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379화>
93. 가지 마라
영국 런던의 히드로 국제공항.
백인, 흑인, 황인, 수많은 인종들이 세련되면서도 묵직한 느낌의 공항으로 들어가고 또 빠져나오며 웅성웅성 소음을 일으킨다.
개중에는 어머니 김복순을 버린 아들 부부도 있다.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산 버버리 코트를 입은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초조한 얼굴로 주위를 경계하며 공항 밖으로 향한다. 그러곤 나서자마자 기둥에 숨는다.
1분, 2분.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그들의 입가에 돌연 미소가 피어오른다.
“경찰은…… 안 오는 것 같죠?”
무슨 일인지 입국 심사가 1시간가량 딜레이되어 초조했던 그들.
“거봐, 내가 뭐랬어. 어머니는 그런 거 할 줄 모른다니까.”
그리고 의도치 않게 놓고 간 건지, 아니면 버린 건지도 확실치 않을 테니 경찰도 개입할 수 없을 터.
더욱이 한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지 않은 영국이다.
혹여 의도적으로 버렸다는 게 발각되어도 한국 경찰은 잡으러 올 수가 없었다.
이 계획을 세우며 참 많은 걸 조사한 그들 부부는 그제야 가슴과 어깨를 펴며 서로 팔짱을 꼈다.
“그럼 갈까요? 버스 승강장이…… 어머?”
아내는 줄줄이 늘어서 있는 클래식한 검정색의 택시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국의 모범택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영국의 고급택시 블랙캡이다.
“와아, 역시 영국. 택시마저 감성이 다르구나. 여보, 우리 저거 타요!”
“흠…… 그럴까?”
한국에선 검은색 택시는 죄다 모범택시라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봤던 남편은 이내 다른 택시를 찾지 못해 난처해하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수중에 20억이 넘는 돈이 있는데 그런 푼돈이 문제겠는가.
그중 대부분이 주택 매매와 가게 매매 대금으로 쓰일 테지만, 이 정도 사치는 충분히 부릴 수 있었다.
이곳이 블랙캡만 정차할 수 있는 승강장임을 모르는 그들은 보무도 당당히, 마치 런던에 몇 번이나 놀러 온 사람처럼 느긋이 택시에 오르며 입을 열었다.
“메리어트호텔로 가 주세요.”
“What?”
순간 얼굴이 빨개지는 남편.
“큼. 메리어트호텔.”
“오, 메리어트. 그러죠. 그럼 운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을 태운 운전기사는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고, 잠시 후 삼십대의 백인 사내 두 명이 헐레벌떡 그들이 있었던 자리로 뛰어왔다.
“빌어먹을!”
땅을 찬 한 사내는 얼른 핸드폰을 들었다.
“놓쳤습니다!”
-야! 지금 뭐하는 거야! 교수님이 특별히 부탁한 놈들이라고! 정신 안 차려?!
“그, 그래도 블랙캡을 탄 것 같습니다!”
-……블랙캡? 그 더럽게 비싼 택시를?
블랙캡과 일반 택시는 탑승할 수 있는 층이 나뉘어져 있을 만큼 가격도 천양지차였다.
“혹시 모르니까 탐문부터 해 보겠습니다.”
-아니면 CCTV를 뒤져서라도 쫓아!
“예, 안 그래도 그럴 겁니다.”
-뭐 이 자식아?!
통화를 종료한 사내는 대기 중인 블랙캡의 운전석을 두드리며 경찰공무원증을 보여 주었다.
“경찰입니다. 사건 때문에 그러는데 방금 전 한 동양인 부부가 여기서 블랙캡을 타지 않았습니까?”
“내 앞 블랙캡이 동양인 부부를 태우긴 했소만…….”
“호, 혹시 쫓을 수 있겠습니까?!”
고급택시답게 손님들의 개인정보에 굉장히 민감해 웬만해선 협조를 구할 수 없는 블랙캡.
사내는, 아니 경찰은 재빨리 사정을 설명했다.
그에 불같이 화를 내는 블랙캡 기사.
“뭐요? 부모를 버려?! 이 장어젤리보다 못한 새끼들 같으니!”
멍청하고 무식하며 교양이 없는 첼시 훌리건들조차도 상종을 안 할 악마들.
“타시오! 하, 어젯밤 꿈에 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났나 했더니 오늘 제임스 본드가 되기 위해서였나 보군요!”
“감사합니다! 야, 뭐해! 얼른 타!”
“예!”
백인 경찰들을 태운 블랙캡이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갔다.
* * *
-아니, 최 팀장. 갑자기 출장을 신청하면 어떡해. 인천공항에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막 나가는 부하 직원에 눈앞이 뒷목이 뻣뻣해지는 함경필 국장.
그럼에도 다그치기가 힘드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아, 그게 말입니다…….”
종혁은 사정을 설명했고, 잠시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진다.
-……최 팀장.
평소의 함경필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하고 살벌한 어투.
-살려서만 데려와.
씨익.
“충성.”
‘할 땐 해 주시는 분이군.’
“4일 내로 복귀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국장님. 과장님께는 제가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래그래. 내 최 팀장만 믿어? 아, 그런데 그…… 영국에도 지인이 있었어?
조심스럽고도 살짝 욕심이 서려 있는 물음에 종혁은 슬그머니 웃었다.
“예. 해리 가드너 교수라고 옥스퍼드 대학의…….”
-프, 프로페서 가드너? 여, 영국 범죄학의 권위자이신?!
“어? 아세요?”
-모를 리가 있나!
해리 가드너. 콧대 높은 영국의 수사기관들, 아니 인터폴조차도 난해한 사건이 있으면 자문을 구할 정도로 범죄학계의 권위자인 교수다.
그것도 미국의 안드레 교수와 함께 무려 세계 전체를 놓고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학계의 권위자.
-그분과는 어떻게?!
“예전에 범죄수사 기법에 관한 포럼에서 인연이 맺게 된 분이십니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어떤 사건을 해결하면서 능력을 입증한 이후 각국과 교류를 하다 인연을 맺게 됐다.
-아이고!
“왜 그러십니까?”
-……아냐, 아냐. 이제야 좀 최 팀장의 스타일을 알았다고 할까.
너무도 크고 소중한 인연을 범죄자 한 명을 잡기 위해 썼다. 냉정하게 보자면 너무도 손해인 일을 한 거다.
하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종혁이 제대로 된 경찰 같아서.
수화기 너머 함경필 국장의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잘 다녀오고. 비행기값이나 교통비, 체류비 등 모든 경비와 나머지 조치는 내가 다 처리해 줄 테니 최 팀장은 영수증이랑 범인만 잘 데려와!
종혁이 외사국에 와서 처음으로 가는 출장이다. 외사국으로서의 가오를 보여 줘야 할 터.
함경필 국장은 종혁과 오택수, 최재수가 비즈니스 왕복 티켓을 끊었다고 해도 용인해 줄 수 있었다.
그런 그의 호언장담에 종혁은 볼을 긁적였다.
“어…….”
-아, 아니야. 그러지 마. 비, 비즈니스지? 퍼스트 아니지?
‘아뇨. 전용기인데요.’
종혁은 자신의 전용기 안을 둘러봤다.
자가용 비행기로 유명한 걸프스트림의 모델이라 그리 크지 않은 공간.
“음. 예. 국장님 마음은 잘 알았으니까 전액 영수 처리를 하겠습니다.”
-잠깐, 최 팀장? 최 팀장!
종혁은 냉큼 통화를 종료했고, 그러다 못해 핸드폰 배터리를 빼 버렸다.
“뭐래?”
“경비는 모두 처리해 줄 테니 범인만 잘 잡아 오래요.”
“……네 경비를?”
“와, 외사국이 돈이 많나 보네요. 팀장님 이거 한번 띄우는 데 얼마나 들어요?”
“글쎄…… 한 5천?”
“미친! 진짜요?”
“아마?”
딱히 연료값을 생각하고 타는 게 아니라서 잘은 모른다.
그에 오택수와 최재수는 혀를 내둘렀다.
“이걸 경비로 처리해 준다고? 히야…… 왜 외사국, 외사국 하는지 이젠 좀 알 것 같네.”
“저도요.”
오택수와 마찬가지로 감탄을 하던 최재수는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종혁을 봤다.
한 번 띄우는 데 5천만 원. 그 무지막지한 액수가 그를 절로 움츠리게 했다. 자칫 소파에 기스라도 났다가는 장기라도 팔아야 할 것 같은 기분.
“저…… 팀장님?”
“저기 미니바에 술이나 간식거리 있으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마음껏 먹어.”
“저, 정말요?! 그래도 돼요?”
“여기에 있는 게 전부 내 건데 무슨 상관이야.”
다 먹는다고 해도 다시 채워 넣으면 그만이다.
“따뜻한 음식 먹고 싶으면 저기 승무원에게 말하고.”
“와 씨.”
이런 게 부자의 위엄인 걸까.
갑자기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빛나기 시작한 종혁을 멍하니 쳐다보던 최재수는 벌떡 몸을 일으켰고, 오택수도 슬그머니 일어섰다.
오는 길에 봤던 미니바에 진열되어 있던 고급 양주와 와인 냉장고. 나름 애주가로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종혁은 그런 그들을 보며 피식 웃고는 뒤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런던 히드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앞으로 11시간.
‘일단 인천공항에서 고쳐야 할 점이…….’
진정한 상사는 부하 직원들이 놀 때 곁에서 일하지 않는 법.
종혁은 인천공항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갑자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안개비에 습기가 높아진 히드로공항.
슈트를 입은 종혁이 한 손에 우산을 든 채 나아가다 누군가를 발견하곤 활짝 웃는다.
중후하면서도 매끈한 라인의 슈트와 중절모, 한 손에 검은색 우산을 들고 있는 갈매기 수염의 70대 노인.
“해리 교수님!”
해리 가드너. 별명은 모리아티 교수.
학생들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그런 불명예스런 별명이 붙었다.
“오, 나의 어린 천재여. 드디어 이렇게 만나게 됐군요.”
“하하. 그러게요. 거의 영상통화로만 이야기했었죠?”
둘은 서로의 눈을 뜨겁게 응시하며 악수를 나눴다.
“그것도 벌써 몇 년 전입니다.”
종혁이 경찰대를 졸업하고 나서는 전화나 메일로만 안부를 주고받았다.
갑자기 해리 교수의 눈에 서글픔이 서린다.
“이젠 연구를 하지 않는 겁니까?”
현재 전 세계 수사기관들이 열렬히 받아들이다 못해 그걸 바탕으로 각 나라의 실정에 맞게 개조하는 수사 기법을 창시하고, 수사 기법의 새 지평을 열어젖힌 종혁.
해리 교수는 그 엄청난 재능이 범인을 쫓느라 묻히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사건이 바쁘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그래도 그런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논문을 하나 쓰고 있으니 기대해 주셔도 됩니다. 이를테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최첨단 수사 기법의 방향성이랄까요?”
올해 미국에서 나온 스마트폰다운 스마트폰을 이용한 수사 기법.
“오!”
“그래서 그런데 논문이 완성되면 검토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런 부탁이라면 백 번, 천 번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 이쪽은 제 팀원들입니다. 이쪽이 오택수, 이쪽이 최재수.”
“반갑습니다, 교수님.”
“나, 나이스 미 투, 썰!”
“하하. 모두 베테랑의 느낌이 물씬 나는군요. 그리고 최의 팀원들답게 옷을 입는 센스도 훌륭해요.”
과하지도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은 클래식한 슈트와 옥스퍼드 구두, 단정한 헤어스타일은 영국 신사의 포인트를 제대로 짚어 내고 있었다.
물론 최고는 종혁이다.
완벽한 영국 스타일의 맞춤 핏. 자신을 위해 예의를 차렸다는 것이 물씬 전해져 왔기에 가드너 교수는 감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종혁은 그런 그의 얼굴을 살피다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살짝 흐트러진 헤어스타일.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영국 신사답지 않은 모습이다.
움찔!
“으음. 일단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죠. 최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테니까요.”
그 말에 순간 종혁의 몸에서 냉기가 뿜어진다.
“곧바로 공항을 빠져나왔다고요?”
“CCTV 확인 결과, 입국 심사대를 지나치자마자 멈추지 않고 블랙캡 승강장으로 향하더군요. 그 걸음과 몸짓에선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가드너 교수가 판단하기에 마치 1초라도 빨리 공항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항공사나 대사관이 아니라 호텔. 문의해 본 결과, 어젯밤 저녁에 그곳에서 만찬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대사관이 아니라 런던의 명물, 시계탑인 빅벤을 구경했다.
“그렇습니까…….”
혹시나 정말 백억분의 하나라도 어쩌다 깜빡하고 김복순 할머니와 승운이를 놓고 갔다는 가능성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그 새끼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종혁의 목에서 사나운 짐승이 울었다.
* * *
영국의 이민국 앞.
김복순 할머니의 아들이 한인 변호사와 악수를 나눈다.
“영국에 체류할 자격을 얻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미스터 노.”
불끈!
“큼.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겠죠?”
아직 영주권을 얻은 게 아니라서 약간 걱정이 든다.
“예. 두 분의 이민 방식은 솔렙이기에 영국 정부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겁니다. 아니, 백 퍼센트라고 할까요?”
변호사면서 이민 브로커이기도 한 그.
솔렙 비자는 어떤 회사가 영국에 지사를 설립할 때 본사의 직원을 영국에 보내기 위해 발급받는 비자인데, 이 비자를 소지한 사람은 영국에서 사업을 할 수도 있고 본사의 영국 지사를 운영할 수도 있다.
다른 비지니스 비자와 달리 현지인을 고용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서 인기가 많은 영국 이민, 영국 영주권 신청 방법인데, 한인 변호사는 여러 가지 편법을 써서 이걸 가능케 하고 있었다.
해외에서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고 장부를 조작해 그럴듯한 회사로 꾸며 영국에 진출하는 방식. 한인 변호사는 이런 페이퍼 컴퍼니를 수없이 가지고 있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들 부부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자 한인 변호사는 옅게 웃었다.
“그럼 두 분께서 운영하실 곳과 거주하실 곳을 살피러 가보죠.”
이 한인 변호사가 소유하고 있는 수많은 페이퍼 컴퍼니들 가운데 하나는 이제 곧 그의 이름이 달리게 될 거다.
‘내 가게! 내 집!’
“어, 얼른 가죠!”
“너무 재촉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유롭게. 앞으로 영국에 사시려면 배워야 할 단어입니다.”
“아, 하하. 그런가요?”
아들 부부는 속으로 굉장히 잰 척을 한다며 구시렁거렸지만, 지금으로선 매달릴 수밖에 없기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의 기색을 알아차린 변호사는 가소롭다는 듯 콧대를 세우며 차를 주차한 곳을 가리켰다.
“후후, 그럼 가시죠.”
그렇게 그들은 이민국을 벗어났고, 곧 몇 대의 차량이 그들의 뒤를 느긋이 쫓았다.
“오!”
런던의 한인타운 외곽.
외곽이란 것에 눈살을 찌푸리며 가게로 들어왔던 아들 부부는 제법 넓은 매장의 크기에 탄성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 계시던 분이 크게 성공을 하셔서 런던의 제일 큰 번화가로 진출을 하시며 나온 매물로, 단언컨대 미스터 노가 제시한 금액대에서 이만한 매물은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특히나 거주지까지 함께 딸려 있는 매물은! 아, 치킨 사업을 하신다고 했던가요?”
아들 부부, 아니 노정봉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옛날 회사원 시절, 비즈니스 때문에 와 봤던 런던 출장.
그때 알게 됐다. 영국의 음식 맛은 지독히도 맛이 없다는 걸.
노정봉은 거기서 성공의 가능성을 읽었다.
‘한국 치킨. 그거라면 무조건 통한다!’
고소하고 바삭하면서도 감칠맛이 휘돌아야 될 튀김조차도 눅눅하고 밍밍하고 느끼함 그 자체였던 영국 음식. 또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던 영국 사람들.
이런 끔찍한 동네에서 고소하고 바삭하며 짭짤하기까지 한 한국 치킨이라면 센세이션을 일으킬 터.
이미 한국에서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다가 크게 말아먹은 적이 있는 노정봉은 성공의 단꿈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치킨. 영국인이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죠. 그럼 거주 공간을 확인하러 가 보실까요?”
“그, 그러시죠!”
흥분을 감추지 못한 노정봉 부부는 재빨리 건물의 이 층으로 향했다.
“어머머머머!”
따뜻한 파스텔톤의 벽지를 더 따뜻하게 만드는 햇빛.
한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인테리어에 노정봉의 아내가 흥분을 한다. 거기다 방은 무려 세 개고, 화장실이 2개나 있다.
바로크풍 화장대와 세련된 주방까지 확인한 노정봉의 아내는 다급히 노정봉을 봤다.
“여보!”
아내의 눈에 서린 뜨거운 감정에 고개를 끄덕인 노정봉은 얼른 입을 열었다.
“여기로 계약하죠!”
“흠. 다른 매물도 있는데…….”
이 매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허름하고 작지만 런던의 제일 큰 번화가에 있는 매물도 있고, 이곳 한인타운의 중심에 있는 매물도 있다.
“아니요! 음식이 맛있으면 손님은 알아서 찾아오는 법이죠! 이걸로 합시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이쪽으로.”
이마저도 편법인 이중 계약서.
그러나 노정봉은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일필휘지로 사인을 했고, 변호사는 노정봉에게 악수를 청했다.
“영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부디 성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잔금은 일주일 안에 넣어 주시길. 그럼…….”
“고맙습니다! 조심히 들어 가십쇼!”
한인 변호사를 배웅하고 돌아온 노정봉은 다시 집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여보…….”
그런 그에게 눈물이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다가오는 아내.
노정봉은 그런 아내를 꼭 끌어안았다.
“그동안 고생했어.”
다 늙은 노총각과 결혼했으면 공주처럼 떠받들어져 살아야 함에도 맨날 손에 물을 묻힐 수밖에 없었던 아내. 그러다 겨우 성공하나 싶더니 일이 어긋나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던 아내.
그 외에도 어머니 김복순의 비위를 맞추고, 주위 시선 때문에 낳은 정도 생기지 않는 승운을 키우느라 참 고생 했더랬다.
“킁. 이제라도 알면 됐어요. 그보다 이제 이 집이 우리 거란 말이죠?!”
“그럼. 여기뿐만 아니라 1층 가게까지 모두 우리 거지.”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었다.
“이제 한국에서의 그 찌질했던 인생은 모두 잊고 새로 시작하는 거야. 조금만 고생하면 곧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테니 우리 조금만 노력하자. 그래 줄 수 있지?”
“치이. 내가 언제는 노력 안 했나?”
“하하! 아니지! 우리 자기는 언제나 노력했지! 낮에도. 밤에도…….”
순간 음흉해진 노정봉의 눈과 손이 아내의 가슴을 훑는다.
“아이, 참. 아직 낮인데…….”
아내는 노정봉을 살짝 밀쳐 냈지만, 그 힘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미소가 더 음흉해진 노정봉은 그녀의 허리를 확 끌어안았고, 아내도 못이기는 척 그의 품에 안겼다.
그렇게 둘의 입술이 서로를 탐하기 위해 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쿵쿵쿵!
‘어떤 놈이!’
“하. 잠깐 있어 봐. 아무래도 변호사 같으니까.”
“알았어. 얼른 다녀와.”
혀를 찬 노정봉은 문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으며 구겨진 얼굴을 폈다.
“어이구, 변호사님. 뭘 놓고…….”
노정봉은 눈앞에 드리워진 거대한 벽에 눈을 껌뻑이며 의아해했다.
“누구?”
거대한 벽, 아니 종혁은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보며 씩 웃었다.
“한국 경찰.”
“……씨발!”
다급히 몸을 돌리는 노정봉.
종혁은 그런 그의 머리채를 콱 낚아챘다.
“어디 가니, 씨발아.”
종혁의 주먹이 노정봉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