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322화>
84. 힘들다
늦은 오후가 되어가면서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사라지기 시작한 백사장.
그제야 바다에 살짝 몸을 담근 종혁은 하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왜? 뭔데?”
움찔!
백사장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다 몸이 크게 흔들린 최재수는 잠시 갈등을 하다가 몸을 일으켜 종혁의 옆에 앉았다.
찰싹 넘실거리는 파도가 엉덩이를 적신다.
종혁은 멍하니 수평선을 응시하는 그를 보며 혀를 찼다. 새진리 아브라함의 지주 사건 이후 가끔씩 낯빛이 어두워지며 먼 산을 보던 최재수.
‘얘도 슬슬 이 시기가 올 때가 되긴 했구나.’
“아브라함 애들 때문이야?”
“……그냥요.”
최재수는 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바다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이게 맞는 건가 싶고…….”
종혁은 그의 말에 공감을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최재수와 같은 생각을, 시기를 겪은 적 있기에.
사람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시기.
저런 놈들을 잡아 봤자 때려죽일 수도 없고, 아무리 잡아 봤자 바뀌지 않는 세상에 경찰이란 직업에 회의감이 드는 시기.
이전까지야 거의 대부분 종혁이 막장까지 치닫기 전에 사건을 해결했지만, 북한에서의 사건과 이번 사건이 큰 타격이 됐을 거다.
그리고 그동안 받은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그의 정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였을 터였다.
“어쩌겠냐. 세상이 변하지 않더라도 잡아야지. 그게 우리 일인데…….”
더럽고 좆같아도 피해자를 위해 범인을 잡아야 하는 것, 그게 경찰이다.
“재수야, 설화학교 애들 기억하냐?”
“잊을 리가 없잖아요. 고작해야 작년 일인데…….”
“그럼 됐다.”
“예?”
“잘하고 있다고.”
작년의 일이라도 기억을 한다면 잘하고 있는 거다.
“구원받은 피해자들의 얼굴을 기억한다면 넌 이게 천직이야.”
“……그럴까요?”
“당장 며칠 전 사건의 피해자도 기억하지 못하는 놈들이 수두룩한데 너 정도면 천직이지.”
“그, 그런 경찰도 있어요?”
“있어.”
스스로를 경찰이 아니라 공무원으로 여기는 부류. 선을 크게 넘지 않으면 결코 잘릴 일이 없기에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다 생각하는 부류.
“경찰에 그런 놈들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냐?”
“……개판이 되겠죠.”
“그러니 너 같은 놈이 필요한 거야.”
사람에게 환멸을 느낄 만큼 열정적인 경찰.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해 줄 수 있는 경찰이…….”
그런 의미에서 최재수는 정말 잘해 주고 있었다.
종혁은 최재수의 가슴을 툭 쳤다.
“그러니 이 가슴에서 타오르는 사명감은 꺼트리지 마라. 그럼 다신 안 볼 테니까.”
“아씨, 그게 뭐예요. 너무하네! 그래도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난 경찰인데 경찰 아닌 놈은 사람 취급 안 한다.”
“압니다, 알아요! 아니, 피해자에겐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어떻게 팀원에겐 이렇게 냉정하지?”
“그럼 남자 새끼한테 뽀뽀라도 해 줄까?”
“그건 저도 됐습니다!”
종혁은 목소리에 힘이 돌아온 최재수를 보며 피식 웃었고, 최재수도 한결 가벼워진 웃음을 터트렸다.
“어우 씨. 똥꼬 춥다. 가자.”
“푸흐흐. 옙!”
“꺄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뭐가 그리 좋은지 새까맣게 탄 얼굴로 바다를 뛰어다니는 사람들. 종혁은 같은 장면을 보는 최재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 저 웃음들 지키자.”
“……옙!”
종혁과 최재수는 웃음을 터트리며 리조트로 향했다.
‘흠. 그런데 저 사람들 구성이……. 에이, 이놈의 직업병.’
고개를 저은 종혁은 발을 성큼 내디뎠다.
“으하하하핫!”
“푸하하하핫!”
서울에서 출발했을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술을 배 속에 털어 넣으며 즐거워하는 경찰들.
그래도 저녁 9시가 넘어가니 일부 술고래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혼절한 상태다.
물론 종혁은 술고래 멤버 사이에 껴 있었다.
“어? 뭐여. 오 경감은?”
김판호가 방금까지 곁에 있었던 오택수를 찾았다.
“의무방어전이요.”
달그락!
순간 젓가락이나 안주들을 떨어트리는 유부남들.
김판호의 낯빛도 하얗게 질린다.
“여그까지 와서?”
“2팀장님은 가족이랑 마지막으로 여행 가셨을 때가 언제예요?”
……꿀꺽.
“그런 거죠.”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몸을 달아오르게 만든 술.
여기까지 왔으니 그런 거였다.
“자, 잠깐. 그러면 부부나 커플들 방을 따로 잡은 것도? 애들이나 부모님을 남녀로 따로 나눈 것도?”
종혁은 대답 대신 엄지를 치켜세웠다.
“최 팀장, 이 나쁜 놈아!”
“와 씨! 이러는 거 아니다, 최 팀장님!”
“반말이야, 존댓말이야?”
“반말해 줄까! ……요?”
“그럼 사모님들께 전화 드리고요.”
유부남들은 머리를 잡으며 소리 없는 절규를 했다.
“하, 쓰벌. 오늘은 여기까지구마잉. 다들 내일 살아서 보드라고.”
아내가 방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는데 여기서 더 엉덩이를 비빈다? 오늘 밤 혹은 내일 살인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 물론 피해자는 그들 본인이다.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기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준 종혁은 남아 있는 정용진 과장을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과장님은 안 가세요?”
“가족끼린 그런 거 하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겉으로만 부부라서요. 이혼조정기간입니다.”
“엑?”
“자식도 없으니 더 늦기 전에 서로 갈 길 가야죠.”
“그래서 덕자를…….”
정용진 옆에 배를 깔고 누워 잠들어 있는 덕자.
입맛을 다신 종혁은 몸을 일으켰다.
남의 가정사에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하는 건 오지랖이 아니라 눈치가 없는 거였다.
“일단 대충이라도 치우고 마시죠?”
“그럴까요?”
그렇게 말했지만 서로 성격들이 깔끔하다 보니 아예 싹 다 깨끗하게 치운 그들은 거실의 통유리를 열어 미지근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물었다.
“후우…… 최 팀장이 지금 몇 살이죠?”
“스물여섯입니다.”
내년, 2007년이면 스물일곱. 이제 몇 개월 남지 않았다.
“확실히 어리긴 하네요.”
“……?”
“지방청이나 서에 가면 고생 좀 하겠어요.”
“네?”
종혁은 미간을 좁혔다.
“잠깐. 저 내년에 인사이동 됩니까?”
“늦어도 3년 안에는 그렇게 되겠죠. 최 팀장 계급이 경정이니까.”
“아, 지방 순회…….”
정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자급에 해당하는 경정이나 총경은 지속적으로 지방 순회를 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여 역량을 길러 진급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종혁은 사실상 총경으로의 진급은 확정된 셈이나 다름없었으나, 그다음 계급인 경무관 진급을 위해서라도 지방 순회는 필수였다.
“내년에 타 과로 인사 발령이 날 테니 숙지하고 계세요.”
“예? 확정된 겁니까?”
“워낙 잘해 주셨어야죠. 저도 마음 같아선 계속 최 팀장을 휘하로 두고 싶지만, 다른 분들의 등쌀이 너무 세네요.”
“끄응…….”
너무 잘나니 이런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팀원을 직접 보고 뽑기 위해 순회를 염두에 두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일이 정해지니 종혁의 머릿속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전반기입니까, 하반기입니까?”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아마 하반기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때쯤이면 새 청장님이 취임하시니까요?”
“정답.”
“흠…….”
‘아, 본청을 벗어날 순 없는데.’
그 조직 때문이다.
놈들을 잡기 위해선 한계가 있어선 안 되는 수사 영역.
“다른 지방 광수대를 알아봐야 하나…….”
종혁의 중얼거림에 정용진은 눈을 빛냈다.
“계속 수사과에 있겠단 소리군요.”
“예, 뭐. 제겐 그게 맞으니까요.”
경찰엔 아직 바꾸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그건 최소한 경무관쯤은 되어야 시도가 가능한 일이다.
“그럼 외사국은 어떻습니까?”
“외사국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종혁의 어깨를 두드린 정용진은 맥주캔을 들고 일어섰고, 종혁은 방을 빠져나가는 그를 응시하다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외사국이라…….’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한 것인지 깨닫게 되어 생각이 깊어진다.
러시아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종혁이 오기만을 바라는 상황.
당연히 수사 협조나 공조가 지금보다 쉬워질 거다.
꿀꺽! 꿀꺽!
“아…… 힘들다, 힘들어.”
정말 골치가 아팠다.
맥주캔을 모두 비운 종혁도 벌렁 드러누웠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만나 미지근해진 공기가 그를 잠의 세상으로 안내했다.
* * *
띠리리리링!
우글우글.
“와아!”
“우와!”
쉼 없이 돌아가는 슬롯머신과 카드게임을 하는 사람들. 한쪽에선 룰렛이 돌아간다.
마치 영화 속 카지노의 모습을 빼다 박은 풍경에 일행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그건 경찰들도 마찬가지다.
“카지노는 외국인만 출입하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판호는 혀를 내둘렀다.
“아따, 온다온다 해 놓고 이제야 데려와 보는구마잉.”
“그러게요. 진작 한번 데려올 걸 그랬어요.”
최재수를 비롯한 특별수사팀의 경찰들은 김판호와 종혁의 대화를 듣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 원래 형사들은 늦어도 3년 안에 여기에 들러야 되거든.”
일종의 통과의례다.
“통과 의례요? 신고식처럼? …… 도박을 하는 게?”
애초부터 경찰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도박.
경찰들의 의문이 더 깊어진다.
“별로 유쾌한 의미는 아니야.”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인간을 보려면 정선에 가라.
“도박 중독이 인간을 어디까지 망가트릴 수 있는지를 보고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거니까.”
그래서 선배 형사들이 견학을 시켜 주는 거다.
“아…….”
짝!
표정들이 대번에 가라앉자 박수를 쳐서 이목을 모은 종혁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적당히 놀면 이것도 꽤 재미난 오락거리니까 오늘은 그런 우울한 거 생각하지 말고 즐기도록 합시다! 아시겠나요!”
“네-!”
“누가 뭐 게임의 필승법을 알려 주겠다, 집에 갈 차비나 밥 먹을 돈이 없어서 그러니 돈 좀 빌려 달라 그래도 돈은 절대 주면 안 됩니다!”
“넵!”
“그럼 호텔에 남아 있는 우리 미성년자들이 눈에 밟히더라도 빡세게 놀고, 오후 5시에 여기서 모이도록 합시다! 해산!”
“해산-!”
종혁은 우르르 흩어지는 사람들을 지켜보다 슬롯머신으로 향했다.
“이봐, 학생. 내가…….”
종혁은 어떤 머신을 골라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다가온 웬 남성에 씩 웃었다.
“왜? 깽값 벌려고?”
뿌드득!
“하, 하하. 그, 그럼…….”
남성이 부리나케 도망치자 종혁은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으로 뚱한 얼굴의 최재수가 앉았다.
“응? 뭐야? 할머님은?”
“다른 할머님들과 의기투합하셨어요. 씨이, 난 손자인데. 그것도 집을 산 손자인데…….”
“저런.”
결국 상여금까지 더해서 살던 집을 매매한 최재수.
집들이 때 내 손주, 자랑스런 우리 재수 하며 연신 얼굴을 쓰다듬던 할머니가 떠오르기에 안쓰럽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러게 평소에 잘했어야지.”
“내가 못한…… 에이씨.”
최재수는 툴툴거리며 슬롯머신에 지폐를 집어넣었고, 피식 웃은 종혁도 지폐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에이씨!”
“에이씨!”
종혁과 최재수 둘의 입에서 동시에 된소리가 나온다.
“아 씨, 이거 기계 조작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한 번을 안 맞아?!”
“내 돈 내놔라, 이 나쁜 기계야!”
쭉쭉 빨아 먹기만 하지 뱉어 내질 않는 나쁜 기계.
고작 한 시간도 안 되어 10만 원이 넘게 빨려 버린 것에 뒷목을 잡던 최재수는 자신의 몇 배를 잃고 씩씩거리는 종혁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팀장님 진짜 도박 못하네요.”
이전 투견도박 사건 때도 느꼈지만, 정말 운이 나쁘다. 다른 운은 다 좋으면서 희한하게 도박운만.
발끈!
“야, 그땐 일부러 잃어 준 것뿐이라고 몇 번 말했냐!”
그땐 운 없는 호구로 보여야 해서 알고도 잃어 줬었다.
몸을 단련한 게 얼마고, 본 심리학 서적이 몇 권이고, 검거한 범죄자가 몇 명인데 투견들의 상태를 모를까.
“네, 네. 그렇다고 칠게요.”
빠직!
이마에 힘줄이 솟은 종혁은 몸을 일으켰다.
“야, 카드 테이블로 따라와. 내가 진짜 도박이 뭔지 보여 줄…….”
띠리리리링!
“꺄아악!”
“와아!”
터지는 환호성에 고개를 돌린 최재수는 서로 얼싸안고 방방 뛰는 사람들을 부럽다는 듯 응시했다.
그건 종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또 보네, 저 사람들.’
어제 해변에서도 만났던 사람들.
“흐응.”
“왜 그러세요?”
“아니다. 아무튼 따라와! 내가 카드 카운팅이 뭔지 보여 줄 테니까!”
“네, 네.”
카드 카운팅이 뭔지 모르지만, 그래 봤자 어차피 잃을 거라며 생각한 최재수는 별 기대 없이 종혁의 뒤를 따랐다.
* * *
“후아!”
“와! 잘 놀았다!”
강원도 정선의 한 작은 모텔.
한 방에 모여 앉은 네 명의 남녀가 새까맣게 탔으면서도 또 술 때문에 빨갛게 달아오른 서로의 얼굴을 보며 키득거린다.
그들의 머릿속에 지난 일주일간의 추억이 스쳐 지나간다.
오션월드와 동해에서 신나게 놀고, 신나게 먹었다.
평소엔 꿈도 못 꾸는 회부터 조개, 대개, 소고기, 호텔 뷔페까지.
그리고 대망의 오늘. 피날레인 정선카지노에서 잭팟까지 터졌다.
정말 후회 없는 일주일이었다.
“이제 다들 후회는 없는 거죠?”
“네. 김 씨는요?”
“저도요. 박 씨는요?”
“저도요!”
어찌 후회 따위가 있을까. 인생 최고로 행복했던 일주일이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서로 연인이 된 네 사람은 서로의 손을. 삼십대 남성이 이십대 초반, 아니 그보다 어려 보이는 여성의 손을 꼭 잡고, 사십대 여성이 이십대 남성의 손을 잡았다.
“그럼 시작할까요?”
잠시 서로의 온기를 느끼던 그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삼십대 남성이 핸드폰을 꺼냈다.
“네, 카페장님. 저흰 준비됐습니다.”
-모두 후회 없이 즐기셨나요?
한 손에 박스 테이프와 수면제를 든 그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