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351화>
89. 밟을 수밖에 없는 덫
저녁이 되어 갈수록 종갓집을 찾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져갔다. 기상청에서 내일 새벽부터 눈이 내린다고 했기에 혹여 길이 막힐까 하루 먼저 와 버린 것이다.
“최 팀장! 한잔 받아야지!”
“예, 형님!”
웅성웅성. 왁자지껄.
새벽부터 일어나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야 하건만 술과 수다가 넘치는 종갓집.
이리저리 불려 다니던 종혁은 사람들이 모두 거나하게 취하자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사랑방을 나섰다.
그러자 겨울의 찬바람이 종혁을 반기듯 달아오른 볼을 휘감는다.
휘이잉!
“푸후우.”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던 종혁은 돌연 낯빛을 굳혔다.
“없었지.”
중앙경찰학교에서 확인한 스포츠계에 드리워진 놈들의 꼬리. 피해를 당한 선수들에게 피해 사실을 조사하며 은밀히 알아봤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아는 이가 없었다.
‘그때 잡은 놈들을 족쳐서 두 놈은 알아냈는데……. 쯧.’
좀 아쉬웠다.
“응?”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던 종혁은 사랑채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최윤아를 발견하곤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다가오는지도 모른 채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윤아.
종혁은 그 옆에 털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밥은 잘 먹고 다니지?”
“힉!”
화들짝 놀라 종혁을 본 윤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종혁은 빼빼 마른 그녀의 다리를 가리켰다.
툭 치면 부러질 듯 앙상한 다리. 스키니 스타일의 청바지라 다리의 두께가 여실히 드러났다.
“아하하하하! 아니에요. 저 밥 엄청 잘 먹어요! 배고플 땐 세 공기씩 먹어요!”
“아닌데…….”
“푸히히히히! 진짜예요!”
진심이 가득한 얼굴에 종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괴롭히는 사람은 없고?”
“네? 아뇨. 그런 사람 없어요.”
“그래?”
종혁은 신기하다는 듯 봤고, 윤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왜, 왜요?”
“아니, 이렇게 예쁜데 시기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네? 으하하핫! 아니에요! 제가 힘이 얼마나 센데요! 우리 애들 저한테 쪽도 못 써……아.”
아차 한 윤아는 얼굴이 빨개졌고, 종혁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거 다행이네. 그래도 혹시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삼촌한테 바로 바로 연락해. 내가 아주 그놈들 혼쭐을 내 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어디서 배웠는지 거수경례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종혁은 푸근히 웃었고, 배시시 웃던 윤아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데 삼촌이요?”
종혁은 얼굴을 구겼다.
“삼촌이라고 불러.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다른 어르신들 앞에서 호칭을 잘못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푸히! 네, 삼촌!”
“그래, 싹싹해서 좋다. 이건 삼촌이 주는 용돈.”
그러자 윤아가 식겁하며 손을 뻗었다.
“에헤이. 넣어 둬요, 넣어 둬.”
“응? 푸핫!”
살짝 친해지니 바로 장난을 쳐 오는 게 넉살이 장난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지갑을 수습한 종혁은 저 멀리 산 위에 뜬 달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색해서 나온 거야?”
“아? 아, 아니요. 그냥 핸드폰 하려고요. 하하.”
“하긴 어색할 수밖에 없나?”
같은 성씨라지만 난생처음 본 사람들만 가득한 종갓집. 그것도 또래 아이는 거의 없이 다 어른들만 있는 곳이다.
예민한 십대 소녀에겐 딱 질색일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니 아마 유일하게 아는 사람인 아빠를 찾아 여기로 온 것일 터였다.
“아, 아니요! 어색한 게 아니라…….”
“다 알아. 나도 처음에 왔을 때 그랬거든. 오늘만 참아. 내일 낮이면 돌아갈 테니까.”
“네에……. 아, 맞아! 아빠가 삼촌이 경찰이라고 하셨는데!”
“왜? 신기해?”
“네! 경찰이시면 막 무서운 사람들도 잡고 그래요?”
“그럼. 이 삼촌 주먹에 걸리면 그냥…… 어?”
“와아…….”
꽉 쥐어진 종혁의 커다란 주먹을 본 윤아는 정말 그럴 것 같다고 살짝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기가 눌린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어떤 범죄자를 잡으셨는데요?”
“글쎄다……. 흠. 윤아 네가 알 만한 사람이라면 한상원?”
“에에?! 지, 진짜요?!”
한상원이라면 윤아도 어렴풋이 기억한다.
한국에서 최악의 탈옥수라고 했다.
“그리고 혹시 철수야 놀자라는 프로그램 기억하니?”
“아! 그거 아빠가 그 후원자란 사람이 사기꾼이라고 했는데!”
“설화학교는?”
“우, 우와아!”
그녀의 눈에 존경심이 차오르자 종혁은 콧대를 세우다가 이내 풀썩 웃었다.
‘내가 애를 데리고 뭐하는 짓인지.’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고2라고 했지?”
“네.”
“갈 대학은 정했고?”
움찔!
“아, 그게…….”
“왜? 아직 안 정했어?”
종혁의 물음에 윤아의 고개는 더욱 숙여져 갔다.
“그, 그게…… 저 연예인 될 거거든요. 데뷔조예요…….”
쥐구멍에 숨어드는 듯 작은 목소리.
“아, 그래서 조카님이 널 데려온 거구나?”
“흡?!”
“뭘 그렇게 놀래. 원래 다 그러는 건데.”
“네?”
원래 다 그렇다.
명절날 종갓집에 난생처음 보는 인물을 데려온다는 게 어떤 의미겠는가. 데려온 사람을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다.
일평생 한 번 안 오다 갑자기 쳐들어오면 몰라도, 계속 종가 행사에 참석했던 조카님이기에 다들 이해할 것이다.
그러라고 있는 게 문중이고, 가족이었다.
“원래 다 그런 거니까 아빠를 너무 미워하진 마.”
“……흑!”
“어이구.”
이 어린 소녀가 아버지의 강권에 종갓집에 따라와 얼마나 놀라고 겁먹고 눈치를 봤을까.
아까 밥을 깨작깨작 먹는 게 눈에 밟히더니 이런 이유 같았다.
종혁은 윤아의 어깨를 두드렸고, 흐느끼던 윤아는 이내 곧 배시시 웃으며 종혁을 봤다.
“감사합니다!”
“뭘. 그나저나 연예인이면 가수? 탤런트?”
“가수요! 아이돌! 늦어도 8월에는 데뷔한다고 했어요!”
“오, 그래? 아이돌이었어?”
“네? 왜요?”
“아니, 난 너무 예뻐서 배우인지 알았지. 흠. 아이돌이라……. 잠시만?”
종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윤아를 보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 쭌이 형. 시간 괜찮아? 아, 그럼 곧 데뷔를 앞둔 후배 가수를 위해 덕담 한마디 해 줄 수 있겠어? 땡큐. 고마워. 받아 봐.”
“네? 여, 여보세요?”
-헬로우? 우리 쫑혁이가 소개시켜 주는 후배님은 누구야?
“어? 어어어?”
너무도 낯익은 목소리와 말투.
연예인을, 그것도 가수를 꿈꾸는 사람이면 결코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종혁은 이게 정말이냐는 듯 쳐다보는 윤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히이익……!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그래, 안녕? 나 박준형이야. 알지?
“네,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최윤아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와아.”
윤아의 표정이 몽롱하다.
그녀로선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대선배이자 레전드 보이그룹의 리더가 너무도 자상한 말투로 덕담을 해 줬는데 제정신을 유지한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종혁은 마치 달빛에 취한 듯 초점이 사라진 그녀의 눈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계세요?”
“삼촌!”
“응?”
“준형 선배님과는 어떻게 아시는 사이이신 거예요?”
“그냥 뭐…… 이래저래?”
사정까지 말하면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
하지만 윤아에겐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종혁의 모습에 존경심이 더 차올랐다.
“와, 삼촌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그럼…….”
“그럼?”
“아?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 이만 자러 가 볼게요!”
마치 폴더폰처럼 허리를 굽히던 그녀는 마치 비밀을 들킨 아이처럼 다급히 돌아섰고, 종혁은 미간을 구겼다.
“윤아야!”
“네?”
종혁은 그녀의 손에 명함을 쥐여 주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꼭 네 일이 아니어도.”
“네?”
순간 흔들리는 그녀의 눈은 종혁의 예측이 진실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다시 허리를 꾸벅 숙인 윤아는 돌아섰고, 종혁은 안채로 향하는 그녀를 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부디 별일이 아니기만을 바라야겠네.”
만약 소속사에서 불합리한 일을 강요한다면?
“그땐 다 죽는 거지.”
굳이 윤아 때문이 아니라도 피해자가 생기는 걸 용납할 수 없다.
꾸그긋!
주먹을 꽉 쥔 종혁은 이내 자취를 감춘 윤아를 보며 담배를 물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일단 자신이 세우는 계획이 진행되기 위해선 손연아가 금메달을 따는 게 중요하다. 윤아는 그 이후였다.
고개를 끄덕인 종혁은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발을 뗐다.
여기서 담뱃불을 붙였다가는 큰일이 날 테니 말이다.
“흠. 담장 밖에다 숙소를 하나 세울까?”
그럼 윤아처럼 종갓집에 처음 오는 사람도 맘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종혁은 종부님과 상의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어두운 곳으로 향했고, 그렇게 종갓집에 온 첫날의 밤이 깊어져 갔다.
* * *
“흐어어.”
설 연휴가 끝나고 본청 로비로 들어서는 종혁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하다.
“좋은 아침……뭐, 뭐야. 설에 못 쉬었어?”
“아뇨. 결혼하라고 시달려서…….”
결혼한 젊은 친구들을 볼 때마다 시작되었던 할머님의 압박, 그리고 그 말에 맞장구치던 어르신들.
설 당일 날 모든 행사가 끝나자 도망치듯 종갓집을 나와 집에서 푹 쉬었지만, 그래도 그 피로가 잘 사라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27살이었으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회귀 전에도 결혼을 못했던 종혁. 아니, 결혼을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지만 그래도 꽤나 타격이 있었다.
“푸하핫! 확실히 최 팀장 정도면 나이가 젊어도 시달릴 만하지. 수고해!”
“예, 수고하십시오…….”
만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지하의 특별수사팀으로 향한 종혁은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는 최재수를 발견하곤 눈을 껌뻑였다.
“얘 왜 이래요?”
오택수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명절 내내 할머니에게 시달렸단다. 너도 이제 서른이니 신붓감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고.”
“나쁜 놈의 새끼들. 친구도 아닌 새끼들. 결혼을 했으면 찾아오지 말라고…….”
“아…….”
동병상련의 마음이 이런 걸까.
애잔한 눈으로 최재수의 어깨를 토닥인 종혁은 묘하게 허탈해하는 오택수를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오 경감님은 또 왜 그러시고요?”
“난 비상금이 죄다 세뱃돈으로 나가서…….”
대학에 입학하거나 취직을 하거나 결혼을 한다는 큰 조카들.
삼촌으로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핸드폰 사라, 양복 사라 하며 아내 몰래 돈을 주다 보니 결국 모아 둔 비상금이 바닥을 드러냈다.
“에휴. 욕보셨습니다.”
다들 명절 후유증이 장난 아니다.
고개를 저은 종혁은 커피메이커로 다가갔다.
커피라도 마시지 않으면 명절 연휴 다음 날, 첫 일과를 우울하게 시작할 것 같았다.
후룩!
“으음.”
고소하고 따뜻한 커피가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자 좀 살 것 같다고 느끼는 종혁의 곁으로 오택수가 빈 컵을 들고 다가섰다.
“이제 새 사건을 받는 건가?”
“그래야죠.”
스포츠 협회 사건도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새로운 사건을 맡을 때다. 아마 이따가 정용진 과장이 부를 터였다.
“뭘 것 같냐?”
“뭐든 많겠죠. 어디 범죄가 계절 타는 것도 아니고.”
물론 계절을 타는 범죄도 몇 개 있긴 하다. 산불 방화라든지, 자살이라든지 특정 계절에 발생량이 많아지는 사건들이 있다.
“아오! 이 빌어먹을 범죄자 새끼들! 착하게 살면 어디 덧나나? 우리도 좀 쉬자, 쉬어!”
“명절날 풀로 쉬었으면 됐죠, 뭐.”
어디 경찰이 명절을 풀로 쉴 수 있겠나. 명절에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축복이었다.
“그건 맞지. 그래도! 쉬고 싶다!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고 싶다!”
“나도요…….”
오택수의 말처럼 정말 아무것도 안 한 채 쉬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경찰인 그를 쉬게 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지이잉! 지이잉!
“응? 얘가 왜?”
윤아다.
“여보세요?”
-사, 삼촌!
물기 가득한 다급한 목소리.
종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어디야?”
* * *
도르르륵!
옷이 가득 든 캐리어를 끄는 윤아가 허름한 아파트, 아니 숙소로 들어선다.
20일 전 데뷔조 멤버가 확정이 되자 소속사에서 마련해 준 숙소.
“히히…….”
‘재밌었어.’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던지라 어색하고 지루하긴 했지만, 하얀 한복을 입은 어르신들이 차례를 지내는 모습이나 성묘를 하는 모습은 마치 사극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재미가 있었다.
그중 가장 재밌는 건 아무래도 종혁이었다.
덩치는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의 헤라클래스처럼 어마어마하지만, 장난기는 학교 남자애들처럼 짓궂으면서도 또 어쩔 땐 성인의 냄새를 물씬 풍겼던 종혁.
그러면서도 어르신들에게는 꼼짝도 못한 채 허리만 숙이던 모습은 정말 개그 그 자체였다.
띠디디디딕! 띠리릭!
“다녀왔습니다악-!”
아직 설 연휴가 끝나지 않아 아무도 없을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우렁차게 인사하며 숙소 안으로 들어서던 윤아는 거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깜짝 놀랐다.
“윤아, 왔니?”
“언니-!”
거실에서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는 TV를 보고 있는 예쁜 소녀. 같은 데뷔조 멤버다.
반사적으로 캐리어를 팽개치며 후다닥 달려가 소녀를 안은 윤아는 말랑말랑한 소녀의 볼에 머리를 비볐다.
“뭐예요. 왜 벌써 왔어요?”
“아니, 뭐……. 안 갔어.”
“네?!”
깜짝 놀라 물러선 윤아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들 데뷔조에서 가장 실력이 좋지만, 무슨 일인지 아직까지 계약을 맺지 못한 소녀. 부모님이 야반도주를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니, 소속사로 무섭게 생긴 사람들도 찾아와 그녀와 말다툼을 벌이는 걸 목격한 사람들도 있기에 마냥 허황된 말은 아니었다. 그 목격자 중 윤아도 있기에 더욱 더.
아마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윤아는 모른 척 씩씩하게 말했다.
“그럼 명절 음식도 못 먹었겠네요?!”
“그렇지?”
“아싸! 공범 생겼다!”
윤아는 내던진 캐리어를 끌고 와서 열어젖혔고, 그 안의 내용물을 본 소녀는 눈을 껌뻑였다.
윤아 정도는 충분히 담을 커다란 캐리어의 4분의 1을 채운 채 고소한 냄새를 내뿜는 검은 봉지.
“너 이거 설마……. 아니지? 곧 데뷔해야 돼서 체중 감량을 해야 되는 걸 아는 우리 윤아가 다이어트의 적인 명절 음식을 가져 온 건 아니지?”
“언니.”
윤아는 정색했다.
“우리 데뷔가 언제?”
“늦어도 8월이랬잖아.”
“네. 8월. 앞으로 반년이나 남았죠!”
“……너 이거 먹으려고 하루 빨리 온 거지?”
소속사에서도 데뷔조 부모들에게 당부하는 다이어트.
아마 윤아는 집에서도 먹을 수 없으니 이걸 훔쳐 온 게 분명했다.
“콜?”
“……콜.”
한창때의 소녀에게, 그것도 다이어트의 압박과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소녀에게 명절 음식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악마의 유혹이었다.
먹는 순간 체중이 늘어날 걸 알면서도 먹을 수밖에 없는 덫.
소녀는 묵직한 자태를 드러내는 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것들이! 얼른 안 일어나-!”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에 벌떡 몸을 일으킨 윤아는 마치 백설기를 닮은 듯 작고 하얀 소녀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에헤헤. 굿애프터눈. 언니!”
“굿모닝이다, 짜샤! 아이고, 내가 못살아! 정말 못살아-!”
기름기 가득한 비닐봉지와 탄산음료로 어질러진 거실.
이게 과연 곧 데뷔를 할 걸그룹 숙소의 모습일 수 있을까.
“너희들 먹이겠다고 살 안 찌는 음식들만 가져온 내가 미친년이지! 너희들 이거 얼른 치워! 실장님 오시기 전에!”
“맞아! Hurry up!”
실장님이 와서 이걸 본 순간 연대책임이다.
윤아는 하얀 소녀 옆에서 허리에 손을 얹고 있는 미소가 예쁜 언니의 화난 모습에 공범의 몸을 흔들었다.
“리나 언니. 얼른 일어나 봐, 언니.”
“으응, 왜…….”
뒤척이며 몸을 일으켰던 소녀, 리나는 화가 잔뜩 나 있는 멤버들의 모습에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난장판이 된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고, 윤아도 얼른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동참했다.
그렇게 찢어 버린 어젯밤의 흔적을 모두 치운 그들은 입을 다문 채 집을 나서 아파트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우리 어제 몇 시에 잔 거예요, 언니?”
“……몰라.”
밤새 웃고 떠들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없다.
그런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어젯밤 윤아가 가져온 명절 음식을 다 먹어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미쳤지. 내가 진짜 미쳤지…….”
몇 킬로그램이나 쪘을까.
이걸 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리나는 같이 먹었음에도 얼굴이 살짝 붓는 정도로 끝난 윤아를 원망스럽다는 듯 봤다.
“같이 먹었거든요?!”
“……같이 먹어 놓고 살은 나만 찌게 만든 나쁜 계집애.”
“히히. 그러니까 사람은 체질을 타고나야 한다니까요.”
“이익! 너 진짜 나빠.”
“히히. 사랑해요 언니……”
“그러게. 우리도 네가 참 나빠요. 김리나 양.”
움찔!
갑자기 대화에 끼어드는 목소리에 기겁하며 몸을 윤아와 리나는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삼십대 남성들의 모습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무서운 사람들.
“김리나 양, 우리가 왜 왔는지 알죠?”
“어, 언니…….”
윤아는 반사적으로 굳어있는 리나의 앞을 막아섰고,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린 리나는 입술을 깨물며 윤아를 뒤로 잡아당겼다.
‘이런 모습 보이기 싫었는데!’
부모님과 연락이 끊긴 지가 벌써 1년이 넘었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왜 동생같은 후배에게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이게 하는 걸까.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후. 저리로 가서 이야기해요.”
남성들은 피식 웃었다.
“괜찮아. 이야기 나눌 필요 없어. 널 데리러 온 거거든.”
“저리 가서 이야기하자니까요!”
“김리나 양, 아빠랑 엄마 봐야지?”
“네?”
“아빠랑 엄마가 리나 양을 찾으시네? 못 믿겠으면 통화하게 해 줘?”
“……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리나에게 넘겨줬다.
“어, 엄마? 아빠?”
-리나야!
“아빠-!”
탁!
핸드폰을 다시 거둬 간 사내는 리나를 보며 비릿이 웃었다.
“자, 이제 우리 말 믿지?”
가자는 눈짓에 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뗐다.
그걸 본 윤아는 눈을 부릅뜨며 리나를 붙잡았다.
“언니!”
리나는 잠시 윤아의 눈을 응시하다가 이내 서글피 웃으며 윤아의 손을 떼어 냈다.
“……금방 다녀올게. 가요.”
“언니, 언니-!”
윤아는 근처에 세워진 사내들 차에 올라타는 리나를 애타게 부르다, 이대로 보내면 영영 그녀를 못 볼 수도 있다는 공포에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사, 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