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341화>
88. 박탈된 꿈
본청의 소회의실.
낯설 수밖에 없는 곳이라서 그런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앞에 놓인 오렌지주스를 한 모금 마신 손연아가 눈을 크게 뜨며 어머니의 옆구리를 찌른다.
“엄마, 엄마. 이거 먹어 봐. 겁나 맛있어!”
“쉿. 조용. 그만해.”
종혁은 맑음 그 자체인 그녀의 모습에 푸근히 웃었다.
“하하. 음료수는 입에 좀 맞나요?”
“네! 디빵 맞아요! 이거 어디서 파는 거예요?”
“연아야아…….”
“하하, 괜찮습니다. 입에 맞으시면 갈 때 챙겨 드릴게요, 손연아 선수. 이게 시중에선 구하기가 좀 힘든 거거든요.”
“헉! 어쩐지! 감사합니다!”
“하하하.”
웃음을 흘린 종혁은 손연아의 어머니를 봤다.
“갑자기 저희가 연락을 드려서 많이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데…….”
경찰이 자신의 딸과 계약을 맺으려는 이유.
그녀는 아직도 이 부분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현재 저희 경찰은 축구단과 야구단을 운용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이 다른 스포츠팀을 꾸리거나 지원하려 하고 있죠.”
“아, 그래서!”
종혁은 준비한 계약서 두 장을 손연아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넘겨주었고, 딸도 계약 내용을 살필 수 있도록 해 준 세심한 배려에 살짝 놀랐던 손연아의 어머니는 이내 계약서를 보곤 경악했다.
“헉!”
“히이익?!”
“손연아 선수께서 저희 경찰의 홍보 대사 및 명예 경찰이 되어 주시는 조건으로 이런 계약을 준비해 봤습니다. 아, 역시 세계적인 스타에겐 적은 액수일까요?”
“아뇨, 아니요!”
손연아와 어머니는 모녀가 아니랄까 봐 손을 붕붕 저었다.
그녀들이 본 계약서 중 최고의 계약서. 아니, 얼마 전 찍은 CF도 이런 액수는 아니었다.
종혁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하는 모녀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그래요? 흠, 협회에서 지원이 많이 나오실 텐데요…….”
“협회에선 그런 거…… 윽?!”
옆구리를 찔린 어머니는 입을 다물었고, 종혁은 모른 척했다.
“호호. 그런데 정말 아무런 조건 없이 이런 계약을 해 주신다는 건가요?”
“아니요. 조건이 없는 건 아니죠.”
“아…….”
“방송 등 대외적인 활동을 하실 때 저희에게 공유만 해 주시면 됩니다.”
“……네?”
“일단 저희가 경찰이다 보니 이미지를 지켜야 해서. 하하.”
손연아와 어머니는 멍하니 종혁을 쳐다봤다.
“정말 그걸로…… 그것만 하면 되는 건가요? 다른 건 없이?”
“그럼요?”
손연아와 어머니는 더 멍해졌다.
“아, 맞아.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듯이 10월 경찰의 날 행사 때나 여타 대형 행사가 있을 땐 참석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스케줄상 오시지 못한다면 영상이라도 보내 주시고요.”
“그, 그건 당연한 건데…….”
“1년에 많아 봐야 4번 정도일 테니 너무 걱정 마시고요. 행사가 있기 한 달 전에 연락을 할 테니 스케줄 조정도 쉬울 겁니다. 아, 이것도 부담이 되실까요?”
난처해하는 종혁의 모습에 손연아의 어머니는 울컥했다.
“흑……!”
“어, 엄마?!”
손연아는 깜짝 놀랐지만, 종혁은 이해한다는 듯 푸근히 웃으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운동하는 따님을 케어하시느라 많이 힘드시죠? 이해합니다. 저희 어머니도 저 운동시킬 때 고생을 많이 하셨거든요.”
“……?!”
“악! 유도 영웅 최종혁! 어게인 방콕! 어게인 시드니! 마, 맞죠?! 최종혁 오빠 맞죠?”
비록 종목은 다르지만, 한국의 영웅을 어찌 못 알아볼까.
설마 알아볼 줄 몰랐던 종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제야 종혁을 알아본 손연아의 어머니도 깜짝 놀랐다.
“마, 맞네요! IMF 금 모으기 운동 때 부모님 결혼 예물을 내놓으셨죠? 어머니께서 거리에서 김밥을 파시고!”
“하하. 예, 지금은 한식 뷔페를 운영하십니다.”
“어머머. 그때 뉘집 아들이 저렇게 잘났냐며 남편하고 참 감탄했는데……. 아, 그럼 설마 이 계약도?”
“아하하.”
볼을 긁던 종혁은 이내 정색했다.
“생각하시는 그건 아닙니다. 모두 손연아 선수가 그만한 기록을 썼기에 저희 경찰도 투자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손연아의 어머니는 고개를 푹 숙였다.
국민의 관심도 없고, 국제 대회에서 여타할 성적을 낸 선수도 없어서 그동안 협회에서 홀대를 받아 왔던 피겨.
그렇다 보니 대회 참가는 물론 숙박비, 연습장 대여비, 장구류는 물론이고 감독 월급까지도 사비를 써야 했다.
그 돈만 한 해 1억이 넘어 남편은 기러기 아빠가 되었고, 작은딸 손연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능이 부족했던 큰딸의 꿈은 외면해야 했다.
그렇게 힘들게 키어 온 작은딸이, 꿈이 박탈된 언니 때문에라도 더 이를 악물고 운동을 했던 작은딸이 드디어 인정을 받는다니 부모로서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의 고생을 모두 보상받는 듯한 기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흐잉. 감사합니다. 절 이렇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구, 아닙니다.”
손연아까지 울음을 터트리자 난처해진 종혁은 둘을 달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러 그녀들이 진정되자 종혁은 싱긋 웃었다.
“그러면 계약을 진행하시는 걸로 생각하면 될까요? 혹시 자세히 검토하고 싶으시다면 제가 아는 변호사를…….”
“아니요! 엄마!”
“응! 딸, 여기!”
“어이쿠!”
종혁은 볼펜을 꺼내는 어머니와 야무지게 쥐는 손연아의 모습에 기겁하며 말렸다.
“하하. 이렇게 믿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혹시 이후로 급한 일이 있으십니까?”
“네? 아니요?”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잠시만요.”
종혁은 핸드폰을 들었다.
“예, 홍보담당관님. 최 팀장입니다. 손연아 선수가 계약을 맺으신다고 합니다. 아, 2시간이요? 예, 그럼 때 맞춰서 청장실로 올라가겠습니다.”
“헉?!”
전화를 끊은 종혁은 사정을 설명했다.
“일단 이게 사진을 찍어야 해서…….”
“처, 청장님이시라고 하면…….”
“예. 현 경찰청장님이십니다. 세계에서 1등을 한 선수와 계약을 맺는데 저희도 그만한 성의는 보여야죠.”
“……!”
“그럼 계약할 때까지 시간도 남았는데, 본청을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계약 당사자로서 저희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네, 할래요! 형사 아저씨들께서 막 나쁜 사람한테 악악 하시는 것도 볼 수 있는 거죠?!”
삐끗!
‘아, 4차원이네.’
종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 진짜 나 아니라니까!”
“똑바로 앉아, 이 시꺄!”
“어? 최 팀장, 무슨 일…….”
쾅!
특수범죄수사과의 문을 닫아 버린 종혁은 손연아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아, 왜요! 나 보고 싶은데!”
“미성년자는 관람불가입니다. 자, 그럼 다른 곳으로 가죠.”
종혁은 뚱해지는 그녀의 등을 떠밀며 생활안전국으로 향했다.
“오, 최 팀장! 간만이네. 응? 근데 두 분은 누구셔?”
“충성. 경정 최종혁. 이번에 저희 경찰이 스포츠 선수를 지원하신다는 거 들으셨죠? 그 선수와 보호자십니다. 손연아 선수? 이분이 여기 생활안전국의 국장님이십니다. 손연아 선수가 찍을 경찰 홍보 영상 중 하나는 이곳 분들과 찍게 될 겁니다.”
“아, 안녕하세요!”
“어이쿠,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기 최 팀장보다 어린 나이에 세계 1위에 등극하셨다고요?”
“아, 아뇨. 랭킹은 아직…….”
“하하하. 그래요? 그럼 잘 둘러봐요. 최 팀장, 부탁해?”
“충성.”
국장이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종혁은 생활안전국에 대해 설명해 줬다. 여성과 아동, 청소년의 범죄와 범죄 예방 등을 담당하는 생활안전국.
“그리고 파출소의 순찰 경로도 이곳에서 총괄 관리…… 아, 혹시 연습은 어디서 하시나요? 그쪽 순찰도 제가 최대한 신경 써 놓겠습니다.”
“아, 그게…….”
갑자기 손연아와 어머니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진다.
“주로 오전에는 태릉선수촌, 오후에는 과천시민회관나 롯데월드에서 연습을 하긴 하는데…… 연습이 끝날 때면 너무 늦은 시간이라…….”
난방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연습에 전념하기조차 힘든 태릉 빙상장.
하지만 실질적으로 국내에서 개인 연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마저도 다른 선수들과 시간을 나눠서 사용해야 하기에 오전에 잠깐 연습할 수 있는 게 고작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오후에는 차를 한참을 끌고 이동하여 잠실이나 과천에서 시민들 틈바구니에서 연습하다가,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이 되어서나 다시 개인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손연아의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끝마치자, 종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그런 고충이 있는 줄 알았다면…… 아니, 아직 사인하기 전이구나. 잠시만요?”
“네? 아, 아니!”
종혁은 얼른 핸드폰을 꺼냈다.
“예, 권 이사장님. 저 종혁입니다. 저번에 행복의 쉼터에서 아이들을 위해 아이스링크를 짓는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아, 제가 들은 게 맞죠? 어디에 짓습니까? 예, 예. 서울에 2개와 수원, 성남, 군포요?”
움찔!
군포시. 현재 손연아 모녀가 사는 곳이었다.
종혁은 몸을 굳히는 그녀들을 일견하며 말을 이었다.
“아뇨.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저희 경찰에서 손연아라는 피겨 선수를 지원하는데 그 링크를 쓸 수 있을까 해서요. 예, 예. 네, 제가 고르긴 했죠? 오, 그래요? 잠시만요? 어머니, 한번 받아 보시죠.”
“네? 여, 여보세요?”
당황하며 전화를 넘겨받은 손아영의 어머니는 눈을 부릅떴다.
“예에?! 저, 저희 딸을요?”
-허허. 예. 손연아 선수는 저도 유심히 지켜봤던 선수입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옹골차고 심성도 훌륭해 보이더군요. 그래서 저희 행복의 쉼터 재단도 후원을 할까 합니다.
“받으세요. 받아요.”
종혁은 옆에서 부추겼고, 어머니는 다시 울컥했다.
일이 풀리기 시작하니 이렇게 풀릴 수 있을까.
이번 경찰과의 계약이 마치 작은딸의 앞길을 활짝 여는 방아쇠가 된 듯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허허. 아닙니다. 그럼 날짜를 잡아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네! 안녕히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어머니는 종혁을 보며 눈물을 그렁거렸다.
“엄마,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연아야…… 연아야!”
“왜에……. 무섭게 왜 그러는데에…….”
“이제에! 사람 많은 곳에서 연습하지 않아도 된대! 여기 이사장님께서 우리 딸을 위해 빙질까지 맞춰 주신다고 언제든 마음껏 이용하래-!”
“저, 정말? 정말이야?! 정말 나도 마음껏 연습할 수 있는 거야? 으아아앙!”
종혁은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를 보며 씁쓸히 웃었다.
* * *
“훌쩍.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이택문 경찰청장과 함께 사진까지 찍고 본청 건물을 나선 손연아와 어머니가 허리를 숙인다.
“아이고, 아닙니다. 손연아 선수와 함께하게 돼서 저희가 더 영광이죠. 아, 혹시라도 매니지먼트가 필요하시다면 여기로 연락해 보세요. 연예기획사이긴 한데, 이번에 스포츠 에이전시를 준비한다는 말을 하더군요.”
손연아와 어머니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인다.
“아, 그리고 혼자 타기 심심하시면 다른 동료분들을 데려오셔도 됩니다. 센터 아이들이 이용하는 시간대만 피해 주신다면, 손연아 선수가 사용하지 않으실 때 그분들이 개인 연습을 하도록 하셔도 상관없고요.”
“지, 진짜요?! 진짜 그래도 돼요?!”
“손연아 선수만을 위한 시간일 텐데요, 뭘.”
종혁이 눈을 빛내며 은근히 말하자 손연아의 눈이 번뜩인다.
“막 경기에 못 나가거나 은퇴한 사람도 괜찮아요?!”
종혁은 불끈 쥔 주먹을 뒤로 돌리며 푸근히 웃었다.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이쿠. 아닙니다. 그럼 명예 경찰 및 홍보대사 위촉식 때 다시 뵙겠습니다.”
“네! 안녕히 계세요!”
허리를 깊이 숙인 그녀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고,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종혁은 이내 낯빛을 차갑게 굳히며 오택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접니다. 피겨 쪽부터 찌르도록 하죠. 이쪽 아주 개판인 것 같습니다.”
한이 지독한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전화를 끊은 종혁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대충 알고 있는 내용이긴 했지만 직접 들으니까 더 빡치네. 아, 이 씨벌새끼들.”
세계그랑프리에서 우승한 선수조차 지원하지 않는 빙신, 아니 빙상협회.
빠드드득!
이를 간 종혁은 몸을 돌렸다.
* * *
“대회에 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눈앞에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정신이 아득한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허억!”
숨을 다급하게 들이마시며 일어난 이십대의 초반의 남성은 송충이가 허벅지를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에 진저리를 치며 악몽을 털어 내려 애썼다.
“……씻어야겠네.”
땀으로 젖어 버린 몸.
화장실로 향한 남성은 몸을 벅벅 문질렀다.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라도 마치 모르는 것처럼 계속.
“후우!”
“일어났니? 일 가려면 밥 먹어야지?”
기형적으로 처진 왼쪽 어깨를 두드리며 다가오는 아버지.
자신을 뒷바라지하다가 무너져 버린 어깨에 울적함이 몰려든다.
남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겨울엔 일이 없잖아요.”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일감이 뚝 떨어지는 막노동판.
“그래서 내일부턴 다른 일 알아보려고요.”
“……그러니?”
‘정말 포기한 거니? 아깝지 않니?’라는 듯한 눈빛에 남성은 고개를 돌렸다.
“쉬고 계세요. 밥은 제가 차릴게요.”
“그래. 쉬게 된 김에 푹 쉬고. 너무 급하게 찾으려 하진 말고.”
“예.”
허름한 반지하의 부엌에 선 남성은 빨갛게 굳어 버린 김치찌개에 불을 올리고, 습관처럼 핸드폰을 꺼냈다.
“아, 문자가 와 있었네. 어? 연아?”
빵빵한 볼이 참 귀여운 어린 후배.
자신과 달리 재능이 넘쳐 났던 후배.
홍선 오빠! 놀자!
공짜로 마음껏 탈 수 있는 아이스링크 발견!
여기 겁나 따뜻해! 빙질도 경기장 수준!
흠칫!
굳어 버린 남성은 문자를 하염없이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