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305화 (305/837)
  •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305화>

    “와아아아아!”

    금강산행 여객선이 정박한 북한의 항구,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이산가족들을 맞이한다.

    이북에 남겨 두고 온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사람들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지도 모르고 옛 기억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살아생전 다시 밟아 볼 거라 생각 못한 고향.

    어느덧 한국을 고향으로 삼게 된 그들이건만, 옛 향수가 그들의 심장을 콩닥콩닥 뛰게 한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남조선에서 오신 동무들을 환영합네다!”

    “환영합네다!”

    “이쪽으로 오시라요!”

    환영 인파가 걸어 주는 화사한 꽃목걸이를 걸고 태극기를 손에 든 사람들은 북한 측의 안내를 받아 항구를 빠져나와 북한이 미리 준비한 버스에 올랐다.

    “거기 동무들은 이 유람뻐스를 타시면 됩네다.”

    차관들이 탄 관광버스를 힐끔 본 종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원을 따라 다른 버스에 올라탔다.

    옛 70년대 버스를 연상시키는 꽤 허름한 버스.

    아무 빈자리에 앉아 목에 걸린 꽃목걸이와 스포츠백을 옆자리에 던지니 유니폼을 입은 외모가 고운 아가씨가 다가와 손을 내민다.

    “짐은 제게 주시면 됩네다.”

    “아, 무거우실 텐데.”

    “일없습네다.”

    단아하게 웃은 아가씨는 종혁의 스포츠 백을 집어 들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흡?! ……호호. 흡!”

    종혁은 피식 웃었다.

    “놔두세요. 그거 머리 위로 들다가 허리 다칩니다.”

    “미, 미안합네다.”

    얼굴이 희게 질린 아가씨는 오택수와 최재수의 짐을 머리 위 보관 장소에 넣은 후 이어 올라타는 이들의 짐을 받아 들었고, 그녀가 멀어지자 최재수가 목에 걸린 꽃목걸이를 쓸어내리며 음흉하게 웃는다.

    “어흐흐. 오 경감님, 아무래도 내 얼굴이 북한에서 먹히는 것 같지 않아요?”

    “저도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종혁과 오택수는 최재수와 공무원의 볼에 찍힌 입술 자국을 발견하곤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이미 진즉에 지워 버린 입술 자국이건만 둘은 뭐가 그리 좋은지 희희낙락이다.

    “하! 부럽다면 부럽다고 하세요! 못생긴 사람들이 아주 심보마저 못돼 가지고!”

    공무원도 말은 안 했지만 동감이라는 듯 시선을 돌린다.

    오택수는 종이 쪽지를 보물처럼 소중히 갈무리하는 둘을 안쓰럽다는 듯 응시했다.

    “……야, 쟤들 어쩌지? 진실을 말해 줘?”

    “냅둬요. 저러다 자기 통장까지 싹 다 털려 봐야 아, 내가 북한 꽃뱀한테 물렸구나 하겠죠.”

    “통장만 털리면 다행이니까 그렇지.”

    “설마 초대받고 온 사람들 상대로 통나무 장사를 하겠어요?”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한국인들을 맞이하는 환영 인파다.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사상이 검증된 이들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교육까지 확실하게 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그 안에 북한 측 요원이 섞여 있을 거란 건 당연한 의심이었다.

    어느덧 심부름꾼으로 따라붙은 공무원을 비롯해 사람이 몇 명 더 탄 버스를 둘러보며 눈을 빛낸 종혁은 이내 의자를 뒤로 젖히려 낑낑거리다 ‘에라이, 관광버스가 뭐 이러냐’며 포기하곤 눈을 감았다.

    “눈이나 붙이세요. 꽤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뭐야, 그런 거였어? 쯧.”

    오택수는 ‘전화는 어떻게 걸지? 호텔에서 빌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는 최재수를 힐끔 보곤 이내 종혁처럼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곧 버스가 출발했다.

    부르릉!

    “……님. 팀장님.”

    몸을 흔드는 손길과 작은 목소리에 눈을 뜬 종혁은 어느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옆자리에 앉은 최재수를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아, 아니 뭔가 이상해요. 저희 선두 차량이랑 다른 길로 들어섰어요.”

    “그래?”

    온통 풀밭뿐인 창밖의 풍경과 뒤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오택수를 본 종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좀 더 자.”

    “네? 아, 아니 느낌이 쎄하다니까요?”

    “네, 네. 알았어요.”

    손을 저은 종혁은 다시 잠을 청하려다 이내 목이 말라 다시 눈을 떴다. 그러곤 냅다 앞좌석을 발로 걷어찼다.

    퍼억!

    “헉?!”

    “동수 씨. 나 물.”

    움찔!

    갑작스런 행동에 눈이 동그래졌던 최재수는 이어지는 종혁의 말과 앞좌석에 앉은 이의 반응에 벌떡 일어났다.

    “도, 동수 씨세요?! 어, 언제 버스에?!”

    종혁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 모자를 쓴 남성의 모습에 계속 의자를 걷어찼다.

    “나 물 달라니까요? 물! 아니면 맥주랑 두부밥!”

    퍼억! 퍽! 퍽!

    “이 아새끼래!”

    벌떡 일어나며 모자를 벗어 팽개친 리동수가 종혁을 노려본다.

    “지금 여기가 남조선인 줄 아네?!”

    “오랜만에 봐 놓고 인사도 안 한 양반이 뭐래! 그것도 저렇게 시꺼먼 사람들만 데려와 놓고!”

    일행들을 제외한 모두가 살기를 갈무리한 귀신들이다. 다 모르는 얼굴들인 것을 보니 보위부 요원들인 것 같았다.

    환영 인사치곤 참 거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맥주랑 두부밥-!”

    ……빠득!

    “누가 맥주랑 두부밥 좀 가져오라!”

    “많이!”

    “……모두 다! 이제 됐네?”

    “땡큐! 아, 오랜만에 만나서 더럽게 반갑습니다, 리 조장.”

    “이 물에 빠지면 주둥이만 동동 뜰 아새끼래…….”

    뒤늦은 인사에 얼굴이 구겨져 있던 리동수는 헛웃음을 터트렸고, 요원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저 리 조장이 밀린 거이가?’

    ‘보고도 못 믿네?’

    ‘오마니. 이 아들이 곧 오마니를 보러 가려나 봅네다.’

    작은 충격이 버스 안을 휩쓸었다.

    *   *   *

    부우웅! 끼익!

    북한의 수도, 평양시의 호텔 주차장에 버스가 멈춰 선다.

    터벅터벅!

    “에이, 별로네. 두부지짐이랑 큰 차이 없는데?”

    “지금 30명이 먹을 걸 혼자 다 처먹고 그런 말을 하는 기야? 어떻게 사람이 소보다 더 처먹는 거이네!”

    “차라리 거기다 다진 고기를 넣으면 어때? 그럼 좀 괜찮을 듯?”

    “그건 고기가 넘쳐 나는 너희 남조선 자본주의 부루주아 돼지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디! 두부의 순수한 맛을 즐기라!”

    “풉!”

    “응?”

    고개를 돌린 종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북한군 정복을 입은 십여 명의 군인들 때문이 아니다. 그 앞에 서서 마치 하얀 백합처럼 깨끗하게 웃고 있는 한 여성 때문이다.

    얼굴이 확 밝아진 종혁은 그녀를 향해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헉!”

    헛숨 삼키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종혁에겐 들리지 않았다.

    “이 경우 없는 행동이나 어디서나 당당한 주둥이는 여전한 것 같습네다. 공화국에 오신 걸 환영합네다, 종혁 동무.”

    “큭큭. 이게 제 무기죠. 오랜만이에요, 순영 씨.”

    그렇게 말하며 잠시 떨어진 종혁은 그녀의 얼굴과 전신을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우마가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가끔은 뒤늦게도 찾아오는 트라우마. 험한 일을 겪었던 그녀인 만큼 이런 부분을 조심해야 됐다.

    종혁은 다시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세요.”

    “……소중한 곳이 뭉개지기 전에 개수작은 그만두시라요.”

    “쩝. 요거 안 먹히네.”

    뒤로 물러난 종혁은 싱긋 웃으며 호텔 외관을 둘러봤다.

    “이야, 이게 저희가 며칠간 묵을 숙소예요?”

    겉은 제법 그럴싸했다.

    “종혁 동무의 눈에는 차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지낼 만할 겁네다.”

    “어흠!”

    “아, 이쪽이 일전의 그분입네다.”

    ‘일전의 그분? 아!’

    가리봉동 위조지폐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으로 인해 인생이 나가리될 뻔했다던 인간.

    “인민보안성의 림학철 소좌요. 원래는 중좌였지만…….”

    “소좌 동지.”

    “커흠. 아무튼 은인을 이렇게 귀찮게 해서 미안하게 됐소.”

    인민보안성.

    북한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경찰 업무뿐만 아니라 철도와 소방까지 겸하고 있는 곳이다.

    “대한민국 경찰청 간편신고관리과 특별수사 1팀의 최종혁 경정입니다. 이쪽은 제 팀원들이고, 저쪽은 통일부 직원입니다.”

    “남조선의 부호 경찰에 대해선 내 바람따라 흘러드는 소리로 많이 들었소.”

    “……부호 경찰이요?”

    “소좌 동지.”

    “어흠흠.”

    뜨악하던 종혁은 이내 어색하게 웃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데 전 총정치국에서 불렀다고…….”

    “하하. 내 아바디가 중앙위원회의…….”

    “한 번만 더 부르면 세 번 부르는 겁네다, 소좌 동지!”

    “아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종혁은 접대용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거 훌륭한 아버님을 두신 분이셨군요. 그 커다란 등을 쫓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시겠습니다.”

    “허! 그걸 어찌…….”

    “날이 선선합네다. 일없으면 올라가시디요.”

    리순영은 종혁의 등을 떠밀며 소좌를 향해 이를 드러냈고, 그제야 아차 싶은 소좌는 목을 움츠리며 주춤주춤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호텔방은 외국인 전용이라서 그런지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꾸며져 있었다.

    다만 거의 모텔 수준이라서 모든 부분에서 미흡했다.

    쏴아아!

    “수압도 나쁘지 않네요.”

    “전기를 제외하고 불편한 점은 없도록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시라요.”

    고맙다는 듯 웃은 종혁은 침대에 털썩 앉으며 리순영을 봤다.

    그리고 씩 웃었다.

    “그래서요?”

    흠칫!

    마치 영혼을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

    종혁의 미소는 몸이 굳는 그녀를 보며 더욱 짙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인사치레만 하려고 부른 건 아닌 것 같은데…….”

    옆의 떠벌이 소좌가 아주 중요한 단서들을 말해 주었다.

    계급이 강등당한 자식을 둔, 그것도 국군 포로를 내놓을 정도로 대단한 권력을 지닌 아버지.

    몸을 사려도 모자랄 판에 이런 무모한 짓을 한다?

    말도 안 된다.

    ‘무슨 꼬투리를 잡히려고?’

    한국군보다 목이 날아가는 게 더 쉬운 북한이다. 즉,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부를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다.

    이에 대한 단서도 나와 있는 상태였다.

    ‘부호 경찰.’

    여기에 무려 정찰총국의 조장을 사사로이, 그것도 보위부와 섞어 마중을 나오게 한 점까지 합쳐지니 지난 며칠 동안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됐다.

    종혁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햐, 이 북한 사기꾼 새끼들. 내 이럴 줄 알았다.’

    종혁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래서 내게 뭘 얼마나 주시려고요?”

    철렁!

    들켰다. 모두 들켜 버렸다.

    ‘이래서 반대를 한 것이건만!’

    앞으로 펼쳐질 일을 직감한 순영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림학철은 아니었다. 갑작스런 정곡에 경악하긴 했지만 그는 함박미소를 지었다.

    “으하핫! 이거 호탕하기가 호랑이보다 더 호탕합네다! 뭘 원하십네까? 아니, 뭘 상상하든 우리 공화국은 더 해 줄 수 있습네다!”

    “호오? 제게 돈을 바라시면서요?”

    겉으로 드러난 어머니 고정숙의 자산만 수백억 그 이상의 규모다. 여기에 종혁의 명의로 된 자산까지 합하면 거의 천억에 육박한다.

    아마 태국 사건과 그 이후, 순철과 순희를 받아들이면서 북한에서도 조사를 했을 터.

    ‘부호 경찰’이라는 건 바로 이런 의미였다.

    ‘물론, 당장 지금 갖고 있는 것만 보고 이러는 건 아닐 테지.’

    당장 가지고 있는 돈보다도 그것을 벌어들인 능력. 주식 쪽은 드러나지 않았을 테지만, 10년도 채 안 되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인 능력을 원하는 것일 터였다.

    움찔!

    몸을 굳힌 림학철은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흐뭇하게 웃었다.

    “그 돈이 장마당 꽃거지들 코 묻은 옷처럼 느껴질 정도의 정보라면 어떡하갔습니까?”

    종혁은 눈을 빛냈다.

    ‘천억을 우습게 볼 정보?’

    이건 약간 흥미가 돈다.

    그 기색을 눈치챈 건지 림학철의 눈이 반짝였다.

    “부와 명예, 미녀. 얼마든지 말만 하시라요. 우리 공화국이 다 누리게 해 주겠습네다.”

    얼른 안기라는 듯 양팔을 벌리는 림학철.

    종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손가락을 폈다.

    “서른 살에 내무본부 국장, 별장 20채, 3억 달러 즉시지불.”

    “무, 무슨……!”

    “러시아가 내게 귀화 조건으로 건 베팅입니다. 미국은 여기의 1.5배.”

    아니다. 러시아와 미국은 이 열 배를 불렀다.

    지금은 더 올라간 상태다.

    하지만 그 정보라는 것에 흥미가 생겼기에 종혁은 슬그머니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림학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모두 경악을 한다.

    “무, 무, 무슨…….”

    “음? 거짓말 같습니까? 당신들도 나에게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 아닙니까?”

    국군 포로. 한국을 억제시킬 수 있는 수단마저 선뜻 포기하면서까지 말이다.

    “어떡하실래요? 아니, 그 전에…….”

    종혁은 하얗게 질린 림학철을 향해 희게 웃어 줬다.

    “러시아와 미국, 감당할 수 있겠어요?”

    종혁의 귀화에 가장 큰 장애물인 러시아와 미국.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림학철은 이내 반발하듯 외쳤다.

    “익! 곧 있으면…….”

    “소좌 동지!”

    순영의 외침에 림학철은 다급히 입을 다물었고, 종혁은 재차 눈을 빛냈다.

    ‘곧 있으면이라…….’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런지 뒤에 이어질 말이 절로 떠오른다.

    ‘흠. 순영 씨도 이것에 대해 안다는 건가?’

    림학철을 죽일 듯 노려본 순영은 고개를 숙였다.

    “우리 공화국의 준비가 미흡했습네다. 그러니 조금 더 고민할 시간을 줄 수 있갔습네까?”

    “얼마든지요.”

    재고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리라 생각했기에 너무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종혁의 모습에 순영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네다. 그럼 쉬시라요. 우린 이만 가 보갔습네다. 아, 보위부는 림 소좌를 모셔라. 내 최 동무와 할 말이 있으니 그것만 하고 따라가갔어.”

    “예. 가시디요, 소좌 동지.”

    “음……. 후. 그럼 쉬시라요.”

    제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런 상황에선 물러나는 게 옳다는 건 아는지 림학철은 순순히 방을 빠져나갔고, 순영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종혁에게 허리를 숙였다.

    “미안합네다, 종혁 동무.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아, 괜찮습니다. 대충 예상이 가니까요.”

    무리해서 순철과 순희를 종혁에게 보낸 순영. 거기에 가족이란 약점까지 있으니 순영은 아마 상부의 지시를 거스르지 못했을 거다.

    “일단 그 정도 베팅으론 힘들다는 거 아시죠? 그리고 날 억류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네다. 아마 로씨아가 폭격기를 띄우겠디요.”

    “푸흐. 그 정도는 아닐 테지만 그래도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런 베팅을 받고도 러시아나 미국에 귀화를 하지 않았다는 건 한국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증거였다.

    어차피 처음부터 귀화는 무리였다는 뜻이다.

    러시아와 미국의 조건을 알았다고 해도 말이다.

    “이제 어떡하실 겁네까? 공화국이 조건을 다시 맞출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겁네다.”

    아마 종혁이 돌아가는 그날까지 판돈이 준비되지 않을 수 있다. 돌아가는 배편에 종혁이 나타나지 않으면 큰일이 날 테니 그 전에는 돌려보내야 했다.

    ‘아직 공화국은 준비가 안 됐다.’

    “그러게요. 저도 그게 고민이긴 하네요. 내가 평양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광도 하루 이틀일 테고…….”

    감시를 받으며 할 관광이 재미나 있을까.

    순영은 고민하는 듯한 종혁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마침 그녀도 종혁이 호텔에만 머물게 하면 안 된다는, 북한의 좋은 모습을 보여 주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럼 이건 어떻습네까? 종혁 동무와 경찰대학교의 교수 동무가 합작하여 개발한 수사 기법을 강의하는 겁네다.”

    “……네?”

    종혁은 눈을 껌뻑였다.

    그러다 활짝 웃었다.

    “오호라? 이거 내가 호텔에 있으면 안 되는 구나?”

    움찔!

    “좋아요. 우리 순영 씨 부탁인데 당연히 해 줘야죠. 우리가 어떤 사인데요. 그런데…… 맨입으로?”

    “……뭘 원하십네까?”

    순간 종혁의 낯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북한에 숨어든 범죄자 새끼들 있죠? 걔들 내놔요.”

    *   *   *

    “리 소좌! 왜 이제…… 컥!”

    굳은 얼굴로 호텔을 나온 순영은 초조해하다 다급히 손을 드는 림학철의 목을 움켜쥐었다.

    철컥! 촤좌작!

    순간 두 패로 나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군인들.

    “그만.”

    그들을 멈춰 세운 순영은 살의를 담은 눈으로 림학철을 죽일 듯 노려봤다.

    “어이, 림학철이. 처신을 잘못해서 강등되고도 배운 게 없는 거이야?”

    움찔!

    “와, 와 이러네! 컥! 나, 난…….”

    “공화국의 훌륭한 모습을 보여 준 후에 조건을 내밀어도 모자랄 판에 와 조건부터 내미네? 그건 어디서 배운 협상질인지 말해 보라. 내 직접 가르쳐 준 아새끼의 모가지를 돌려 버릴 테니!”

    “지, 진정하라, 리 소좌!”

    “진정하게 생겼네! 지금 이걸 어떻게 할 거이야! 너도 사내새끼라면 은혜를 알아야 할 것 아니간-!”

    마치 호랑이의 포효처럼 추상 같은 호통.

    “……미, 미안하다, 소좌 동지. 내 또 마음만 앞서 일을 그르쳤어.”

    림학철이 울음을 터트릴 듯 울상을 짓는다.

    순영은 이제 그만둬야 할 때란 걸 깨달았다.

    “하아. 일없습네다. 일단 밖으로 끌어낼 수는 있게 됐으니.”

    “헉! 저, 정말이야?! 공화국의 훌륭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게 된 거이야?”

    고개를 끄덕인 순영은 종혁과의 딜을 말해 주었고, 림학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잘했다! 정말 내겐 리 소좌밖에 없어!”

    공화국에 외화를 바치는 범죄자들을 내놔야 하는 게 마음에 좀 걸리지만 임무를 망치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닥치고 잘 들으시라요.”

    “응! 응! 말해 보라.”

    “종혁 동무는 소좌나 나나 막을 수 없는 존재란 건 인정하디요?”

    종혁의 방북이 결정된 그날, 러시아에서 연락이 왔다. 이래저래 돌려 말하긴 했지만, 종혁을 건드렸다가는 가만 안 두겠다는 엄포. 이날 러시아 계파 쪽 장성들도 참 많이 찾아왔었다.

    그래서 위에선 더 욕심을 냈지만, 그렇기에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말이다.

    “걱정 말라! 내 앞으론 이런 실수 안 할 거이야! 무조건 동지 말을 듣갔어!”

    “……그 말 꼭 지키시라요.”

    너무 믿음직스럽지 못해 짜증이 울컥 솟지만,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종혁이 이대로 돌아갈 확률이 백 퍼센트에 육박한데, 림학철이 얻는 게 없다? 그땐 림학철의 보좌인 순영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걸 넘어 교화소로 보내질지도 모른다.

    ‘내가 이 빚은 어떻게든 받아 내갔어.’

    콧방귀를 뀌며 돌아선 순영은 종혁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대단한 사람.’

    적지의 한가운데임에도 당당하기 그지없던 미친 배짱.

    정말 존경심밖에 안 들었다.

    “아, 기런데 오늘 보낼 그 선물은 어찌할 거이가?”

    “……놔두시라요.”

    모든 걸 눈치챈 이상 종혁이 알아서 할 거다.

    그녀는 종혁을 믿었다.

    ‘그나저나 북한에 숨어든 범죄자라…….’

    이쪽에서 속인 게 있으니 싹 다 추려 내야 할 터.

    명단을 확보하려면 아마 꽤 뛰어다녀야 할 듯싶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고, 림학철 소좌는 그런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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