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386화>
빅토르와 헤프너 남작이 은밀한 회담을 나눈 다음 날 정오.
런던경찰청 근처의 펍엔 사람들이 가득하다. 사건이 모두 해결되며 해산된 수사본부의 경찰들과 경찰청장까지 모였기 때문이다.
“건배!”
채재쟁!
허공에서 부딪치는 맥주병들.
그와 함께 경찰들의 얼굴에 서린 후련한 미소도 짙어진다.
방금 전 기자회견을 끝으로 수사본부 해산을 외친 그들.
비록 훔쳐진 보물 중 20퍼센트의 행방은 찾을 수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어딘가. 영국 최고의 경찰청, 런던경찰청의 체면은 지켰다.
앞으로 따로 전담반을 꾸려 콜린 패거리를 감시하다보면 곧 뭐가 나와도 나올 터.
물론 이것만 아니었다면 근사한 곳에서 찐한 회식을 했을 텐데 하지 못해서 좀 아쉽기는 했다.
런던경찰청장은 이번 수사의 주역이었던 종혁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수사본부의 해산이 늦어지는 바람에 최의 복귀도 늦어진 게 아닌가 싶군요.”
“오늘 저녁에 비행기를 타면 문제없습니다. 내일까지만 도착하면 되거든요. 저희 국장님이 그 정도 융통성은 있으셔서요.”
“하하핫! 그렇습니까? 좋은 상사군요. 저희 런던경찰청에도 그런 상사들이 많은데…….”
“아하하.”
경찰청장은 어색하게 웃는 종혁을, 아니 오택수와 최재수까지 응시하며 눈을 빛냈다.
옆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가드너 교수와 맞먹는 추리력을 가진 종혁과 발로 뛰는 수사가 뭔지 제대로 알려 준 오택수, 최재수.
‘이 팀이 우리 런던경찰청에 온다면 어떨까.’
아마 더 이상 범인을 찾지 못해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욕심이겠지.’
타국에 와서 이런 능력을 보이는 형사인데, 자기 나라인 한국에선 얼마나 날아다닐까.
혹시나 해서 조사해 봤더니 이력도 어마어마하다. 영국 나이로 고작 25살 어린 나이에 중간 간부의 끄트머리, 고위 간부를 앞에 두고 있다.
한국 경찰들도 종혁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단 소리다.
‘타국 경찰이 부러워진 적은 처음이군.’
“아, 몇 시 비행기로 예약하셨습니까?”
“9시 비행기입니다.”
“그렇습니까? 꽤 늦게 출발하시는군요.”
종혁은 미소를 지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함께 싸운 전우끼리 흠뻑 취할 시간 정도는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하하하핫……! 정말 욕심이 나는군요, 욕심이 나!”
테이블 치며 좋아하던 경찰청장은 돌연 낯빛을 굳혔다.
“취소하세요.”
“예?”
“영국인은 결코 은혜를 잊지 않죠. 저희가 항공편을 잡아 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있지만 종혁에게 줄 선물 때문이다.
비록 20퍼센트의 보물은 회수하지 못했지만, 런던 경찰의 체면을 지켜 준 종혁을 위한 선물.
그것들을 실기 위해선 꽤 많은 좌석이 필요했다.
“아, 아니 그러실 필요는…….”
이제 와서 전용기를 타고 왔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
“부탁드리겠습니다.”
“끙…….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전용기는 주인을 태우지 않은 채 돌려보내야 할 것 같다.
종혁은 쓴웃음을 흘리곤 벽에 달린 TV를 힐끔 봤다.
‘슬슬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아, 축구를 보시는군요. 축구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예? 아, 예. 한국 선수가 맨유라는 곳에 뛴다고 하니 좀 관심이 가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진성이는 잘 있나 모르겠네.’
방콕 아시안게임과 시드니 올림픽에서 여러 종목 국가대표들과 두루두루 친해지다 보니 그들을 통해 알게 된 박진성, 캡틴 박. 같은 나이라서 빨리 친해지게 되었다.
“오, 그러고 보니 팍이 한국 선수였죠! 마침 경기도 맨유와의 경기…… 음?”
TV를 보던 경찰청장이 갑작스런 특보에 미간을 좁힌다.
“기자…… 회견?”
그것도 헤프너 남작의 긴급 기자회견이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든 경찰청장은 맥주병을 내려놓으며 TV를 뚫어져라 쳐다봤고, 그건 다른 경찰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종혁과 오택수, 최재수, 가드너만이 여유로울 뿐이었다.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매달린 그들.
‘오, 화면발 좀 받는데?’
종혁은 헤프너의 옆에 선 빅토르를 보며 눈을 빛냈다.
-큼. 바쁜 시간임에도 이렇게 많은 분들께서 찾아 주셔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정중한 인사로 시작된 헤프너의 말.
뒤이어 폭탄이 떨어졌다.
-기자분들께는 미리 전달한 것처럼 본 헤프너 남작가는 더 이상 헤프너 박물관의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현 시간부로 헤프너 박물관의 소유권 및 소유물에 관한 권리를 여기 드바 로마노프의 회장인 빅토르 로마노프 씨에게 이양하기로 하였습니다.
쿠웅!
기자회견장뿐만 아니라 펍에도 떨어진 폭탄.
“뭐?!”
“미친!”
지금 듣고 있는 말이 정말인 걸까.
환청은 아닌 걸까.
그들이 혼란에 휩싸인 사이에도 헤프너의 말은 계속 되었다.
-마지막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박물관의 보물을 찾아 주시느라 애쓴 런던경찰청의 노고에 깊은 감사와 찬사를 올립니다. 그럼…….
-무, 무슨……! 헤, 헤프너 남작님!
-잠깐만요, 남작님!
너무도 경악스런 말에 아비규환이 된 기자회견장.
그러나 펍은 지독할 정도의 침묵에 휩싸여 있다.
“야, 이 개자식아-!”
경찰청장은 자신들의 노고를 똥통에 처박아 버린 헤프너의 만행에 결국 분노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저 이 개새끼가……!”
“빌어먹을-!”
펍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푸후우. 미안합니다. 내가 정말 할 말이 없어요.”
해가 저물어 가는 늦은 오후.
경찰청장이 종혁의 옷자락을 잡고 또다시 사과를 한다. 그건 이번 수사본부의 본부장과 다른 경찰들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합니다. 영국 경찰이 정말 미안합니다.”
“미안해, 최. 진짜 면목이 없다.”
술을 잘 마시다가도 종혁과 눈이 마주치면 다가와 사과를 건네는 그들.
술이 사람을 잡아먹은 거다. 안주도 없이 술을 들이켰으니 인사불성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어이구.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곧 있으면 빅토르에게 가야 하는데, 술을 좀 깼으면 싶었다.
‘이걸 어떻게 끌고 가야 하려나…….’
헤프너 남작이 범인이라고 말할 수만 있었어도 술을 못 마시게 했을 테지만, 이 안에 헤프너의 쁘락지가 있을지도 몰랐다.
심지어 그게 눈앞의 청장이라고 해도 말이다.
“진짜 미안합니…… 아니 사람이 이러면 안 되지! 어떻게 범인을 잡은 지 고작 이틀 만에 보물들을 포기하는데! 우리가 그걸 어떻게 회수했는데-!”
하루에 두세 시간 쪽잠을 나눠 자면서 해결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인이, 그것도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경찰이 씻지 못해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 러시아 사업가도 그래! 판다고 그걸 넙죽 받아?! 빌어먹을! 돈이면 다냐, 이 개자식아! 앞으로 드바 로마노프 물건은 안 사!”
“옳소! 나도 드바 로마노프 안 산다!”
“청장님이 옳은 말씀을 하는구만! 나도 동참!”
삽시간에 일어난 불매의 물결.
눈을 빛낸 종혁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이구, 드바 로마노프 회장과 헤프너 남작에게 불만이 많으신가 봐요.”
“최는 안 그렇습니까!? 화도 안 나요?!”
“당연히 저도 화가 나죠. 그러니 우리…… 따지러 갈까요?”
“……예?”
“아니, 저 보물에 우리의 지분도 있잖습니까. 우리가 찾아 줬는데. 안 그래요?”
억지지만 그래도 속은 후련한 말이었다.
“푸하하핫! 그럽시다! 따지러 갑시다! 본부장!”
“예! 다들 가자! 돌격 앞으로!”
“오케이! 2차 갑시다, 2차!”
형사들이 벌떡 일어나자 종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됐네.’
종혁들과 형사들은 우르르 펍을 빠져나가 거리를 걷기 시작했고, 서로 어깨동무를 한 그들의 입에서 곧 응원하는 축구 구단의 응원가들이 흘러나왔다.
축구 시즌 중에는 서로가 원수지만, 오늘만큼은 동료.
그들은 앞장서는 종혁을 따라 런던 거리를 가로지르며 목청을 높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힘들어져 술이 깨기 시작한 그들은 종혁을 보며 의아해했다.
멀어도 너무 멀다.
“최,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이젠 최도 출국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런데…… 따지자면서요?”
“예? 아니, 그건 그냥 말이…….”
“따지려면 따져야죠. 그래야 직성이 풀릴 텐데. 그리고 다 왔습니다.”
“……?”
사람들은 코앞에 있는 호텔을 가리키는 종혁의 행동에 어리둥절해했고, 종혁은 핸드폰을 들었다.
“예, 빅토르. 저희 왔습니다. 지금 올라갈게요.”
“헉?!”
종혁은 경악하는 경찰들을 보며 싱긋 웃었다.
“갑시다.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러.”
이제 사건을 끝낼 시간이었다.
* * *
드르르르!
한 손에 캐리어를 든 헤프너 남작이 호텔 로비를 가로지른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그린 그.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캐리어를 넘기는 순간 4천만 달러가 손에 들어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럼 당장 내일부터 수첩에 써 놓은 물품들을 살 수 있을 터.
엘리베이터에 오른 헤프너는 거울에 비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체통 없이 웃음을 터트려 버릴 것 같기에.
띵! 스르릉!
“크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곧바로 보이는 펜트하우스의 커다란 문 앞에 서 손을 들었다.
쿵쿵쿵!
“누구십니까?”
“휴이 헤프너 남작이오.”
스윽.
조금 열린 문을 통해 헤프너를 확인한 빅토르의 경호원은 곧 문을 활짝 열었다.
“로마노프 회장은?”
“이쪽으로.”
‘쯧…….’
마치 무기질을 응시하는 듯한 불쾌한 시선에 얼굴을 구기면서도 따라간 헤프너는 이내 넓은 풀에서 여자들과 알몸으로 뒹굴고 있는 빅토르를 발견하곤 이를 악물었다.
‘이 야만인이 정말!’
“꺄르르르!”
“호호호!”
“오, 왔나? 잠깐 놀고 있으라고, 아가씨들.”
“빨리 와요!”
“자, 이쪽으로 가지.”
여자들과 진한 키스를 나눈 빅토르는 가운을 걸치며 한쪽 방으로 향했고, 헤프너는 마치 더러운 것을 외면하듯 여성들을 일견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그들이 몸이 돌리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여성들의 모습을 말이다.
그렇게 방으로 들어온 빅토르는 어서 펼쳐 보라는 듯 테이블을 가리켰고, 헤프너는 그 위에 조심스럽게 캐리어를 올렸다.
달칵! 달칵!
잠금장치가 풀리자마자 열리며 화려한 속살을 드러낸 캐리어.
금과 은과 보석의 향연.
“……호오오.”
헤프너는 됐냐는 시선을 보내곤 캐리어를 닫았다.
그에 살짝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신 빅토르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게 전부겠지? 아니라면 꽤 재밌어질 거야.”
“……크흠. 걱정 마시오. 우리 진짜 귀족은 누구와 다르게 약속은 꼭 지키니까!”
“푸하핫! 그래, 그것참 대단하군. 그러면 거래를 시작하지.”
소파에 앉은 빅토르는 서류를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당신의 부탁대로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회사야.”
한 박물관에 헤프너가의 가보를 매도한다는 내용의, 회수하지 못했다고 알려진 20퍼센트의 보물이 헤프너가의 가보로 둔갑되어 있는 매매 계약서.
이게 헤프너가 꾸민 스토리였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은데.”
“자금의 출처를 밝혀야 하기에 어쩔 수 없소.”
그래야 돈을 맘대로 쓰지 않겠는가.
‘박물관을 팔아 버렸으니 왕실이 가만있지 않겠지.’
소유한 것을 파는 건 개인의 자유지만, 그게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보물들이라면 말이 좀 달라진다. 개중엔 옛 영국의 왕비나 현재는 몰락하고 없는 왕실 방계 귀족가의 가보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영국의 보물들. 그렇기에 영국 왕실은 매 분기마다 왕실에 귀속시켜 달라고 귀찮게 굴었다.
아마 당분간은 꽤 고깝게 볼 거다.
‘사업들에도 약간의 제동이 걸리겠지.’
세무 조사는 기본일 것이고, 1파운드 하나 쓰는 것조차 감시할 것이다.
“귀찮게들 사는구만. 뭐, 나야 보물이 늘어나니 다행이지만.”
고개를 저은 빅토르는 소파 옆에 놓인 캐리어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쿠웅!
“당신이 원하는 대로 반은 수표, 반은 현금. 확인해 봐.”
달칵! 달칵!
‘흡!’
눈에 콱 틀어박히는 달러의 향연과 콧속을 훅 파고드는 돈 냄새에 순간 눈앞이 아찔해진 헤프너 남작.
빅토르는 그런 그의 모습에 시거를 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찾아낸 거지? 경찰들도 오리무중이던데 말이야.”
“다 방법이 있소.”
마치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성의 없이 대하는 그의 모습에 빅토르는 입술을 비틀었다.
“흐음. 역시 자작극이었나?”
움찔!
휙 고개를 든 헤프너는 떨리는 눈으로 빅토르를 봤고, 빅토르는 피식 웃었다.
“왜 이래 선수끼리. 거래도 다 끝났으니 말해 줄 수도 있잖아? 응?”
씨익.
“그렇게 티가 났는지 몰랐군. 바보 같은 영국 경찰들은 다 모르던데 말이야. 이런 걸 보면 역시 태생은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뒷골목 쓰레기통이나 뒤지던 시궁창 하층민들.”
거래가 모두 끝나니 본래의 말투로 돌아온 헤프너 남작.
“그럼 이 아름답고 고귀하며 영광 된 나라에서 부디 품위라는 것을 배우고 가길 바라지, 올데가르히.”
빠직!
‘후후후.’
드디어 한 방 먹였다.
속이 후련해진 헤프너가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어?”
문 앞에 도열해 이쪽을 죽일 듯 노려보는 취객들.
아니, 경찰이다. 경찰청장이다.
“네, 네가 여길 어떻게…….”
“더 이상 못참겠다, 이 개자식아!”
빠아아악!
“으악!”
코를 부여잡고 나뒹구는 헤프너 남작.
성큼성큼 다가온 경찰청장은 그런 그의 몸을 뒤집어 깔아뭉개며 수갑을 빼 들었고, 헤프너 남작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상황을 파악하곤 절망했다.
‘아, 안 돼!’
이제 넘치는 돈 속에서 헤엄치는 일만 남았는데 잡힌다니? 그럴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됐다.
하지만 경찰청장은 매정했다.
“휴이 헤프너! 당신을 사기…….”
“놔! 놔라, 이 하층민들아! 내가 누군지 아느냐! 놔아아!”
빠아악!
“누구긴 누구야 범죄자지, 이 개자식아.”
‘휘유.’
손속에 자비가 없는 런던경찰청장의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두른 종혁은 자신의 억지에 어울려 준 빅토르를 향해 감사의 뜻을 담아 엄지를 치켜들었고, 빅토르는 피식 웃으며 시가를 길게 빨았다.
‘역시 최와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