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342화>
“아.”
남성 남홍선이 아이스링크를 보고 느낀 감정은 좁다였다.
선수 시절 한창 누비던 링크보다 작은 공간. 낮은 천장. 그러나 그가 아는 아이스링크에서 객석을 뺀다면 딱 이 정도 공간이 될 법도 했다.
그런 아이스링크를, 새하얀 빙판 위를 한 마리의 작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
촤악! 촤악! 촤아악!
너무도 우아한 날갯짓.
“어? 오빠아-!”
홍선은 빠르게 다가온 손연아에 화들짝 놀랐다.
“오올. 제일 빨리 나왔네? 혹시 나한테 관심 있으삼? 아이참, 난 아직 미성년자인데.”
따악!
“악! 우씨, 왜 때려!”
또 볼이 호빵이 되어 버리는 연아의 모습에 웃음을 흘린 홍선은 이내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직 주니어 대회 경력뿐이라고는 하나, 2006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쇼트 세계신기록을 경신했을 만큼 특출한 재능을 지닌 손연아.
하지만 피겨 볼모지인 한국에선 그녀가 세계신기록을 경신했음에도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다. 정부도, 그리고 대중도.
그러니 훈련 비용은 물론이고, 훈련 장소도 제대로 지원될 리 만무했다.
‘제대로 지원만 받는다면 분명 세계적인 선수가 될 텐데…….’
홍선은 자신과 달리 남다른 재능을 지닌 손연아가 제대로 된 훈련조차 할 수 없음에 속으로 안쓰러워했다.
그런 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손연아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히히. 얼른 타는 게 좋을걸? 곧 다른 언니, 오빠들도 오기로 했거든!”
“아, 그럼 얼른 타야지.”
더럽혀지지 않은 빙판을 누비는 짜릿함, 이쪽 사람들 밖에 모르는 그 쾌감을 떠올린 홍선은 얼른 스케이트화를 신고 빙판에 올라섰다.
그 순간…….
“아.”
꿈을 접고 떠날 때만 해도 다신 찾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빙판. 그럼에도 그냥 재미로 타는 건 괜찮지 않을까 스스로를 속이며 승낙한 오늘의 약속.
오길 잘한 것 같다.
매끄럽게 나아가는 스케이트날이, 온몸에 부딪치는 냉기가 다시 그때 그 시절의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홍선은 흥을 이기지 못하고 빙판을 박차고 올라 몸을 비틀었다.
촤라락!
“푸히히히!”
“웃지 마라.”
“넘어졌대요. 준비 운동 안 하고 점프하다가 또 넘어졌대요.”
“이상한 박자로 놀리지 마라, 짜샤!”
쉬익!
허공을 가르는 홍선의 주먹.
“나 잡아 봐라-!”
“……어후, 저걸 진짜!”
홍선은 어느새 저만치 도망쳐 버린 연아를, 마치 놀리듯 더블 악셀을 하는 연아를 보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고, 그의 주위에서 헐떡이던 남녀들이 피식 웃는다.
“그런데 여기 태릉 피트니스센터 아니야? 아까 들어오는 길에 보니까 그런 현수막이 걸려 있었던데?”
공사 중이라서 솔직히 처음엔 손연아가 장난을 치는 건가 생각했던 그들도 태릉 피트니스센터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은퇴한 운동선수들이 어떤 투자회사의 투자를 받아 설립했다는 태릉 피트니스센터. 이곳은 은퇴하거나 은퇴를 생각하는 스포츠 선수들에겐 꿈의 직장이나 다름없었다.
높은 월급과 환상 같은 직원 복지.
그동안 자신들은 관계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아이스링크가 생기는 걸 보니 원서를 넣어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이젠 이 작은 군포에도 태릉이 생기는구나.”
“군포뿐만 아니라 이제 소도시에도 계속 생기게 될 겁니다.”
“힉!”
화들짝 놀라 뒤를 본 그들은 종혁과 권회수를 발견하곤 의아해했다.
“누구신지…….”
“어? 이사장님! 최종혁 오빠!”
종혁은 손을 흔들었고, 권회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어떻게 빙판의 질은 마음에 드시는가? 내 미국에서 전문가를 공수하긴 했다만은…….”
정말 번갯불에 콩 볶듯 진행된 이번 일.
태릉 피트니스센터와 연계해 건물을 매입하고 공사를 진행해 빙질을 만드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4일에 불과했다.
권회수는 오랜만에 급하다고 무리한 부탁을 한 종혁을 어떠냐는 듯 흘겨보곤 손연아를 응시했다.
“그럼요! 훌륭해요! 진짜 짱! 짱짱이에요, 이사장님!”
짱이란 말로도 부족했다.
제대로 난방이 되질 않아 몸이 얼어 제대로 기량을 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빙판이 너무 딱딱해 혹시라도 다칠까 봐 마음껏 점프할 수 없었던 태릉 빙상장과 비교하면 이곳은 낙원과도 같았다.
무엇보다 사람과 부딪칠 걱정 없이 마음껏 연습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쪽 분들이 우리 연아 양의 지인분들인가 보구만.”
“아, 네! 언니, 오빠들 인사해요! 여기 어르신은 행복의 쉼터 재단 권회수 이사장님! 그리고 이쪽은 최종혁 경찰 오빠!”
행복의 쉼터 재단은 그들도 들어 본 적 있다.
가출청소년과 소녀소년 가장, 독거노인을 지원하는 복지 단체.
현재는 고아원과 학교폭력, 자살 상담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아, 안녕하십니까!”
“허허. 그래요. 우리 연아양 좀 잘 부탁해요.”
온기가 가득 서린 말.
손연아의 지인들은 잠시 손연아를 부러워했다가 종혁을 보며 어색해했다.
“하하. 역시 경찰이 친근한 존재는 아니죠? 본청 간편신고관리과 특별수사팀의 최종혁입니다.”
“어? 간편신고면?”
“네. 인터넷신고사이트를 총괄 관리하는 부서입니다.”
종혁은 특별수사팀의 의의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여기 손연아 선수가 이번에 저희 경찰의 홍보대사로 위촉되는데, 그 계약을 제가 진행하고 있습니다.”
“와.”
경찰의 업무라고 해 봤자 범인을 잡거나 순찰을 도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들로서는 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언니, 오빠들! 못 알아보겠어요? 유도 영웅 최종혁 오빠잖아요!”
“……으악!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하하. 종목이 다른데 선배는요. 그냥 편하게 불러 주세요. 아, 물론 여러분 중에 범죄자가 있다면 제 반응이 좀 달라질 테지만요.”
순간 차가워지는 종혁의 목소리에 그들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고, 장난이었다는 듯 웃은 종혁은 권회수를 봤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인데 식사 좀 사 주시죠? 보양식으로다가.”
종혁은 권회수를 향해 짓궂게 말하고는 손연아의 지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하. 갑시다. 이분이 아주 부자시라 마음껏 뜯어먹으셔도 되거든요.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 * *
치이익!
그릴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지는 손질된 장어 한 마리.
숯불 위로 뚝뚝 떨어지는 기름이 식욕을 폭발시키는 향을 뿜어 댄다.
“아흐! 장어야, 오랜만이야…….”
종혁은 이상해지는 손연아을 일견하며 그녀의 지인들을 봤다.
아까 전과 비교하면 절반으로 줄어든 숫자.
“우리는 술 한잔하시죠.”
그들은 종혁이 내미는 술병을 공손히 받아 들었고, 종혁은 그런 그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아직 혈기가 넘치는 이십대.
많이 먹고, 많이 마셔야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자, 건배.”
“거, 건배!”
채재쟁!
술잔이 중간에서 부딪쳤다.
“한 점만! 딱 한 점만 더!”
“얘가 진짜 오늘 왜 이래! 빨리 안 와?!”
귀를 잡힌 손연아가 끌려가고, 권회수도 오늘 먹고 즐기라며 백만 원짜리 수표를 놓고 떠나자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됐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술이 들어가니 급격하게 친해진 그들.
종목은 다르지만, 같은 운동선수였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더 빨리 친해졌는지도 모른다.
“와, 진짜 방콕 때는 말도 마요. 일본 이 썩을 것들이 음식 가지고 수작을 부리지, 숙소로 장난치지…….”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데요?”
“어떡하긴요.”
숙소는 그들 위층으로 옮겨 버렸고, 음식은 방콕 한인들에게 도움을 얻어 뷔페를 차렸다.
“내가 진짜 그걸 해낸다고 생지랄 떤 거 생각하면…… 어휴.”
“억! 그걸 형님이 직접 하셨다고요?!”
“그럼 어떡해. 태국어를 할 줄 아는 인간이 나밖에 없는데. 협회는 니들 알아서 해라…….”
움찔!
“지원 빵빵한 축구나 야구는 우리 먹을 것도 없다고 지들 밥그릇만 챙기지. 어휴, 내가 진짜 찬오형 아니었으면 경찰 되자마자 프로 야구부터 조졌을 거야.”
“와아. 형님 같은 분도 그런 고충이 있으셨구나…….”
“그랬지. 그땐 정말 모든 게 열악했지. 거기다 좆같은 군기가 있어 가지고 나이 어린놈들은 한겨울에도 찬물로 손빨래해야 됐다니까? 진짜 그 고통은…… 어후. 응? 뭐야, 너희도 그랬어?”
3차를 따라온 홍선과 3명은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신기하네. 너흰 돈 많은 사람만 하는 스포츠 아니었어? 내가 알기로 선수용 스케이트화 가격도 만만치 않을 텐데?”
순간 입이 다물어졌던 그들은 동시에 혀를 차며 술잔을 들이켰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눈에 초점이 흔들리기 시작한 그들.
“그거 다 빚이에요, 형님.”
“맞아요. 진짜 부자인 애들은 몇 명 없어요. 다 부모님 등골 빨아먹으면서 하는 거지.”
여느 스포츠가 다 그렇지만, 피겨는 특히 더 심하다. 모든 게 사비이기 때문이다.
“뭐? 협회는 뭐하고? 너희 회비 엄청 뜯어 가지 않아?”
종혁이 알기로 회비도 회비지만, 피겨 선수가 협회에 뜯기는 비용이 상금의 30퍼센트다.
“협회는……!”
쿡!
홍선은 옆구리를 찌르는 선배에 입을 다물었다.
“하하. 워낙 인기가 없는 스포츠라서요. 저희 남자는 특히 더하고요. 형님도 그렇게 힘드셨는데, 저희라고 다를 게 있겠어요?”
“흠……. 확실히 그렇긴 하겠네. 에이, 빌어먹을 협회.”
혀를 찬 종혁은 슬쩍 그들을 둘러보곤 몸을 일으켰다.
“난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넵. 다녀오세요!”
그렇게 종혁이 화장실로 향하자 선배가 홍선을 노려본다.
“협회 까서 뭐 어쩌려고.”
“그럼 형은 억울하지도 않아요?”
술이 들어가서인지 홍선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리고 씨발 내가…… 내가 누구 때문에, 뭐 때문에 피겨를 그만뒀는데요! 형도 저랑 똑같이 그 교수에게…….”
빠악! 쿠당탕!
“유언아!”
“씨발. 아무리 취했어도 할 말, 안 할 말은 가려서 하자.”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형.”
“씨발.”
의자를 걷어찬 선배는 담배를 물며 밖으로 나갔고, 남은 사람들이 홍선을 일으켰다.
“홍선아, 네가 이해해. 유언이 쟤도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인 거 알잖아.”
홍선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관두게 된 선배.
은퇴 이유는 점프 착지를 잘못하는 바람에 십자인대가 파열됐기 때문이지만, 그래서 더 괴로울 거다. 홍선보다 먼저 그 교수의 그 추악한 짓을 참고 견디면서도 찬란히 빛났던 선배이기에.
선배는 남자 피겨계에서 추락한 별이었다.
“그리고 협회나 교수 까다가 걸리면 우리 앞길도 망가지잖아.”
미우나 고우나 선수를 관뒀어도, 대회에 출전을 못해도 어차피 그들이 살아가야 할 곳은 빙판 위다.
어쭙지 않은 코치 정도가 아니라 시간 강사라도 하기 위해선 그들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알아요. 나도 안다고요…… 씨발.”
아는데 너무 억울해서, 치욕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확 고소라도 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자신의 친구들까지 연좌제로 앞길이 막힐 수 있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죄송한데 저 먼저 갈게요. 종혁이 형에겐 대충 둘러대 주세요.”
“야! 야!”
“아놔, 진짜!”
그들은 떠나가는 홍선을 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렇게 술자리 분위기는 망가져 버렸다.
한편 밖으로 나온 선배는 옆 골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들었다.
“예, 교수님. 저 유언입니다. 네. 경찰과 웬 복지센터에서 연아를 지원하더라고요. 스폰서 계약이요. 컨디션이 무척 좋아 보였습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는 선배.
“그리고 홍선이가 경찰에게 교수님에 대한 험담을 하려는 걸 막았습니다. 역시 홍선이가 쌓인 게 많더라고요.”
마치 잘했냐는 듯 칭찬을 바라는 말투에 수화기 너머의 음성이 부드러워진다.
-그래? 잘했어.
생각보다 잘해 줬다.
“그럼 약속하신 강사 추천은…….”
-알았어. 해 줄게. 대신 너랑 나랑 있었던 일은 끝까지 다무는 거다.
“어? 저는 무릎이 망가져서 그만둔 건데요?”
-……그래.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서 경력이나 쌓고 있어.
“예. 좋은 밤 되십시오, 교수님.”
전화를 끊은 선배는 그제야 담배를 물었다.
찰칵! 치이익!
타들어 가는 담배처럼, 다 타 버린 가슴처럼 검게 물든 밤하늘.
“후, 좆같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피겨 말곤 아는 게 하나 없는 자신으로선 비록 몸이 더럽혀졌다 하더라도 꼬리를 흔들 수밖에 없다.
피겨를 너무 좋아하기에, 교수가 던진 먹잇감이 너무 달콤하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강사로 경력을 쌓으면 고등학교 코치직을 추천해 주겠다던 교수.
“아니. 지금에서야 더럽혀졌다고 생각하는 거지.”
무릎이 박살 나기 전엔 그렇게 해서라도 대회에 출전하고 싶었다.
“그게 뭐 잘못됐…….”
저벅저벅!
“씨발. 씨발.”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입을 다물었던 선배는 골목 앞을 스쳐 지나가는 홍선을 보곤 입술을 비틀었다.
“퉤. 집에나 가야겠네.”
홍선도 사라졌으니 이제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침을 뱉으며 골목을 빠져나가던 선배는 지퍼를 내리며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에 화들짝 놀랐다가 옆으로 비켜서며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빠져나가고 오줌 싸는 취객만 남겨진 골목.
취객, 아니 오택수는 핸드폰을 꺼내 귓가에 가져갔다.
“어, 최 팀장. 씨앗 예쁘게 뿌렸더라?”
-뭐가 있나 봅니다?
아무래도 혹시나가 역시나가 된 것 같다.
“피겨가 개판이랬지? 생각보다 더 개판이다. 아주 개판이야.”
지이익!
지퍼를 올린 오택수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