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409화 (409/837)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409화>

96. 사기의 정석

구우웅!

이제 벼가 노랗게 익어 가고 날이 선선해진 가을의 10월.

하늘을 나는 종혁의 전용기 안에서 잠에서 번뜩 깬 백이도 과장이 주위를 둘러보다 전용기를 처음 탔을 때처럼 몸을 움츠린다.

한국 경찰의 자랑이자 마스코트인 종혁이 한국을 대표해 강연을 한다는데 어찌 부서의 수장인 그가 따라오지 않을 수 있을까.

각국의 내로라하는 범죄학 교수들과 경찰 관계자들과 안면을 틀 수 있는 기회. 외사수사과의 과장으로서 무조건 참가해야 했다.

여기에 따라가서 종혁의 돈 씀씀이에 대해 알아 오라는, 그래야 종혁에게 얼마나 많은 예산을 분배할지 결정할 수 있다는 함경필 국장의 밀명도 있었다.

“최 팀장.”

“예?”

러시아 신문을 보고 있던 종혁이 고개를 들자 백이도는 눈물을 글썽였다.

“고마워.”

“갑자기요?”

“응. 갑자기지만 너무 고마워.”

‘영수 청구를 다 안 해 줘서……. 빙산의 일각만 해 줘서…….’

이 전용기를 띄우는 값만 해도 외사수사과 두 개 수사팀의 보름치 예산이다.

종혁이 비행기를 띄울 때마다 영수 처리를 했다면 외사수사과는 경찰 역사상 최초로 일개 팀의 영수 처리 때문에 망해 버린 부서가 될지 몰랐다.

백이도는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그의 생각을 눈치챈 종혁은 볼을 긁적였다.

‘여기서 놀라면 곤란한데…….’

그런 그에게 스튜어디스가 다가온다.

“최, 10분 후 모스코 상공에 진입합니다.”

“아, 고마워요. 이 와인도 더 주시고요. 입에 맞네요.”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 르 몽라셰 1978, 사색을 즐길 때 마시기에 적합한 와인이죠. 원하신다면 계속 구비해 놓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종혁은 다시 러시아 신문에 시선을 돌렸고, 가격을 묻지도 않고 구비하라는 쿨함에 작게 감탄한 백이도가 슬그머니 입을 연다.

술은 소주와 맥주가 최고라는 지론을 가진 그도 혀에 촤악촤악 감길 만큼 맛있기에 아내에게도 맛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음…… 미스? 이거 가격이 얼마나 합니까?”

“경매로밖에 구매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가격을 측정하는 건 어렵습니다만 3만 달러는 넘을 겁니다, 미스터 백.”

“컥!”

“귀국할 때 한 병 가져가세요. 곧 사모님과 결혼기념일이시잖아요. 선물로 드릴게요.”

“아, 아냐! 아냐! 나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 아냐!”

“어차피 많아요. 아, 샐리. 그냥 스트리밍 이글 카버네 쇼비뇽 1992년산으로 준비해 주세요. 무드 있는 이벤트를 할 땐 그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알겠습니다, 최.”

고개를 끄덕인 스튜어디스는 앞으로 향했고, 비행기는 곧 모스크바 외곽에 위치한 종혁의 저택에 지어진 활주로로 향했다.

떠억!

오택수가 입과 눈을 크게 벌린다. 최재수도, 백이도도 마찬가지다.

집인지 성인지조차 분간이 안 가는 거대한 저택.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저택의 앞에는 억대의 명차들이 방금 전 세차를 마친 것처럼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여, 여기가 몇 평이라고?”

“10만 평? 아마 그 정도 될걸요?”

원래는 저택을 중심으로 5만 평이었는데, 후에 땅을 더 늘렸다고 했다. 활주로도 그때 만들었기에 이제 러시아에 올 땐 이곳으로 바로 올 수가 있었다. 입국 심사도 이곳에서 해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숲엔 함부로 들어가지 마세요. 조난당하면 골치 아프니까.”

심지어 곰도 있다. 물론 애완용으로 키우는 곰이다.

“그러니까 이걸 그 훈련법 때문에…….”

“어차피 빈 땅이 많은 나라니까요.”

“야, 너 왜 국적을 안 바꾼 거냐?”

같은 생각인지 백이도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 아차 했다.

“오 경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최 팀장의 애국심이 그만큼 깊다는 거겠지! 한국 경찰로 남아 줘서 고마워, 최 팀장!”

“그래요! 나라면 무조건 바꿨을 테지만! 사랑합니다, 팀장님!”

최재수다운 대답에 피식 웃은 종혁은 저택 안으로 향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다가 종혁을 향해 인사를 하는 늙은 신사와 고용인들의 모습에 오택수들이 다시 굳는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최.”

“오랜만이에요, 유리프.”

이 저택의 관리인인 유리프. 옛 KGB의 스파이다.

“그런데 직원이 꽤 늘었네요? 성비율도 꽤 편중되어 있고.”

“부지가 넓어지고 시설이 많아져서 더 고용을 하게 됐습니다.”

“단순히 그 이유가 아닌 것 같은데…….”

마중을 나온 사용인들 전부 여성인 데다가 심지어 미녀다. 러시아인들이 미녀라 생각하는 선 굵은 미녀가 아니라 한국인이 미녀라 여기는 선이 얇은 미녀.

거기다 커리어우먼처럼 정장을 입었는데 특정 부위들이 굉장히 강조되고 있다.

‘끙. 나탈리아.’

“하하. 보드카를 준비할까요?”

“……에혀. 온천에서 마실 거예요. 바비큐도 준비해 주세요.”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뭐해요. 가요.”

“어? 어어!”

빠악!

“침은 그만 흘리고 따라와, 인마.”

“네에…….”

그렇게 방으로 안내된 종혁은 문이 닫히자마자 입술을 비틀었다.

“내 선물은 마음에 드나요, 최?”

주인 없는 방에서 시거를 피고 있던 나탈리아가 종혁에게 다가와 살포시 껴안는다.

“어휴, 진짜.”

고개를 저은 종혁의 눈빛이 돌연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겁니까?”

“맞아요.”

놈들이 본격적으로 러시아 정치인이나 바이칼 호수 인근 도시의 공무원, 부자들에게 접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종혁을 데려오다 못해 종혁이 러시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명분을 만든 거다.

그게 바로 수사기법에 관한 포럼.

너무 갑작스럽게 개최되는 포럼이라 많은 숫자가 참석할 순 없겠지만, 종혁과 나탈리아 둘에게 있어 그 부분은 별로 상관이 없었다.

“참 거침이 없더군요.”

한 번 물꼬를 트자 무섭게 아군을 늘려 가고 있다.

‘솔직히 최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놈들인지도 모를 뻔했어.’

사기꾼이나 머저리라고 여겼을 거다.

바이칼호에 숨겨진 표트르 대제의 보물선 이야기는 그저 전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대체 이 정보는 어떻게 안 건가요?”

종혁이 미리 말해 줬음에도 놈들이 활동을 시작하다 못해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야 FSB(러시아연방보안국)가 알아차릴 만큼 은밀했다.

종혁은 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나탈리아에게 건넸다.

[바이칼호 보물선 인양은 사기입니다.]

작년, 2006년 자살카페 사건 이후 은밀하게 배달된 쪽지.

종혁은 이 정보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레이더를 돌렸는데, 올 7월에야 놈들의 흔적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놈들의 움직임은 지독하리만큼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그걸 종혁보다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내부자. 그놈들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겠죠.”

작금의 상황을 토대로 고민해 보았을 때 나오는 답은 그것뿐이었다.

“호오. 재밌네요.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거네요.”

집에 바퀴벌레가 나왔다면 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백 마리가 있다는 말이 있다.

즉, 어쩌면 이번에 쪽지를 전달한 인물 외에도 조직에 불만을 품은 또 다른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단순히 내부 항쟁이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적의 내부에 균열이 생길수록 빈틈이 만들어질 터.

종혁에겐 나쁠 거 하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우리에겐 나쁠 게 없죠.”

“후후.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기쁜 마음에 선물을 하나 준비해 봤는데…….”

“여기서 더요?”

싱긋 웃은 나탈리아는 손가락을 튕겼고, 이내 화장실 쪽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사내를 본 종혁은 눈을 부릅떴다.

“어때요. 마음에 드나요?”

“……죽이네요.”

종혁과 나탈리아는 서로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건 꽤 사악한 웃음이었다.

*   *   *

모스크바 붉은 광장 근처의 한 거대한 컨벤션 센터.

10월이 되면서 날이 살벌하게 추워지다 보니 수사기법에 관한 포럼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옷이 두텁다.

“오, 최!”

“교수님!”

미국 범죄학계의 권위자 안드레 교수, 그가 웃으며 종혁을 향해 다가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늘 프랑스에서 범죄학 포럼이 열리며, 안드레 교수는 그곳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째서 이곳 러시아에 있는 것인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최가 수사기법의 미래에 대해 강연을 한다는데 만사를 제쳐 두고 와야죠.”

종혁은 대체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 그것이 몹시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이런…….”

“왜 그러죠?”

“교수님께서 참석하실 줄 알았다면 더 위트 있는 멘트를 준비할 걸 그랬네요.”

“으하하하하핫!”

“아, 이쪽은 제 상사이신 백이도 총경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팀원들이고요.”

“범죄학의 권위자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한민국 경찰청 외사국 외사수사과의 과장 백이도입니다.”

“오. 최의 상사라면 범상치 않은 분이겠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스터 백. 그리고 골치 아픈 상사를 만난 것에 애도를 표합니다, 최의 팀원들.”

“아하하. 최재수입니다.”

“최!”

“아, 교수님!”

영국 범죄학계의 권위자 해리 가드너 교수. 그를 일견한 안드레 교수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진다.

“왔군, 해리. 영국의 날씨는 오늘도 안녕하나?”

“자네의 그 쓸 일 없는 작은 땅콩처럼 언제나 안녕하지.”

미국 출신의 범죄학계 권위자 안드레 교수.

영국 출신의 범죄학계 권위자 가드너 교수.

각기 자유분방과 고지식의 나라 대표인 둘은 옛날부터 앙숙이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종혁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 양반들 또 이러네.’

“오오, 최!”

“앙리 씨!”

프랑스 내무부 산하 국가 경찰 사법경찰국(Direction centrale de la Police judiciaire. DCPJ)의 앙리.

계급은 한국으로 치면 경무관에 해당하는 고위 간부다.

그뿐만이 아니다. 종혁을 발견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크으! 최 팀장!’

마치 뽕을 맞은 듯 황홀한 기분.

‘얘가 제 부하입니다! 세상 사람들! 이렇게 대단한 최 팀장이 내 부하라고요!’

백이도는 진심 가득한 웃음을 터트리며 세계 각국의 인사들과 안면을 터갔다.

그리고 이내 곧 4일 동안 개최되는 수사기법에 관한 포럼이 시작되었다.

“이상으로 우리에게 프로파일링과 행동심리학이란 영감을 주신 신과 이 두 개를 아름답게 조형해 세상에 내놓은 최에게 감사를 표하며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짝짝짝짝짝짝!

장장 8시간, 총 6명의 발표가 끝나자 모두 기지개를 켜며 일어선다.

“후. 범죄 수법이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는 게 몸소 느껴지는군요.”

“이젠 따라가는 게 벅찰 정도입니다.”

안드레와 가드너의 말에 종혁뿐만 아니라 주위의 저명한 인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이 많아지니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우발적인 범죄를 제외한 모든 범죄는 창작이다.

어떻게 하면 남을 속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걸리지 않을 수 있을까.

범죄자들은 그 수법을 끊임없이 궁리하고, 또 궁리해 경찰들을 한 발 앞서려고 한다.

그리고 이 수법이라는 건 결국은 그 범죄자가 가진 지식, 정보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것.

문제는 이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불과 10년 전과 비교하여 최소 30배는 많아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바로 인터넷 때문이다.

범죄자들은 인터넷을 통하여 과거 범죄 수법을 보완하여 몇 배 더 완벽한 범죄를 저지른다. 아니면 그를 기반으로 아예 새로운 범죄를 발명해 내든가.

‘곧 등장할 피싱 사기처럼.’

이미 일본을 뒤흔들고 있는 피싱 사기.

한국에도 상륙하기까지 몇 년 남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는 버겁다는 수준이 아니라 쫓아가는 게 불가능한 수준까지 진화할지도 모릅니다.”

종혁의 무거운 말에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그만큼 우리도 연구하고, 또 연구해야겠죠. 또 앞서 나가야 합니다.”

종혁의 그 말에 움찔 몸을 굳힌 안드레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에 관한 것이겠군요. 최가 내일 발표할 수사기법의 미래는.”

“제가 말했던가요? 난 정말 눈치 빠른 사람들이 싫습니다.”

“으하하하하하!”

“크크크크!”

“자, 그럼 굳은 허리도 풀 겸 맥주나 마시러 가시죠!”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 긍정을 표했지만, 종혁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맥주는 아무래도 내일 마셔야 할 듯하네요. 선약이 있거든요.”

“선약?”

“예. 아주 중요한 선약이죠.”

순간 차가워졌던 종혁의 눈이 다시 미소를 지었지만, 그걸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이런. 아쉽군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주십시오.”

“내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최.”

“하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모두 모스코에서의 첫날밤을 즐겁게 즐기시길.”

작게 목례를 하며 도로로 나선 종혁은 때마침 도착하는 리무진을 보며 발을 멈춰 세웠다.

“오, 최! 나의 친구!”

“빅터!”

종혁을 와락 껴안은 드바 로마노프의 회장, 빅토르 로마노프는 그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악역이 등장하기로 했습니다. 준비됐습니까?”

“언제든.”

종혁의 입술이 차갑게 비틀린다.

그리고 잠시 후 저녁.

종혁의 저택보다 더 거대한 빅토르의 저택.

파티가 열리는 그곳에 새하얀 슈트를 입은 거구의 사내가 두꺼운 시거를 문 채 느릿한 걸음으로 들어선다.

“아이반 벨로프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입구에서 들리는 외침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오택수와 최재수, 백이도는 경악을 하며 종혁과 아이반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에 종혁은 보드카를 홀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장대한 사기극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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