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393화 (393/837)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393화>

철렁!

죽는다. 정말 죽는다.

소년은 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마치 거인이 움켜쥔 듯 목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 때문이 아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빛.

저건 사람을 죽여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빈민간에 살며 저런 눈을 여러 차례 봐 왔던 소년은 그의 말이 단순한 공갈이 아님을 알았다.

소년은 황급히 품을 더듬더듬 뒤졌다.

“여, 여기요.”

“……그래, 잘했다.”

대견하다는 듯 웃어 준 종혁은 소년의 머리를 후려쳤다.

빠악!

“아악!”

머리를 움켜쥐며 주저앉은 소년은 억울한 표정으로 종혁을 봤고, 그런 소년을 일견한 종혁은 주춤거리며 소년의 주위로 몰려드는 아이들을 살폈다.

얼마나 못 먹고 못 씻은 건지 깡마르고 꾀죄죄한 아이들.

이 어린 것들이 오죽 먹고살기 힘들면 도둑질을 하게 됐을까.

그 생각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이게 한다.

‘에라이.’

“쯧. 따라와.”

“예?”

종혁은 의아해하는 소년을 무시하며 근처의 마트로 향했고, 당황한 소년들은 우물쭈물하며 종혁의 뒤를 따랐다.

“어서……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양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가 종혁의 얼굴을 보곤 대번에 낯빛을 굳히는 늙은 마트 주인, 아니 철사나 못 따위 등 이것저것이 다 있는 잡화점 주인.

‘진짜 여기서 뭔 짓을 한 거냐, 새끼들아.’

두려움이 아니라 적개심이 잡화점 주인의 얼굴에 가득하다. 한국인에게 유감이 많다는 소리다.

종혁은 어쩔 수 없이 린치가 마련해 준 가짜 신분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는데, 그보다 자말이 먼저 나섰다.

“불쾌하군요. 내 남편의 아버지는 아프간인이고, 어머니는 태국계 미국인이에요. 사는 곳은 미국이며, 우리나라에서 청금석과 보석을 사다가 미국에 파는 사업가이기도 하죠!”

당당하게 외치는 그녀의 모습에 종혁은 살짝 놀랐고, 자말은 그런 종혁을 향해 윙크를 했다.

‘휘유.’

“……어흠흠. 태국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외탁을 많이 했나 보군요.”

얼굴을 붉힌 잡화점 주인은 괜히 뒤 따라온 소년에게 버럭했다.

“내가 언젠가 이렇게 당할 줄 알았다, 하밀! 이 망아지 같은 꼬맹이!”

움찔!

“됐으니까 여기 이거나 받으세요.”

잡화점 주인은 종혁이 내미는 지폐 뭉치에 깜짝 놀랐다.

아프가니도 아닌 100달러 지폐들.

“앞으로 이 애들이 오면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달마다 돈을 붙일 테니 계좌번호도 적어 주시고.”

“억?!”

“뭐해. 먹고 싶은 거 고르지 않고. 아니면 여기 주인아저씨만 공돈 버는 거다.”

“흐, 흩어져!”

“으응!”

아이들은 다급히 작고 허름한 잡화점 안으로 흩어져 닥치는 대로 품에 끌어안기 시작했고, 자말은 킬킬 웃는 종혁을 기이하다는 듯 응시했다.

“오늘 못 사면 내일 사도 되니까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가져와라!”

푸다닥!

마구잡이로 끌어안던 것들을 내려놓는 아이들의 모습에 다시 웃은 종혁은 서늘한 눈으로 잡화점 주인을 봤다.

“사장님, 내 돈 꿀꺽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혹시 모르기에 종혁은 허리춤 홀더에 꽂아 놓은 린치가 준 권총을 보여 줬고, 잡화점 주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매달 2천 달러면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을 터. 이곳 아프간에서 매달 2천 달러면 인생을 고칠 수 있는 돈이었다.

“여, 여기요!”

“이거 담아 주세요!”

종혁은 눈이 돌아간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이후 근처 약국과 정육점에서도 똑같은 행동을 한 종혁.

“안녕히 가세요-!”

늙은 약사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약국을 나온 종혁은 하밀이라는 소년을 봤다.

“왜? 뭐? 왜 도와주냐고?”

“아, 아니…….”

자신들에게 왜 이러는 걸까.

자신들은 주머니를 털려고 했던 도둑들인데. 거기다 종혁은 방금 전에 자신을 죽이려고 했었는데.

종혁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하밀을 바라보며 계속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찰칵! 치이익!

“아저씨도 이런 곳에서 자랐거든.”

흠칫!

깜짝 놀라 종혁을 보는 소년과 아이들.

자말도 놀라 종혁을 본다.

“너희처럼 언제나 못 입고, 못 먹고…….”

종혁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년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심장에 주먹을 가져다 댔다.

“꼬마야, 사람이 좆같고, 나라가 좆같고, 세상이 좆같은 게 아니다. 네가 스스로를 그렇게 속이는 거지.”

쿵!

작지만 큰 울림.

“죽을 것같이 힘들어도 이 악물고 부딪쳐 봐.”

“……그, 그럼 당신처럼 될 수 있어요?”

“글쎄? 내가 워낙 잘나야 말이지.”

“그게 뭐예요…….”

“뭐긴 뭐야. 대가리 터지도록 부딪쳐 보라는 거지. 세상이 깨지든 네 대가리가 깨지든. 뭐든 일단 한 번 부딪쳐 볼 가치는 있잖아?”

소년과 아이들의 머리를 헤집은 종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간다.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또 보자.”

소년과 아이들은 멀어지는 종혁을 멍하니 응시했고, 자말은 후련해하는 종혁을 보며 우물쭈물해 했다.

“그런 과거가 있는 줄 몰랐어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능숙한 한국어. 그녀는 영어와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인재였다.

“아, 그거요? 구란데요?”

“예?”

“푸하핫. 야, 이번 건 좀 더 그럴듯했다?”

“그렇죠? 어려서 없이 살아서 그러나? 아! 야, 최재수. 받아.”

지갑을 던진 종혁은 냅다 최재수의 머리를 후려쳤다.

“아아악!”

“형사란 새끼가 저런 꼬맹이한테 주머니나 털리고 말이야. 너 이거 한국이었으면 시말서 썼어. 알아?”

“죄, 죄송합니다!”

“야, 더 때려. 몇 대 더 때려.”

“이 씨…….”

“씨? 씨이?”

어제의 공항에서처럼 다시 투닥거리는 그들.

자말은 격의가 없는 그들의 모습을 기이하다는 듯 응시했다.

“그런데 정말 이대로 가는 건가요?”

정말 이대로 베풀고만 가는 걸까.

“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들은 종혁은 혀를 찼다.

“국정원과 CIA, 이 동네 정보기관에다 경찰들이 싹 다 뒤집어 놨을 건데 저런 꼬마들에게 물어봐서 뭐해요.”

이미 놈들의 진입 경로와 퇴주로 정도는 알아냈을 그들. 이런 상황에서 괜히 물어보는 건 종혁 본인이 아프간에 있다는 걸 광고하는 꼴밖에 안 된다.

그랬다간 장기 출장을 승인한 함경필 국장이 피를 본다.

“거기다 시선들도 무쟈게 느껴지고.”

흠칫!

“……알고 계셨나요?”

종혁은 싱긋 웃었다.

“범인은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 그건 경찰에게도 통용되는 말입니다.”

지금 느껴지는 시선들 중 경계와 적개심이 어린 시선을 제외한 다른 시선들은 모두 정보기관, 혹여 놈들이 다시 나타날까 정보기관에서 박아 둔 요원들일 게 분명했다.

‘어쩌면 협력자들일 수 있고.’

“그럼 이제 뭘 하시려는 거죠?”

“일단 여기서 할 일은 없으니…….”

“택시 드라이버.”

종혁과 오택수, 자말의 시선이 최재수를 향해 모인다.

“맞죠?”

짜악!

“악! 왜, 왜 때려요!”

“기특해서 그런다, 인마. 기특해서. 햐, 이 자식 언제 형사 되나 했는데…….”

오택수의 감탄에 종혁도 동감이라는 듯 웃는다. 이젠 제법 머리가 돌아가고 있다.

종혁은 의아해하는 자말에게 입을 열었다.

“왜 하필 그 택시기사였을까요.”

놈들은 대체 그 택시기사가 교회를 다닌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우연이든 뭐든 알았다고 해도…….

고작해야 이틀이다. 새벽의 등불이 달란트를 목표물로 삼은 후 통역사 무함드를 달란트에 붙이기 위해 택시기사를 협박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그것도 하루 온종일 밖에서 일하는 택시기사를 협박해서 말이죠.”

“아!”

종혁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너무 놀라는 척하지 맙시다.”

움찔!

“……들켰나요?”

“내가 생각한 걸 정보기관이 떠올리지 못했을 리 없잖습니까. 밥 먹고 사람 뒤나 약점 파는 것만 연구하는 사람들이.”

정답이다. 이미 그 택시기사에게는 아프간, 미국, 한국의 정보기관 요원들이 붙어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풀썩 웃은 자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종혁은 역시 정보기관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제 어떡할 건가요?”

만약 택시기사의 뒤를 쫓는다면 종혁은 국정원의 감시망에 걸릴 거다. 그럼 강제 출국이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합니까. 서포트해야지.”

강제 출국을 당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짓.

이런 거라도 해야 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네?”

종혁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귀를 기울이는 김오철 목사를 봤다.

“목사님.”

“아! 예, 예!”

“이 동네 사람들도 잔치 좋아합니까?”

“……예?”

*   *   *

터벅터벅.

할랄푸드 마크가 찍힌 음식이나 약 등을 양손 가득 든 채 집으로 향하는 소년, 하밀이 생각에 잠겨 있다.

‘세상에 부딪쳐라. 날 속이지 마라.’

해 주는 거 없이 훈계만 늘어놓는 어른의 잔소리가 아닌 가슴에 와닿는 말.

‘세상에…… 세상을 향해…….’

하밀의 생각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하밀 형.”

고개를 돌린 하밀은 미소를 지었다.

“핫산.”

근처에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작은 소년 핫산.

며칠 전 누구에게 얻어맞은 건지 얼굴을 비롯한 온몸 여기저기가 멍과 딱지투성이다.

“몸은 좀 괜찮아? 열은 내렸어?”

하밀은 핫사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으응. 괜찮아. 그런데 한탕 한 거야? 부럽다…….”

“부럽긴. 이제 안 할 거야.”

“응? 왜?”

종혁처럼 되고 싶어서다.

이런 곳에서 살았음에도 그렇게 성공한 종혁. 심지어 아리따운 부인이 스스럼없이 발언을 하는데도 애정으로 바라봐 주는 그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다.

하지만 이걸 말하기에는 좀 부끄러웠다.

“아, 아무튼 그럴 거야! 그보다 아주머니는 괜찮으셔?”

“응! 기침이 많이 줄었어!”

어젯밤엔 겨우 두 번밖에 깨지 않았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아주머니 약도 사 왔으니까.”

하밀은 놀라는 핫산을 데리고 핫산의 집으로 향했다.

“콜록! 하밀 왔니?”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기침은 좀 괜찮으세요?”

“하밀이 걱정해 줘서 좀 나아졌단다. 어머니는 괜찮으시니? 태어난 아이는?”

얼마 전 출산을 한 이후 그 후유증에 힘들어하는 하밀의 어머니. 하밀은 그저 어색하게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휴. 출산한 산모는 잘 먹어야 하는데……. 아버지에게 말해 보는 게 어떠니? 택시 일을 하시니까 고기 한 덩이 정도는 살 수 있잖니.”

움찔!

아버지. 어느 순간 가족을 내팽개친 증오스런 이름.

미간을 좁힌 하밀은 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건 아주머니 약이에요.”

“하밀! 너 또……!”

“아, 아니에요. 어떤 분께서 사 주신 거예요. 신께 맹세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조심하렴.”

핫산의 어머니는 하밀이 든 봉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핫산을 힐끔 보곤 말을 이었다.

“이 동네엔 이교의 동정을 받았다고 못된 짓을 하는 사람도 있거든.”

“괜찮아요. 그분은 우리나라 사람이거든요.”

“……그럼 다행이구나. 고맙다. 잘 먹을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뭘요. 저희가 힘들 때 아주머니가 해 주신 게 얼마나 많은데요.”

몇 년 전 아버지가 갑자기 돌변하며 가정을 돌보지 않게 된 이후 힘들어졌던 가족들.

다른 이들이 모두 외면할 때 오로지 하루 종일 일해야 겨우 하루 빌어먹는 빨래일을 하는 핫산의 어머니만 자신들을 도왔다. 자신들보다 훨씬 힘들게 사는 핫산의 어머니만이.

그 은혜를 이제야 갚을 수 있단 생각에 활짝 웃은 핫산은 들고 온 물건의 반절을 부엌 여기저기에 밀어 넣었다.

“그럼 가 볼게요. 나오지 마세요.”

일어나려는 핫산의 어머니를 말린 하밀은 집을 나섰고, 핫산은 그런 하밀의 뒤를 쫓았다.

“고마워, 형.”

“됐어. 그런데 대체 어떤 개자식한테 그렇게 맞은 거야?”

대체 누구에게 맞은 건지 아무리 물어도 여태껏 대답을 하지 않았던 핫산.

“……전사.”

“탈레반?”

끄덕.

“……또?”

또 탈레반.

탈레반은 왜 계속 자신들과 얽히는 걸까.

“이름은?”

“파미르.”

철렁!

“파, 파미르?”

“응. 파미르라고 했어. 혀, 형! 하지 마. 그 전사들 엄청 무서운 사람들이야!”

“아, 아니…….”

왜 하필 파미르라는 이름일까.

그 순간이었다.

“여보! 얼른 나와!”

“알리! 얼른 나오렴, 알리!”

갑자기 부산해지는 빈민가에 놀라 눈을 껌뻑이는 하밀과 핫산.

“어, 어떤 부자가 공터에서 잔치를 연대! 의사들도 불렀대! 어서 나와!”

‘어떤 부자? 설마……?’

하밀은 다급히 빈민가의 입구 쪽을 바라봤다.

종혁과 만나고 헤어졌던 그곳을.

*   *   *

언제나 굶주리는 게 일상인 빈민가에 커다란 솥들이 걸리고, 한쪽에선 고기가 구워진다.

생김새만 다를 뿐 한국의 시골 잔치 풍경과 다를 게 없는 모습.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이곳에도 웃음이 있네요.”

종혁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이,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최 팀장!

“오, 역시 들켰네. 뭐긴 뭡니까. 내 나름대로 민심을 다스려 보겠다는 거지.”

-미쳤어? 지금 상황 몰라?!

“아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이 동네 민심 가라앉히지 않고도 그 택시기사가 빈민가에서 뭘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

택시기사가 일할 때야 감시가 수월할 거다.

하지만 퇴근 후에는?

외부인이 나타나면 바로 알아차리는 게 이런 폐쇄적인 동네의 특징이다. 저들의 감시에는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하는 짓이니까 이해해 줘요. 씨발. 뭐라도 해야지. 곧 외지인이 돌아다녀도 아무렇지 않아 할 환경을 만들 테니 그냥 지켜나 봐요.”

-……하아. 출국 기록을 보니 어제 들어온 것 같은데 어디서 잔 겁니까?

“아, 그게…….”

“오, 해리!”

-리, 린치? 옆에 그 사람 카불 지부장 맞죠?!

“끊습니다.”

종혁은 활짝 웃으며 린치의 손을 붙잡았다.

“왔어요? 무리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하하. 아닙니다.”

종혁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챘기에 린치는 웃을 수 있었다.

“아, 이쪽 분이?”

“인사해요. 아흐메트 씨입니다. 아프간에서 꽤 유명한 외과의시죠.”

TV에 몇 번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외과의 아흐메트.

그러다 3년 전 돌연 퇴직해 아프간 전역을 돌아다니며 의료 봉사를 하는 의인이다. 마침 카불에 있기에 요청을 했는데 역시나 의인답게 망설이지 않고 응해 줬다.

놀란 종혁은 의사 가운을 입은 노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아닙니다. 그런데…… 혹시 한국인이십니까?”

종혁은 살짝 놀랐다.

‘외국인은 동양인을 잘 구분하지 못할 텐데?’

“조모님께서 한국인이십니다.”

“그러셨군요…….”

“음?”

“아닙니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럼.”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은 아흐메트는 몰려든 사람들을 주욱 둘러보곤 뒤따라온 의사들을 향해 일갈했다.

“뭣들해!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잖아!”

“예!”

의사들은 우르르 사람들을 향해 몰려갔고, 종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네.”

“아들을 폭탄 테러로 잃은 이후 의료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 저런…….”

대체 이놈의 전쟁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성이 차는 걸까.

참 지랄 맞았다.

“아, 아저씨 한국인이셨어요?”

어느새 다가온 하밀이 떨리는 눈으로 응시한다.

“왔냐? 내가 한국인인 게 아니라, 조모님이 한국인이라고. 그보다 옆에 계신 분은 어머니? ……누가 어머니셔?”

하밀의 뒤엔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꼬마는 몰골이 왜 그렇고. 네가 때렸냐? 이 자식이 형이라고 동생을 저렇게까지 때리고…….”

“아니거든요!”

“후후. 오는 길에 이야기 들었습니다. 저희 아이가 큰 실례를 끼쳤다죠?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저도 덕분에 약을 먹을 수 있었어요. 감사해요. 이 아이는 핫산이고요.”

“아닙니다. 앞으로만 안 그러면 되죠. 그런데…… 산후 후유증이 심하시네요.”

굉장히 부은 얼굴과 손. 살이 찐 게 아니라 붓기가 빠지지 않은 거다. 아마 땡기고 쑤셔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거다.

“어머?”

“이쪽으로 오시죠. 아드님도요.”

종혁은 그들을 아흐메트 앞으로 안내했다.

진료를 할 준비를 하느라 바쁜 그들.

“아흐메트 씨, 이분들부터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 이런. 어서 앉으십시오! 아이르! 와서 도와라!”

“예!”

여의사가 달려오자 종혁은 그제야 물러나 린치를 봤다.

“상주할 의사들은 대기시켰죠?”

“후후. 역시 그런 의도였군요. 걱정 마십시오. 이미 준비해 놨습니다.”

이제 CIA가 준비한 의사, 아니 의료 지식을 갖춘 요원이나 현지 협력자들이 이 빈민가를 누비며 택시기사를 감시하게 될 거다.

‘택시기사가 새벽의 등불과 상관이 없다면 그저 시간 낭비만 하는 것이지만…….’

이런 거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저…… 아저씨.”

“왜? 아니 그보다 저 꼬맹이는 누구한테 맞은 거냐? 설마…….”

가정폭력.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종혁의 눈이 서늘해진다.

“아, 아니에요. 그리고 그,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는데…….”

“뭔데?”

“아저씨는 우리나라에서 보석을 사다가 파신다고 했잖아요. 그럼 높은 사람들과도 어울리겠네요?”

“뭐 그렇지?”

종혁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약간 서글펐다. 이런 어린아이가 어째서 어른들의 사정을 아는 걸까.

“그럼…….”

하밀이 입술을 깨물며 갓난아기 막냇동생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여의사에게 아픈 곳을 말하는 어머니. 그러며 막냇동생부터 진찰해 달라고 말하는 어머니.

그리고 칭얼거리는 동생들.

“탈레반에 빠진 사람을 알려 주면 아저씨에게 도움이 될까요?”

“탈레반?”

종혁의 눈빛이 진지해진다.

갑자기 탈레반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걸까.

“……누군데?”

하밀은 이를 악물었다.

말을 꺼낸 이상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종혁이 언제까지 돌봐 줄지는 모르지만, 3개월만 도와줘도 하밀 본인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다.

‘그럼 아버지는 더 이상 없어도 돼!’

탈레반의 사상에 빠져 가족을 등한시하는 아버지는, 탈레반과 얽힌 것만으로도 극형을 받는 이 나라에서 탈레반을 따르며 가족을 위험에 빠트리는 아버지는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엄마랑 동생들을 위해서야!’

결단을 내린 하밀은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요. 그리고 파미르라는 남자요.”

쿠웅!

“뭐?”

우당탕!

“선생님!”

아버지란 말에 화들짝 놀랐던 종혁은 갑자기 넘어진 아흐메트를 의아한 눈으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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