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378화 (378/837)
  •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378화>

    전라남도 해남, 땅끝 어느 작은 마을의 주택이 새벽녘부터 시끄럽다.

    “와아아아!”

    대체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건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8살 소년.

    “할므니, 얼른 씻어요! 빨리!”

    “어이구. 알았다, 알았어.”

    도심보다 기상이 빠른 시골임에도 그보다 더 빨리 일어난 팔십대 노년의 여성은 손자의 재촉에 푸근히 웃으며 하나뿐인 아들을 본다.

    손자는 할 일을 했다는 듯 ‘엄마’라고 외치며 화장실로 달려간다.

    37살 늦은 나이에 겨우 결혼한 하나뿐인 늦둥이 아들. 먼저 낳은 자식들 다 비명에 보내고 이제 이놈 하나만 남았다.

    참 모든 게 늦었던 올해 44살의 아들도 손자의 보챔 때문에 일찍 일어나 얼굴에 잠이 한가득이다.

    “정말 이래도 되나 모르겄다.”

    노인의 말에 순간 표정이 굳은 중년인이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또 왜 이러세요. 다 합의된 거잖아요.”

    “하지만…….”

    “어머니.”

    움찔!

    “저희 이민 가면 다신 한국 못 와요. 그럼 어머니 혼자 한국에 계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래도…….”

    “승운이도 못 보는데?”

    움찔!

    할머니의 시선이 엄마가 언제 다 씻나 화장실 앞을 서성이는 승운에게로 향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승운.

    그녀의 눈이 흔들리자 남자의 미소가 푸근해진다.

    “그럴 바에는 어머니도 함께 가셔서 우리 승운이랑 함께 사시는 게 낫잖아요. 그리고 어머니가 도움을 주시면 저흰 더 빨리 정착할 수 있을 거고요.”

    할머니는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아들의 손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어휴. 알았어야. 그냥 조금이라도 뭘 남기고 가야 혹여 일이 잘못됐을 때 돌아와 먹고살 수 있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말을 해 본 거여.”

    작년부터 시작된 아들의 이민 권유.

    처음엔 곧 죽을 나이에 뭔 이민이냐고, 너희들끼리만 가라고 했지만 방금과 같은 이유로 계속 설득을 하니 결국 승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소와 고구마밭, 그리고 이 집까지 모두 팔아 이민 자금을 마련한 할머니.

    그러나 떠날 날이 와서 그럴까. 그녀의 마음에 온갖 걱정이 휘몰아친다.

    혹여 자리 잡는 데 실패하는 건 아닐지.

    한국도 아닌 먼 타지에서 배척을 당하는 건 아닐지.

    말은 통할지.

    험한 꼴을 당하는 건 아닐지.

    오만 걱정에 뜬 눈으로 날을 샌 그녀다.

    “테레비 보믄 막 살인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던디…….”

    “아이고, 저흰 그런 동네 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저희가 갈 곳은 LA의 한인타운이라고 한국인들만 모여 사는 곳이에요. 그리고 돌아오긴 뭘 돌아와요. 설사 이 돈 모두 날려 버린다고 해도, 아니 엄마가 어떻게 번 돈인데 이걸 날려요? 그럼 혀 빼물고 죽어야지!”

    “……어휴. 알았다, 알았어. 거도 사람 사는 곳인디 빌어먹을 곳 없겄냐. 늙은 년이 노파심에 한 소리 한 것잉께 잊어버려야. 통장이랑 돈은 다 챙겼제?”

    “예, 어머니. 저기 가방에 넣어 놨으니까 걱정 마세요.”

    신발장 앞에 덩그러니 놓인 가방 두 개.

    가져갈 짐은 저게 전부다.

    가서 사면 된다고, 가져가 봤자 짐만 된다고 해서 간단하게 꾸린 짐. 이 집에 있는 것들은, 지난 세월의 추억이 서려 있는 물건들이나 옷은 곧 마을 사람들이 가져갈 것이다.

    “그래도 한번 점검혀 봐.”

    “넣어 놨다니까요?”

    “지금 늙은 애미라고 괄시하는 겨?!”

    “아이고. 예, 예. 우리 여사님이 하시라면 해야죠.”

    아들은 기내에 들고 탈 가방을 뒤지는 척했고,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만 통하믄 어쩌코롬 해 볼 수 있을 것인디…….’

    불과 16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시댁의 온갖 구박을 버티면 살아온 세월이 얼마던가.

    자식들 잡아먹은 년, 지아비 잡아먹은 년.

    아주 지랄 염병이었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버티며 적지 않은 재산을 일군 그녀.

    남편이 남긴 재산이 좀 있긴 했지만, 4만 평이 넘는 고구마밭을 일군 건 오로지 그녀의 수완이었다.

    그런 그녀이기에 말만 통한다면 얼마든 잘살 자신이 있었다.

    “……머님! 어머님! 씻으셔야죠!”

    할머니의 시선이 수건을 머리에 돌돌 만 채 화장실에서 나오는 젊은 여성에게로 향한다.

    올해 서른세 살인 젊고 어린 며느리.

    늦둥이 시골 노총각 아들을 구원해 준 고맙고도 예쁜 며느리다.

    “어서 오세요! 제가 씻겨 드릴게요!”

    “음마! 돼, 됐어야. 됐어. 남사시럽게 뭘 같이…….”

    “그래도 한국에서 마지막 날이잖아요. 제가 씻기게 해 주세요.”

    어쩜 이렇게 하는 말도, 행동도 고울까.

    말년에 너무 큰 호사를 누리는 것 같다.

    할머니는 다가와 손을 꼭 잡으며 제발 하게 해 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며느리의 모습에 못 이기는 척 일어섰다.

    “아따, 이 나이에 씻김 당하믄 벌써부터 벽에 똥칠하냐고 욕하는디…….”

    “흥! 며느리가 시어머니 씻겨 드릴 수도 있는 거죠! 다 부러워서 하는 말이니까 무시하세요. 그리고 목욕탕 가면 제가 다 밀어 드리잖아요. 자, 어서 일어나세요.”

    “그래요, 할므니! 얼른 일어나세요! 얼른요, 얼른!”

    “어이구, 알았다. 알았어. 아따 이 써글놈. 니 할미 넘어져야!”

    할머니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이제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이용할 고향 집의 화장실을.

    그렇게 깨끗하고 씻고, 꽃단장을 한 채 집을 나선 그녀는 대문 앞에서 동네 친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는 겨?”

    “그려, 가.”

    살짝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다 늙어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들이 할머니의 아들 내외를 본다.

    번듯하게 정장과 원피스를 입고, 깔끔한 새 옷을 입은 손자의 손을 잡은 아들 내외.

    명절에나 볼 수 있는 귀티 나는 옷차림들이다.

    “씨부럴. 진짜 가네.”

    “크흠. 얼마 전에 인사혔응께 더 말해 봤자 먼 길 가는 사람 발목만 잡겄제. 잘 가드라고. 가서 뒈지면 연락하고. 오는 덴 순서 있어도 가는 덴 순서 없는 거 알제?”

    꼭 한마디씩 더해 욕을 버는 친구.

    그러나 마지막까지 목청 높여 싸울 수 없으니 할머니는 입술을 비튼다.

    “알았어. 니도 관 짜면 연락혀.”

    “씨부럴거. 내가 오빠랑께 그러네!”

    “그려, 그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의 살벌한 농담에 어색하게 웃은 아들 내외는 할머니를 재촉했고, 그녀는 아들 내외가 렌트한 차에 오르며 정든 고향을 떠났다.

    시집을 오며 고향이 되어 버린 고향을.

    *   *   *

    웅성웅성.

    떠나는 사람들과 들어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인천공항 안으로 할머니의 가족들이 들어선다.

    “우와아아!”

    너무도 많은 사람들과 높다랗고 거대한 공항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손자. 할머니는 그런 손자 승운의 손을 꼭 잡는다.

    “어디 가냐, 이놈아. 그러다 길 잃으면 어쩌려고. 딱 이 할미 옆에 있어야.”

    “응!”

    “응이 아니고, 네.”

    “네, 할므니!”

    “그려, 예쁘다.”

    승운의 얼굴을 거친 손으로 쓸어내린 할머니는 아들 내외를 봤다.

    “늦진 않은 겨?”

    “예. 시간은 충분해요.”

    걱정 말라는 듯 푸근히 웃어 주는 아들 부부.

    “아, 저흰 발권하러 다녀올 테니까 어머니는 승운이랑 여기 계세요. 발권하면 밥 먹으러 가요.”

    “그려, 그려. 얼른 다녀와.”

    아들 부부는 할머니의 짐이 든 가방을 내려놓고는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아들 부부.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다시 미소가 피어난다.

    방금 전과는 다른 미소가…….

    “자기, 어머님 재산 봤어? 나 아직도 안 믿겨.”

    “나도 놀랐어.”

    자산을 모두 정리하니 거의 20억에 가까웠던 재산.

    ‘고작 소랑 논밭만 팔았을 뿐인데…….’

    어머니가 알부자인 건 알았지만, 자산을 모두 처분했을 때 그들은 놀라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그중 압권은 은행에 든 펀드 상품과 따로 구매한 주식이었다.

    4억이 펀드 상품에 묶여 있었고, 8억이 삼전전자와 대현자동차에 나뉘어 있었다.

    삼전전자와 대현자동차를 처음 샀을 때를 찾아보니 1989년도.

    당시 돈으로 2천만원 씩 넣어 놨던 게 8억이 되어 버린 거다.

    펀드 상품도 93년도에 5천만 원 넣어 놨던 게 4억이 됐다.

    한국에 IMF가 터지며 사방에서 대기업들이 도산하는 가운데에도 그녀가 산 종목들은 나날이 우상향.

    “아니, 이런 돈이 있었다면 자기 사업 자금이나 줄 것이지! 쫄딱 망했을 때도 돈 없다, 돈 없다 하셔 놓고!”

    그때 2억만 있었어도 사업이 망하진 않았을 거다.

    “그럼 이런 짓도 하지 않았을 거 아냐!”

    흠칫!

    아들의 몸이 굳는다.

    순간 가슴을 찌른 칼날에 잠시 굳었다가 이내 고개를 털은 아들.

    “……됐어.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해. 어머니도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다잖아.”

    이번에 자산을 정리하다가 알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도 이런 게 있었냐며 깜짝 놀랐었다.

    “뭐야. 이 순간까지도 어머님 편을 드는 거야?!”

    “이제 곧 영원히 헤어질 사람한테 신경 쓰지 말라는 거야.”

    흠칫!

    “……호호. 그렇지?”

    히죽 웃은 그녀는 아들의 팔짱을 끼며 가슴을 뭉갠다.

    “자기야, 나 영국에 도착하면…….”

    “일단 집이랑 가게 잔금 치르는 것부터. 쇼핑은 그 이후야. 솔직히 이 돈도 아슬아슬해.”

    할머니의 재산이 20억이 넘는 걸 알게 된 후 더 큰 곳과 계약한 그들.

    “사모님 소리 안 들을 거야?”

    “칫. 알았어.”

    “그보다 넌 어떤데?”

    그녀가 데려온 아들 승운.

    승운은 둘의 온전한 자식이 아니었다.

    “몰라, 그딴 짐 덩어리. 내가 걔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

    “됐어.”

    아들은 더 말하지 말라는 듯 부인의 어깨를 쓰다듬었고, 그녀는 그런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아, 불 켜졌다.”

    그들은 불이 켜진 항공사 카운터로 다가가 여권들을 내밀었다.

    “런던 두 장이요. 퍼스트로.”

    두 장의 예약권을 내미는 그들의 얼굴에선 양심의 가책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   *

    “하우움. 할므니, 나 잠 와.”

    인천공항 2층에서 배 터지게 밥을 먹고 나니 결국 식곤증이 오고 만 손자의 모습에 할머니는 곧바로 의자에 눕히며 팔을 토닥였고, 아들 부부는 그런 둘은 미소로 지켜봤다.

    할머니는 그런 아들 부부를 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아따, 뭔 시간이 이로코롬 오래 걸린대? 에레이인지 에라인지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겄다!”

    “하하. 원래 비행기라는 게 탑승 시간 8시간 전에 와서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어머니.”

    “그려? 거 비항기에 금테를 둘렀나 보네. 그럼 이렇게 7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겨?”

    “조금만 참으세요, 어머니. 비행기 타시면 편해지실 거예요. 아니면 사우나라도 좀 가실래요?”

    “사우나? 목간? 이런 곳에 그런 것도 있는 거여? 아, 아니다. 됐다. 거기서 쓸 돈도 없는디 한 푼이라도 아껴야제. 갈라믄 니들이라도 갔다 와야. 승운이는 내가 보고 있을 텡께.”

    그 순간 아들 부부의 눈이 빛난다.

    안 그래도 곧 비행기 탑승 시간이라 이 자리에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던 둘이었는데, 할머니가 명분을 줬다.

    “그, 그래도 될까요?”

    “운전하느라 힘들었을 텐디 갔다 와. 목간은 에레이에도 있겄제.”

    “크흠. 그럼 저흰 다녀올게요. ……어머니.”

    “또 뭐?”

    이대로 돌아서면 정말 끝이기 때문일까. 독한 마음을 먹으며 이 잔혹한 계획을 세웠던 아들의 눈이 흔들린다.

    그걸 본 부인은 다급히 옆구리를 찔렀다.

    흠칫!

    눈이 마주치자 다시 단단해지는 눈빛.

    미소가 다시 피어난 아들은 의아해하는 할머니를 향해 따뜻한 음성을 뱉어 냈다.

    “아니에요. 다녀오는 길에 뭐 좀 사 올까요?”

    “난 됐응께 승운이 마실 거라도 사 와.”

    “예, 알겠습니다. 아, 혹시 핸드폰 가져오셨어요?”

    “니가 치매냐? 에레이 가서 개통하믄 된다고 해제시켰자녀.”

    그리고 기기는 해지를 한 통신사 대리점에 팔아 버렸다.

    “아, 그랬죠. 도중에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이걸로 사 드시고요.”

    할머니의 손에 5만 원을 쥐여 준 아들 부부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계세요.”

    ‘영원히. 안녕히.’

    “갈게요, 어머님.”

    “그려 싸게 갔다 와.”

    둘은 자신들의 짐이 담긴 가방을 들고 돌아섰고, 그대로 게이트로 향했다.

    “여권 확인하겠습니다.”

    “……여기요.”

    “여기 있어요, 빨리!”

    마지막 미련을 털어 버리며 여권을 내미는 그들.

    그런 아들 부부를 향해 손을 저은 할머니는 그제야 주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입을 헤 벌렸다.

    “아따, 뭔 부자들이 요로코롬 많디야. 위쪽 동네는 뭐가 달라도 달러.”

    복작복작한 모습을 보니 그냥 구경만 해도 재밌다.

    “저…… 아들 내외와 여행가시나 봅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라 고개를 돌린 할머니는 볼이 살짝 상기되어 있는 칠십대의 노인을 발견하곤 웃었다.

    아무래도 아들 부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빠르게 보낼 사람이 나타난 것 같다.

    “아녀라. 난 이민 가지라. 그짝은 어디 가쇼잉?”

    “허허. 이민이라…… 큰 결정을 하셨군요. 나는 큰아들 내외가 그러지 말라고 해도 여행을 가자 해서 동남아 갑니다. 혹시 베트남이라고 아십니까?”

    “베트남! 고건 또 내가 알지라.”

    “오호, 그래요? 가 보셨나 봐요? 어떤가요? 말처럼 따뜻하나요?”

    “고건 아니고, 우리 동네에서 노총각으로 늙어 뒈지려는지 지 부모 속을 썩이던 놈에게 베트남 처녀가 시집 와서 알게 됐지라. 걔가 또 얼마나 지아비에게 지극정성이고, 시부모에게 싹싹헌지…….”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리고 열 시간…….

    왜 이렇게 늦을까, 대체 언제 올까, 언제 오려나.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도 참으며, 무지막지한 친화력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할머니는 어느덧 깜깜해져 버린 하늘을 떨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할므니…… 엄마, 아빠 언제 와?”

    아닐 거다. 사우나에 깜빡 잠이 든 거겠지, 하나뿐인 아들과 싹싹한 며느리가 그럴 리가 없을 거다. 곧 올 거다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버티던 할머니는 손자의 칭얼거림에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인나 봐야. 저짝 좀 가 보게.”

    “으응.”

    손자는 할머니의 굳은 표정에 겁을 먹으며 몸을 일으켰고, 할머니는 아들 부부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시려고요, 어르신? 여권 확인하겠습니다.”

    “……여권? 고게 뭐시다요?”

    “예? 아, 비행기 타시려는 거 아니세요? 그러면 여권이라고 해외에서 쓰실 수 있는 주민등록증 같은 게 필요해요. 이렇게 네모나게 생긴 녹색 수첩인데요.”

    철렁!

    할머니의 심장이 내려앉는다.

    소학교도 나오지 못했지만, 지혜가 없진 않은 할머니.

    “그, 그게 없으면 에레이에 못 가는 거요?”

    “네. 없으시면 LA가 아니라 이 안으로도 못 들어가세요.”

    “아들 부부는 이미 10시간 전에 들어갔는디?”

    그 말에 여권 확인을 돕던 여객 서비스팀 직원의 표정이 굳는다.

    그걸 본 할머니는 마지막 희망을 꽉 붙들며 입을 열었다.

    “아, 아가씨. 내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읍시다. 저 안에…… 목간이 있소? 사우나. 사우나 말이요.”

    “……아니요. 죄송합니다.”

    털썩!

    “할므니?!”

    “어르신!”

    “괘, 괜찮으세요, 어르신?!”

    “이거 보이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어르신!”

    할머니는 망연자실하여 직원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가씨…… 나 아무래도 버려진 것 같소. 이, 이제 어째야 쓸까잉……. 이 불쌍한 것을 어째야 쓸까잉!”

    손자를 와락 껴안으며 눈물을 쏟아 내는 할머니.

    눈을 질끈 감은 팀원은 무전기를 들었다.

    “상황 발생. 상황 발생…….”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을 전파하는 팀원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   *   *

    뚜벅, 뚜벅, 뚜벅!

    인천공항의 어느 복도를 빠르게 걷는 종혁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져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선 안 될 짓.

    자식이 부모에게 절대 해선 안 될 짓.

    빠드득!

    “티, 팀장님!”

    휴게실 앞, 안절부절못하던 조은별이 종혁을 보자마자 참고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조 팀장님? 아니, 그 아들 부부의 출국 사실은 확인됐습니까?”

    “오전 8시 50분에 런던행 비행기에 탑승한 게 확인됐어요…….”

    할머니가 말한 미국 LA조차도 아닌 영국 런던.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12시간 전. 이미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눈을 질끈 감은 조은별의 말에 종혁은 이를 악물었다.

    “알겠습니다. 잠시 비켜 주시겠습니까?”

    “팀장님, 제발…….”

    고개를 끄덕인 종혁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표정을 바꾼 후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종혁을 힘없이 바라보는 할머니는 울다 지쳐 잠든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종혁은 그런 그녀를 향해 푸근히 웃어 줬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본청 외사국 외사수사과 최종혁 형사입니다.”

    “……김복순이어라.”

    ‘후우.’

    삶에 대한 의지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은 목소리.

    텅 비어 버린 눈에 종혁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펴야 했다.

    “어이구. 외모처럼 이름도 고우시네요. 젊었을 적에 남자들이 많이 달려들었겠어요.”

    “형사 양반, 찾을 수는 있겄소?”

    움찔!

    종혁은 할머니를 응시했다.

    텅 비어 버린 눈 깊은 곳에 불똥이 튄다. 입김만 불어도 꺼져 버릴 듯 희미한 불똥이.

    그걸 확인한 종혁은 미소를 지우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찾으시겠습니까?”

    “찾아야지라.”

    그래서 묻고 싶다.

    왜 이랬는지, 대체 나의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렇게 돈이 좋았는지 묻고 싶은 게 참 많다.

    하지만…….

    “근디 어떤 아가씨가 그럽디다. 내 아들놈이 타고 간 비항기가 영국 거라 세울 수가 없다고.”

    혹여 세운다고 한들 이미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니 찾을 수 없을 거라고도 말했다.

    빠드득!

    “어르신.”

    체념에 물들어가는 눈이 종혁을 본다.

    “찾고 싶으십니까?”

    방금 전과 달라지지 않은 물음. 그러나 그 속에 든 뜨거운 불길에 할머니의 몸이 굳는다.

    “……예. 찾고 싶소. 그 썩을 것들! 찾을 수만 있다면 찾고 싶소!”

    마치 전염이 되듯 속마음을 뜨겁게 토해 내는 할머니.

    “그렇게 되면 아드님 부부는 구속이 되어 교도소에 가게 될 겁니다.”

    “괜찮응께 찾아 주시요! 다 늙은 애미는 짐처럼 느껴질 수 있지라! 그란디 지 자식을 버린다는 게 말이 된다요-!”

    “우응. 할므니?”

    “으허어엉! 그 짐승 같은 잡것들 좀 잡아 주시오, 형사님.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될 겁니다. 오 경감님.”

    “예, 팀장님.”

    “할머님 호텔로 모시고, 고소장과 진술서 받으세요.”

    “예.”

    문을 닫고 나온 종혁은 바깥에서 기다리던 인천청 경찰을 응시했다.

    “그 새끼들 송환시킬 수 있겠습니까?”

    “크크큭. 쉽겠냐? 그건 너희 본청이라도 힘들지.”

    다른 곳도 아닌 영국이다. 저 미국보다 훨씬 더 콧대 높은 영국. 아직 범죄인 인도 조약도 맺지 않은 나라다.

    그쪽에서 이 사정을 불쌍히 여겨 어찌어찌 협조를 수락할 때쯤 되면 아마 그 아들 부부는 종적을 감춘 후가 될 것이다.

    “이봐, 본청 양반. 이런 일은 처음이라 예민하게 반응하나 본데, 여긴 좀 흔한 일이거든? 그냥 대충 돈 쥐여 드리고…….”

    “좆까, 씨발놈아.”

    “뭐야?! 이런 개새끼가!”

    콧방귀를 뀐 종혁은 매서운 눈빛으로 인천청 경찰을 응시했고, 그 눈빛에 인천청 경찰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래, 바라지도 않았다.’

    범죄인 인도 조약도 맺어져 있지 않은 영국으로 도망친 범죄자를 잡기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설사 잡는다 하더라도 그때까지 몇 년이 걸릴 지 알 수 없는 상황.

    이들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거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주먹을 으스러지게 쥔 종혁은 몸을 돌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예,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잘 계셨죠?”

    오래도록 쌓아 두기만 했던 인맥을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종혁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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