 놓은 보물들과 반지를 번갈아 본 사람들은 탄식을 터뜨렸다.
“허! 그 전설이 진짜였다니!”
“미친! 올라프, 왜 이걸 말하지 않은 건가!”
“하하. 내 깜짝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도경수는 후끈 달아오르는 그들의 모습에 입술을 비틀었다.
‘됐군.’
빅토르가 영국에서 표트르 대제 시절의 보물들을 구해 오면서 더 쉬워진 이번 일.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사람들의 눈에 탐욕이 서리기 시작하자 도경수는 옆을 스쳐 지나가는 고용인이 든 쟁반에서 샴페인을 하나 가져와 입술을 축였다.
‘곧 돈이 굴러 들어오겠군.’
500여 톤 상당의 보물과 금괴. 한화로 수십조 원이다.
눈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병신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빅토르 로마노프 님과 그의 친구 최께서 입장하십니다!”
이번 파티의 호스트인 빅토르가 등장한다는 소식에 사람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입구를 바라봤다.
그리고 살짝 놀란다.
웬 동양인 남성이 러시아 재계의 거물, 빅토르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파티는 에스코트를 할 여성과 함께 들어오는 게 기본임에도 남자와 함께하는 것도 모자라, 정말로 친애하지 않는 이상 호스트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라도 한 발 물러서야 하는데도 나란히 걷는다.
사람들은 종혁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경수와 그의 부하 직원은 아니었다. 그들의 두 눈 차갑다 못해 살의가 넘실거렸다.
“친하군.”
“아무래도 회사의 추측이 맞는 것 같습니다.”
고작 망신을 당하지 않게 해 줬다는 이유만으로 옆을 내줄 수 있을까.
거만한 괴물, 빅토르 로마노프라는 사내는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종혁과 빅토르가 친분을 쌓아 왔다는 뜻.
‘아이반과 최종혁은 동일 인물이다!’
러시아에서 진행된 다단계 투자 사기.
처음에는 당시 프로젝트를 맡았던 김 대리가 돈을 빼돌린 것이라 판단했으나, 연수원을 급습한 러시아의 모습을 통해 다른 원흉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회사는 빅토르 로마노프의 소개로 무려 천만 달러나 되는 거액을 투자했던 고려계 러시아인 졸부 아이반 벨로프, 그가 그 원흉일 것이라 추측했다.
또한…… 그 아이반 벨로프가 최종혁이 아닐지 의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의심에 불과했으나, 눈앞에 보이는 종혁과 빅토르의 모습을 보자면 틀림없다는 촉이 섰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이는 종혁이 다단계 투자 사기 때부터 자신들을 알고 있었다는, 정확히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니 답은 하나다.
“제거해야지.”
그동안 본사가 무서워하던 러시아의 개입, 그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우연히 얽히는 것과 작정하고 찾아 얽히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넌 나가서 본사에 연락해. 최종혁과 아이반 벨로프가 동일 인물이 확실한 것 같다고.”
“예.”
밖으로 빠져나가는 부하 직원을 일견한 도경수는 마치 이런 파티가 익숙한지 옆을 지나는 고용인에게서 샴페인을 낚아채 입에 가져가는 종혁과 그런 종혁을 주위 사람들에게 인사시키는 빅토르를 보며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그때였다.
“아이반 벨로프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풉?!”
도경수는 안으로 들어오는 백색의 거인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건 밖으로 향하던 도경수의 부하 직원도 마찬가지였다.
* * *
“와, 씨발.”
리무진 안, 종혁의 대저택보다 최소 두 배는 커 보이는 빅토르의 대저택에 감탄을 표하던 최재수가 다급히 입을 막는다.
하지만 오택수나 백이도는 그런 최재수를 타박하지 않았다. 그들도 빅토르의 대저택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저택을 새로 산 겁니까, 빅터?”
“원하는 걸 모두 채워 넣으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커지더군요. 여긴 최의 저택이 있는 곳처럼 넓은 부지를 구매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 걸 이 모스크바 한복판에 지었다가는 저기 크램린궁에 사시는 분께서 굉장히 싫어하시겠죠.”
“으하하하핫! 아, 내리죠.”
리무진에서 내린 빅토르는 종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무대에 오르실까요, 레이디?”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내 주먹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핫!”
그들은 저택으로 향했다.
“빅토르 로마노프님과 그의 친구 최께서 입장하십니다!”
안으로 고하는 외침에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들.
놀람과 흥미가 주를 이룬 시선 속에서 동양인 두 명을 발견한 종혁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저놈들이군.’
별다른 특징 없이 평범하게 생긴 외모들.
옆을 스쳐 지나가는 고용인에게서 샴페인을 넘겨받은 종혁은 몰려드는 사람들과 인사하는 빅토르의 소개에 고개를 까딱이며 통성명을 나눴다.
“호오. 혹시 한국 범죄학의 최 아닙니까?”
“어? 절 아십니까?”
“오, 이런! 모를 리가요!”
마치 스타를 만난 소녀팬처럼 흥분하는 노년의 신사.
“모스코 대학 법학부의 일리야 페데로프입니다. 이봐, 인사들 하라고. 이 젊은 친구가 현대 수사기법의 새 지평을 연 천재니까!”
현재 범죄학계의 내로라하는 권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어린 괴물.
종혁이 만든 수사기법을 차용하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이기에 현대 범죄학계에 환생한 아인슈타인이라고도 불렸다.
“프로파일링과 행동심리학의 대가지!”
“호오. 이 친구가 누군가를 이렇게 극찬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인 것 같군요. 반갑습니다, 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인사를 건네 오자 종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오택수와 최재수, 백이도도 함께 소개시켜 줬다.
‘그나저나 대체 언제 오는 거…….’
“아이반 벨로프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입구로 돌아간 사람들이 술렁인다.
뚜벅! 뚜벅!
옆구리에 여자를 낀 채 거침없이 걸어 들어오는 거구의 사내.
사람들의 시선이 종혁에게로 향한다.
비슷하다. 아니,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입가에 샴페인 잔을 가져가며 살짝 웃은 종혁은 이내 표정을 수습하며 아이반을 빤히 응시했다.
아이반 벨로프. 원래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상속의 인물이자 종혁의 위장 신분이지만, SVR이 몇 년의 노력 끝에 현실로 끄집어 낸 존재.
그리고 나탈리아가 준비한 선물.
지금부터 시작될 사기극의 주연 배우다.
“오, 빅터! 내가 왔…….”
종혁을 발견하곤 낯빛이 딱딱하게 굳은 아이반.
마치 도플갱어라도 만난 것처럼 경멸과 분노로 두 눈이 일그러진다.
“뭐야, 이 못생긴 놈은. 빅터, 이 자식은 뭡니까?”
초장부터 시비를 거는 그의 행동에 종혁이 코웃음을 쳤다.
“뭐래.”
종혁은 빅토르를 보며 아이반을 가리켰다.
“이 마피아 새끼는 누굽니까, 빅터?”
“아하하. 최, 전에 말했죠? 당신과 똑같이 생긴 친구가 있다고. 이쪽은 아이반 벨로프라고 내 오랜…….”
“마피아? 하하. 어이, 입을 함부로 놀리면 큰일 난다고 엄마한테 배우지 못했나?”
“푸흐. 좆도 아닌 새끼가 가오를 잡네. 빅터, 내가 당신의 친구로서 충고 하나 하겠는데, 이런 껄렁한 놈은 그냥 버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렇게 언행이 방정맞은 놈은 언젠가 당신의 발목을…….”
뻐어어억!
쿠당탕!
“꺅!”
“헉!”
거의 3미터를 날아 바닥을 뒹군 종혁.
“아, 아이반! 지금 무슨 짓을…….”
주변 이들이 경악하여 소리쳤지만, 정작 사고를 친 아이반은 태연하게 시거를 물었다.
“어이, 애송이. 이렇게 처맞으니까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야.”
“티, 팀장님!”
“최 팀장!”
달려드는 오택수들을 향해 손을 들며 몸을 일으킨 종혁이 입을 오물거리다 침을 뱉어 냈다.
“퉤!”
바닥에 뱉어진 피와 그 사이에 섞인 하얀 조각들.
아이반을 보는 종혁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푸흐흐.”
눈에 불똥이 튀는 종혁.
“넌 뒈졌어.”
종혁은 아이반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