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212화>
"아이고, 배야."
옆구리의 실밥이 터질 듯 따끔거리고 나서야 웃음을 멈춘 종혁은 다시 뚱한 얼굴로 돌아온 이택문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얼마나 많던가요. 세진은행이 털리면 안 되는 인간들이."
"많았지."
오늘 하루, 아니 하루도 아니다. 1시간도 안 돼서 연락이 온 곳만 열 곳이 넘는다.
다들 불면 날아가 버릴 송사리였지만, 그들의 배후는 이택문의 자리를 위험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권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사건은 어디로 넘어갑니까?"
"부산청."
‘박종명?’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종혁은 눈을 껌뻑였다.
하지만 이내 곧 이해했다.
종혁이 파악한 박종명은 권력지향형 인물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는 이 인간이 그 조직과 얽혔냐는 건데…… 일단 체크.’
"씁! 최종혁, 얼른 아는 거 안 불지?"
상황 파악을 끝내고 경악하던 김종두 과장이 재촉을 하고, 이택문도 눈빛으로 재촉을 하자 종혁은 베게 뒤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혹시 이 이름들입니까?"
"……?!"
어떻게 알았냐는 의문이 담긴 이택문의 눈빛에 키득키득 웃은 종혁은 다시 베게 뒤에서 다른 쪽지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번 일에 억울하게 휘말린 고영광 씨가 목격한 겁니다. 아마 이 사람이 놈들의 진짜 목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유달수?"
"계좌번호가 몇 번으로 시작하는지 보이십니까? 참고로 힌트는 남산입니다."
"중정?"
중앙정보부. 안기부의 전신이자, 옛 군부독재의 흔적.
그 민감한 단어가 나오자 이택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사해 보시면 꽤 재밌는 게 튀어나올 겁니다."
"야, 최 경감."
"저도 이 이상은 모릅니다."
아니다. 안다.
회귀 전 이때쯤 대한민국을 뒤흔든 사건이 하나 있었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의 망령이 죽지도 않고 기어 나와 떠벌린 어떤 말 때문에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의 기업 회장이 휠체어를 타고 검찰에 출석을 하였다.
‘설마 그게 이놈들 작품이었다니!’
솔직히 유달수란 이름만 가지곤 회귀 전의 그 사건과 연결을 시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었던 중앙지검 검사장이 알려 준 몇몇 정보들 가운데 이 계좌번호에 대한 게 있었다.
과거 중앙정보부 및 안기부가 소속 요원들이 은행에서 통장을 발급받으면 무조건 이렇게 시작되는 번호였다고 말이다.
그렇다 보니 절로 이 사건이 떠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회귀 전, 세진은행 해킹 사건과 이 사건은 분명 별개의 사건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어지는 사건.
‘대체 왜? 뭣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지른 거지? 설마…….’
"야, 설마 이거 이 새끼들이 이 유달수란 놈의 뒷주머니를 털어서 멱살을 잡고 뭔가를 터트리려고 한 거 아닐까?"
흠칫!
마침 같은 생각을 하던 중이라서 속으로 놀란 종혁은 말을 꺼낸 김종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유달수는 과거의 망령이다. 이 계좌에 든 돈 한 푼이 아쉬울 인간이란 소리다.
종혁은 이택문을 봤다.
"조용히. 연락 중이니까."
검지를 입에 가져갔던 이택문은 마침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입을 열었다.
"원장 되십니까? 나 이택문 청장입니다. 옛 중정이나 안기부 요원이었던 사람의 신상을 알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마 내용을 들어 보시면 원장도 꽤 관심이 생길 겁니다."
이택문은 약간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겨 본격적인 통화를 시작했고, 김종두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는 형 집에 놀러 갔다가 뜬금없이 해킹 사건에 휘말려 칼을 맞더니, 이젠 대가리 속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를 중정 요원이라고? 종혁아."
"네."
"내가 진지하게 말하는데, 너 굿 한번 해 봐라. 이러다간 네가 제명에 죽지 못하겠다."
"푸핫! 봐서요. 지금보다 심해지면 생각해 볼게요."
"장난 아니고 진심이다. 진짜 꼭 해 봐."
그렇게 말한 김종두는 목이 타는지 멀리 있는 냉장고로 향했다.
그때였다.
-지치고 힘들 땐…….
"네. 최종혁 경감입니다."
-나예요.
나탈리아다. 종혁은 눈을 빛냈다.
-정말 이놈들과 최는 끊을 수 없는 악연인가 보네요.
‘그럼요. 절대 끊을 수 없는 악연이죠.’
"그래서 어딥니까?"
종혁은 국정원 팀장뿐만 아니라 나탈리아에게도 부탁을 했다. 왠지 느낌이 이상하니 혹여 해킹 때 이상한 놈들이 있으면 추적을 해 달라고 말이다.
그 결과가 이제야 나온 것 같다.
-기다려요. 곧 올라갈 테니까.
"네?"
-걱정 말아요, 내 친구.
그 말을 끝으로 끊긴 전화에 종혁은 ‘대체 무슨 생각이냐’며 미간을 좁혔다.
"왜? 뭔데?"
"아뇨. 아는 분께서 문병을 오신다고 해서요."
"음?"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드르륵!
"맙소사! 몸은 괜찮나요, 최!"
들어오자마자 종혁에게 키스를 퍼붓는 러시아 미녀에 김종두와 이택문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종혁아. 이, 이 아름다운 분은 누구시냐?"
커다랗게 만발한 장미꽃이 사람이라면 이럴까.
저 꼭대기에 앉아 세상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여왕벌이 사람이라면 이럴까.
꽃향기를 가득 풍기는 금발 러시아 미녀의 등장에 김종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건 이택문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표정은 여전히 뚱하지만 나탈리아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
‘에라이.’
"인사하세요. 예전부터 저를 도와주신 주한 러시아대사관 2급 서기관 안젤리나 씨예요."
종혁은 행복의 쉼터로 인해 인연을 맺게 됐다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1급이에요, 최."
그녀의 능숙한 한국어에 김종두와 이택문이 놀란다.
"그렇다고 하시네요."
"어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종혁이가 아빠처럼 생각하는 본청 특수범죄수사과의 과장! 김종두입니다!"
"아, 당신이 김종두 과장이군요? 안젤리나예요. 제 친구 종혁을 많이 아껴 주셔서 감사해요."
"으허헛! 그런 것까지 말했니, 종혁아?"
‘이봐요. 당신 딸이 셋이잖아.’
사모님도 두 눈 시퍼렇게 살아 계신다.
"경찰청장 이택문입니다, 러시아 정보부 한국 지부장님. 한국어가 유창하시군요."
‘당신도 사모님이 아직…… 음?’
종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장님, 이분은 서기……."
말을 정정하려던 종혁은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나탈리아와 이택문의 모습에 풀썩 웃고 말았다.
"국정원장님께 들으셨나 보군요."
들은 시기는 아마 김가을 살인사건 때일 것이다. 그때를 제외하면 이택문과 국정원장 사이엔 접점이 없었다.
이택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뺏기면 안 된다고 어찌나 신신당부를 하던지, 이택문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그런 비밀을 감추고 있었을 줄이야…….’
최기룡이 청장이었을 시절부터 국정원이 왜 경찰을 지지하나 싶었는데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종혁은 혼란스러워하는 김종두에게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는 눈빛을 보내곤 나탈리아를 봤다.
‘이래서 굳이 올라온다고 한 거구나.’
종혁은 그제야 그녀가 그리는 그림에 대해 깨닫고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대단한 여자라니까.’
이래서 반해 버릴 수밖에 없다.
"흐응."
순간 분위기가 돌변한 나탈리아는 백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치이익.
새빨간 입술에 물려 타들어 가는 담배에서 연기가 몽환적으로 흩어진다.
정체가 들통이 나자 그녀는 본래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내 정체를 알고 있다니 말이 편해지겠네요. 비공식 요청이에요. 오늘 최가 체포해 옆에 가둬 둔 놈들의 신병을 넘기세요."
"나탈리아?"
"미안해요, 최. 친구인 당신에게도 밝힐 수 없는 게 있답니다."
종혁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지만, 나탈리아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종혁이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구겼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나랑 인연을 끊자는 거예요? 더 이상 내 피지컬 트레이닝은 필요 없다는 겁니까?"
움찔!
눈에 띄게 흔들린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좋아요. 말해 드리죠."
또각! 또각!
화병이 올려진 서랍장에 등을 기댄 나탈리아는 말할 내용을 정리하려는 듯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원래는 우리 러시아의 친구인 최에게 상처를 입힌 놈들이 누군지 잠시 추적을 해 봤을 뿐이에요. 그런데 아는 얼굴들이 나오더라고요?"
"……아는 얼굴들?"
나탈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집중하기 시작한 세 남자의 모습에 싱긋 웃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엑?!"
"이 이상은 기밀…… 어머!"
몸을 돌리며 함께 돌아간 그녀의 팔꿈치에 화병이 걸려 떨어졌다.
와장창!
"미, 미안해요, 최. 일부러……."
말을 하던 나탈리아의 입이 다물어진다.
그건 다친 곳은 없냐고 말하려던 종혁도 마찬가지다.
‘저게 왜 여기에?!’
종혁은 눈을 부릅떴고, 나탈리아는 흩어진 조각들 사이에 널브러진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기기, 도청기를 들어 올렸다.
"어머나. 이게 여기 왜 있을까?"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워 낸 나탈리아는 핸드폰을 들었다.
"세르게이? 잡아."
더 이상 그녀의 얼굴에 미소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한편 병원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주차된 승합차 안.
헤드셋을 쓰고 있던 한 사십대 남성이 혀를 찬다.
"들켰다. 출발해."
"예!"
부우웅.
차가 느릿하게 출발하자 함께 있던 동승자들이 머리를 벅벅 긁는다.
종혁이 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다는 소식에 겨우 도청기를 넣어 놨는데, 그게 들켜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순간에 말이다.
"일단 들을 건 다 들은 것 같은데……."
동감이라는 듯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은 사십대 남성을 봤다.
"부장님."
부장이라 불린 남성은 검지를 세웠다.
"기다려. 지금 정리 중이니까."
뭔가 좀 복잡한 내용이다.
‘SVR과 최종혁이 아는 사이다. 그런데 그게 피지컬 트레이닝 때문이다.’
"최종혁 자료 가져와."
"여기 있습니다."
종혁의 증명사진이 붙은 서류 안에는 종혁에 대한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종혁의 고등학교 성적부터 고정숙의 자산 현황까지. 하지만 이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걸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 여기 있군."
최종혁이 유도 국가대표 수석 코치를 맡은 순간부터 선수들의 기량이 최소 20퍼센트 향상됐다.
부장은 이 20퍼센트란 단어에 집중을 했다.
‘확실히 이 정도라면 욕심을 낼 만해.’
단순히 선수 기량이 늘어나는 걸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만약 러시아 군인과 정보부 요원의 기량이 그렇게 늘어난다면?
‘작전 성공률이 달라지지.’
"일단 최종혁이 러시아 군부나 정보부에 피지컬 트레이닝을 해 줬는지부터 알아봐."
"러시아 파견 직원은 이미…… 어떻게든 알아보겠습니다."
다단계 투자사기 프로젝트가 어그러지며 많은 게 박살 난 이후 회사는 러시아에 다시 직원을 파견했다.
정체가 들통날 위험을 감수한다면 아마 알아볼 수 있을 거다.
고개를 끄덕인 부장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는 얼굴. 분명 아는 얼굴이라고……. 빌어먹을! 김 원장 그 빌어먹을 늙은이가 정신을 차린 건가?’
아니면 사지 멀쩡히 러시아로 잡혀간 다른 사원들이 불었을 수도 있다.
일단 뭐든 엿 된 거다. SVR이 지금부터 자신들을 쫓을 거라는 것이니 말이다.
"전 지부에 지금 잡혔거나 쫓기는 사원들 얼굴 보내서 마주친 적이 있는지 알아봐."
"만약 있다면……."
"어쩌겠어. 얼굴 갈아야지."
하지만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닐 거다. 얼굴을 수시로 바꾸는 게 자신들이니 말이다.
"그리고 추격당하는 사원들에게 자살코드 발송하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안가에 처형조 파견해."
"예."
"그럼 정리한다."
그 말에 운전을 하는 사원까지 귀를 쫑긋 세운다.
"현 시간부로 최종혁은 감시 3등급으로 지정."
총 5등급까지 있는 그들 회사의 요주의 인물 감시 등급.
그동안 회사와 얽히거나 수사 능력을 모두 종합했을 때 그 정도의 등급이 알맞다.
방금도 보라. 유달수란 이름을 가지고 곧바로 자신들이 세진은행 해킹을 통해 얻으려 했던 걸 유추했다.
정보력과 두뇌가 비상하단 증거다.
"러시아 정보부와 짝짜꿍하지 않겠습니까?"
"저 오만한 러시아가? 소비에트가? 일개 경찰이랑?"
"……죄송합니다."
"쯧."
혀를 찬 부장은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발각됐으니 감시는 하지 않는다."
"부장님!"
"방금 못 들었어?"
종혁이 더 이상 피지컬 트레이닝은 필요 없냐고 하니까 결국 입을 열었다. 즉, 러시아는 종혁이 필요하단 소리다.
이런 상황에서 도청기가 발견됐다. 지금부터 러시아 정보부는 철통같이 보호를 할 터.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이쪽의 꼬리만 드러날 뿐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지. 새끼 새처럼 보호받는 처지.’
아마 도청기도 어물쩍 넘어가고 말 거다.
정보부란 그런 놈들이니까. 그로 인해 종혁과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제 자존심을 지킬 놈들.
‘어차피 강제로라도 최종혁의 능력을 빌릴 수 있을 테니까.’
즉, 종혁은 회사 일을 방해했을지라도 위험을 끼칠만한 인물이 될 수 없단 소리다.
‘그래도 회사 일을 방해했으니 죽여 버리고 싶지만…….’
대체 종혁 때문에 본 손해가 얼마던가.
새로 지으려던 연수원이 날아가 버린 것뿐만 아니라, 천문학적인 소득이 예상되던 이번 프로젝트도 어그러졌다.
정말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러시아 때문에 불가능했다.
부장은 혀를 찼다.
"방금 정리한 내용 모두 인사과에 전달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뭐하죠?"
종혁을 감시하기 위해 출장을 나온 그들이다.
솔직히 몇 달을 예상하고 나왔는데, 겨우 몇 시간 만에 일이 실패로 끝나 버렸다. 시간이 갑자기 붕 떠 버린 상태였다.
"낚시라도 갈까요?"
"……오케이. 고."
"흐흐흐. 역시 우리 부장님. 그럼 남해로 핸들 틀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부장은 이제야 긴장을 풀며 등받이에 등을 묻었다.
"아쉽네요. 뒷이야기까지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어쩔 수 있나."
발각이 됐으니 어쩔 수가 없다.
그들은 별일이 없길 바라며 남해로 향했다.
* * *
도청장치 탐색이 시작되자 종혁은 옥상으로 향했다.
찰칵! 치이익!
‘방심했군.’
자신이 놈들을 방해하기에 놈들 역시 어떤 제스처를 취해 올 걸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그에 대한 대처를 해 놨음에도 도청기가 심어졌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이건 방심이 맞았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잠시 동안 반성을 한 종혁은 입술을 비틀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야 날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거냐?’
종혁 본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종혁은 그게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불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아, 예."
종혁은 다가온 사내에게 라이터를 빌려줬다.
찰칵! 치이익!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리 말하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하십니다."
종혁은 그가 그리는 수신호를 보곤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요. 제가 더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진심으로요."
나탈리아가 자신의 주변을 감시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생각도 없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기껏 숨겨 왔던 것들이 모두 탄로 났을 터.
그걸 생각하니 섬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나탈리아가 고마웠다.
이런 종혁의 진심 어린 눈빛에 싱긋 웃은 사내는 고개를 까딱이곤 멀어졌고, 종혁은 담배 연기를 깊게 마시며 이제 놈들이 어떻게 나올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낯빛이 굳은 김종두 과장이 다가왔다.
"불어."
"어디서부터요?"
"처음부터 끝까지."
배신감이 스며 있는 그의 눈에 종혁은 나탈리아와의 인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진실은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김종두에겐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허어. 잘나가는 운동선수를 귀화시키기 위해 지부장급이 나선다니."
"고작 잘나가는 수준이 아니었잖아요."
"시끄러워, 인마."
아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뛴다.
"아무튼 그 이후 권 영감의 행복의 쉼터 복지 시스템을 러시아에 적용시키는 걸로 인연이 깊어졌다고?"
"나탈리아 씨는 진심이었으니까요. 그런 좋은 분과 인연을 맺는 걸 거부할 이유가 없죠."
"……귀화는 안 할 거지?"
"과장님, 저 대한민국 경찰이에요."
"흐흐흐. 그럼. 암! 우리 종혁이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경찰이지! 그래서 더 숨기는 건?"
순간 훅 들어오는 질문에 종혁은 의뭉스레 웃었다.
"나중에 때가 되면요."
"이놈이?"
"내려가죠. 더워요."
"그래. 가자, 가. 아 요새는 에어컨 없으면 버틸 수가 없네. 아, 그런데 그놈들 정체가 대체 뭘 것 같냐? 대체 노렸던 게 뭘까?"
‘아마 주가 차익이겠죠.’
갑자기 튀어나온 과거의 망령의 발언으로 인해 재계 서열 1위 기업, 삼전그룹의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이 당시 기사 타이틀은 정경유착으로 키워 낸 기업, 삼전.
삼전그룹은 기업 이미지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김희건 회장은 법원까지 들어가야 했다.
비록 공소시효가 끝난 일이 대부분이라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지만, 한번 떨어져 버린 주가는 쉬이 회복되지 않았다.
‘돈에 미친 이놈들이라면 충분히 벌일 수 있는 일이야.’
또 유달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계좌까지 털지 않았던가.
놈들은 고작 세진은행 해킹으로 인해 삼전기업뿐만 아니라 다른 권력자들의 약점까지 틀어쥐려고 했던 것이다.
‘대단한 새끼들.’
정말 알면 알수록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종혁아?"
"……과장님. 그놈들, 아마 저희가 아는 놈들일 수도 있어요."
"응?"
"제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네 촉이?"
한 번 세워졌다 하면 빗나간 적이 없는 종혁의 촉.
종혁은 미간을 좁히는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자, 그럼 그물을 키워 보실까?’
이미 짜여 있는 그물인 SVR과 국정원. 여기에 대한민국 경찰을 더 추가시킨다.
아래로 향하는 종혁의 걸음은 무척이나 경쾌했다.