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213화>
룰루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오던 종혁은 병실 입구를 막고 있는 검은 양복을 입은 두 인종의 사내들에 눈을 빛냈다.
‘벌써 왔나 보네, 국정원.’
"수고하십니다."
스윽.
"응?"
종혁은 가로막은 손과 손의 주인을 번갈아 봤다.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에이, 이러지 마요. 내 병실인데? 후회합니다?"
"후회란 단어는 최 트레이너가……."
퍼억!
"컥!"
종혁은 배를 움켜쥐며 눈을 부릅뜬 요원의 관자놀이를 팔꿈치로 후려쳤다. 그에 요원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다른 요원들이 발작을 일으켰다.
"이봐, 최 트레이너!"
"이 자식이 죽으려고! 야!"
종혁은 살기등등한 그들의 모습에 어깨를 들썩였다.
"푸흐흐. 이 양반들이 벌써 감이 떨어졌나. 이봐, 당신들을 가르친 게 나야. 벌써 잊었어?"
움찔!
순간 그들의 몸이 굳는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지옥 같았던 나날들을 말이다.
그러다 참다못해 폭발했던 몇 명은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무기는 쥐지 않았지만, 동시에 달려들었는데도 말이다.
코웃음을 친 종혁은 국정원 요원과 함께 서 있던 SVR 요원을 봤다.
"유고, 나 감당 가능해요?"
"……총을 쥐면 가능하겠군요."
"하지만 여기서 못 쏘죠?"
"……."
SVR 요원은 슬그머니 입구에서 비켜섰고, 감사하다 고개를 끄덕인 종혁은 문을 박차며 들어갔다.
"구원군 등장이요! 혼자 경찰이라서 많이 뻘쭘하셨죠, 청장님?"
김종두 과장은 마치 일행이 아니라는 척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택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내 부하가 좀 사납습니다."
"……아닙니다. 최 경감에 대해선 잘 알고 있으니까요. 오랜만이야, 최 경감. 늦었지만 경감으로 진급한 거 축하한다."
"오랜만입니다, 차장님."
국정원 국내 파트의 차장. 요원들에게 피지컬 트레이닝을 전수하던 당시 몇 번 기웃거렸던 인물이다.
"그리고 팀장님은 당장 오늘 통화했고."
"야, 야!"
"그래."
차장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우리 요원들을 사사로이 이용했더군."
"와, 먼저 언제든 도와주시기로 해 놓고 이렇게 말 바꾸기 있어요? 이러면 섭섭한데요."
"……쯧."
"그리고 그 덕분에 찾던 놈들도 찾았잖아요."
"뭐?"
차장이 눈을 부릅뜨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종혁을 노려본다.
그러나 종혁은 이미 나탈리아를 보고 있었다.
"아까 분명 내 옆구리에 구멍 뚫은 놈들을 쫓다 보니 아는 얼굴들이 나왔다고 했죠? 그리고 그 아는 얼굴은 여기 국정원도 아는 얼굴일 거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나탈리아가 박수를 쳤다.
"역시 영특하네요, 최."
씩 웃은 종혁은 차장을 봤다.
"그리고 그 국정원도 아는 얼굴은 차장님 역시도 찾던 놈들일 테고. 그런데 어머나, 그걸 여기 팀장님이 내 부탁을 받고 찾아 버렸네?"
"……경찰 조직의 미래가 밝은 것 같습니다, 청장님."
"목줄은 단단히 쥐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이택문의 말에 내심 섭섭해진 종혁은 나탈리아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럼 저도 자격이 있다 판단을 하고 잠시 세 분의 대화에 개입하겠습니다."
종혁은 나탈리아를 봤다.
"그래서 그놈들은 찾았어요?"
"찾긴 찾았는데, 이미 도망쳐 버린 뒤였어요. 건물에 불을 질러 버리고."
"불이요? 호오오……. 신기하네. 나도 그런 애들 아는데."
종혁은 흠칫 몸을 굳히는 김종두를 응시했다.
"조, 종혁아, 이거 설마……."
"거봐요. 내가 촉이 섰다고 했잖아요."
"이런 미친?! 아니, 걔들이 얘들과 연결된다고?! 이게 말이 돼?! 확률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어디 세상 일이 확률로만 돌아가나요."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지!"
타아악!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이택문이 종혁과 김종두를 봤다.
"설명해."
잡아먹을 듯한 그의 눈빛에 김종두가 발작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작년 겨울 강원도의 철량리란 마을에서……."
그렇게 시작된 김종두 과장의 설명에 이택문의 미간은 점점 좁혀져 갔다. 그건 국정원 차장도 마찬가지였다.
왜인지 기시감이 드는 내용. 그는 거대한 교회란 대목에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 이거 설마?’
"그런데 추적을 해 보니 놈들이 아지트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 모처의 교회는 이미 불타 버린 뒤였고, 놈들도 세상에서 증발해 버린 듯 자취를 감춰 버렸기에 수사는 거기서 종결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에 탔다? 세상에서 증발해 버린 듯 사라졌다?"
종혁은 눈에 의구심이 들어차기 시작한 이택문과 이미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차장을 보며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김종두에게 귓속말을 했다.
"거봐, 맞잖아요. 우리가 찾는 새끼들."
"아니, 이게 동일 조직이라는 걸 떠올린 네가 미친놈이지!"
그런 둘의 모습을 일견한 이택문은 나탈리아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이거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부탁하는 말투가 아닌 강요하는 말투.
나탈리아는 싱긋 웃었고, 종혁은 속으로 아이고 이마를 때렸다.
"내가 말을 해야 될 이유가 있나요?"
"여긴 대한민국입니다, 지부장."
"리, 그런 말은 자신보다 약자에게나 하는 거랍니다."
쾅!
"지금 대한민국이 우습다는 말입니까!"
"편하게 생각하세요. 음, 커피가 맛있군요."
"이봐, 지부장!"
짜악!
분노를 터트리려던 이택문은 박수를 친 종혁을 뚫어지게 쳐다봤고, 종혁은 싱긋 웃었다.
한참 동안 그런 종혁을 노려보던 이택문은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고, 수고하셨다며 고개를 숙인 종혁은 나탈리아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그냥 좀 가르쳐 주면 안 될까요? 나도 내 옆구리에 구멍을 뚫은 새끼들이 어떤 새끼들인지 궁금하니까!"
그 말과 함께 종혁의 몸에서 살기가 폭발했다.
그러자 나탈리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정말 욕심이 난다니까. 좋아요. 친구가 이렇게 간절히 요청을 하니 들어줘야겠네요."
"고마워요, 나탈리아. 하지만 귀화는 안 됩니다."
"아쉬워라."
장난스레 눈을 흘긴 그녀는 이내 다리를 꼬며 입을 열었다.
종혁과 함께 놈들을 박살 냈던 그날의 일을 말이다.
나탈리아는 자세하게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알아야 할 건 모두 알렸다.
그에 병실엔 침묵이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놈들이 이 대한민국에 있다고?’
단순히 국정원 안가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기에, 심지어 그걸 저지른 사람이 국정원 안가 관리 요원이었기에 눈에 불을 켠 채 놈들을 쫓았던 차장으로선 알고 있었냐는 듯 팀장을 봤고, 팀장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택문도 이런 차장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런 놈들이 이 대한민국에서 활개를 치고…….’
"이야아."
갑작스런 탄성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종혁을 봤다.
"아주 재밌는 새끼들이네, 이거?"
종혁은 이택문을 봤다.
"청장님, 어떤 새끼님들이 이 개새끼들을 부산청으로 넘기라고 했다고요?"
빠드득!
잠시 깜빡하고 있었던 일을 상기한 이택문은 이를 갈았다.
"이 대한민국에 벌레들이 있었군."
"그러게 말입니다."
종혁은 분노를 불태우는 이택문과 차장의 모습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엮었다!’
나탈리아가 의도한 그림이자, 종혁이 교정한 그림.
종혁은 나탈리아를 봤다.
‘어떤가요? 내 솜씨가?’
‘굿.’
아주 굿이었다.
이택문과 나탈리아, 국정원 차장과 팀장이 떠나고 종혁과 김종두 과장만 남겨진 VVIP 병실.
김종두는 심란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제 나도 늙은 건가."
"왜요?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어서요?"
"아니, 결국 침묵하기로 한 세 분의 결정을 이해해 버려서."
이렇게 놈들에 대해 알게 됐지만, 이택문과 국정원 차장의 결정은 침묵을 하자는 것이었다.
국정원은 이미 배신자가 나왔기에, 이택문은 박종명 부산청장이 의심되기에.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지켜지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 알기로 합의를 보았다.
나쁜 놈들은 어떻게든 때려잡아야 했던 김종두로선 이 결정이 너무 답답했지만, 그러면서도 이해해 버리고 만 자신의 모습에 작은 환멸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런 개새끼들은 대한민국 경찰 전체가 달려들어서 때려죽여야 하는데!’
"아, 좆같네."
"전 그래서 더 과장님이 존경스러운데요?"
"뭐?"
종혁은 눈이 흔들리는 그를 보며 푸근히 웃었다.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하신 거잖아요."
대한민국 경찰 전체가 달려들어서 검거한다?
그래서 뿌리를 뽑을 수 있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럴 수 있었다면 이미 예전에 가진 바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그렇게 했을 거다.
하지만 한 놈이라도 놓치면?
그게 이놈들의 대가리인 ‘어르신’이라면?
훗날의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또 독버섯이 자라고 말 거다.
종혁은 그런 끔찍한 미래를 맞이하고 싶은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내가 현명했다고 생각해?"
"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정말이라는 듯 단단히 빛나는 종혁의 눈빛에 김종두는 풀썩 웃고 말았다.
"그래. 너랑 내가 이제 놈들에 대해 알고, 청장님도 알게 됐는데 이보다 뭐가 더 중요하겠냐."
"그럼요.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하죠. 과장님과 청장님이 아시게 됐다는 거."
김종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김종두 본인과 이택문은 접근하는 모든 것, 모든 사건에서 놈들을 의심하게 될 터.
범죄 수사에 거리와 성역이 없는 특수범죄수사과의 장인 김종두 본인과 전국 경찰 조직의 모든 걸 볼 수 있는 이택문.
이 정도만 해도 놈들을 잡을 그물은 만들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국정원과 SVR도 있잖아요."
국내 파트의 안보를 총괄하는 차장이 놈들에 대해 알게 됐다.
솔직히 차장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놈들의 끄나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끄나풀이건 협력을 하건 상관없지. 그에 대한 대비는 다 해 놓은 상태니까.’
종혁의 가슴속에서 살의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풋. 걔들이 우릴 돕겠냐? 오늘처럼 뺏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아."
종혁은 그럴 수도 있다며 어깨를 으쓱였고, 김종두는 뜬금없이 알게 된 거대한 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그런데 결국 잡긴 잡았네?"
"어? 그러네요?"
경찰 이미지 마케팅과로 전출이 결정됐을 때 본청 옥상에서 둘이 나눴던 대화. 김종두는 종혁에게 가서 한풀이 다 하고 몸성히 돌아오라고 말했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옆구리랑 어깨에 구멍이 뚫렸네?"
"사, 사랑합니다!"
주먹을 부르르 떨던 김종두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였다.
"넌 진짜 굿을 해 봐. 내가 볼 때 네 조상님들이 널 싫어하는 것 같아."
"아하하."
"웃기는……."
피식 웃은 김종두는 종혁의 어깨를 쫙 때리곤 몸을 돌렸다.
"간다. 몸조리 잘해."
"으윽. 들어가십시오. 충성."
쿠웅.
문이 닫히자 종혁은 담배를 물었다.
그런 그의 눈은 언제 웃었냐는 듯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 이제 그물은 넓혔고……."
이제 국정원도 종혁의 부탁을 함부로 무시할 순 없을 터. 혹여 차장이 놈들의 끄나풀이라고 해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이용할 수 있는 패가 더 늘어났다고 봐야 했다.
아니, 예전에 쥐었던 패를 이제야 제대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언제 어떻게 써야 가장 자연스러울까 고민했던 나날들.
그것만으로도 정말 엄청난 성과였다.
"이제 놈들이 하나둘씩 걸려들기만을 바라면 되겠네."
그렇다보면 결국 놈들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 터.
"푸후우. 기다려지네, 그날이."
미래 어느 날, 발밑에서 버둥거리며 악을 지를 얼굴조차 모르는 어르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온몸이 저릿저릿 울리는 것 같았다.
종혁의 미소는 더욱 비릿해졌다.
-엇? 이제 오십니까, 제수씨!
-안녕하세요, 과장님. 일이 이제야 끝나서요.
‘제수씨? 엄마?’
눈을 껌뻑이던 종혁은 문을 걷어차듯 거칠게 열며 들어오는 어머니 고정숙의 무심한 얼굴을 발견하곤 하얗게 질려 버렸다.
‘아, 난 죽었다.’
침대에서 내려온 종혁은 무릎을 꿇었다.
"살려 줘. 잘못했어요."
* * *
불이 꺼진 어두운 병실.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고영광은 손톱을 깨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난 왜 만날 이럴까.’
너무도 달콤했던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결과일까.
아니면 실력이 좀 있다고 자만했던 결과일까.
‘부모님이 살아 계셨으면 내가 이런 위험한 걸 했을까?’
당시엔 위험한지 위험하지 않은지 몰랐지만, 결국 그런 생각까지 든 영광은 무릎을 더 끌어안았다.
"엄마. 아빠……."
드르륵! 쾅!
"씨부럴. 야, 네가 어둠의 자식이냐?"
불을 켠 종혁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이쪽을 보는 영광에게 캔 맥주를 던졌다.
"앗!"
"좆같을 때는 술이 최고지. 마셔."
"저, 저 미성년자인데……."
"지랄. 맥주가 술이냐? 내숭 떨지 말고 마셔."
"……감사합니다."
달칵, 치이익!
"우왓!"
"아주 지랄 염병을 한다."
"아니, 이건 형이 던져서……."
"닥치고 휴지 어디 있어."
영광이 가리킨 곳에서 휴지를 가져와 대충 닦은 종혁은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며 술을 들이켰다.
"그런데 얼굴도 맞으셨어요? 눈이 판다……."
움찔!
"닥치고 안 마시면 그냥 아가리에 꽂아 넣는다."
어깨를 움츠린 영광은 눈치를 보며 캔맥주를 입에 가져갔고, 종혁은 그사이 다 마신 캔을 구기며 다른 캔을 꺼내 들었다.
"여기 치킨도 먹어 가면서 마셔."
"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불편하지만 마냥 불편하지는 않은 침묵.
배가 차고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르자 영광의 입술이 달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보다 종혁의 입이 먼저 열렸다.
"일단 처벌은 면치 못할 거야."
"혀, 형!"
"네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결국 해킹을 한 건 맞으니까 법의 심판은 받아야겠지.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마. 형이 좋은 변호사 붙여서 집행 유예 받게 해 줄 테니까."
"지, 집행 유예요?"
"어, 있어. 빨간 줄이 그어지는 건 맞는데, 그냥 사회에서 평소처럼 살 수 있는 거. 그런 다음에 네 재산 찾자."
"……네?"
"네 부모님이 네게 남긴 유산. 네가 정당히 받았어야 할 네 권리."
종혁은 다시 눈이 동그래지는 영광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러니 버텨."
울컥!
버티란 말에 갑자기 눈물을 왈칵 솟는다.
"또, 또요? 왜요? 왜, 왜 나만 견뎌야 하는데요? 대체 전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건데요! 왜 나만-!"
그동안 쌓인 한의 폭발에 종혁은 씁쓸히 웃었다.
"어쩌겠냐. 버텨야지. 이 좆같은 세상 그거 말고 답이 있겠냐?"
특히 부모 없는 아이에겐 너무도 가혹한 세상이다.
"흐어어어엉!"
종혁은 영광을 한 팔로 끌어안았고, 영광은 그 넓은 품에서 그동안 쌓였던 모든 울분과 설움을 토해 냈다.
"훌쩍. 감사합니다. 정말 다…… 왜 제게 이렇게 해 주시는지 모르겠지만……."
"야, 내가 한 말 벌써 잊었어? 네가 정수 형 동생이니까 내게도 동생이라고 했냐, 안 했냐?"
"해, 했는데……."
"그럼 뭐가 문제야? 씨발, 형이 돼서 동생한테 이 정도도 못해 줘?"
"혀엉."
이런 사람도 있구나. 이런 어른도 있구나. 다 날 괴롭히는 것만은 아니구나.
영광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남자 새끼가 울진 말고."
"흡! 쿨쩍……. 헤헤."
"웃기는."
그래도 헤헤 웃는 영광의 모습에 종혁은 진짜 명함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럼 간다. 오늘은 그거 마시고 푹 자고 힘든 일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
"어, 어디 가시게요?"
"할 일이 있어서."
고개를 모로 기울인 영광은 닫힌 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왜일까.
다시 혼자가 됐는데, 방금 전처럼 외롭고 무섭지가 않았다.
영광은 헤실 웃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 * *
과아아아앙! 끼익!
차를 몰아 어딘가에 도착한 종혁은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를 지나던 경찰들은 웬 환자가 들어오자 막아서려고 했지만, 종혁이 보여 주는 경찰공무원증에 순순히 물러났다.
그렇게 지하로 향한 종혁을 반긴 건 빼곡하게 세워져 있는 컴퓨터 책상들과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그리고 치열한 응대 소리였다.
종혁은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을 찾았다.
"충성. 본청 경찰 이미지 마케팅과 최종혁 경감입니다."
"무슨 일이야?"
"윤문현 경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래? 불러 줄까?"
"아닙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음?"
고개를 꾸벅 숙인 종혁은 안으로 들어갔다.
"네, 112입니다."
그랬다. 여기는 112 신고센터였다.
물어물어 윤문현 경장 앞에 선 종혁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윤문현 경장님?"
"예?"
이제 이십대 후반 정도 됐을까.
제법 잘생긴 외모의 사내가 약간 짜증 섞인 눈으로 쳐다본다.
"오늘, 아니 어제 22시 33분에 자기가 해킹을 했는데 누가 잡으러 왔다는 신고 전화를 받으신 적 있죠?"
"……아, 그 전화요? 네, 맞습니다. 제가 받았습니다."
"그래요?"
‘너구나?’
이놈이 맞았다.
"야."
쫙!
"어?"
볼을 맞은 윤문현이 당황하며 눈을 껌뻑인다.
종혁은 그런 그의 양 볼을 툭툭 쳤다.
"야, 야."
"이,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윤문현은 다급히 일어났고, 그 순간 종혁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야, 이 개새끼야-!"
퍼어억! 쿠당탕!
112 신고센터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